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티오의 책들 | 철학 고전 강의 — 25
- 강의노트/라티오의 책들 2021-24
- 2021. 10. 18.
라티오 출판사에서 제공하는 팟캐스트 '라티오의 책들'을 듣고 정리한다. 라티오 출판사에서 출간된 책들에 관한 강유원 선생님의 해설녹음이다.
팟캐스트 주소: https://ratiopress.podbean.com/
⟪철학 고전 강의 - 사유하는 유한자 존재하는 무한자⟫, 제30강
❧ 오성(Verstand)
주어진 객관에서 오는 감각 데이터에 근거하여 판단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판단을 보류하고 잠정적 참만을 가지고 있다.
인간의 인식이 미칠 수 있는 범위를 알려주므로 ‘규제적’(regulativ)
❧ 이성(Vernunft)
오성을 통해서 가지게 된 판단들, 즉 사유물에 대해서 생각
인간의 인식이 미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서 체계적 통일을 시도하므로 ‘구성적’(konstitutiv)
❧ 이성의 사변적 사용
인간의 감각으로써 알 수 없는 초월적 존재에 대해서 초월론적 입장에 서서, 즉 신의 입장에 서서 사유하려는 것
오성이 설정한 인식의 끝(한계)을 넘을 수 있는 선(경계)이라 여겨 넘어서려는 것
이성을 사변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인간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변증론의 상황에 처하게 된다.
2021.05.04 철학 고전 강의 — 25
칸트의 형이상학을 읽고 있다. 오늘은 제30강 이성의 사변적 사용. 사변이라는 말이 영어로 speculation, 독일어로 spekulation이라는 단어를 번역한 것인데 사변이라는 말은 궤변이라는 말로도 번역할 수 있는데 사기친다는 말이다. 말로 사기 치는 것, 이것으로 생각하면 이성의 사변적 사용이라는 말은 이성이 사기치는 것이라고 이해하면 사실 쉽다. 무슨 말이냐 하면 우리가 어떤 것에 대해서 안다고 말할 때 안다는 말은 굉장히 범위가 넓게 쓰이는 말이다. 비가 오면 꽃이 피는 것을 안다고 말할 때 비가 오면이라는 조건이 있고 꽃이 핀다는 결과. 비가 오는 현상과 꽃이 피는 현상 사이를 인과관계로 묶어서 말하는 것인데, 누가 '비가 오는 것을 보고 활짝 꽃이 피겠군'이라고 말을 하면 대체로 많은 사람들이 수긍할 것이다. 그런데 비가 와도 꽃이 피지 않게되면 우리의 앎은 틀렸다고 말할 수 있다. 비가 오는 현상과 꽃이 활짝 피는 현상 사이에 인과관계를 일대일로 맞춰서 하기 어렵다. 어떤 사람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저러다가 이럴텐데' 생각하고 지켜보고 있는데 그렇게 되었다면 사람들은 '그럴 줄 알았다'라고 말한다. '안다'가 들어간다. 들으면 기분 나쁜 말 중 하나가 '그럴 줄 알았다'인 것 같다. '그럴 줄 알았다'는 말은 마치 그 사람이 하는 행동의 시작과 끝을 다 알고 있고 모든 과정의 인과관계를 다 알고 있고 전지전능한 신처럼 알고 있어야만 가능한 판단이다. '그럴 줄 알았다'는 판단을 했을 때 곰곰이 따져보면 그 판단으로 가는데 사용된 원인들을 따져보면 굉장히 어이없게도 인과의 사슬에 엮여 있기는커녕 그것조차도 확실하지 않은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도 확실하지 않은 몇 가지가 나열되고 있을 뿐이다. 칸트에서 비판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A는 B다라는 말했을 때 그것은 엉망이야라고 말하는 것이 비판이 아니라 A는 B다라는 판단을 했을 때 그 판단이 제대로 된 근거를 가지고 판단을 한 것인지 아니면 허술한 몇 개의 사실로 확인되기도 곤란한 것을 가지고 섣불리 인과관계를 엮어서 무엇 무엇인것처럼 만들어서 이야기한 것은 아닌지 반성해보게 해주는 대화이다. 사실임이 틀림없다고 확인되지 않은 것들을 몇 개를 알고 있다. 그것을 알고 있는 사람도 나이고, 나의 정신이고, 그것을 가지고 이렇게 저렇게 엮어서 '그럴줄 알았어'라고 말하는 것도 나의 정신이다. 그런데 종류가 조금 다르다. 내가 잘못 알게 되면 어떻게 하나 하고 찾아보는 능력이 하나 있고 그런 것과는 관계없이 그럴줄 알았어라고 달려가는 것이 하나 있다. 칸트는 그 부분을 이성이라고 말한다. 공부를 하는 사람과 하지 않은 사람의 차이는 섣불리 또는 함부로 일반개념을 말하는 데 있다.
