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담화冊談話 | ε. Gilson(9), God & Philosophy, Ch. 1

 

2024.05.06 ε. Gilson(9), God & Philosophy, Ch. 1


제가 쓴 《철학 고전 강의》에서 파트1이 희랍 철학의 시작: 세계에 전체에 대한 통찰인데, 희랍 우주론의 원형으로 헤시오도스의 《신들의 계보》를 검토하고 두 개의 챕터로 나누었다. 그다음에 세계의 원리에 관한 자연학적 파악 | 《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단편 선집》에 있는 파르메니데스를 읽었다.  파르메니데스를 읽고 헤라클레이토스를 읽고 그리고 플라톤으로 넘어갔다. 이 목차를 보면 지금 에티엔 질송은 아낙시만드로스라든가 아낙시메네스, 탈레스 이런 사람들을 얘기하는데 대개 희랍 철학을 이야기할 때는 탈레스부터 시작을 한다. 그런데 《철학 고전 강의》는 형이상학을 의도했기 때문에 그 책의 첫 문장[제1강]이 "이제 우리는 철학의 근본 영역인 형이상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할 것입니다."이다. 다시 말해서 탈레스라든가 아낙시메네스라든가 아낙시만드로스를 거론하지 않은 것은 그들은 형이상학의 영역에서는 다룰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오니아의 자연 철학은 형이상학을 향하는 어떤 그런 것은 보여줄지언정 형이상학의 영역에서는 다루지 않는다. 파르메니데스부터 검토를 하려고 하니 헤시오도스가 조금 마음에 걸리고, 그래서 《신들의 계보》를 두 개의 챕터로 집어넣어 두었다. 에티엔 질송이 지금 지적하고 있듯이 세계질서world order에 관한 설명으로서는 이오니아의 자연철학은 적당하지 않다. 아직 형이상학 이전 단계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니까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시대적으로 소크라테스 이전 사람들이다 라는 것을 가리키는 말일 수도 있지만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에 의해서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형이상학 이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질송의 책에서 용어에 있어서 이오니아의 자연 철학을 철학적 설명이라고 말하는데 철학적 설명이라고 하는 것에는 자연철학적 설명도 포함이 되고 형이상학적인 설명도 포함이 된다. 그러니까 의식적으로 세계에 대한 자연철학적 설명 모형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겠나 생각을 한다. 그래서 노트에는 "자연철학적 설명 모형"이라고 썼다. 자연철학적 설명 모형은 자연과학으로 전개되는 모형이다. 그러니까 그것을 자연학적이라고 말하는 것이 사실은 적절할 것 같다. 파르메데스를 제가 얘기하면서 "세계의 원리에 관한 자연학적 파악"이라고 얘기했는데, 자연학적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자연철학적 또는 자연과학적 이것 모두를, 자연철학적인 설명으로 전개될 수도 있고 자연과학적 설명으로 전개될 수 있는 원형이 되는 사유가 바로 자연학적인 것이겠다. 그러니까 파르메니데스의 일자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그것에 대한 해석들을 《철학 고전 강의》에서 내놓았는데, 그 해석들은 자연과학적인 해석도 가능하고 자연철학적인 해석도 가능하고 그다음에 형이상학적 해석도 가능하기 때문에 그 셋을 포괄하는 것으로서 자연학이라는 말을 쓸 수 있겠다. 이오니의 자연철학자들에게 있어서는 아직 그들이 파악하고 있는 물이라든가 또는 무한정자라든가 또는 지수화풍 이런 것들, 잠깐 다른 얘기인데, 질송이 왜 헤라클레이토스를 얘기하지 않았는가는 의문스러운 점이 있다. 물론 이제 lecture니까 자기가 필요한 것만 골라서 하면 되었을 것인데, 그걸 왜 거론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이 책이 어쨌든 형이상학에 대한 책이 아니라 신에 대한 논의이기 때문에 헤라클레이토스는 조금 신에 관한 얘기로는 모자라지 않나 라고 생각을 했을 수가 있고, 파르메니데스가 말하는 일자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신론으로서는 조금 부족한 점이 있다고 여겼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런 얘기는 일단 접어두고 《God & Philosophy》의 논의를 충실히 한번 따라가보기로 하겠다. 

