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원의 책담화冊談話(https://booklistalk.podbean.com)에서 제공하는 「ε. Gilson, God & Philosophy」을 듣고 정리한다.
2024.03.17 ε. Gilson(2), God & Philosophy, foreword
에티엔 질송, ⟪철학자들의 신 - 역사적 개관⟫(God and Philosophy, 2002)
텍스트: https://buymeacoffee.com/booklistalk/god-philosophy-foreword
에티엔 질송의 《God and Philosophy》 Foreword를 야로슬라프 펠리칸Jaroslav Pelikan이 썼다. 야로슬라프 펠리칸의 서문은 김규영 선생님 번역본에는 없다. 김규영 선생님이 번역 대본으로 삼은 책 이후에 나온 책에 이게 들어가 있다. 이 책은 맬론 강의를 정리를 한 것이지만 그것 자체로, 펠리칸도 거의 1차 문헌에 가깝게 글을 쓰는 사람이고 에티엔 질송은 1884년에서 1978년, 생몰연대가 그렇게 되니까, 펠리칸의 지적처럼 "약간 구식으로 보일지는 몰라도 엄청난 권위를 지닌 학자이다." 펠리칸이 엄청난 권위를 지닌 학자인데 펠리칸이 그렇게 말을 한다고 하면 우리가 새삼스럽게 질송에 평가를 하는 것은 어이가 없는 것이다.
첫째 문장은 이렇다.
ÉTIENNE GILSON (1884-1978) was a magisterial scholar, perhaps a slightly old fashioned one, but in the grand manner; and, as the vernacular saying goes, "They don't make them like that any more."
magisterial scholar, scholar라는 말이 지금 학자라는 말로 쓰여 있다. 보통의 경우에는 저자writer이다. 그러니까 아무거나 쓰는 사람은 다 작가이다. 호칭에도 약간의 급수 개념이 들어가 있다. 거기서 조금 더 가면 author라고 하는 것이고 그다음에 lecturer, 그 다음에 scholar, scholar라고 하면 좁은 의미에서는 서양 중세, 5세기에서 15세기가 중세인데, 그 중에서도 여기 나오는 것처럼 13세기가 Golden Age이다. 중세 전성기, High Middle Age, 고중세高中世에 해당하는 시기에 등장했던 학문의 방법이 있다. 그게 바로 이제 스콜라 철학이라고 그러는데, 그런 방식으로 작업을 하는 사람들을 좁은 의미에서 scholar라고 한다.
예를 들어서 당송 팔대가唐宋八大家, 동아시아 세계에서는 글에 관한 가장 권위 있던 시대니까, 그중에서도 고르면 동파, 그 다음에 두보 그다음에 이백을 잡는다. 당나라가 한국에서는 굉장히 좋지 않은 그런 의미로 쓰이는데, 문학사의 시대 구분을 얘기할 때는 당나라 후기를 만당晩唐이라고 한다. 그때는 완전히 무르익은 때, 예를 들어서 우리가 아는 이태백 이런 사람들은 그 시대를 지나간 사람이다. 이백과 두보 시대의 사람들은 성당盛唐이라고 한다. 동아시아 세계에서 시대 구분이 그런 것처럼 중세도 마찬가지로에 High Middle Age 시대의 가장 탁월한 학자들로 토마스 아퀴나스를 좁은 의미의 scholar라고 본다. 적어도 그 정도의 급수가 되는 사람을 scholar라고 부른다. 아무나 scholar가 아니다. 그런데 그 앞에다가 magisterial scholar라고 했다. 김준혁 교수의 번역은 "엄청난 권위를 지닌 학자"라고 아주 잘 풀어서 번역을 했다. magisterial scholar라고 하면 학자로서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그것도 야로슬라프 펠리칸 정도에서는 되는 사람이 이렇게 부를 수 있다, 호칭 하나도 허투루 쓰지 않는 그런 사람인데, 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이 scholar라고 하는 호칭을 받으려면 적어도 두 가지 정도는 할 줄 알아야 scholar가 되는 건데 일단 아주 기본적으로 scholar의 자격을 갖출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그게 이제 바로 Close Reading과 philosophical explication de texte, 텍스트에 대한 철학적 해명, exēgēsis이다. 철학적인 해명을 할 줄 안다. Close Reading은 상세하게 읽기, 촘촘하게 읽기이다. 촘촘하게 읽기를 하고 나면 그다음에 이제 동시에 explication de texte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인데 주석을 단다라는 의미이다. 주석을 단다는데 이게 일단 scholar가 갖춰야 될 1차적인 능력이다.
