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티오의 책들 | 철학 고전 강의 — 19
- 강의노트/라티오의 책들 2021-24
- 2021. 9. 27.
라티오 출판사에서 제공하는 팟캐스트 '라티오의 책들'을 듣고 정리한다. 라티오 출판사에서 출간된 책들에 관한 강유원 선생님의 해설녹음이다.
팟캐스트 주소: https://ratiopress.podbean.com/
⟪철학 고전 강의 - 사유하는 유한자 존재하는 무한자⟫, 제22강, 제23강
❦ 근대성의 요소들
수학과 자연과학의 발전
인간의 이성을 음미하고 평가
형이상학에 대한 경멸
사유하는 자기(또는 자기의식)의 등장
❦ 진리의 원천과 진리인식의 원천
데카르트는 “사유의 존재”(res cogitans)를 철학의 제1원리로서 받아들였다. 이것이 진리인식의 원천
진리의 원천인 신에 대한 철학적 탐구
“신이 부여한 인식 능력(cognoscendi facultatem, cognoscendi facultas)”을 가진 존재로서의 인간
2021.05.04 철학 고전 강의 — 19
《철학 고전 강의》 제22강 데카르트부터 읽는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끝나면서 고대 형이상학이 끝나고 데카르트, 칸트, 헤겔 이렇게 하면 근대 형이상학이 된다. 근대라고 하는 말이 가지고 있는 의미가 무엇인가부터 생각을 해보겠다. 《철학 고전 강의》 목차를 보면 제1부가 희랍 철학의 시작: 세계에 전체에 대한 통찰로 되어있다. 이 책을 쓸 때 제목을 그렇게 각각의 파트와 챕터의 제목을 쓸 때 궁리를 한다. 세계 전체니까 여기서는 인간이 이렇다 저렇다라는 말이 없다는 말이다. 물론 인간이 나약한 존재 이런 말이 있지만 대체로 보아서 큰 흐름으로는 저 바깥에 있는 세상에 대해서 관심을 가졌다는 말이다. 플라톤을 다룬 제2부는 플라톤: ‘좋음’ 위에 인간과 공동체를 세우려는 노고이다. 좋음 위에 세우려고 한다, 물론 인간이라는 단어가 들어있기는 하지만, 좋음이라는 것을 플라톤이 탐구할 때 좋음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저 바깥에 있는 것이다. 고대인들은 모두다 그런 것은 아닌데 적어도 형이상학의 탐구에서는, 고대 형이상학은 인간이 좋은 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 좋은 것은 인간 바깥에 따로 있다. 어떻게 해서든지 인간이 알아내서 그것에 따라서 모방해서 살려고 한다. 그게 고대적인 생각이다. 서양의 중세에서는 하느님을 믿는 기독교, 기독교 신학이 사람들에게 모두다 스며들고 파고들었다고는 해도 하느님이 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저기에 있다. 어떻게 보면 플라톤의 좋음이라는 것이 인격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의 가치이다. 그 가치를 구현해서 움직여가는 인격신이 하느님일텐데 그러한 인격신이라 해도 인간이 아니라 저 바깥에 있는 훌륭한 분이다. 아리스토텔레스도 마찬가지이다. 아리스토텔레스: 희랍 형이상학의 체계적 완결인데 아리스토텔레스에서도 궁극적으로 저 바깥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목차를 보면 데카르트, 칸트, 헤겔을 보면 데카르트: 주체인 인간의 세계 구축으로 되어 있다. 제목에 벌써 인간이 있는데 이 인간이 주체가 되어서 세계를 구축하다는 말이다. 데카르트가 근대 철학의 아버지라고 하는데 도대체 어느 점에서 그러한가를 물어본다면 인간에 대해서 탐구를 하는 것이다. 저 바깥에 좋은 것이 있는지 없는지, 데카르트는 있다고 믿는다. 어떻게 보면 고대인들은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묻지 않았고 근대인들의 눈에는 인간이 볼품없어 보였다. 