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담화冊談話 | 수사학(1) / 특강 철학·인문학

 

2024.03.20 🎤 수사학(1) / 특강 철학·인문학

[3강: 3.20(수) 수사학(rhetoric)이란 무엇인가?]

일시: 2024. 3. 20. 19시 30분-21시 30분
장소: 수원시글로벌평생학습관

강의 안내: https://learning.suwon.go.kr/lmth/01_lecture01_view.asp?idx=3641
강의 자료: https://buymeacoffee.com/booklistalk/suwon-rhetoric


일반적으로 수사학이라고 하면 대체로 문장을 아름답게 꾸미고 말을 멋들어지게 하고 것들을 수사학이라고 하는 말 안에서 포괄한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수사학이 그런 의미로만 사용되지는 않는다. 공공영역에서 통용되고 있는, 하나의 상식보다도 좀 더 상위에 있는 인문적 교양 또는 사회적·정치적인 또는 역사적인 교양의 수준 이런 것들까지도 포괄하고 있는 게 수사학이다. 예전에 아리스토텔레스가 정리한 수사학이 있지만 아리스토텔레스 시대의 수사학이라고 하는 건 그냥 연설이다. 사람들에게 널리 사용되는 이런 인쇄물이라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수사학의 영역 안에 매스 커뮤니케이션 매체를 어떻게 비판적으로 읽을 것인가 하는 그런 것까지도 다 포함이 된다. 그러니까 수사학이라고 하는 게 굉장히 폭넓은 의미를 가지게 된다. 더군다나 하반기 3/4분기와 4/4분기에 하려고 생각하고 있는 사회지리학이나 공공역사 이런 것들은, 특히 사회지리학 같은 경우도 단순히 지리적인 것 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 앞에 붙어 있는 society에 관련된 것들이 연결되어 있다. 지리라고 하는 것이 예전에는 백두대간, 태백산맥 그런 것만 생각했는데 요즘에 지리학이라고 하는 과목에서 지리 그 자체를 공부하는 경우라는 건 굉장히 드물다. 이주 결혼 여성들 문제도 사실은 사회지리학적인 문제이다. 이런 것들은 인구학적인 문제가 아니라 사회지리학적인 문제이다. 여러분들 내가 안 당하면 다 없는 일 같지만 내가 안 당하고 있는 사이에 세상에 그런 일이 많이 벌어진다. 그런 것처럼 오늘 「수사학이란 무엇인가」 강의 자료를 여러분들과 얘기하는 건 아리스토텔레스부터 시작을 해서 오늘날의 매스미디어 그다음에 미디어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비판적인 안목까지 하면 좋겠는데 일단 아리스토텔레스부터 시작을 해서 가장 기본적인 것들만 수사학에서 논의를 하겠다.  

 

전고典故 
전고典故 부분부터 보자. 중국의 당나라는 당나라 초반기 말고 당나라 전성기를 성당盛唐이라고 하과 당나라 말년 그러니까 황소의 난이 벌어지고 그럴 때를 만당晩唐이라고 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당나라에 대한 이미지는 그렇게 몇 가지 없는데 중국 사람들은 자기네를 당인唐人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차이나타운이라고 그러는 것을 중국사람들은 당인가唐人街라고 한다. 성당盛唐 시기에 가장 유명한 시인이 이백과 두보이다. 이백과 두보의 시는 좋기는 한데 너무 멋있다. 너무 멋있다는 것은 재미가 없다는 것이다. 진짜로 잘 된 시다. 이백의 시는 연애 편지에 적당하지 않다. 너무 멋있다. 연애 편지는 약간 퇴폐적이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만당晩唐 기에 쓰여진 시들이 더 좋다는 말이다. 만晩이라는 게 늦을 만인데 晩이라고 하는 글자가 앞에 수식어로 붙으면 약간 데카당스décadence한 것이다. 늦을 만晩자를 앞에다 놓고 이렇게 뭘 쓰면 여기에 약간의 데카당스과 멜랑콜리와 약간의 로맨틱이 겹쳐진다는 것이 동의가 되는 건 그 컨텍스트를 공유하는 커뮤니케이션 집단 속에 들어가 있다는 것이다. 이게 정서의 공동체 안에 들어간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당나라 성당盛唐을 영어로 말하면 High Tang Age이다.  영어 표현에서는 High Middle Ages라고 하면 고중세高中世, 중세 전성기 즉 13세기를 말한다. 이백을 시선詩仙이라고 부르는데, 시를 쓰는 신선이란 말이다. 성당 시대에는 철학이 없다. 세상은 아름다운데 시선이 등장하는 시기에 철학이 있을 수가 없다. 어쨌든 이 성당기를 지나서 즉 이백과 두보의 시기를 지나서 만당기에 들어서게 되면 시는 데카당스로 흘러간다.  