자연철학자들에게는 일관성 있는 또는 일의적인, 전체론적인 설명이 결여되어 있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어쨌든 화해시켜야 될 것이 두 개가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 확실한 것은 바로 대상으로서의 세계, 즉 자연이 내 눈앞에 놓여 있다 라는 사태이다. nature is there, hence it has always been there, and ever shall be. 즉 자연은 저기에 있다. 그리고 언제나 있었고 그리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은 예상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일단 그들은 그것이 예상이라 할지라도 자연이 있다는 것에 주목한다. 그러니 그것은 이제 ad infinitum, 즉 무한히 있는 것이고 시작과 끝이 없이 반드시 그러하게 있는 것, 그것으로부터 필연성과 무한성이라고 하는 것을 도출한다. 그러면 이 무한성이라고 하는 것을 빼면 필연성, 자연은 필연적으로 있다. 반드시 있다. 그리고 그것은 자연 안에 법칙을 가지고 있다 까지 가면 자연과학이다. 어쨌든 세계에 대한 자연철학적 설명 모형은 자연과학의 단초가 되는 것이기도 하다. 자연과학의 단초가 되는 것이기도 하고 이것이 하나의 인생론의 단초가 되기도 한다. 이 모형에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삶을 파악할 수 있다. 그러니까 무슨 말인가.  인간은 생물학적 존재이다. 생물학적 존재이니까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다.  그래서 내 삶에서 일어난 사건들도 당연히 자연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의 일부로서 일어난다. 질송의 말처럼 "삶의 연속적 사건들을 비인격적 원인에서 비롯된 수많은 구체적인 결과로 보고 자기의 죽음도 예견"한다. 모든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 라는 언명이 있다고 할 때 이 언명은 필연성을 띤 법칙이다. 그리고 자연철학적 질서를 표명하는 언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는 자연의 일부이고 인간이 그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이 자연은 그것 자체로 자연은 자신의 법칙을 자연 세계에 관철해 낸다. 그 자연 세계 안에 들어있는 게 인간이고, 인간은 자연 세계의 법칙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이다. 그러면 그 법칙에 의해서 움직여가는 인간 존재, 내가 뭐라고 마음을 먹든 간에 그것은 내 마음에서 생겨나는 하나의 maya, 즉 판타지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것이 판타지에 불과하다는 것을 철저하게 깨달은 순간, 즉 인간이 자연물의 일부라는 것을 단 하나의 아주 조금의 양보도 없이 유보도 없이 그것을 깨닫는 순간,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는 자연으로 소멸되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인간은 깨달음을 얻는다. 그런 깨달음을 얻는 것이 바로 모든 것은 무상하다 라고 하는 그런 것으로 전개된다. 그러니까 그것은 자연과학이 아니라 인생론이다. 자연과학은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가 자연에 대해서 탐구를 하는데 그것은 그냥 자연만을 탐구하는 것이다. 인간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생각해보지 않고, 즉 자연과 인간의 몰교섭적인 태도를 바탕으로 해서 그런 마음가짐을 가지고서 자연을 탐구하는 것이 자연과학이고, 인간이 자연의 일부이구나, 그러니 인간도 자연처럼 무한히 시작과 끝없이 그러니까 내가 태어나고 내가 죽는 순간 그것 역시 내가 결정하지 않은 비인격적 원인에서 비롯된 수많은 사태 중에 하나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인간의 탄생과 죽음이라고 하는 것 자체도 그저 자연의 하나의 사태이다. 그렇게 파악을 하는 것이 바로 무상한 세계관, 대표적으로는 불교적 세계관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구원이 무엇인가, 해탈인 것이다. 그래도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났는데 무슨 의미가 있지 않겠는가 라고 하는 것 자체가 다 자연의 법칙에 따르면 아무런 영향력도 미칠 수 없는 그런 사태인 것이다. 그것이 바로 불교적 세계관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그렇게 마음을 먹는다라고 하는 게 물론 하나의 자각이겠지만 그렇게 마음을 먹는 것은 자연의 이치가 아니다. 그런 점에서는 자각적이고 하나의 형이상학의 편린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근본적으로는 자연철학적인 설명 모형에서 딱 한 발자국만 더 나아간 것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저급의 세계관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자연철학적 질서의 언명이고 여기서 이오니아의 자연 철학은 더 이상 나아가지 않았다. 그냥 세계가 이러하다 라고 하는 대상적 세계에 대한 논의만을 전개했을 뿐이다. 