그리고 신이 있다는 것을 우리 인간이 알까를 고민하는 것이다. 그리고 있다는 것을 믿고 싶어하는 것이다. 우리는 동아시아 세계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기독교도가 아닌 한은 신에 대해서 깊이 고민하지 않는다. 유교의 가장 근본적인 가치가 조상숭배이다. 조상이라고 하는 것은 나와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제사를 지낸다는 것은 살아 생선에 알던 분이다. 가령 기독교도가 하느님에게 기도한다, 살아 생선에 알던 분이 아니라 원래부터 저기 있었다. 다시말해서 동아시아 세계에서는 아무리 하늘의 이치가 어떻다고 해도 유한한 인간과 그 이치와의 사이에 단절이 없고 하나의 연속체이다. 그리고 내가 신이라고 하는 존재를 알지 걱정하지 않는다. 도를 닦으면 알 수 있다, 굉장히 가뿐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같은 기독교라고 해도 동아시아 세계, 특히 한국에 들어온 기독교는 사실 서양의 기독교와는 방식이 다르다. 서양 근대철학을 읽을 때는 이것을 생각해야 한다. 서양 근대인들은 신이 있다는 것을 믿었다, 그런데 없는 것이 아닐까 걱정도 했다, 그리고 믿고 싶어했다, 믿고 싶어 하다가 잘 안되면 화도 내고 그리고 기본적으로 인간은 볼품없는 존재로 생각했다. 제5부 칸트를 보면 칸트: 인간의 한계 자각과 ‘장래의 형이상학’이다. 데카르트에서나 칸트에서나 형이상학이라고 하면 보편존재론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말한 것과 같은 신학이다. 그냥 단순하게 말하면 신에 대한 학, 신학이다. 데카르트는 인간이 주체가 되어 세계를 구축하겠다는 야망이라도 있는데, 칸트에 오면 인간의 한계를 자각하고, 벌써 인간이라는 존재가 쪼그라들었다, 그 인간이 이렇게 못난이인데 그래도 형이상학이라는 것이 있어야 학문이 성립하고, ta onta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을 텐데 지금까지의 형이상학을 더 이상 쓸 수 없게 되니까 어떻게 하면 앞으로 형이상학을 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한계 자각과 ‘장래의 형이상학’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헤겔은 헤겔: 신적 입장으로 올라선 인간이라는 제목을 달아놓았다. 데카르트, 칸트, 헤겔을 다루는 파트의 제목에 인간이라는 말이 들어가 있다. 인간이라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그렇다. 그런데 헤겔은 신적 입장으로 올라선 인간, 야욕이 지나치다고 얘기할 수 있다. 야욕이 지나치기는 하지만 그런데도 불구하고 인간이 올라가려고 노력하는,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정말로 신적 입장으로 올라섰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여하튼 데카르트, 칸트, 헤겔 모두 인간이라는 존재가 볼품없는 존재라는 것을 분명히 자각하고 있었다는 것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근대 형이상학은 인간 존재에 대한 굉장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의심하는, 좋게 말하면 겸손한, 나쁘게 말하면 자학적인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제22강을 보면 칸트 형이상학 강의 서론에 나와 있는 부분을 인용하고 있다. 근대인들은 왜 인간이 볼품없다고 생각했을까를 칸트가 잘 정리하고 있다. 