He was capable of a kind of close reading and a philological explication de texte, especially of a Latin text, that could, for example, parse in various footnotes Augustine's use of such terms as reatus or memoria almost as though he were writing a lexicon entry rather than a philosophical mono graph.
이것이 지금 그것을 하는 능력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것을 어떻게 할 줄 아는가. 거기에 lexicon이라는 단어가 있다. dictionary와 lexicon가 비슷한 말인 것 같은데, lexicon도 사전이라고 번역은 하지만 lexicon보다는 dictionary가 훨씬 넓은 의미이다. 우리가 영한사전, 국어사전 이렇게 쓴다. 그런데 예를 들어서 정치학 용어사전 그럴 때는 lexicon이다. 특정한 분야에서 사용되는 또는 도치이 메쯜러(Metzler)에서 나온 『Philosophen-Lexikon』(철학자-사전)이 이런 것이 lexicon이다. He was capable of a kind of close reading, 일종의 정밀하게 읽기, 촘촘하게 읽기를 하면서 철학적인 explication de texte를 했는데, 특히 라티움어로 된 텍스트를 잘 할 줄 알았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서 various footnotes 속에서 parse를 할 줄 안다. 이게 포인트이다. 구문을 분석한다는 것이다.
일단 언어학에서는 parse라고 하면 문장을, 어떤 문장이 있으면 구성 성분으로 분해한 다음에 분석하는 것이다. 분해하고 분석은 다르다. 일단 element로 쪼갠다. 그것을 어떤 단어가 어떤 단어를 함축하고 있고 가장 가장 atomic한 용어가 무엇인가 이런 것들을 따져 묻고 하면 그런 것들이 분석이다. 분석은 틀을 가지고 있는 것이고, 물론 분해도 그렇지만, 그렇게 해서 문장 구조를 규정하는 것이 언어학에서는 parse이다, syntax analysis라고 하기도 하고, 그러니까 analyzing a string of symbols는 상징인데 언어이기도 하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모든 언어는 심볼이다. 그 심볼들을 분석을 한 다음에 형식적인 문법의 규칙들로 이렇게 짜맞춰보는 것을 parse한다고 말한다. 그러면 철학적인 텍스트 분석에서는 어떻게 하는가. 철학적인 텍스트 분석은 마치 사전의 항목을 쓰듯이 lexicon의 entry를 쓰듯이, "사전 항목을 집필한다고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로 번역이 되어있다, 사전의 항목을 쓰듯이, as though he were writing a lexicon entry, 이것은 "사전 항목을 쓰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라는 뜻이다. 아구스티누스는 우리가 반드시 Close Reading을 해야 되는 저자이다. Close Reading의 대상이 되는 텍스트가 사실은 클래식이다. 그러니까 아우구스티누스의 lexicon을 쓴다고 하면 아구스티누스가 사용하고 있는 술어들terms, "단어의 용례를 분석" 번역이 되어 있는데, 술어이다. 그리고 죄책reatus와 기억memoria등과 같은 주석을 달면서라고 얘기할 수 있다. 철학적 주석을 단다고 할 때는 parse를 "주석을 달면서"라고 번역을 한다. 주석을 단다는 것은 마치 lexicon의 항목을 쓰는 것과 같다. 이게 어떤 맥락에서는 어떤 용래로 쓰였고 하는 것이다.
제가 공부한 기억으로 그걸 했던 술어가 하나 떠오른다면 라티움어로 코나투스conatus라는 단어가 있다. conatus라는 단어가 16세기, 17세기, 특히 17세기에 서양 근대철학, 서양 근대 형이상학에서 저류底流를, 가장 밑에 흐르고 있는 흐름, 17세기 서양 근대 형이상학의 저류를 뚫고 있는, 꿰고 있는 그런 술어term이라고 할 수 있다. conatus라고 하는 단어를 처음 보게 된 건 토마스 홉스의 리바이어던Leviathan에 endavour라는 단어가 있다. 노력이라고 일반적으로 번역이 되는데 그것을 홉스는 conatus라고 하는 라티움어를 endavour라고 하는 영어로 번역을 했다. conatus라는 개념은 스피노자에서도 발견이 되고, 데카르트에서는 발견이 되지 않는다. 토마스 홉스의 형이상학과 스피노자의 형의 사학이 연결되는 지점이 있다. 홉스는 그냥 Leviathan만 생각하면 안 되고 홉스의 metaphysical foundations은 굉장히 저변이 넓고도 깊다. 그리고 그가 가지고 있는 그런 저변들이 또 수학적인 방식으로 또는 geometrical method로 연결되고 있는 지점들이 있기 때문에 기하학적 방법론과 그다음에 분석 종합적 방법 이런 것들, 거의 토마스 홉스의 방법론 전체가 17세기 형이상학의 방법론을 망라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홉스의 책들을 읽어보면 그 부분은 요즘 관심이 없다. 야마모토 요시타카의 《과학의 탄생》, 근대 과학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 책이 있다. 《16세기 문화혁명》, 《과학의 탄생 - 자력과 중력의 발견, 그 위대한 힘의 역사》, 《과학혁명과 세계관의 전환》 이런 책들이 있다. 《과학의 탄생》은 기본적인 책이다. conatus 얘기하다가 얘기가 옆으로 빠졌는데 제가 처음으로 이런 식의 lexicon에 등장하는 이런 작업을 해본 건 그것이다.
