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티오의 책들 | 철학 고전 강의 — 16

 

⟪철학 고전 강의 - 사유하는 유한자 존재하는 무한자⟫, 제19강

❦ 이론학의 영역들
세상의 모든 존재 일반: 보편적 존재론
자연학: 운동(변화)에 관여하는 한에서의 존재
신학: 있는 것 자체, 있는 것의 본질, 하나의 최고 원리
수학: 수와 양의 측면에서 본 존재

 

2021.05.04 철학 고전 강의 — 16

오늘은 《철학고전강의》 19강 학의 성립에 관한 물음, 보편적 존재론과 신학의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하겠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형이상학》에서 처음 하는 얘기가 모든 인간은 본성적으로 알고 싶어한다는 말이다. 이 말을 처음 듣는 사람은 나는 알고 싶은 게 없는데 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모든 인간은 본성적으로 알고 싶어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본성적으로 알고 싶어하지 않아라고 이렇게 말하는 것 자체가 이미 어떤, 모든 인간은 본성적으로 알고 싶어한다 라는 것이 하나의 앎, 지식, 명제인데 이 명제에 대해서 반응하는 것 자체가 궁금함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렇게 포괄적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그러면 모든 인간은 본성적으로 알고 싶어한다라고 할 때 이 문장에서 뭔가 허전한 것이 있다. '무엇을' 알고 싶어하는지가 일단 있어야 한다. 도대체 무엇을 알고 싶어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철학고전강의》는 존재론과 형이상학에 관한 것이다. 존재론과 형이상학에 관한 것에서 탐구의 대상은 모든 존재를 탐구하는 것이다. 그러면 모든 인간은 본성적으로 알고 싶어한다는 이 명제는 무엇을 알고 싶어하는가에 대한 대답은 모든 것을 알고 싶어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모든 것을 알고 싶어하는데 이 말을 쪼개보면, 모든 것이 진짜인가, 참된 것은 없는지, 거짓은 없는지 물을 수 있다. 그러면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을 알고 싶어한다. 진짜와 가짜를 알고 싶어한다. 진짜와 가짜가 아무런 구별이 되지 않고, 설사 진짜와 가짜가 구별된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라고 여기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물론 불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모든 것이 거짓 현상이다. 마음에서 거짓을 분별하고 싶어하고 그러니까 모든 것을 알아봐야 소용없다고 말하면 급진적인 질문이 된다. 그래서 부르크하르트가 종교 중에서 권력과 손을 잡는데 가장 부적절해 보이는 것이 불교라고 말을 했다. 그 다음에 기독교라고 했다. 기독교는 지상에 있는 모든 것이 지나가는 것이라고 얘기했다. 지금은 희미하게 보이지만 나중에는 또렷하게 보일 것이다 라는 말이 바로 그것이다. 