수학과 자연과학이 발전했다. 수학이라고 하는 학문은 인간이 만든 학문이고, 자연과학 역시 인간이 만든 학문이지만 그것이 인간이 제멋대로 만든 것은 아니다. 인간은 어찌해볼 수 없는 법칙들을 탐구하기 때문에 수학과 자연과학이 발전하면 할수록, 비록 수학자나 자연과학자가 대단하다 하는 그런 평가를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수학과 자연과학이 발전해서 저 자연의 세계가 이렇게 기가막히구나 하는 것을 알아낼 수록 인간은 외소해지기 마련이다. 수학과 자연과학의 발전이 인간에게 자존심을 북돋아주고 심지어 자만심을 갖게 해주지는 않았을 것 같다. 그러다보니까 사람들이 인간의 이성을 음미하고 평가하는 경향이 생겼다. 이런 것은 존 로크나 이런 사람들이 시도했던 것이다. 그리고 칸트가 아주 분명하게 말하듯이 형이상학은 본래의 철학임에도 불구하고, 본래의 철학이라는 것은 철학 중에 철학이라는 말이다, 형이상학적 천착에 관해서 경멸적으로 말하는 것이 자랑거리가 되는, 일종의 무관심주의가 보인다. 이 세가지 특징이 근대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칸트의 형이상학 강의》 서론부분은 칸트가 보여주는 일종의 공부하는 방법을 잘 드러내 보여준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칸트는 명료하게 글을 잘쓴다. 데카르트는 난삽하고 실존적으로 고민이 많은 사람이다. 헤겔도 그렇다. 그런데 칸트는 그렇지 않다. 22강에서 칸트의 정리를 보면 칸트가 보기에 데카르트는 사유에 대해서 명석성을 준 것으로 크게 기여했다. 명석하다는 것은 clear and distinct이다. 번역할 때 명석판명하다고 하는데, 데카르트는 사유에 명석성을 주었다는 말은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잘 구별할 수 있게 했다는 것이다. clear하다는 것은 깨끗하다는 것이다. 이것저것 뒤섞여 있을 때는 unclear 하다. 칸트가 보기에 사유에 명석성을 주었다는 것은 우리의 이성의 능력치를 키워졌다는 것이 아니다. 쓸데없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던 것, 머리속이 엉클어져 있던 것에 대해서 불필요한 것들을 치웠다는 것이다. distinct는 판명하다고 하는데, 판단할 때의 판, 명확하게 한다는 명이다. 분류를 잘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일단 머리에 있는 찌꺼기를 쓸어내고, 쓰레기가 아닌 것들을 남겨놓고 그것들을 정리 정돈하는 것을 말한다.
제22강 256 우리는 진리의 연구에 당혹해서 주춤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형이상학은 본래의 철학임에도 불구하고, 형이상학적 천착에 관해서 경멸적으로 말하는 것이 자랑거리가 되는, 일종의 무관심주의가 보인다. 우리 시대는 비판의 시대이며, 따라서 사람들은 이 비판적 시도로부터 무엇이 생겨나는가를 알지 않으면 안 된다. ━ 《칸트의 형이상학 강의》 서론
제22강 257 칸트는 데카르트에 대해 한 마디로만 정리하고 지나갑니다. "데카르트도 사유에 대해서 명직성을 준 것으로 크게 기여했다"는 것입니다. 칸트가 보기에 데카르트의 업적은 사유의 명석성을 확립한 것입니다.
칸트는 데카르트에 대해서 적극적인 업적을 인정하지 않은 셈인데 헤겔은 적극적인 업적을 생각한다. 자기 의식이 진리의 본질적인 계기라는 것을 알고 있는 자립적 철학에 착수했다. 다시말해서 헤겔이 보기에 인간의 의식을 가지고, 인간 존재가 가지고 있는 이성의 능력을 가지고 철학적 탐구를 해보려고 한다는 말을 철학사에서 한다. 데카르트가 시작한 자기의식의 철학을 밀고 나아가서 내가 완성했다는 것이 헤겔의 자부심이다.
