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티오의 책들 | 역사 고전 강의 — 26 / 제19강(2)

 

⟪역사 고전 강의 - 전진하는 세계 성찰하는 인간⟫, 제19강(2)

❧ “권두의 그림 설명 — 서문을 대신하여”, 첫 문장 — 형이상학
“관자놀이에 날개가 달린 여성이 천구의天球儀 위에 서 있다. 천구의는 자연을 의미하며, 여성은 형이상학을 나타낸다. 왼쪽 위의 모서리에 한 개의 눈(응시하고 있는)을 싸안고 빛을 번쩍이는 삼각형은 섭리의 시선을 갖추고 있는 신이다. 이 시선(방사선)을 통해 형이상학은 지금까지 철학자들이 신을 명상하는 매체로 이용한 자연물적 질서를 초월하여 황홀 망아忘 我 속에서 신을 관조하고 있다.”(새로운 학문, [2])


❧ 문명 신학
“인간의 문명화는 신의 섭리에 의해 질서가 부여되고 배치되는 것이다. 이것이 참된 인간의 문명사회적 본성이며 자연에 존재하는 법이기도 하다. 이러한 신의 인도야말로 이 학문이 해명하려는 근본문제의 하나이다. 따라서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이 책은 신의 섭리를 논하는 문명 신학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새로운 학문, [2])

 

 

2021.10.19 역사 고전 강의 — 26

⟪역사 고전 강의⟫ 제19강 두번째 시간이다. 19강은 비코의 ⟪새로운 학문⟫에 관한 이야기이다. 19강부터 ⟪새로운 학문⟫에 관한 원리적인 소개이고, 20강은 그것이 인간이 만든 역사가 진리라고 하는 것, 비코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을 이야기한다. 그래서 19강, 20강이 ⟪새로운 학문⟫에 대한 설명인데 ⟪새로운 학문⟫ 자체가 두꺼운 책이다. 본격적으로 근대적인 학문 또는 본격적인 의미에서의 역사철학은 비코의 ⟪새로운 학문⟫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에 두 번에 걸쳐서 설명한다. 《갈리아 원정기》도 고전이기는 하지만 그건 사료이고, 많이 분석해볼 필요가 없는 사료임에 반해서 ⟪새로운 학문⟫은 중요하고도 좋은 텍스트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는 완전히 철저하게 신의 섭리라든가 이런 것들에서 벗어나서 뭔가를 생각하고 있다고 여기기 쉽지만 사실은 나쁘게 말하면 미신, 좋게 말하면 섭리라든가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알아차리기 어려운 그런 것들에 대해서 의식하면서 살아간다. 그리고 역사는 뭔가 큰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떻게 해 볼수 없는 힘이 있는거 아닌가 생각한다. 그런 것들을 본다면 비코가 여기서 추구하고자 했던 것은 신의 섭리와 인간의 일을 연결해서 설명하려고 한 것, 이것이 어찌보면 낡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어떤 점에서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런 것들을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낡은 것이 아니라 여전히 생각해봐야 할 점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새로운 학문⟫은 그림 한 장이 유명하다. ⟪새로운 학문⟫이 14부로 되어있는데 제5권에도 서론이 있다.목차를 보면 제1권 원리의 확립에 관하여, 제2권 시적 지혜에 관하여, 제3권 참된 호메로스의 발견에 관하여, 제4권 민족들이 밟는 과정으로 되어 있고, 제5권 민족이 다시 일어났을 때 인간사의 반복, 반복, 이런 말을 보면 비코는 순환사관을 했던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데 1,2,3,4,5권에 들어가기에 앞서어 이 저작의 개념이라고 해서 문단이 42개가 있다. 비코의 저작을 인용할 때는 문단 번호로 인용한다. 다시 말해서 플라톤의 저작을 인용할 때는 스테파누스 넘버를 이용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을 인용할 때는 베커 넘버를 이용하고, 파스칼의 팡세를 얘기할 때는 문단 번호가 있다. 그렇듯이 비코의 책을 인용할 때도 문단 번호를 가지고 말한다. 

