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자키 이치사다: 중국통사
- 책 밑줄긋기/책 2012-22
- 2021. 9. 1.
중국통사 - 미야자키 이치사다 지음, 조병한 옮김/서커스(서커스출판상회) |
머리말
총론
제1편 고대사
제2편 중세사
제3편 근세사
제4편 최근세사
맺음말
저자 발문
주
색인
역자 후기
세계사간이 연표
아래 그림은 내가 고안한 세계사의 간이 연표로서 그 속에 나의 시대구분론에 따른 시간의 좌표가 제시되어 있다. 비스듬히 그어져 있는 곡선이 즉 그것이다. 고대古代부터 중세中世, 중세부터 근세近世의 경계선이 보통은 직선으로 구분되어 있지만 여기서 곡선을 사용하고 있는 데는 이유가 있다.
하나의 역사가 고대에서 중세로 옮겨가는 시기에 어느 시점에서 모조리 단번에 변한다는 것은 실제로는 있을 수 없다. 예컨대 960 년 송 왕조의 성립을 중국이 중세로부터 근세로 이행한 해로 삼는 것은 전적으로 편의적인 수단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진실은 근세적 경향은 훨씬 전부터 시작하고 있으며, 또한 대체로 완성되기까지에도 더욱 상당한 세월이 소요되었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래서 만일 색채를 사용해 중세에서 근세로의 이행을 제시한다면 그 경계를 흐릿하게 하면 좋을 것이다. 중세를 청색으로 칠하고 근세를 황색으로 칠한다면 그 경계는 두 색이 섞인 띠가 된다. 청색이 차츰 옅어져 녹색이 되었는가 하면 이번에는 녹색이 차츰 옅어져 황색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색을 쓸 수가 없으므로 곡선으로 그 점차적인 이행을 나타내고자 했다.
이 표는 내가 이제까지 이미 몇 번이나 사용한 그림인데 그 의미를 특별히 설명한 적은 없었다고 생각된다. 그 때문인지 자칫하면 많은 독자에게 나의 고심이 간과될 우려가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지금 실례를 들어 약간의 주해를 시도하고자 한다.
동양적 근세
독자는 우선 동양지역의 근세 부분에 주목하기 바란다. 이 구간에는 왕조의 명칭으로 말하면 송 · 원 · 명 · 청조의 대부분을 포함시킬 생각이다. 내 생각에는 동양의 중심을 이루는 중국은 삼국 · 육조 · 당 · 오대라는 중세의 상태가 그 종말 무렵이 되면 점차 근세적 경향을 나타내고, 송대에 들어서 거의 근세의 형태를 갖추고 나면 그대로 대체로 같은 상태가 청조 말기, 즉 19 세기 중엽까지 지속되며, 그로부터 이번에는 최근세(근대)의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게 된다.
그런데 이제 동양의 근세를 보면 이것은 이웃 란의 서아시아의 근세와 접촉하고 있다. 하지만 서아시아의 근세는 동양보다 훨씬 일찍이 시작되고 있다. 내 억측으로는 이슬람의 압바스 왕조의 군주 하룬 알 라시드의 치세 전후에 근세가 대략 완성을 보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 서아시아의 근세는 동양의 중세에 영향을 미쳐서 그 근세화를 자극했음에 틀림없다. 나의 어휘로 말하면 서아시아의 르네상스가 동양에 영향을 주어서 그 르네상스를 출현시키는 데 공헌한 것이다. 이 같은 경우 뒤늦게 꽃피운 르네상스일수록 완성도가 높다. 그렇다면 같은 근세이면서 동양의 르네상스는 서아시아로 역류해 그 근세 문화를 한층 더 높일 것으로 예상되며 사실 또 그대로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동양의 근세는 서아시아를 사이에 두고 유럽과도 연관이 있다. 동양이 근세화한 초기에 유럽은 아직 중세였다. 그렇다면 동양의 근세 문화는 서아시아를 경유해 유럽 중세에 영향을 미치고 그 근세화를 보조했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내 생각으로는 사실 그대로 되었던 것이니, 바꿔 말하면 유럽의 르네상스에는 동양의 르네상스의 영향이 있었던 게 틀림없어 보인다. 그리고 최후에 나와서 가장 제대로 완성된 유럽의 르네상스는 다시 한번 역류해 서아시아와 동양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 도표에 보이듯이 유럽의 근세는 타지역에 비해 대단히 짧다. 완성도가 높았던 유럽의 르네상스는 그대로 진전을 계속해 한 단계 더 높은 산업혁명에 도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최근세
이 산업혁명으로 상징되는 최근세 문화는 당연히 다른 지역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게다가 굳이 따지자면 먼저 근접해 있는 서아시아를 최근세화하고 그런 다음 동양을 감화시켜야 했다. 그런데 서아시아에는 당시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있어서 유럽 문화의 수용을 거부했고, 그 결과 서아시아를 우회해 유럽 신문화가 동양에 수입되었다. 그 동양에서는 역사적 인연이 깊은 중국이 먼저 이와 접촉했지만 당시의 청조는 서아시아의 투르크 제국에 못지않게 강한 거부 반응을 보였으므로 뜻밖에도 후진적인 일본에서 먼저 최근세화가 성공을 보았다. 그리고 일본을 중개로 삼음으로써 중국의 유럽 문화 수입이 촉진되었고, 신해혁명에 의해 청조가 타도되어 중화민국의 성립을 보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것은 정치상의 현상에 그치고 그 경제, 사회 등의 일반 상태는 아직 완전히는 낡은 양식에서 벗어날 수 없었지만, 이로써 근대화로의 방향이 확립되었던 것이다. 이야기가 조금 지나치게 앞서 나갔지만 또 한 번 그 앞의 송조 이후의 근세로 돌아가려 한다.