무엇을 알고 싶은가. 모든 것을 알고 싶다. 모든 것을 쪼개보면 참과 거짓을 알고 싶다는 것이 된다. 그러면 알기는 아는데 참과 거짓을 나누어서 알고 싶다. 여기서 나눠서라는 말을 해버리면 어떻게 아는가가 된다. 알기는 아는데 어떤 식으로 탐구를 해야 참을 알 수 있고 거짓을 알 수 있는가. 그러면 파르메니데스부터 계속된 물음이라는 것을 눈치챌 수 있다. 참다운 길을 알아야 한다. 있음이라는 길과 없음이라는 길을 이야기한다. 있음이라는 길은 진짜이고. 없음이라는 길은 가짜라는 말을 한다. 무엇을 알아야 하는 말에는 참과 거짓을 알아야 한다는 말이 들어가고, 참과 거짓을 안다고 하려면 어떻게 아느냐가 포함되고, 참과 거짓만을 알아야 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것이 위에 있고 어떤 것이 아래 있는지 알고 싶게 된다. 그것을 아리스토텔레스나 플라톤은 다수의 것들과 하나의 원리라고 표현한다. 그것을 꿰어서 알게되는 것을 체계적 안다고 말을 하는 것이다. 어떤 것들 중에서도 모든 것들 중에서 어떤 것은 변화하고 어떤 것은 변화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변화하는 것을 기준으로 삼아서 변화하지 않는 것을 끼워 맞출 수는 없다. 거꾸로 변화하지 않는 것을 기준으로 삼아서 변화하는 것을 끼워 맞추는 것도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변화하지 않는 것, 불변의 것이 원리인데 어떻게 그 원리인 불변으로부터, 콩심은데 콩나듯이, 불변이 나와야지 변화가 나오는지 물어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정리해보면 모든 인간은 본성적으로 알고 싶어한다. 뭘 알고 싶어 하는가. 모든 것이다. 그런데 일단 초보적으로 얼핏 보기에는 모든 것이 그냥 있다. 그런데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그랬는지 저 수백만년 전부터 그랬는지 앞으로도 또 그럴 것인지 영혼불멸 할 것인지를 따져보려면 본래도 그런 것인지 본래는 안그랬는데 지금만 그런 것인지 이런 것들. 본래도 그런 것이고 지금도 그런 것이면 본질이 실현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고, 지금만 그런 것이면 거짓 현상, 가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살펴본다. 시간의 경과에 따른 변화를 본다. 본질이 실현된 것은 있는 것 자체, 또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것처럼 있는 것이 있는 것인 한해서, 본질의 측면에서 본다. 

그러면 보편적 존재론과 신학의 관계에 그런 말이 나온다. 있는 것을 있는 것인 한해서 살펴보는 것, 이것은 본질의 측면에서 살펴보는 것이고, 그 다음에 그게 어떻게 변화하는 가를 보는 것이, 변화에 관여하는 한에서 보는 것이 자연학의 탐구이다. 지금 우리는 모든 것을 알고 싶어한다. 모든 것에 대해서 따져묻는 것이 보편적 존재론이다. 그런데 보편적 존재론을 묻는데 그 존재가 있는 것이다. 그 있는 것인, 즉 있는 것 자체에 대해서 따져보고 연구하는 것이 본질의 측면에서 보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가 신학이다. 

변화에 관여하는 한에서 운동에 관여하는 한에서 이렇게 따져묻는 것은 자연학이다. 무엇 중에서도 질적으로 우위에 있는 것이 있는데 이게 있는 것 자체이다. 그러면 그것들을, 있는 것 자체들을 쭉 꿰어서 보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원리"들"이 있다고 말한다. 그 원리들을 꿰어서 올라가면 가장 위에 최고의 원인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을 따져 묻는 것이 신학이다. 하나의 최고원인, 그것도 존재이다. 존재를 볼 때 본질의 측면에서 보면 원리를 따져묻는 것이니까 아리스토텔레스는 신학이라고 부른다. 무엇을 탐구하는가. 있는 것을 탐구한다. 그 있는 것들을 수와 양의 측면에서 따져물으면 수학이다. 눈 앞에 책이 6권 놓여있다. 각각의 책들이 내용이 다르다. 내용의 측면에서 보면 다른데 뭉뚱그려서 6권이라고 하면 수와 양의 측면에서는 내용이 다 소거되고 6이라는 숫자로 묶을 수 있다. 다시말해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보편적 존재론 안에서 이야기하는 것들은 자연학과 수학과, 신학을 얘기하는 것을 다 묶어서 이론학이라고 부르는데 이론학 안에 있는 것들은, 다시말해서 이론학의 탐구는 보편적 존재론과 같은 얘기이다. 그런데 보편적 존재를 이런 저런 측면에서 다룰 때 다르다는 것이다. 운동에 관여한다고 하는, 즉 변화의 측면에서 다루면 자연학이 되는 것이고, 수와 양의 측면에서 다루면 수학이 되는 것이고, 여러 원리들과 하나의 최고 원인의 측면에서 다루면 신학이 된다. 그런데 그 중에서 신학은 하나의 관계 속에서 여러 개를 봄으로 그것은 질적으로 우위에 있는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우리가 눈 앞에 보이는 것들을 자연학, 수학적으로 탐구했다. 그런데 하나의 최고 원인이라고 해서 테오스, 신이라고 하는데 사실은 신은 우리 눈 앞에 보이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전체를 딱 한 개의 원리로 묶어놓기 위해서 가져온 일종의 학문적 시원, 설명의 원리가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나 그에 선행하는 플라톤이나 그게 있다고 여겼던 것 같다. 그러면 그 신은 어떻게 알 수 있지라고 물을 수 있다. 그래서 플라톤은 '갑자기' 알게 된다고 말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뭐 탐구하다보면 알게 되겠지 이런 식으로 하고 만다. 