이 저작의 개념이라고 하는 부분에서는 ⟪새로운 학문⟫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그림, 이 저작의 서론 몫을 하면서 안표지에 있는 그림에 대한 설명이다. 42개의 문단으로 되어 있는 "이 그림을 보면서 "권두의 그림 설명 ━ 서문을 대신하여"를 읽어 봅시다. 이 그림과 설명은 책 전체의 개념을 이해하는데 매두 중요한 것이어서 이것만 이해하면 책 한 권을 이해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그림을 보면 "테벳 사람 케베스가 도덕에 관한 도판을 만들었던 것처럼 여기에서 우리는 문명에 관한 도판을 보여주려고 하는데", 케베스는 소크라테스와 필롤라오스의 제자로, 플라톤의 《파이돈》에 등장하는 사람이다. 파이돈과 에케크라테스가 등장해서 파이돈에게 소크라테스의 마지막에 대해서 물어보던 사람이다. 적어도 비코는 플라톤의 대화편들을 읽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제19강 233 ⟪새로운 학문⟫을 펴 보면 곧바로 그림이 한 장 나옵니다. 이 그림을 보면서 "권두의 그림 설명 ━ 서문을 대신하여"를 읽어 봅시다. 이 그림과 설명은 책 전체의 개념을 이해하는데 매두 중요한 것이어서 이것만 이해하면 책 한 권을 이해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관자놀이에 날개가 달린 여성이 천구의天球儀 위에 서 있다. 천구의는 자연을 의미하며, 여성은 형이상학을 나타낸다." 천구의는 지상이고, 그 위에 서있는데 관자놀이에 날개가 달려있다. 이런 것은 상징을 읽어내는 것인데 상징을 읽는 것은 사실 미리 약속된 뭔가를 알아야 읽을 수 있다. 발로 밟고 있으니까 자연을 경시한다 또는 자연위에 있다. 형이상학 metaphysics, physics는 고대에는 자연학이라고 불렸고, 현대에는 물리학이라고 불리는 학문, 그러면 그 학문 위에 있는 것이니까 meta는 두번째, ~위에 있는 이런 말이다. 메타인지는 두번째 인지라는 말이고 2차적이라는 말도 되니까 그보다 상위에 있는 것. 비코의 ⟪새로운 학문⟫이라는 것이 형이상학과 모종의 관계가 있음을 여기서 암시하는 것이다. "왼쪽 위의 모서리에 한 개의 눈(응시하고 있는)을 싸안고 빛을 번쩍이는 삼각형은 섭리의 시선을 갖추고 있는 신이다." 왼쪽 위에 삼각형이 있는데 그 안에 눈이 하나 있다. 그런데 그것에서 나온 빛이 여성의 가슴을 향하고 있다. 그러면 형이상학이라고 하는 것은 신의 섭리로부터 뭔가를 받아오는구나. 그리고 "이 시선(방사선)을 통해 형이상학은 지금까지 철학자들이 신을 명상하는 매체로 이용한 자연물적 질서를 초월하여", 자연물적 질서는 천구의인데 그 천구의 위에 있기 때문에 초월했다고 표현하는 것. "황홀 망아忘 我 속에서 신을 관조하고 있다.", 신을 바라보는 것이다. 영어는 남성, 여성, 중성이 없는데 도이치어에서는 metaphysics이 여성명사이다. 그래서 metaphysics을 여성으로 형상화한다. 그러면 우주를 지배하는 조율하는 신의 섭리가 있고 인간 세계와 연결하는 일차적인 요소가 형이상학이다. 따라서 형이상학의 일차적인 과제는 "인간 영혼의 세계, 즉 문명 세계 또는 민족 세계 안에 존재하는 신의 섭리를 증명하려는 것이다." 형이상학은 theology, 신에 관한 학문, 신학이다. 서양 형이상학의 전통에서 기독교적인 계시하는 신을 전제하지 않은 그런 형이상학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인데 그렇다고 그 사람들도 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우주의 이치, 이것들을 탐구하는 것이 형이상학이라고 보았다. 기독교의 신학은 물론 인격신이 있지만 그 신도 하나의 법칙을 벗어나 있지 않다. 신은 이성을 가지고 있기도 하지만 의지를 가지고 있기도 한다. 고대 희랍의 신은 의지라는 것은 없다. 인격신이 아니기 때문에 오로지 법칙만을 가지고 있다. 거기에 의지를 덧붙이면 인격신이다. 신이 전지전능하다고 할 때 전지라는 것이 이성, 전능까지가면 의지를 얘기하는 것이다. 헤겔이 역사 형이상학을 이야기하면서 과연 전능까지 얘기하는지는 의문점이 있다. 헤겔은 역사의 법칙을 이야기하니까 섭리만 이야기한다. 비코도 마찬가지이다. 신이 가지고 있는 의지의 측면은 거론하지 않는다. "형이상학은 인간 영혼의 세계, 즉 문명 세계 또는 민족 세계 안에 존재하는 신의 섭리를 증명하려는 것이다." 이때 신의 섭리는 법칙으로 이해하면 된다. 그러므로 비코의⟪새로운 학문⟫은 신의 섭리를 증명하려는 것이기 때문에 역사를 관통하고 있는 법칙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지 신이 우리의 일상을 자기의 의지로 기적을 일으켜서 지배하고 있는가 이런 것을 따져물으려는 기독교 신학적인 의미의 섭리는 아니다. 따라서 이것은 역사 형이상학이라고 말하는 것이 적합하다. 비코가 가지고 있는 하나의 술어에서는 신학이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쓰고 있지만 그것이 기독교 신학 의미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렇다 해도 기독교 신학보다는 고대 형이상학의 의미가 강하다고 이해하면 되겠다. 그렇기 때문에 열심히 읽는 것이다. 