이상은李商隱이라고 하는 야우기북夜雨寄北이라는 시가 있다. 이상은은 813년에서 858년 만당 시기에 두목, 온정균 등과 함께 유명하다 라고 되어 있다. 두목은 두보의 동생이다. 당시 이상은이 만당시기의 시인이구나 라고 하는 순간 여러분들은 방금 설명한 High Tang Age, Late Tang Age를 떠올려야 한다. 만晩이라는 글자가 들어가면 이상은이나 두목이나 원종균이나 이 사람들의 시는 일단 기본적으로 멜랑콜리를 깔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단어를 이해하기 위해서 그 단어가 만들어진 시대적인 사태적인 맥락까지 알아야 된다고 하면 문맹을 양산하기에 딱 좋은 언어가 된다.  읽고 쓸 줄 안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다. 이해는 안 되는 것이다. 즉 translation을 했는데 영원히 interpretation은 안 되는 채로 남아 있게 되는 언어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쉽지 않다. 거기에 전고典故 또는 고사故事. 전고典故는 옛 전적에 근거한다는 말이고, 고사성어 故事成語는 사태에 의거(故事)하여 말을 만들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말을 만들었다고 하면 우리에게 주어진 거는 成語, 주어진 어語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사事에 해당하는 것을 알아야 된다는 말이다. 사事라고 하는 건 단순히 일이 아니라 어떤 맥락에서 어떻게 사용될 것인가 이런 것들이 다 사事에 해당한다. 오늘날의 수사학이라고 하는 건 이 영역까지도 건드리는 것이다. 단순하게 수학적으로 뭔가를 하고 일 처리가 끝나는 게 아니라 이런 것들까지 파악을 해야 되면 적어도 사회심리학적인 맥락이라든가 또는 특정한 역사적 맥락이라든가 이런 것들까지도 포함하고 있는 게 수사학이다.  

"Crossing the Rubicon"을 보자.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가 실제로 한 말은 "alea iacta est"이다. the die is cast, 주사위는 던져졌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냥 앞뒤를 잘라서 Crossing the Rubicon이라고 말하면 passing a point of no return,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건넜다 라는 의미로 쓰인다. 우리나라에서는 다리를 불태웠다는 말이다. 갈리아 원정이 끝난 후에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너면서, 루비콘 강을 건널 때는 장군은 물론이고 모든 병사들도 무장을 해제하고 들어가야 된다. 로마에 들어갈 때는 무장을 해제하고 들어가는데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자기를 제거하려는 음모가 로마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자기 휘하 군단인 갈리아 군단에게 연설을 한다. 이 강을 건너지 않으면 내가 불행해질 것이고 이 강을 건너면 로마가 불행해질 것이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어떻게 할래 라고 하니까 내전이 시작되었다. 그렇게 해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독재관에 취임하게 된 계기가 된 게 바로 서기전 49년에 루비콘 강을 건넌 사건이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굉장히 조심스럽게 인용을 해야 하는데, '루비콘 강을 건너던 카이사르의 심정으로'라고 말할 때는 나의 행동을 지지하는 사람 앞에서 얘기를 해야 된다. 나의 행동을 지지하지 않는 사람들 앞에서 루비콘 강을 건너던 카이사르의 심정으로 물에 빠져 죽으세요 라고 하는 수가 있다. 그러니까 고사를 인용할 때는 고사가 원래 생겨난 맥락에서 그 사태에 대한 가치평가까지도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 앞에서 이것을 인용하지 않으면 아주 무의미한 것이 된다. 그런데 이것까지 생각해서 연설을 하는 경우란 잘 없다. Crossing the Rubicon이라고 하는 것은 분명히 정치적인 연설이기 때문에 굉장히 조심스럽게 사용해야 되는 그런 것들이다. 