질송은 여기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향해 가기 위해서 그것들을 검토하는데, 그것은 무엇인가.  우리 눈앞에 놓여 있는 자연철학적 질서가 있다. 그런데 이 자연철학적 질서, 즉 자연 안에 들어있는 필연성을 안다는 것, 즉 knowledge, 내가 안다 라고 말하는 것이 있다. 세계는 있어왔고, 있고, 있을 것이라고 하는 이 언명은 세계의 존재에 관한 운명이다. 자연이 우리에게 나는 이러이러하니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라고 말해주는 게 아니라 이런 언명 자체가 세계의 존재에 관한 우리 인간의 언명이다. 그리고 인간은 이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알고 있다고 하는 것은 대상으로서의 세계와는 구별되는 것이다. 즉 인간이 세계에 대한 지식을 생산해냈는데, 이 지식은 어디에서 생겨났는가. 인간은 세계의 일부이니까 일단은 자연으로부터 생겨났다 라고 말할 수 있다. 그 원천은 그렇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자연이 우리에게 이것을 딱 새겨주는 것은 아니다. 물론 근원적으로는 자연적 세계에서 생겨났다 라는 말을 조금 더 밀고 가보면 자연물로서의 인간, 즉 인간의 뇌가 자연적 구성물이다 라고 하는 것을 바탕으로 해서 철저하게 유물론적 인식론, 즉 인간은 뇌수의 산물에 불과하다 라는 생각도 그렇게 얘기할 수도 있겠다. 그러니까 근원적으로는 자연적 세계에서 생겨났다 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이것을 한번 묶어서 얘기를 해보면, 지금 여기서부터는 질송의 얘기가 아니라 제가 이것을 재정리한 것인데, 인간은 세계 內 存在이다. 인간은 세계 안에 있다. 최근에 읽고 있는 책 중 하나가 칼라너인데, 다 읽고 소개하려고 아직 말하지 않았는데, 《세계 내 정신 - 토마스 아퀴나스의 유한한 인식의 형이상학》하는 책이다. 질송의 책에 이어서 한번 읽어볼까 하면서 읽고 있는 중이다. 어쨌든 그건 딴 얘기이고, 인간은 세계 내 존재이다.  