우리 인간은 섣부른 일반화를 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성이라고 하는 것이 하는 짓이 섣부른 일반화를 해야 한다. 그래야 세상사는 것이 편하고 머리를 덜 쓰게 된다. 우리 인간의 생물학 조건 자체가 두뇌가 게으르다는 점에 있다. 인간의 두뇌는 게을러서 새로운 방식으로 뭔가를 하려면 기존의 뉴런의 정보 연결 부위를 녹여서 다르게 이어 붙이는, 스위치가 일어나야 한다. 그런데 그것을 인간은 잘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리고 그렇게 도전해서 얻게 되는 이익은 막연한데 머리를 쓰는 것은 분명한 손실이 있다. 그래서 인간은 아주 분명하게 손실회피를 하는 것이, 무지가 속편한 상태가 인간의 기본값이다. 칸트는 여기서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성의 사변적 사용'이라고 하면 이성이 별다른 근거도 없이 사기칠려고 하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기를 친다. 아주 거대한 사기. 흔히 말하는 거대한 이론. 거대한 서사. 사실 사는 게 고통이라는 말 자체가 어디서 나온 것인가. 우리가 뭔 일을 했는데 고통인지 즐거움인지를 이성이 판단하는 것이다. 신의 은총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 이런 것들이 거대 서사이다. 이성의 사변적 사용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인데 칸트는 그런 것들이 형이상학을 이루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없애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우리가 이성을 칸트가 말하는 의미에서의 이성을 전혀 사용하지 않으면 할 수 있는 말이 별도 없다. 항상 잠정적인 참으로만 되어 있다. 거기서부터는 내가 말을 할 수 없다는 것. 선이 그어져 있는데 선을 넘어가면 안된다고 알고 있으면 즉 이성을 사기치는 식으로 사용하면 안된다 라고 생각하고 철두철미로 지키는 선이, 여기서부터는 사기야 하는 선이 한계선이다. 즉 오성의 한계라고 말한다. 오성만 가지고 판단하는 또는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한계로 보이는 것이 그냥 그것이 경계선인 것이다. 여기서부터는 이성으로 넘어가는 것, 이성의 사변적 사용으로 하는 것. 따라서 오성만 가지고 판단하는 사람에게는 그 선이 한계이고, 이성을 사변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능란한 사람에게는 경계선이다. 넘어설 수 있는 선이다. 그래서 그 사람에게는 한계라는 것이 없다. 똑같은 선인데 어떤 입장에 있느냐에 따라서 그것을 부르는 명칭이 달라진다. 선을 넘는다는 말이 있다. 그 선이 굉장히 느슨한 사람이 있고 빡빡한 사람이 있다.
칸트는 이성의 사변적 사용이라는 이런 주제 아래서 그것을 생각하면 된다. 오성의 영역에 있는 것과 이성의 영역에 있는 것들이 나열될 수 있다. 신에 대해서 생각해보면 칸트는 신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무조건 이성의 사변적 사용이다. 그냥 신은 죽었다고 말하지 않아도 우리가 신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이성의 초월론적 입장에 서서 신의 입장에 서서 말하는 것이 더 무서운 말이다. 신은 죽었다고 말하면 신은 살아있었다는 것을 전제한다. 신이 있었는데 없어졌다는 것이다. 신은 초월적인 것이다. 우리의 감각 기관을 넘어서 있다. 그런데 자꾸 신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자기가 신을 만나보고 온 것처럼 말하는 것이니까 초월론적이라고 하는 것이다. 신을 초월적이다라고 하는 것은 오성인데, 신에 대해서 거대이론을 말하는 것은 마치 신의 입장에서 말하는 것은 초월론적인 것이다. 인간은 초월적이기도 하면서 초월론적 존재이기도 하다. 그러면 오성은 그런 자연물 또는 감각대상에 대해서만 아는 것이고, 이성은 아는 것 몇 개 조각을 가지고 얘기를 꾸며내는 것이다. 그것을 칸트의 용어를 가지고 말하면 사유물인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것들을 가지고 변명을 하는 것이다. 변명을 하면서 변명이다 라고 말하지 않고 최고의 목적을 놓고 체계 일반의 통일을 이루고자 하는 작업이라고 말한다.
사기라는 것은 누구나 다 확인가능한 데이터를 놓고 거기서부터 시작해서 어느 순간 오성으로 파악할 수 없는 영역을, 우리는 한계라고 여기는데 사기꾼은 경계라고 보는 그 지점을 넘어서 딱 아귀를 맞아 떨어지는 얘기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오성이 하는 것은 여기까지만 알면 된다, 넘어가면 안된다고 하는 것이다. 즉 우리의 정신에서 오성은 규제를 하는 역할을 하고 regulativ, 이성은 자꾸 사기를 치는 것, 구성을 하는 것 konstitutiv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우리 인간은 오로지 오성적이지고 않고 오로지 이성적이지도 않고 둘 다가 있다. 우리 인간에게는 오성의 영역도 이성의 영역도 있다. 사실 어디서부터 이성이 작동하는 영역인지 모른다. 그러면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다. 사기를 치려는 것은 아닌데 전체를 통일적 체계를 사변적으로 구성하고 싶은 욕구가 있다. 그것이 칸트가 보기에 형이상학의 요구이다. 아리스토텔레스와 다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본성상 알고자 한다, 이것이 형이상학이라고 하는 것이다. 오성부터 시작해서 신에 이르는 이성, 칸트의 용어를 빌면, 오성과 이성 전체를 하나로 꿰어서 이야기한다. 그런데 칸트는 아니라고 한다. 거기 중간에 다가 한계라도 부르든 경계라고 부르든 그 선 위에 서 있는 사람, 그 상황이 난관에 처한 것이다. 그것을 칸트는 변증론의 상황에 처한다고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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