질송은 1884년에서 1978년까지 살았으니까 이런 분들은 이런 걸 머릿속에 기억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바로 그게 scholar가 하는 가장 기본적인 것이다. scholar의 일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일단 parsing이다. 이게 그냥 나온 게 아니라 서양 중세의 학문 방법을 이어받고 있는 것이다. 서양 중세의 항문 방법은 다음 시간에 얘기할 것인데, 마르틴 루터도 했던 것이고 lectio라고 하는 것을 하는 것이고, 그다음에 littera, 문자의 뜻을 알아내는 것이고, 그다음에 sensus 그다음에 exēgēsis를 그렇게 해서 완성을 시킨 다음에 이제 quaestio, disputatio 이런 것들을 벌이게 되는 거고 나중에 determinatio, 그다음에 quodlibeta 이런 것들을 하는, disputatio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이렇게 하는 것이다. disputatio라고 하는 건 무엇인가. 마르틴 루터가 1517년에 95개의 논제라고 하는 것을 발표했다. 그 논제라고 번역이 되는 게 바로 disputatio이다. disputatio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사전에 미리 하는 작업들 그런 것들이 바로 parse이다. 이것을 할 줄 알아야 scholar인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에티엔 질송에 대해서 펠리칸이 뭐라고 말을 했는데 magisterial scholar라고 말한 순간. 우리가 펠리칸에 대한 신뢰를 전제한다면, 이 용어는 분명히 에티엔 질송의 중세적 전통과 질송이 가지고 있는 학문적인 능력을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magister는 중세에서도 석사라고 번역을 하는데 중세에서는 magister 그다음에 doctor는 박사라고 그런다. magister는 한 영역을 들이파서 범접할 수 없는 어떤 쪽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특정 영역의 대가다 라는 의미가 있고 그다음에 doctor는 이것 저것 뭐 아는 게 많은, 잡지식도 많은 사람을 doctor라고 할 수도 있겠다. 일단 1번 scholar는 그런 일을 할 줄 안다는 것이다.
Foreword의 8페이지를 보면
But in addition to all these scholarly genres
번역본은 "이와 같이 진중한 학문적 장르 글만 쓴 것은 아닙니다"라고 되어있는 부분이다. 그러니까 사상사적 서사를 만든 것과 그다음에 앞서 방금 전에 말한 parsing을 한 것은 scholarly genres이다. scholar라고 하는 건 그 두 가지를 할 줄 알고 거기에 더해서 lecture를 하는 것, 그러면 lectio까지 갔다는 것이다. 학자는 두 가지만 할 수 있으면 일단 scholar가 되는 것이다. parsing을 하고 그다음에 그 parsing에 더해서 사상사 서사 규정을 하는 것이다. 일단 parsing에 대해서는 설명을 했다.
Alternately, he could, and did several times, notably in his History of Christian Philosophy in the Middle Ages (1955), present a full length connected narrative of the history of medieval thought
1955년에 출간된 《중세 철학사》, 있는 그대로 보면 중세에 있어서 기독교적 철학의 역사라고 번역을 하는 게 맞겠다. 중세 철학이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기독교 철학만 있던 게 아니다. 중세 철학사 그러면 기독교적 철학만을 얘기하는 게 아니다. 서양 중세에는 온갖 철학이 다 있었겠다. 그것만 얘기하는 게 아니라 중세에는 다른 것도 있었는데 이제 질수송이 작업을 한 것은 History of Christian Philosophy이다. 《중세 철학사》라고 예전에 번역되어 나왔다. 엄청 좋은 책이다. 이런 책들은 가지고 있는 게 재산이다. 그리고 정의채 선부님과 김기영 선생님이 번역한 《중세철학입문》도 있다.
