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터슐츠: 근대 형이상학에 있어서 철학자의 신

 

철학자의 신 - 10점
발터슐츠/사랑의학교

 

역사 서문
서론
쿠자누스와 근대 형이상학의 역사
근대 형이상학에 있어서 철학자의 신
근대의 구성적 체계에 있어서 데카르트의 형이상학적 지양
헤겔의 절대정신의 체계와 니체의 동일자의 영원 회귀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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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형이상학에 있어서 철학자의 신
68 즉 내가 가지고 있는 완전성의 이념이 내 자신의 존재로부터 근거지워질 수 있다면 내 자신이 신일 것이고, 이 경우 나의 유한성은 바로 부정되어야 한다는 상황에 놓이지 않을 수 없으리라. 그러나 나와 대립해 있는 이 신은 나를 나의 유한성 속에 두었으며 나에게 나의 존재를 부여했다. 그러므로 나는 사고가 명석하게 판단한 한 나의 사고를 신뢰해야 한다. 그 이유는 신이 나를 기만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데카르트는 신의 성실성에 근거를 둔다. 그러므로 악령은 배제된다. 신까지도 같이 묶어버린 하나의 존재 질서로부터 끌어내지 않고 신의 절대적인 전능으로부터 풀어 나간다. 그와 더불어 그는 신은 스스로 기만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극단적 유명론을 배격한다. 그리하여 그는, 신은 스스로 기만하기를 전혀 ‘원할 수가' 없다고 한다. 그 이유는 기만하려는 것은 악하고 약하다는 표시가 되기 때문에 절대적 전능과 화합할 수 없는 것이다. 절대적 전능은 자기 결정을 정당하게 할 수 있는 최고의 결정이며 또 최고의 결정으로 나타난다. 신은 마치 왕이 자기의 법을 선포하듯 이 세계를 그의 전능에 의하여 아주 자유롭게 그리고 온전하게 한다.

69 데카르트의 신은 단순한 개념이 아니다. 내적 필연성으로 나에 대(對)해서 존재하는 기준이며 내 위에 놓이게 된 기준이다. 그 기준으로 나는 내가 유한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러한 신을 바라볼 때에만 나는 나의 유한성을 받아들일 수 있으며 그 유한성을 지탱할 수가 있다. 이 신이 그 절대적인 전능으로 나 자신을 나에게 넘겨주기 때문이다. 데카르트의 신은 철학자의 신이지 믿음 안에서 파악될 수 있는 계시의 신은 아니다. 철학자로서의 데카르트는 이제는 더 이상 교회의 교리에 따라 살지 않았다. 교리에 대한 그의 개인적 태도는 그것을 느긋하게 받아들이는 편이었다. 그의 잠정적 도덕의 첫째 명제에서 데카르트는 그가 신의 은총으로 소년 시절부터 가르침을 받아왔던 그 종교를 굳게 지킨다고 말하고 있다.

80 이러한 문제 설정은 하이데거에 따르면, 바라는 바의 일정한 것에 맞추어 버리는 것이 된다. 존재자를 묻는 자, 자신의 근거를 최고의 존재자 안에서 구하려고 하고, 또 최고의 존재자로부터 이해하려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하이데거에 의하여 전통적 형이상학의 특징을 두 가지로 찾아볼 수 있다.

 

하나는 전통적 형이상학이 존재자를 전체로서 묻는다면, 말할 것도 없이 바로 존재를 가지는 자로서 최고의 존재자를 내세운다. 다른 하나는 형이상학자는 그 근거를 최고 존재자에 두려고 하고 또 최고 존재자에 의지하려고 한다. 이 전통적인 형이상학 안에서 그때그때마다 최고의 존재자로 규정된 것은 각기 다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최고의 존재자를 신으로 규정했다. 근대 형이상학은 신 대신 절대정신을, 그리고 후에는 인간을 내세웠다. 이러한 차이는 중요할지도 모르나, 그러나 구조상으로 그들 내부에는 동일한 것이 일어나고 있다. 즉 하나의 존재자가 추구되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다른 모든 존재자의 근거가 되고 있다. 