이상은의 시를 한번 보겠다. 이상은 그러면 만당 시기의 시인이라는 것을 일단 알아놓아야 된다. 만晩자가 들어가면 최소한 최소한 멜랑콜리melancolie하다, 퇴폐적으로까지는 안 가는데 약간의 멜랑콜리가 있다. 이때는 Late Tang Age이다. 강의자료를 보면 유미주의적唯美主義 만당사晩唐詞라고 했는데 유미주의적이라고 하는 건 오로지 아름다움만을 추구한다는 말이다. 오로지 아름다움만을 추구한다는 것은 바로 멜랑콜리, 나는 그냥 아름다움이 전부야 라고 말하는 것이다. 

君問歸期未有期(군문귀기미유기) 그대는 묻는다, 돌아올 날을, 기일은 없다
巴山夜雨漲秋池(파산야우창추지) 파산의 밤비가 가을 연못에 넘쳐 흐른다
何當共剪西窗燭(하당공전서창촉) 언제쯤에나 함께 서창의 촛심을 자를 것인가
卻話巴山夜雨時(각화파산야우시) 돌이켜보며 파산에 밤 비 내리던 때를 말할 수 있겠는가

여기서 그대는 여성일 것이고, 이 글을 쓰는 사람은 남성이다.  그대가 나에게 언제 돌아오시느냐고 물었다. 그러니까 벌써 여기서 먼 곳에 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언제 그대에게 돌아갈 것인가를 날짜를 못 박아서 말을 못하니 참 마음이 안 좋다는 것이다. 언제 갈지 모르겠네 라고 말한 순간 쓸쓸함이 이제 밀려오는 것이다. 파산야우창추지라고 하는 것이 그렇게 대답을 하고 나니 내 마음이 이러하다가 두 번째인 것이다. 그러고 나서 자신의 내면 세계를 직설적으로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건 추잡스러운 것이다. 바깥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객관적으로 서술하는 것을 빗대어서 내면을 표현하는 것이 고급진 것이다. 지금 여기에 나와 있는 건 굉장히 상징적인 표현인데 외부에서 벌어진 사건이다. 파산巴山에 대해 강의자료를 보면 "파촉巴蜀 지역, 섬서陝西 남부와 사천四川 동북의 경계에 있는 대표적 산"이다. 파산이라고 하는 곳은 실제로 있는 지명인데 동시에 머나 먼 산골짜기라는 것이다. 쉽게 갈 수 없는 것을 상징한다. 그 지역에서는 비가 가을에만 강수량이 70%가 내린다. 그러니까 파산야우라고 하면 쉽게 갈 수 없는 머나먼 곳에 가서 가을밤을 보내고 있는 것을 이 네 글자가 표현하는 것이다. 파산 지역에서는 가을에만 비가 내린다고 하는 것을 모르면 파산야우라는 표현이 어필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다음에 하당공전서창촉은 "언제쯤에나 함께", 그다음에 西窓剪燭는 사자성어로 있는데, "서쪽에 난창에서 촛심지를 자른다"라고 하는 것은 귀족을 말한다. 중국에서는 침실은 서쪽이다. 즉 침실에서 촛심지를 자른다 라는 말은 밤늦도록 뭔가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호메로스에 서사시 《오뒷세이아》에서는 마지막에 페넬로페와 오뒷세우스가 만나서 얘기를 계속한다. 이야기를 계속한다는 것은, 서로 즉물적으로 사랑을 주고받았다 라고 표현하는 것보다 이야기를 계속한다 라고 하는 것이 훨씬 더 고급진 표현이다. 서쪽으로 난창 아래에서 밤새 이야기를 했다 라는 것이 고급스러운 표현이다. 그러니까 언제쯤에나 함께 서창의 촛심을 자를 것인가 라는 것은 만나서 함께 이야기를 할 것인가에 대한 간절한 표현이다. 이건 남자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고 이 상황을 개탄스러워하고 있는 여성이 얘기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아니면 여성의 마음을 미루어 짐작해서 써놓은 것일 수도 있다. 그다음에 각화파산야우시, 파산야우라는 말이 한 번 더 들어갔다. 사실은 이것은 시의 작법에서는 굉장히 금기시되는 작법이다. 시인들은 앞에 한 문장을 또 쓰면 안되는데 또 썼다. 그것을 쓰기 위해 앞에다가 각卻자를 집어넣었다. 파산야우는 간곡하게 그립다 라는 뜻이다. 옛날에 파산에 가 있을 때 그때 가을 무지하게 서로 그리워 했었는데 지금 우리가 서로 그리워하던 때를 지금 이렇게 만나서 이야기를 하니 몹시 좋네 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니까 앞으로 언젠가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인가, 일어나지 않았는데 일어날 것인가 하고 얘기하니까 정말 이건 애틋함이 곱절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상은의 야우기북夜雨寄北은 일단 그것 자체로 애절한 그리움을 표현하고 있는 것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어떤 시 하나를 읽는 데 있어서도 굉장히 많은 컨텍스트들에 대한 앎이 전제된다고 하는 것이다. 이 한자를 다 몰라도 이 정도의 고사故事, 옛날에 일어난 일에 근거해서 말을 만드는 것들이 있다는 것을, 그런 방식으로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것이 세상에는 분명하게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 그리고 그것이 가지고 있는 함축과 커뮤니케이션의 능력 그리고 그러한 여지를 남겨두는 커뮤니케이션 있다는 것, 그런 것들이 가지고 있는 위력에 대해서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이 필요하다. 