질송이 쓴 책으로 1924년에 성보나벤투라의 철학La philosophie de Saint Bonaventure이라는 책이 있다. 사상사 작업인데, 거기에 더해서 Jean Duns Scot: Introduction a Ses Positions Fondamentals, 우리 말로 이 책 제목을 번역하면 둔스 스코투스, 그의 근본적 입장, 입장이라고 번역을 해도 되지만 명제라고 이해를 할 수도 있다. 그러니까 스코투스가 내놓은 근본 명제들에 대한 입문. 하나는 1924년에 작업이 되었고, 스코투스에 관한 것은 1952년에 작업이 되었다. 이 두 개가 선행 작업이 있었고, 이 선행 작업이 있던 위에 1955년에 기독교 철학의 역사가 출간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면 이 세 개를 크게 묶어서 이른바 '중세 철학 시리즈'라고 할 수 있겠는데, 바로 그것에서 full-length connected narrative를 구축했다 그렇게 얘기를 했다. 꽉 짜인 또는 full-length라는 게 길이가 가득 찼다는 것이 아니다, 그 체계가 굉장히 잘 짜여진, 연관된 connected narrative를 구축했다, 사상사의 서사를 구축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질송이 중세 철학사를 썼구나 그렇게 우리가 알면 되었다. 그런데 중세 철학사를 쓴다, 중세 기독교 철학사를 쓴다 또는 사상사를 쓴다 할 때 반드시 갖추어야 할 그런 것이 뭐냐 하면 해석interpretation이다. 어떤 관점에서 내 눈앞에 놓여 있는 것들을, 이 사상사의 사상 자원들을 어떤 관점에서 해석할 것인가를 정립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펠리칸은 질송이 이 작품들을 쓸 때 어떤 관점에서 썼는가를 짚어서 말한다.
avoiding a triumphalist or Whig interpretation and supplying a surprisingly small number of hints about his own identification with the thirteenth century of Thomas Aquinas as the golden age of that millennium.
avoiding a triumphalist or Whig interpretation, "승리주의적 또는 휘그식 해석을 피하면서"가 일단 있고, 그다음에 보면 surprisingly small number of hints about his own identification with the thirteenth century of Thomas Aquinas as the golden age of that millennium. 번역본은 "자기가 중세 천년의 황금기였던 토마스 아퀴나스의 13세기를 좋아한다는 암시는 놀랄 만큼 적게 남겼다." identification 은 우선 일치이다. 펠리칸이 이 단어를 왜 썼을까를 곰곰이 한번 생각을 해보니까 질송은 스스로를 토마스주의 그러니까 토마스 아퀴나스의 어떤 스콜라적 학을 가장 중세의 탁월한 업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본인도 자기 자신도 그 안으로 그 계보 속으로 스스로를 집어넣으려고 했다. 그러다 보니까 그게 하나가 된다, 13세기와 한몸이 된다고 생각을 할 수 있겠다. 그것을 identification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identification이라는 게 식별하다라는 뜻도 있다. 그러면 정체성인데, 다른 이들과 자기 자신이 구별되는 지점을 가지고 정체성이 구축된다. 다시 말해서 identification이라고 하는 것을 동일성이라고 우리가 이해한다면 동일성은 사실상 차이difference를 함축하고 있다. 동일성은 차이difference이다. 동일성과 차이는 같이 움직여 가는 것이다. 차이를 분명하게 드러냄으로써 동일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그래서 동일률과 모순율이라고 하는 것은 같은 것일 수밖에 없다.