85 형이상학의 역사가 신으로부터 절대 정신으로, 나중에는 인간으로 그 중심이 옮아가는 것을 밝히는 것이라고 설명한다면 바로 여기에서 그 옮김의 근거가 밝혀진다. 즉 인간은 그 최고 존재자에 묶어놓는 근거를 개념으로 확실하게 함으로써 인간은 그 최고 존재자에 묶어 놓은 근거를 무효화시키며, 자기 자신을 바로 이러한 무효화하는 행위의 실행자로 파악한다. 즉 이 최고 존재자에 묶어놓는 것을 파악하는 이러한 인간은 나중에 가서 이 최고, 존재자와의 연결을 가지고 근거를 만들어 최고 존재자로 군림하고 만다.

하이데거 철학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그는 최고의 신적인 것이 최고의 인간적인 것으로 바뀌어진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라고 묻는다.

그의 대답은 이렇다. 최고의 신적인 것이 바로 하나의 '존재자'이기 때문에 생길 수 있었던 것이라고. 그래서 인간은 사유 하면서 존재자를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기독교적으로 이해된 신으로서의 존재자라 해도 인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되어 버렸다고 대답한다.

데카르트 이후의 근대 철학은 이 기독교적인 신을 부정하였다. 근대 형이상학은 그 모든 존재자의 어떤 것도 그 근거로 삼지 않는다. 마음껏 자기 것으로 소유해 버리고, 자기 것으로 끌어 들이고 또 자기 자신의 근거가 될 수 있는 그 어떤 존재자도 모두 부수어 버리고 또 그렇게 부수어 버리지 않고는 못배기는 그 알 길 없는 사유의 의지에 의하여 근대 형이상학의 특징은 이루어지고 있다.

91 신을 어떤 규정된 존재자로 그리고 파악할 수 있는 존재자로 만들어 버릴 때 경험된 것은 단지 사유의 힘이었다. 그것은 규정된 신적 존재자까지도 지배하는 사유 바로 그것의 힘이었다. 그 이유는 규정된 신적 존재자가 바로 사유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사유의 본질)은 모든 규정된 존재자, 파악할 수 있는 모든 존재자를 사유하면서 넘어선다.

이 존재자에 대한 사유의 힘을 끝까지 생각한 사람은 사유의 무력을 경험하기에 이른다. 사유 자신이 또 그 자체로서 있을 수 없는 이 무력을 경험하게 된다. 만일 그 사유가 존재 자신으로부터 제약받고 가능성을 받지 않으면 그렇다. 이 마지막 길을 감히 걸어가는 자, 그는 더 이상 사유 안에서 용해될 수 없는 철학자의 신을 찾는다.

연로한 쉘링은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참된 철학을 하고자 하는 자는 모든 희망 또는 모든 욕구, 모든 동경에서 자유로워야 한다. 그는 아무것도 원해서는 안 되며, 알아서도 안 되고, 완전히 알몸으로 궁핍함을 지각해야 하며 모든 것을 얻기 위하여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한다. 어려운 것은 이 발길이다. 마지막 언덕에서 이별하는 것도 그만큼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이 구절 바로 앞에 몇 구절이 더 있다. "여기서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이 필요하다. 흔히 말하는 것처럼 단순히 아내나 아이들만 아니고 존재하는 것, 신까지도 포기해야 한다, 왜냐하면 신 역시 이러한 입장에서 볼 때 하나의 존재자이기 때문이다. 또한 진정으로 자유로운 철학의 출발점에 자신을 놓기를 원하는 자는 신 자체도 포기해야 한다. 이 말이 뜻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그것을 얻으려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그것을 버리려는 자는 얻으리라."


이 글을 마치면서
173 여기에 펴낸 논문들은 근대 형이상학의 철학적 의미에 대한 새로운 통찰의 필연성을 지시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 지시는 '신의 문제'라는 시점에서 이루어진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처음부터 애당초 이 역사적 전개의 의미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모든 사변을 제거하는데 노력하는 일이다.