이와 같이 우리는 세계사 간이 연표를 앞에 두고, 예컨대 송조 성립 이후 약 900년 동안 잇달아 일어난 역사 사실에 관해 생각하게 되면 우선 그 사실이 동양 근세사의 내부에서 어떠한 의의를 갖는가를 고려에 두면서, 다음에는 그것이 동양의 중세, 다른 지역의 근세 및 최근세에 대해 직접적 혹은 간접적으로 어떻게 서로 연관되는가를 끝없이 물으면서, 궁극적으로 그것이 세계사에서 어떠한 의미를 갖는지 평가해야만 하는 것이다.
종래에도 이와 유사한 방법이 사용된 적이 없지는 않다. 예컨대 청의 강희제를 문제로 삼을 때 유럽에서는 프랑스의 루이 14세,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가 나오고 일본에는 도쿠가와 막부의 5 대 쇼군 쓰나요시가 재임 중이었다는 것과 같은 비교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같은 연대에 유력한 전제 군주가 나란히 나타났다는 유사한 평행 현상을 거론하는 데 그치고 그 이상의 내면적 연관성은 추구되지 않는다. 또 그 관계를 더듬어보아도 구체적 실속이 있는 성과를 거둘 가능성이 적을 것이다. 역사학에서 같은 연대라는 것과 같은 단계라는 것은 전혀 의미가 다른 것이다.
현대사
다음에 네 번째로 주의를 환기시키고 싶은 것은 세계사 혹은 세계사의 부분적 연구와 현실에서 진행되어 가고 있는 세계정세와의 관련이라는 문제이다. 오늘날의 세계는 엄청난 속도로 움직여가고 있고 필연적으로 그 속에는 인류의 장래에 깊은 관련이 있을 수 있는 대사건도 포함되어 있음에 틀림없고, 더욱이 이에 관한 정보도 홍수와 같이 밀려들고 있다. 이에 비해 과거의 세계에 대한 연구는 지지부진한 것이 일상적이어서 모처럼 세계사의 체계를 구성해보아도 곧 그날부터 하루, 하루로부터 현재와의 사이에 거리가 생기는 것을 피할 수 없다. 도대체 학자는 과거의 연구를 한편으로 행하면서 다른 한편 현실의 세계사의 진행을 따라잡을 수 있을지 의문이 생긴다. 특히 이 의문은 이른바 현대사란 것을 연구 대상으로 하는 사람에게 심각한 번민의 불씨가 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인간의 실생활에는 끊임없이 장래를 예측해 장래에 대비하면서 현재의 순간을 살고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가는 일면과, 또 끊임없이 과거를 되돌아보아 과거를 정리하는 일면이 있다. 그리고 과거를 정리해두지 않으면 내일의 생활에 지장을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과거는 그대로 소멸해가는 것이 아니라 그 중 필요한 부분은 장래에 재생한다. 그러므로 과거를 정리한다는 일은 그 자체가 생활의 진행인 것이다. 왠지 반대 방향으로 향하고 있는 듯이 보여도 실제는 그 어느 것도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일어나는 생활의 영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나의 사분법
나의 방법은 총체적으로는 사분법을 채택한다. 그 내용은 고대는 태고로부터 한대까지, 중세는 삼국으로부터 당말기 · 오대까지, 근세는 송이후 청의 멸망까지, 최근세는 중화민국 이후가 된다. 이 가운데 고대에 진 · 한을 포함시킨 것도, 중세를 오대까지로 한 것도, 근세를 송 이후로 한 것도 전부 나이토의 학설 그대로이다. 다만 긴 근세 중에 뭐라 해도 서양 문화의 침입은 역사상의 대사건으로 중국의 전통을 타파한 것이니, 그 중대한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 그래서 그 결과가 명확하게 나타난 중화민국의 성립에 의해 시대를 구획하고 이후를 최근세(근대)로 하는 것이다. 혹은 서양의 영향이 나타나기 시작한 아편전쟁으로 경계선을 삼아도 좋으므로 때때로 나는 그러한 구분을 했을지도 모른다. 대략 70년 정도의 차가 나지만 원칙은 마찬가지이고 특별히 다를 것은 없다.
최근의 경향으로 눈에 띄는 것은 종래의 삼분법론자가 치츰 사분법으로 견해를 바꿔 가고 있는 사실이다. 앞서 서술한 대로 사분법은 결코 나의 창안은 아니지만, 어느 시기에는 나 혼자 사분법의 고립된 보루를 지켜 외압에 대항한 적이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렇다면 나는 시대 구분론에서 일종의 공적을 이미 이루었다고 해도 좋지 않은가 생각한다. 특기해야 할 것은 유물사관을 표방하는 역사학연구회가 삼분법으로부터 사분법으로 옮겨간 현실이며, 그것도 서양사부회가 먼저 사분법으로 고치고 최후에 동양사부회도 또한 사분법에 따르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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