his own identification with the thirteenth century of Thomas Aquinas, 토마스 아퀴나스의 13세기와 질송 자신을 동일identification 시하려고 하는 그런 말이다. 동일시하려고 하는 힌트는 조금도 남기지 않았다. 그런데 여기서 생겨나는 문제는 질송이 13세기 토마스 아퀴나스를 golden age로 본다면 scholar답지 못한 사람들은 13세기 이전에 등장했던 또는 동시대에 등장했던 토마스 아퀴나스 이외의 철학들 또는 선행하는 철학들은 모두 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이 성립하는데 밑거름이 되었다 또는 결국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이 13세기의 golden age를 장식하면서 이겼다 라는 관점에 쓰게 되면 토마스 아퀴나스의 기독교 철학을 위해서 그것을 목적으로 해서 선행하는 것들이 움직여 간 것처럼 해석을 할 위험성이 있다. 예를 들어서 에티엔 질송이 1924년에 보나벤투라의 철학에 대해서 썼다. 그리고 1952년에 스코투스 철학의 근본 입장에 대해서도 썼다. 그런 것들을 쓴 것이 결국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을 미화하고 찬양하기 위해서 썼다고하게 되면 토마스 아퀴나스가 승리했다 라고 하는 즉 토마스 아퀴나스에 대한 적극적인 옹호라는 그런 목적을 위해서 이것을 성취하게 작업을 하게 되어버린다. 그런 것들을 넓게 봐서 휘그적 해석이다 라고 얘기한다. 휘그적 해석이다는 것은 역사론의 측면에서 보면 근대사가 진보의 성취 과정으로 보는 그런 것들을 말한다. 넓게는 어떤 특정한 후대의 성취를 목적으로 해서 선행하는 모든 역사적 사태가 그것을 향하고 있다 라고 하는 목적론적, 조금 치졸하다, 목적론적 역사관을 휘그사관Whig historiography라고 부른다. 그런데 질송은 토마스 아퀴나스에 대한 적극적 옹호라고 하는 그 목적을 피해가면서 또는 13세기를 golden age로 보려는 태도를 피해가면서 그런 선행 작업도 하고 중세 기독교 철학의 역사를 썼다는 말이다. 그게바로 질송은 엄청난 학자인 것이다. 목적론적 역사를 쓰기는 쉽다. 목적론적 역사를 쓰게 되면 결국 종말론으로 빠져들어가게 될 텐데 그것은 지금 여기서 논할 게 아니다. 사상사 서사를 구성하는 데 있어서 그것이 굉장히 중요한 작업이었다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한 가지 더 생각을 해볼 수 있는 건 보나벤투라 같은 경우에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우호적인 반대자이자 그와 같은 해 세상을 떠났던 프란치스코 신학자이다. 어쩌면 보나벤투라나 둔스 스코투스나 이런 사람들을 연구한 것은, 마땅히 해야 되겠지만, 토마스 아퀴나스에 대한 identification, 토마스 아퀴나스에 대한 자기 동일시 또는 토마스 아퀴나스를 식별해내는 또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상이 가지고 있는 탁월함 이런 것들을 식별해내기 위해서 그의 반대 정립에 해당하는 보나벤투라라든가 또는 둔스 스코투스를 연구했다고 할 수도 있다. 다시 말해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동일성identification, 그의 정체성을 뚜렷하게 하기 위해서 그와 차이가 나는 것들, 그와 구별되는 것들, 신에 대한 접근이니까 여기선 구분이 아닌 구별이라고 해야 되는데, 하나의 신을 향한 접근에 있어서 구별되는 방법론들 또는 교설들 이런 것들을 연구했다고 할 수 있다. 내가 뭔가를 좋아한다고 하면 그것을 뚜렷하게 드러내 보이기 위해서 그것 아닌 것들에 대한 연구와 탐구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는 것, 그게 말하자면 사상사 서사를 구성하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요건이다. interpretation이 있는데 이제 triumphalist or Whig interpretation을 피하는 정도만이 아니라 반대 정립, 즉 안티테제들에 대한 탐구도 엄청나게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상사의 서사를 구성하려면 첫째로는 해석interpretation이 있어야 되고 그러한 해석과 함께 다양한 테제, 안티테제들을 모두 다 망라하는 탐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를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에 대해서 펠리칸은 아래와 같이 말한다.
But in addition to all these scholarly genres, he also paused several times in his literary career,
여기서 all these scholarly genres는 바로 지금 얘기한 두 가지이다. 하나는 lexicon의 항목을 쓴 것과 같은 작업, 또 하나는 사상사를 서사를 구축해내는 작업, 이 두 가지를 scholarly genres라고 얘기를 한다. 학자는 무엇을 하는가. 하나는 lexicon을 쓰는 것처럼 정교한 parsing작업을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상사를 쓰는 것이다. 그것은 테제와 안티테제를 서로 고려해 가면서 목적론적 역사관에 매몰되지 않고 그런 것들을 써나가는 것, 이게 바로 기본적으로 에티엔 질송이라고 하는 이 사람이 scholar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scholar라고 하는 말이 중세의 철학자들의 전통에도 손을 대고 있다 하는 것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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