이 세계 내 존재인 인간이 낳아놓는, 자기가 세계 안에 있으면서도 그 세계에 대해서 의식적으로 분리된 어떤 위치에서 세계에 대한, 즉 세계를 마주하여 뭔가를 반성한 사유의 산물이 바로 '세계는 있어왔고, 있고, 있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이 언명 자체가 자연철학적 질서의 언명인데 곰곰이 따져보면 이 언명은 자연이 우리에게 준 것이다. 물론 근원적으로는 자연이 우리에게 준 것이다. 그런데 그렇다고 자연이 이렇게 써준 게 아니다. 그렇다면 세계에 대한 맞서서, 영어로는 against, 도이치어로는 gegen, 그러니까 Gegenstand라는 말이 대상인데, 마주 서 있는 이라는 말이다. 반성한 사유의 산물이다. 그러니까 곧바로 세계에 대한 자연철학적 질서 언명을 내놓았다 라고 하는 것은 바로 우리가 반성적 사유를 하고 있다, 세계 내 존재인 인간이 세계에 대하여 반성적 사유를 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인간은 세계 내 존재이지만 그렇지만 인간은 세계 안에 있는 존재이면서 세계에 대해 있는 존재라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즉 세계 안에 있는 존재는 즉자적卽自的 존재이고 세계에 대해 있는 존재는 대자적對自的 존재이고, 이런 대자 존재Fürsichsein은 세계에 대한 앎을 우리가 가짐으로써 가능해진다. 이게 바로 대상 의식이겠다. 이런 대상의식을 갖고 있을 때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가 형이상학으로 가는 어떤 첫 걸음을 내딛게 되는 것이다. 형이상학라고 하는 것은 초월적인 것에 대한 앎을 추구하는 것인데, 이 초월적인 것을 우리가 어떻게 알아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되고 뭔가를 초월하려고 하는, 즉 자기 내 초월이다, 지금 나는 세계 안에 있는 자연적 존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세계를 벗어나서 세계에 대해서 생각하고자 한다 라고 한다면 그것이 바로 Fürsichsein으로 가는 출발점이고 그런 Fürsichsein의 의식을 갖고 있는 것이 형이상학의 첫걸음이다. 그런 까닭에 세계에 대해 있는, 세계에 마주 서 있는 대자존재로서의 인간은 앎을 가지게 되고, 바로 이 앎이라고 하는 것은 질송의 말처럼 "선택가능성"을 세계에 도입한다.  

선택가능성이라고 하는 말을 다르게 말하면 자유이다. 이게 바로 형이상학적인 의미에서의 자유를 가리킨다. 세계에 도입한다 라고 하는 것은 세계에 대한 사유를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다. 그냥 나는 자연철학적 질서 언명을 뭔가 막연히 감지하기는 하는데,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내 삶을 이끌어 가보겠다는 생각을 안 할 수도 있다. 어쨌든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내 삶을 이끌어가겠다 라고 생각을 한다면 인간은 세계에 대한 앎, 즉 Wissen을 통해서 자체 존재가 된다. 하나의 세계를 구축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어떤 지식들을, 세계에 대한 앎들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고, 선택적으로 구성해 낼 수가 있게 된다. 그러면 그런 존재를 우리는 자체존재라고 말할 수 있고 하나의 독자적 세계를 자신의 의식 안에 구축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눈을 감아버릴 수 있다. 나는 더 이상 세계에 대해서 인식하지 않겠다 라고 할 수도 있고, 나는 세계를 의식하되 나의 의식 속에서 세계를 이렇게 구축하겠다 라고 하는 의지를 가질 수 있게 된다. 그러면 세계 내 존재로서의 하나의 자연물로서의 인간이 의식 내 세계의 원인이 되고, 그런 원인은 구체적으로는 인간의 의지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것, 즉 나의 의식을 통해서 세계를 구축하려고 하는 것 이것이 바로 관념론의 기획이다. 그렇게 되면 이제 플라톤으로 나아가는 길인데, 앞서서 세계에 대한 자연철학적 설명 모형이 있었다면, 이제부터는 세계에 대한 관념론적 설명 모형이 성립하게 된다. 이런 보충 설명이 있은 다음에 현전하는 세계가 아닌, 현전하는 세계로부터만 뭔가를 끄집어 올린 것이 아닌, 앎이 구축하는 세계가 성립하게 된다.  그러면 앎이 구축하는 세계, 즉 관념론적 기획에 의해서 구축되는 세계가 바로 플라톤이 말하는 지성으로써만 알 수 있는 세계가 될 것이다. 이제 플라톤 얘기가 이 다음에 이제 이어진다. 이것을 중간 부분에서 한 번은 보충을 해야 될 필요가 있어서 얘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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