문장 꾸미기로서의 수사학. 

수사학이라고 하는 것은 원래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설득하는 것이 수사학의 목표이다. 그런데 그것이 어느 정도 세월이 지나면서 단순한 데코레이션의 역할로 전락한 경우가 있다. 이 문장 꾸미기로서의 수사학이라고 하는 것도 무시할 수 없는 영역을 차지한다. 셰익스피어라든가 그다음에 성서라든가 이런 고전 텍스트들은 적어도 이 맥락 속에 들어있다. 우리가 문장 꾸미기로서의 수사학을 공부를 하다 보면 이 텍스트는 어떤 수사학 기술을 사용했는가를 알고 있으면 일단 언어 능력에 대한 현저한 향상을 기대할 수 있다. 그래서 문장 꾸미기로서의 수사학을 먼저 얘기를 하겠다. antithesis라는 것은 반정립反定立이다. 대조되는 단어와 관념을 병치하는 것이다. "It has been my experience that folks who have no vices have very few virtues." 번역을 하면 악함을 갖지 않은 사람들은 미덕도 거의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 내 경험입니다 라는 말이다. 아브라함 링컨의 격언으로 단점이 없는 사람들은 장점도 거의 없다 라는 뜻으로 사용된다. 거기서 조금 더 나아가면 특성이 없는 인간은, 즉 장점이든 단점이든 뭐 하나 이렇게 튀어나오는 게 없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다 라는 말이다. 아브라함 링컨의 이 말은 vices라고 하는 단어와 virtues라는 단어가 서로 대립된 뜻이다. 문장을 꾸민다고 할 때 가장 많이 사용하는 방법이 서로 반대되는 대조되는 단어와 관념을 나란히 쓰는 것이다. 그러면 이것을 하려면 반대말을 풍부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 결국 수사학이라고 하는 것은 단어에 대한 굉장히 민감한 센스를 요구하는 것이다. 