제19강 233 관자놀이에 날개가 달린 여성이 천구의天球儀 위에 서 있다. 천구의는 자연을 의미하며, 여성은 형이상학을 나타낸다. 왼쪽 위의 모서리에 한 개의 눈(응시하고 있는)을 싸안고 빛을 번쩍이는 삼각형은 섭리의 시선을 갖추고 있는 신이다. 이 시선(방사선)을 통해 형이상학은 지금까지 철학자들이 신을 명상하는 매체로 이용한 자연물적 질서를 초월하여 황홀 망아忘 我 속에서 신을 관조하고 있다.(새로운 학문, [2])

제19강 234 형이상학은 인간 영혼의 세계, 즉 문명 세계 또는 민족 세계 안에 존재하는 신의 섭리를 증명하려는 것이다.(새로운 학문, [2])

"비코의 기본적인 학문적 목표는 신의 섭리를 증명하는 것입니다." 즉 이 말에서 기독교 신학을 떠올리지 말라는 이야기이다. 즉 역사 형이상학인데 사실은 역사 형이상학이라고 해도 비코는 인간의 삶 속에서 펼쳐지는 사건들을 정리해서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에 오히려 역사 형이상학은 초월적인 의미보다는 인간사의 의미에 더 가깝다. 비코의 표현을 빌리면 문명 신학이다. "인간의 문명화는 신의 섭리에 의해 질서가 부여되고 배치되는 것이다. 이것이 참된 인간의 문명사회적 본성이며 자연에 존재하는 법이기도 하다. 이러한 신의 인도야말로 이 학문이 해명하려는 근본문제의 하나이다." 자연에 존재하는 법, 여성으로 표상되는 형이상학을 거쳐서 자연으로까지 관철되어 있다. 이 자연에 관철되어 있는 것을 비코가 연구하겠다는 말이다. 그리고 "따라서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이 책은 신의 섭리를 논하는 문명 신학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문명 신학이라는 말, 인간의 문명이기 때문에 national civil theory of divine providence, 신적인 섭리에 관한 합리적인(이성적인) 문명신학. civil theory, 문명 신학, 인간의 신학이다. 인간적이라는 의미를 그 안에 함축하고 있다. 형이상학이 중간에 있어서 위로부터는 신의 섭리를 받아들이고, 신의 섭리를 근거에 두고 자연 세계가 펼쳐진다. 그 중간 매개물이 형이상학이다. 그러면 비코가 말하는 문명 신학, 새로운 학문은 신의 섭리, 형이상학, 자연에서 펼쳐지는 여러 사건들을 관장하는 자연법 이 모든 것이 포괄되는 학문이라도 말할 수 있다. 한 때의 치기로 유치한 야망으로 품어볼 수는 있겠으나 이 정도의 생각을 비코가 자기의 학문에서 시도해보려고 했다는 것, 예전이니까 가능했겠다. 다른 한편으로는 오늘날 아무리 계량적인 통계적인 사회과학이 발전했다고 해도 그런 것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근본문제들이라는 것이 인간에게 있다. 그런 것을 또 놓쳐서는 안된다는 것을 비코가 보여준다고 하겠다. 삶의 궁극적인 의미 이런 것들을 부여하지 않은 상태에서 엄밀한 사회과학에만 바탕을 두고 뭔가를 해나가는 것이 과연 학문의 완성일 수 있겠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다. 그래서 여전히 형이상학이라는 것이 여전히 공부를 해봐야 하는 영역이 아닌가 한다.

제19강 234 비코의 기본적인 학문적 목표는 신의 섭리를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이것은 "문명 신학"입니다.

제19강 234 인간의 문명화는 신의 섭리에 의해 질서가 부여되고 배치되는 것이다. 이것이 참된 인간의 문명사회적 본성이며 자연에 존재하는 법이기도 하다. 이러한 신의 인도야말로 이 학문이 해명하려는 근본문제의 하나이다. 따라서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이 책은 신의 섭리를 논하는 문명 신학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새로운 학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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