우리 인간이라는 존재를 예를 들어서 말해보겠다. 인간에 대해서 궁금하다고 하면 우리는 아주 넓은 의미의 인간학이라고 할 수 있다. 인류학이라는 학문영역도 있지만 인간학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학 안에는 인간을 생물적 신체의 측면에서만 연구를 하면 생물학이다. 생물학 안에 또 영역이 있다. 뇌과학, 의술 등이 있다. 이게 무엇을 말하는가. 하나의 인간의 놓고도 그 인간에 대한 탐구는 그냥 뭉뚱 그려서 인간학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인간에 대한 존재에 대한 탐구는 참으로 여러가지 측면에서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존재 일반에 대해서 탐구를 한다고 하면 보편적 존재론이다. 그런데 그 존재론은 운동의 측면에서 연구할 수도 있고, 그 존재들 전체를 꿰는 하나의 원리의 측면에서 연구할 수도 있고 그냥 수와 양의 측면에서 연구할 수도 있다. 그것에 따라서 다른 이름을 붙일 수 있다. 인간에 대해서 연구한다고 할 때 인간의 연구를 아무리 연구한다고 해도 이런 창발적인 것을 어떻게 하는 걸까 말하면 누가 그건 신께서 하는 일이야 라고 말하면 플라톤처럼 '갑자기' 신으로 올라가버리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도 마찬가지로 신학이라는 학문이 그런 위치에 있는 것이다 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면 신학에서는 하나의 원리로 여러개의 존재들을 꿴다. 다르게 말하면 하나와 여럿의 관계는 어떠한 가의 문제이다. 보편적 존재론 안에 신학이 있는데 신학의 핵심문제 중 하나가 '하나'라는 것이다. 하나와 다른 여러 개의 존재들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이것 만을 따져 물을 수 있다. 이것이 다음에 다룰 실체론이다. 그 다음에 변화에 관여하는 한에서 운동에 관여하는 한에서, 즉 어떤 존재를 다룰 때 운동의 측면에서 다루는 것이 자연학이다. 그런데 자연학에서 핵심은 운동에 관한 논의이다. 이것이 21강에 있는 운동론, 가능태와 현실태이다. 그러면 아리스토텔레스에 관한 강의가 형이상학의 구성, 앎의 종류와 단계들, 형상의 분리와 내재, 그리고 오늘 보편적 존재론과 신학의 관계에 대해서 설명했다. 

S에 P가 우연히 속해있다.
S에 P가 본질적으로(자체로서) 속해있다.
S에 P가 속해있다는 것은 참/거짓이다.
S에 P가 가능적으로/현실적으로 속해있다.

S에 P가 우연히 속해있다. 학문적으로는 따져 볼 필요가 없다. S에 P가 본질적으로(자체로서) 속해있다. 어떻게 속해 있는 것인가를 물어보면 그게 바로 실체론. S에 P가 가능적으로/현실적으로 속해있다. 이게 바로 운동론에 관한 얘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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