제22강 257 철학이 이성으로부터 자립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알고 있는, 또한 자기 의식이 진리의 본질적인 계기라는 것을 알고 있는 자립적인 철학에 착수한 사람이 데카르트이다. ━ 헤겔, 《철학사 강의》
그러면 데카르트는 무엇을 하는가. 일단 정리를 한다. 내 의식이 어디에 있고 저 바깥에 있는 물건들, 또는 신은 어떻게 있는지 뚜렷하게 정리하는 것이다. 엉키지 않도록 정리하는 것. 그게 바로 23강에 있는 진리의 원천과 진리인식의 원천 부분이다. 제목만 가지고 생각해보면 된다. 진리의 원천은 신이고, 진리인식의 원천은 인간의 자기의식이라고 적어두면 된다. 근대인들은 신이 있다고 믿고 싶어하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역시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진리의 원천은 신이다. 그러면 그것을 아는, 즉 진리를 인식하는 원천은 인간의 자기의식이다. 그러면 데카르트가 할 일은 진리의 원천인 신과 진리 인식의 원천인 자기의식 사이를 연결하는 일이다. 그것이 철학의 원리적인 탐구이다. 이 둘을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 칸트는 안된다고 했다. 인간의 한계를 자각한 것이다. 여기서 인간은 자기의식이라고 바꿔서 말할 수 있다. 그런데 헤겔은 자기 의식을 밀고 올라가면 신의 닿을 수 있다. 데카르트, 칸트, 헤겔의 입장이 갈린다. 근대 형이상학은 이 세계에서 왔다갔다 한다. 어떻게 할까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이 데카르트. 진리의 원천인 신과 진리 인식의 원천인 자기의식,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는 고민하는 사람이 데카르트. 칸트도 고민한다. 그런데 결론을 내렸다. 자기의식적 인간은 신에 닿을 수 없다. 그게 순수이성비판의 주장이다. 헤겔은 자기의식을 열심히 쌓으면 신적인 입장에 올라설 수 있다고 말하는, 망상이다. 데카르트가 자기의식을 가지고 해보는 것이 잘 드러나는 것이 파스칼과 비교를 하는 것이다. 파스칼은 유명한 수학자이다. 수학자가 왜 신을 애타게 찾았는가. 파스탈은 신학자의 신, 자기가 수학가지고는 안되니까 믿음으로 간 것 같고, 데카르트는 철학자의 신을 주장한다. 다시말해서 데카르트는 자신이 최대한 자기의식을 가지고 노력하고 탐구를 해서 신을 알아내겠다고 하는 것이 데카르트 철학의 기본적인 의도이다. 그러면 일단 나에 대해서 탐구를 하게 된다. 내가 과연 신을 알아 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탐구를 한다. 그게 바로 나는 생각한다라고 하는 명제가 나오게 된 근원이다. 나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생각을 하고 있구나, 그러니까 나는 생각하는 존재, 사유적 존재라는 것이다. res cogitans. 여기서부터 시작을 한다. 진리의 인식의 원천이 res cogitans, 거기서 시작해서 진리의 원천인 신으로까지 나아가려고 한다. 그런데 데카르트는 조금 불안한 했던 것이다. 불안하니까 신이 사유적 존재인 나의 인식의 확실성을 보증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자연의 빛, 다시말해서 신이 부여한 인식 능력이 관여하는 한" 이 부분은 증명하지 못한다. 깔고 가는 것. 사실 그것을 증명해야 하는데 깔고 들어갔으니까 데카르트는 증명해야 될 것을 증명된 것처럼 깔고 들어갔으니까 거짓말쟁이이다.
제23강 264 인간은 의심을 합니다. 이 '의심하고 있는 나'는 존재하는 것입니다. 의심이 존재를 자각하게 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사유를 하고 또 다른 모든 것들은 의심하지만 자신의 존재를 의심할 수 없는 존재란 육체일 수 없고 우리가 영혼이나 사유라고 일컫는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생각하면서, 나는 이러한 사유의 존재를 제1원리로 받아드렸다"고 합니다. "사유의 존재", 즉 인간 정신의 현존, '사유하는 존재, 사유적 존재'(res cogitans)가 데카르트 철학의 제1원리이자 출발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제23강 265 이로부터 자연의 빛, 다시말해서 신이 부여한 인식 능력(cognoscendi facultatem, cognoscendi facultas)이 관여하는 한, 즉 명석판명하게 지각하는 한, 그 인식 능력은 단지 참인 대상에만 관여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 《철학의 원리》 첫번째 부분, 3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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