라티오의 책들 | 철학 고전 강의 — 22

 

⟪철학 고전 강의 - 사유하는 유한자 존재하는 무한자⟫, 제27강

❧ 유한자와 무한자의 관계
파스칼의 Pensées가 제시하는 방법: ‘신학자의 신’ 방식. 자신이 철저하게 유한자임을 자각하고 바로 그 순간 신에 대한 앎을 포기하고 철저하게 신에 의존함으로써 “안심(확신)의 빛”(lux securitatis)을 확보한다.
데카르트가 제시하는 방법: ‘철학자의 신’ 방식. 자신이 철저하게 유한자임을 자각하고 바로 그 순간 신에 대한 앎이 생겨남을 확인한다. 또는 신의 입장에 올라선 초월론적 자아를 확보함으로써 신을 알 수 있다고 자신한다.
데카르트에 있어서 자립적 자기의식은 완전한 의미의 자립성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2021.05.04 철학 고전 강의 — 22

데카르트의 《성찰》에서 사실 중요한 부분이 제3성찰이다. 오늘은 제3성찰을 다루고 있는 27강을 설명하겠다. 27강 제목이 "인간의 유한성에 근거하는 신의 무한성 증명", 그냥 무심코 지나갈 수도 있겠지만 굉장히 말이 안되는 이야기이다. 신의 무한성을 증명하려고 하는데, 무한한 것을 증명하려면 무한한 것으로 증명해야 한다. 27강에 얘기가 나오는데 '데카르트의 존재론적 의존'이 나오는데, 인과원리이다. 인과 원리라고 하는 것은 '원인은 결과보다 크거나 같다', 속담으로는 콩 심은데 콩난다, 팥이라는 결과가 나왔으면 팥이라는 결과보다는 팥을 만들어 낸 원인들이 똑같거나 적어도 커야 한다. 다시 말해서 신은 무한하다. 신은 무한한데 무한한 것을 증명하려면 무한한 것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데카르트는 인간의 유한성에 의거해서 신의 무한성을 증명하려고 한다. 지금까지 제1성찰, 제2성찰에서 읽은 것들이 사실 여기서는 좀, 도대체 이렇게 할꺼면 뭐하러 인간의 순수한 자기의식을 이야기했나 하는 의심이 들 정도이다. 큰 단절이 있다.  제1성찰, 제2성찰과 제3성찰 사이에 아주 큰 단절이 있다. 지난 번에 제2성찰에 대해서 다룬 26강을 이야기하면서 데카르트가 이렇게까지 순수한 자기의식에 대해서 이해를 하려고 했던 이유가 그 사람이 신이라고 하는 확실한 존재를 알고자 해서 또는 그런 신을 든든한 자기의 뒷배경으로 삼고자 하는 그런 욕망으로 그렇게까지 억지스러운 자기 의심을 해나아갔다고 말했다. 그러면 데카르트는 그것을 통해서 무엇을 알았는가. 인간이 결국 신이라고 하는 무한한 존재의 보장이 없으면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는 그런 유한한 존재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즉 제1성찰과 제2성찰의 성과는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nihil esse certi라고 말했다. 그것은 신에게 그런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그런 것이다. 그리고 데카르트에서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를 깨달은 존재는 인간이고 인간의 사유하는 정신이다. 자립적 자기의식이 갖게 된 성과는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이다. 이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라는 그런 생각과 모든 것을 확실하게 알고 있는 무한자, 즉 신과의 사이에는 엄청난 거리가 있다. 

 