그다음에 paronomasia. 이름을 살짝 바꾸기, 발음이 같은 단어를 사용하되 뜻이 다르지 않은 것. 이것은 우리나라에서는 하기가 어렵다. 영어는 알파벳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철자를 바꿔서 할 수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하기가 어렵다. 우리나라 말은 영어와는 다르게 글자를 모아서 하나의 뜻을 만들기 때문에 스팰링 위주로 가는 것과 다르기 때문에 이는 조금 어렵다. 그 다음에 Gorgianic Figures 중 첫 번째 것인 대조되는 단어와 관념을 병치하는 것이 중요하는 것이다. 그다음에 세 번째 보면 이중 반복. 앞의 구절, 행, 문장의 마지막 단어나 구절을 다음 문장의 처음에서 되풀이하는 것, 절정에 이를 때 사용하면 효과가 좋다. 셰익스피어의 《리차드 2세》 5막 1장에 나온다. "The love of wicked friends converts to fear; / That fear to hate, and hate turns one or both / To worthy danger and deserved death." "사악한 친구 사이의 사랑은 두려움으로, / 두려움미움으로, 그리고 미움은 한쪽 혹은 양쪽 다 / 심각한 위험과 마땅한 죽음으로 몰아가는 법", 이렇게 움자 돌림으로 한번 번역을 해보았다. 셰익스피어의 드라마를 보면 이런 것이 굉장히 많다. 이것은 연습을 많이 해서 사용을 해야 한다. 이것을 굉장히 잘한 현대 문학 작가가 카프카이다. 카프카는 체코의 유대인으로 네이티브 언어가 이디시어이다.  아슈케나지 유대인, 그러니까 동유럽 유대인으로 그 사람은 기본적으로 체코어도 쓰지만 체코에 살고 있는 고급 지식인들은 도이치어를 쓴다. 그러니까 굉장히 연구하고 고민하고 쓰는, 말하자면 문어로서 도이치어를 쓴다. 그것을 가지고 소설을 쓴 것이다. Fremde라고 하는 것이 낯선 것이라는 뜻인데 이 단어를 미친 듯이 반복해서 쓰는 문장들이 있다. 그런 것들을 반복 효과로 이렇게 한다.  

그다음에 성서에 많이 나온다.  특히 성서 같은 경우에는 반복도 많이 있지만 문장의 끝을 맞추는 경우가 있다. While he was still speaking to the crowds, his mother and his brothers were those who standing outside, wanting to speak to him. Someone told him, “Look, your mother and your brothers are standing outside, wanting to speak to you.”(마태오 12.46-47) ”(마태오 12.46-47) [예수께서 아직 군중에게 말씀하고 계실 때에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밖에 와 서서 예수와 말씀을 나눌 기회를 찾고 있었다] 마태복음은 코이네 그리스어koine greek로 쓰여져 있다. 그래서 기본적으로는 키케로가 이야기하는 그리고 호메로스라든가 이런 것까지는 너무 먼 옛날인데, 적어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에 등장하는 기술들은 적어도 성서에 나온다. 바울 서신에도 그런 게 나온다. 바울은 모르긴 해도 성서를 쓴 사람들 중에 가장 유식한 사람이 바울일 것이다. 마르코나 마테오나 이런 사람들보다 바울이 훨씬 더 유식한 사람이었을 거라고 본다. 성서를 읽을 때도 이런 것이 쓰였다고 하는 건 이건 분명히 아주 많은 사람들에게 어필하기 위해서 썼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서는 양피지를 가져다 이렇게 묶었는데 그것을 코덱스codex라고 한다. 성서라고 하는 커뮤니케이션 매체가 가지고 있는 이런 수사학적 장치들, 코덱스라고 하는 제본 형식이 기원 전후 예수 탄생 전후로 해서 널리 퍼지기 시작했는데 지금 우리가 오늘날 사용하고 있는 기본적인 방식이 코덱스이다. 우리 시대가 이 코덱스적으로 뭔가를 텍스트를 읽는 마지막 시대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본다. 

그다음에 평행구조가 유사한 구, 절, 문장을 사용하는 것. 수사학의 기술들은 기본적으로 대조되는 단어와 관념을 병치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다 반복이라는 특징들을 갖고 있다. 반복을 어떤 방식으로 하는가. 반복을 계속하면 지겨운 것이고 잘하면 멋있는 것이다. 마지막로 3개를 사용하면 trikōlon, 4개를 사용하면 tetrakōlon. veni, vidi, vici,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했다는 말인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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