헤겔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지배적인 근대 형이상학의 해석은 그것이 이제는 절대 정신으로 규정되든, 자율적 인간으로서 규정되든 이 역사의 주체를 안다고 믿고 있다. 이제는 이 주체들을 신이라고 불리우는 새로운 주관성의 모습으로 바꾸어 놓는 것은 잘못 빗나간 것이 아닐까? 신이 이 역사의 주역인가 아닌가라는 물음은 우리들이 원래 이 신이 누구인가를 이미 파악했을 때에만 결정되리라. 그러나 이 시대의 사색가들 자신에게 그들이 신을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가를 묻게 된다면 바로 이 물음은 자기 쪽에서 하나의 대답을 가져오는 것이 된다. 사색가 자신의 말을 사실적(史實的)으로 분별하는 것을 포기한다면, 그리고 그들의 신(神)계념을 그저 끌어내기만 한다면 그들을 하나의 기준을 가지고 재는 것이 된다. 이 기준은 외적인 것으로 끝나고 만다. 말을 바꾸어 말하자면, 신이라는 문제의 시점에서 근대 형이상학의 철학적 의미에 대한 물음은 그것이 자기 자신을 이 형이상학에로 (in) 꾸려넣고 (einodnen) 그 형이상학으로부터 신을 물어보려고 할 때에만 물음으로서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 물음은 이 형이상학 자신을 실현시킴으로써 하나의 윤곽을 얻을 수 있다.

이 실현의 논리가 다시 한번 밝혀진 셈이다. 주관을 새로 철저히 생각해 내고 그것을 인식의 출발점이라고 선언하는 사상가들 一 쿠자누스와 데카르트 一이 이 전개의 시초를 이룬다. 그러나 그들은 이 주관성을 그들과 대립하는 신에 의하여 한정하는 방법으로 선언한다. 이 신은 무한한 것으로서 유한한 주관성을 지탱하고 있다. 이러한 시초를 이루는 사색가를 이어서 체계를 이루는 사림들――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 — 이 뒤따른다. 이들의 바램은, 인간의 주관성과 신의 주관성 사이에 존재론적으로 통찰할 수 있는 관계를 만드는 일이다. 더구나 그것도 신을 인간의 주관성과 대립시키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인간도 그 안으로 짜여져 들어가 있는 그 연관 전체를 지탱하는 자로 규정하는 방식을 가진다.

이와 같은 계승은 이제는 그 어떤 형태로 근대 형이상학의 내부에서 계속 반복되어 진다. 즉 매개적인 체계학은 다시금 반복해서 주관성을 새롭게 한다. 그리고 보다 더 근본적인 규정에 의해 문제된다. 이 주관성은 그 자체로 신과 대립하는 형태로 그리고 그 대립에 의하여 한정된다. 이 대립의 교차 관계는 근대 형이상학의 본래적인 "연관"을 형성한다. 신은 유한한 주관성과의 '대립(Gegensatz)'으로 '그리고(und)' 유한한 주관성의 '통일(Einheit)' 로서 규정되는 제약이다. 근대 형이상학의 신은 이것저것의 규정에 의하여 파악될 수 없다. 그리고 이 형이상학 안에서의 모든 사색가는 단순히 일면적으로만 사유하기 때문에, 사유하는 한 추월을 당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대립적인 규정에는 공통성이 있다. 즉 근대 형이상학의 사색가들은 신과 인간과를 대립적인 관계의 형태로, 그리고 그러한 관계에 의해서 사유한다. 비록 이 관계가 대립이 되든 통일이 되든 간에 그렇다. 이 규정들에 의하여 근대 형이상학은 우리들에게 오늘날의 뚜렷한 모습으로 부각되고 또 특징지어진다. 그리고 우리는 다음과 같이 묻지 않을 수 없다.

즉 그 사유가 신을 앞질러 생각하고 나와 대립하는 극한과 또 나와의 통일 사이에서 그 스스로 운동하고 그 두 규정 속에서 그 스스로 나와 관계를 가지면서도 내 안에서는 일어나지 않는 이 사유의 본질이 무엇이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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