데카르트는 이 거리를 어떻게 뛰어넘을 것인가를 생각한다. 오만하다. 데카르트는 오만한 사람이다. 가령 내가 정말 별 볼 일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어떻게 깨닫는가. 정말 대단한 사람을 만나면 깨달을 수 있다. 그러면 우리는 상식적으로 어떻게 하는가. 내가 별 볼 일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으면 그냥 거기서 주저앉든지 아니면 내가 저 사람처럼 대단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욕망이 있다면 저 사람이 어떤 방식으로 되었는지 노력을 해야 한다. 두 가지 중에 하나이다. 그것을 유한자와 무한자의 관계 속에 집어넣으면 내가 확실한 것을 아무것도 없다를 깨달은 자립적 자기의식, 다시 말해서 유한자라고 하자. 데카르트가 제2성찰까지 한 얘기가 그것이다. 그러면 무한자가 되고 싶다 정도까지는 아니고 무한자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계속해서 신에 대해서 생각하고 무언가를 해야한다. 그런데 엄청난 능력을 가진 사람을 만났을 때 그 사람을 본받아 그 사람처럼 되려고 노력하는 것, 그것은 같은 사람이니까 가능하다. 신에 대해서는 유한자를 수없이 쌓아올려도 무한자가 되지는 않는다. 무한자에 가까이 갈 뿐이다. 그러니 무한자가 되려고 하는 것, 또는 심지어 무한자를 알려고 하는 것조차 시도하지 말아라 라고 말하는 것이 칸트이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의 기본적인 논지이다. 그러면 유한자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무릎을 꿇는 것뿐이다. 신을 알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믿어버리는 수밖에 없다. 아니면 내가 신 따위에 신경 쓸 필요는 없지 그냥 다른 영역으로 제쳐놓은 뿐이다. 따라서 제3성찰에서 데카르트가 시도하는 것은 굉장한 왜곡이고 이상한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눈에는 그렇게 볼 수 있다. 데카르트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파스칼. 팡세가 사유한다는 불어에서 나온 것인데, 파스칼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팡세》를 읽어보면 나는 신을 알고 싶다는 것이 전혀 없다. 똑같이 파스칼도 자기 의식을 얘기한다. 이 우주가 나보다는 엄청 힘이 세고 강한 것이라고 해도 이 우주보다는 내가 더 탁월하다. 왜 나는 생각하기 때문에. 《팡세》도 자기 의식이 있다. 그래서 《팡세》를 읽으면 굉장히 공감을 한다. 데카르트와는 다르게 파스칼은 우주 앞에서 공포에 떤다, 어쩌겠는가, 신은 숨어 있다, 나는 숨은 신을 향해서 나는 나아갈 뿐이다라고 하는 것이 《팡세》에 나타나는 생각이다. 데카르트는 숨은 신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신이라고 생각한다. 데카르트와 파스칼은 똑같은 처지이다. 인간은 허약한 존재다. 유한한 존재일 뿐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파스칼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유를 되살린다. 기도해야 한다고 얘기한다. 그래서 기도를 하면 lux securitatis, "안심(확신)의 빛", 확신과 확실은 다르다, 안심, 과학적인 증거와 심정적인 편안함까지 더해질 때 securitatis이라는 말을 쓸 수 있다. 즉 《고백록》에서 lux securitatis라고 말할 때 신앙인의 입장이다. 파스칼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데카르트는 그게 아니다. 제3성찰에서 핵심적인 내용은 여기에 있다. 데카르트는 파스칼과 마찬가지로 내가 얼마나 형편없는지 확실한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을 너무나도 잘아는 유한자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어떻게 깨달았는가. 내가 유한하다는 것을 아니까, 이것을 깨달은 결정적인 계기는 신이라는 관념이다. 즉 나는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에 이 유한한 존재로부터 무한한 존재인 신은 나올 수가 없다. 원인은 결과보다 크거나 같기 때문이다. 원인은 나인데 신보다는 크거나 같을 수 없다. 따라서 신이라고 하는 존재를 내가 어떻게 만들어 낼 수는 없다. 신은 분명히 나와 비할 바 없는 무한한 원인 때문에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제2성찰에서 도달한 성과는 인간이라는 존재는 이론적으로 신이라고 하는 것을 가정해 볼 수 있는 존재였다. 신에 입장에 올라선 초월론적 자아라고 이야기했었다. 즉 내가 존재의 측면에서는 신의 원인이 될 수는 없지만 내가 사유를 많이 해버리면 신의 입장으로까지 올라설 수 있으니까, 즉 초월론적인 자아가 될 수 있으니까, 신에 대해서 알 수는 있다고 하는 것이다. 즉 나라고 하는 유한자는 신이라고 하는 무한자의 현존,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것의 원인은 아니지만 신을 알아차릴 수 있는 원천은 될 수 있다. 

