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티오의 책들 | 철학 고전 강의 — 24
- 강의노트/라티오의 책들 2021-24
- 2021. 10. 14.
라티오 출판사에서 제공하는 팟캐스트 '라티오의 책들'을 듣고 정리한다. 라티오 출판사에서 출간된 책들에 관한 강유원 선생님의 해설녹음이다.
팟캐스트 주소: https://ratiopress.podbean.com/
⟪철학 고전 강의 - 사유하는 유한자 존재하는 무한자⟫, 제29강
❧ 칸트 철학의 근본적 원리
계몽철학: 17세기 과학혁명에 바탕을 둔 합리적 사유. 반종교주의와 종래의 형이상학 부정
⟪순수 이성 비판⟫은 과학적 사유의 방법을 밝히고 형이상학적 사유의 가능성을 제거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 비판(Kritik)의 의미
❧ 도덕과 세계 전체에 대한 앎
인간의 윤리적 행위의 최종 근거는 과학적 인식에 근거할 수 없으므로 ‘신, 영혼불멸, 자유의지’ 등을 “요청”(Postulat) 해야만 한다. -- ⟪실천 이성 비판⟫
자연의 영역에 속하는 인간의 육체와 자유의 영역에 속하는 인간의 정신을 통일적으로 이해하고 세계 전체를 알고자 할 때 요구되는 원리를 탐구해야 한다. -- ⟪판단력 비판⟫
2021.05.04 철학 고전 강의 — 24
《철학 고전 강의》를 헤시오도스부터 시작해서 데카르트까지 읽었다. 칸트와 헤겔이 남아 있다. 칸트를 읽어나가면서 형이상학은 사실 칸트에 와서는 없다고 보면 된다. 칸트 부분에 달아놓은 제목이 인간의 한계 자각과 '장래의 형이상학'이다. 한계 자각이라는 말을 써놓았는데, 자각이라는 말이 이제 끝났다는 것이다. 인간이 형이상학적으로 신에 대해서 생각하고 왈가왈부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게 한계의 자각이다. '장래의 형이상학'이라고 하는 것은 지금까지 데카르트에서 우리가 본 것과 같은 그런 종류의 형이상학은 아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까지 형이상학이라고 알고 있던 것이 아니라 학으로서 성립되어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이 있는데, 감각적인 앎부터 시작해서 신에 대한 앎까지 체계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칸트에 와서 완전하게 끝났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칸트가 서양철학에서 위대한 사람으로 간주되고 그가 쓴 ⟪순수 이성 비판⟫이 형이상학을 끝장낸 것이다. 형이상학을 끝장냈다, 다시 말해서 신이 존재한다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회의론의 입장에서 서있으면 알 수 없다. 칸트는 신이 존재한다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가 따져서 물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학문의 대상이 아니다 라고 얘기하는 것이다. 우리가 기껏 할 수 있는 것은 신이 있다고 믿는 사람, 자유의지가 있다고 믿는 사람이 훨씬 선한 행동을 할 가능성이 있다, 행동심리학에서 보면 그러한 성과가 있다. 칸트가 하는 얘기는 이러이러한 경우에는 신이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 적절할 것 같다고 하는 것, 그것을 칸트는 장래의 형이상학이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처음에 말한 것처럼 종래의 형이상학은 있지도 않고 칸트가 억지로 형이상학이라는 말을 붙여서 장래의 형이상학이라고 했지만 지금까지 데카르트를 읽을 때까지 존재해왔던 형이상학이라는 말은 여기서 성립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도대체 칸트에서 왜 형이상학이 성립하지 않는 것인가. 왜 칸트는 성립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그것은 바로 칸트가 바로 계몽철학의 완성자이기 때문이다. 대개 칸트도 독일사람이고 헤겔도 독일사람이니까 둘이 비슷하지 않겠나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런데 결코 그렇지 않다. 칸트와 헤겔은 종류가 다른 사람이다. 아예 기본적인 바닥 자체가 다른 사람들이다.