 

그러면 거기까지 데카르트는 이야기한 다음에 무엇을 얘기하는가. 나는 내가 유한자 임을 안다. 파스칼은 유한자임을 아니까 신에게 복종하고 신을 믿어야 겠다고 간다. 데카르트는 내가 유한자 임을 안다. 그러면 내가 유한자임을 어떻게 알았는가. 신이라고 하는 무한자를 알아차릴 때 내가 유한자임을 알아차린다. 어디다 비교해보니 알겠는가. 내가 능력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가, 진짜 능력있는 사람을 만나보니 알겠더라, 이와 마찬가지로 내가 유한자라는 것을 진정한 의미에서 있어서 진정한 무한자를 신을 상대하니까 알게 된다. 즉 나의 유한함때문에 신의 무한함을 알게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가 초월론적 자기라고 하는 입장에 올라서는 것들은 그냥 저절로 혼자 있을 때는 생겨나지 않는다. 다시말해서 방구석에 앉아서 자기 혼자만 있을 때는 초월론적 자기라고 하는 것에 대한 의식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 언제 일어나는가. 신에 대해서 사유할 때에만 등장한다. 즉 철학적인 용어를 쓰면 신의 매개를 거쳐야만 그런 초월론적 자기가 등장하게 된다. 그렇다면 신이 매개되지 않으면 초월론적인 자기가 없다. 그렇다면 초월론적 자기라고 하는 것이 완전한 의미에서 자기 혼자 존재하는 자기의식이 아니다. 이것은 데카르트에 대한 비판이라고 할 수 있는데 데카르트는 이런 방식으로 신존재를 증명한다. 즉 인간은 신이라고 하는 무한자에 대해서 사유할 수 있다. 사유할 수 있으니 인간이라는 존재는 형편없는 유한자인 것 같지만 그래도 인간이라는 존재는 대단한다. 그리고 이 대단한 인간 존재가 신이라고 하는 무한자를 알 수 있으니 다른 것은 모르겠는가, 신을 매개로 해서 저 세상의 사물들을 알 수 있다고 하는 제4성찰, 제5성찰, 제6성찰로 나아가게 된다,

다시 정리해보면 데카르트의 사유와 파스칼의 사유를 비교해보는 것이 적절하다. 간단하게 말하면 유한자와 무한자 논변에서 데카르트는 무한자인 신에 대해서 유한자인 인간이 사유하고 있다. 그러면 그런 사유가 바로 무한자를 증명하는 것이다 라고 하는 역설을 제시하고 있다. 도대체 왜 이런 식의 생각을 하는가. 애초에 신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믿어버리면 된다. 그런데 데카르트는 제대로 믿어보려고 한 것인지 아니면 이런 식으로 생각해서 신이라는 존재는 믿을만한 것이 못된다고 말하고 싶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여러 번 읽어보고 생각을 해보니까 제대로 믿어보고 싶었던 것 같다. 그가 살았던 세상은 30년 전쟁 시기를 거치면서 워낙 신을 믿기에는 어려울 정도로 난장판이었다. 세상의 난리를 다 겪고 나니까 믿을 놈 아무도 없다, 신 웃기고 이네 이런 생각이 들었을 수도 있다. 아마 그랬던 것 같다. 그러고 나니까 자기 마음 한 켠에는 신 따위를 어떻게 믿나 이런 생각이 생겨났을 것이다. 그게 너무 괴로운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의심하고 있는 자기에 대해서 점검을 안 해 볼 수 없는 것이다. 보통사람이라면 그래도 믿어야지 하겠지만 데카르트는 민감한 철학자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했을 것이다. 사실 철학의 역사를 살펴보면 철학자들은 모두 다 고독한 방에서 혼자서 생각하는, 이른바 고독한 철학자 이런 사람은 별로 없다. 당장에 아리스토텔레스나 플라톤이나 소크라테스나 그렇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헬라스 세계에서 여행을 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떠돌아다닌 사람이다. 방구석에 가만히 앉아서 내가 이 모양일까 이렇게 한 사람은 데카르트가 유일한 것 같다. 고독하게 사색하는 철학자, 데카르트이다. 그러면서도 애타게 신을 찾는데 그냥 파스칼처럼 믿으면 될 것을 이 사람은 끊임없이 고민을 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lux securitatis에 이르기는 힘들었고, 이 사람이 내놓은 답변이 내가 유한하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무한자를 알게 된다, 거기까지 온 것 같다.

다음 시간에는 28강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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