제29강의 첫 문장이 "칸트는 '계몽 철학의 완성자'로 불립니다."이다. 계몽철학은 기본적으로, 계몽, 말그대로 몽매함을 깨우치는 것이 계몽이다. 몽매함을 무엇으로 깨우치는가. 자연과학의 탐구를 통해서 몽매함을 깨우친다. 그러면 몽매함은 주로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기독교이다. 칸트는 반기독교적인 글을 써서 프로이센 왕으로부터 그러면 안되다 해서 금지도 받았던 사람이다. 칸트는 경건한기는 했는데 그 경건함이라고 하는 것이 기독교적인 경건함은 아니었다. 이 사람은 철저하게 자연과학적인 태도를 가진 사람이다. 그러니까 신을 믿고 하느님의 영광과 권능을 이 세상에 증명해보고 싶은 마음에 자연과학을 하는 사람이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도 그런 사람의 하나이다. 그런 사람하고 자연과학을 열심히 해서 이 세계를 합리적인 자연과학의 입장을 가지고 설명을 하는데, 자연과학으로 해결이 안되는 부분은 그냥 있다고 치고 이렇게 얘기하는 사람과는 입장이 다르다. 칸트는 17세기 과학혁명 위에서 성립한 18세기 계몽주의 철학자이다. 이것을 항상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무한자에 대한 탐구라는 의미에서의 형이상학은 없다. 칸트가 종래의 형이상학을 폐기한 것은 틀림없다. 데카르트까지 이야기했던 것이 종래의 형이상학인데 그것을 폐기한 것은 틀림없다. 그런데 결정적인 순간에 뭔가 설명이 안되는 것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이 사람은 '장래의 형이상학'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해보고자 했던 것이다.
그래서 칸트가 쓴 책들이 《순수 이성 비판》, 《실천 이성 비판》, 《판단력 비판》, 모두 비판(Kritik)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이렇게 Kritik이라는 말은 비판이라는 의미이다. 비판은 한계를 분명하게 한다는 말이다. 여기까지가 한계다. 거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여기까지가 한계니까 그 다음에는 이렇게 하자고 말하는 것이 사실은 비판 안에 함축되어 있다. 칸트는 누군가를 까고 거기에 약간의 대안, 틀림없는 대안은 아니니까, 장래의 형이상학이라고 하는 약간의 대안을 덧붙이는 것이 칸트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칸트의 비판철학이라고 말하면 한계를 뚜렷하게 말하는 것만이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한계가 뚜렷해졌으니 한계 너머에 있는 것은 이렇게 해봅시다라고 하는 것까지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비판이라는 말이 한계를 뚜렷하게 한다는 의미로만 적용되는 책은 《순수 이성 비판》이고, 그것이 한계니까 뭔가 보완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은 비판 너머의 보완은 《실천 이성 비판》, 《판단력 비판》에 들어있다. 그래서 《실천 이성 비판》, 《판단력 비판》은 비판이라고 하는 말이 가지고 있는 1번 뜻은 가지고 있지 않다고 보면 적절할 것 같다.
제29강 319 칸트는 '계몽 철학의 완성자'로 불립니다.
칸트는 오늘날에도 형이상학을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가장 읽을만한 사람이다. 지난번까지 데카르트를 읽었는데 여러 번 말했듯이 조금 황당하고, 자기학대적이다. 칸트의 형이상학은 그나마 받아들일만 하다. 우리가 칸트는 읽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인간은 아무리 자연과학이 발전하고 그것에 근거하여 모든 것을 알아낸다고 해도 남아있는 문제가 있다. 정말 그것이 궁극적으로 참일까 하는 것들을 물어보고 싶어한다. 그런 것들을 형이상학적 요구라고 한다면 최대한 자연과학을 버리지 않고 이성적 사유 또는 과학적 사유를 버리지 않고 우리가 형이상학을 할 수 있는 최대치가 어디일까를 한번 따져보기 시작한다면 칸트를 읽는 것이 좋다는 이야기이다. 즉 칸트에서 우리의 형이상학적 요구는 무엇인가. 예를들어 착한 일을 해야한다. 왜 착한 일을 해야하는가. 사회학적인 설명을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착한 일이라는 것은 어떤 도덕적인 초월적인 근거가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이러한 것을 우리 사회에서는 착한 일이라고 한단다. 물론 착한 일에 해당하는 것들은 사회마다 다르지. 그런데 그런 착한 일을 하면 사회가 잘 돌아간다. 이러면 윤리적인 설명이 아니다. 그냥 착한 일로 불리는 어떤 사회적 행동을 나열해서 그것들을 규범으로 만들어서 강제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것과는 관계없이 정말 언제 어디서나 착한 사람으로 살고 싶다면 도대체 왜 그게 착한 일인가. 그런 것들에 대해서 사회적인 설명이 아닌 어떤 상황에서도 해야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근거가 필요하다. 그것의 근거가 칸트는 신이나 영혼불멸이나 자유의지 같은 것이라고 봤다. 자기가 새로 발명해낸 개념은 아닌데 전통적으로 이런 것들은 형이상학의 주제로 알려진 것이다. 그것을 알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알 수 있다는 것이란 증명할 수 있는 것이다. 신이 여기에 있다고 알려주지 않는다. 자유의지도 아니다. 그것으로부터 어떤 감각데이터를 우리가 가져올 수 없다. 그래서 그것은 있다고 친다고 하는 칸트의 말로는 요청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면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는 앞서 데카르트에서는 정신과 육체로 이루어져 있다고 되어있다. 마찬가지로 칸트는 인간이라는 존재는 육체에 해당하는 자연과 그런 것들과는 무관한 자유의지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에 대해서 완전한 설명을 만들어 내려면 데카르트에서는 정신과 육체를 구분해서 그 사이에 신을 넣어서 설명했는데 칸트는 정신과 육체가 구별되는 것은 사실인데 자유라는 것은 탐구라는 것으로 얻어내기가 곤란하다. 이 두개를 연결시키는 방법은 무엇일까를 많이 생각을 해보겠다. 즉 자연의 영역에 대한 탐구를 어떻게 할 것인가 그리고 그렇게 해서 우리가 얻어내는 것은 무엇일까를 따져묻는 것이 《순수 이성 비판》이고, 올바른 일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또 우리의 도덕적 행동은 무엇에 근거하여 이루어지는 가를 따져보는 것이 《실천 이성 비판》이다. 그러면 자연의 영역에 대해서 앎이 어떻게 성립하는 가를 따져묻는 《순수 이성 비판》있고, 자유의 영역, 즉 도덕의 영역에서 우리는 어떻게 행동하고 그 근거를 따져보는 것이 《실천 이성 비판》이 있는데 인간 존재에 대해서 완전한 설명을 제시하려면 그렇게 자연의 영역과 자유의 영역에 속하는 것을 다 설명해야 한다. 그것을 다 설명해보기 위해서 목적론의 원리를 도입해서 설명해보려는 시도가 바로 《판단력 비판》이다. 따라서 칸트에서는 종래의 형이상학이다라고 하면 《판단력 비판》이다. 칸트를 읽을 때는 형이상학에 관한 부분은 《판단력 비판》에 들어있는데 《판단력 비판》에 들어있는 형이상학에 들어가기 전에 칸트가 형이상학에 대해서 이야기한 것이 《형이상학 서설》이다. 칸트에서는 종래의 형이상학이 완전히 폐기하였다. 그래도 칸트가 남겨놓은 형이상학적인 것을 보고 싶다면 《형이상학 서설》과 《판단력 비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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