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담화冊談話 | 그리고 로마는 그들을 보았다(6) [7]

 

2024.05.09 📖 그리고 로마는 그들을 보았다(6) [7]


어제 《그리고 로마는 그들을 보았다》 제4장 갈레노스 얘기를 두 번에 나눠서 하겠다고 말했다. 갈레노스가 기독교의 신론에 대해서 비판한 부분은 책에서 분량은 적지만 그렇게 간단하게 설명이 잘 안 되는 부분이 있다. 게다가 기독교에서 무으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라고 하는 창세기의 교리는 A.D 200년이 될 때도 확고하게 자리 잡은 교리가 아니었기 때문에 갈레노스가 굉장히, 루이스 윌켄이 지적하고 있듯이, 이 교리 형성에 크게 기여한 바가 있다. 

우선 갈레노스의 비판부터 말해보면 갈레노스가 가지고 있는 생각은 기본적으로 플라톤의 《티마이오스》에 담긴 우주론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티마이오스》의 우주론이라고 하는 것이 굉장히 강력한 영향을 끼치고 있었고 초창기에 순교자 유스티노스 이런 사람들도 무로부터의 창조 교리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무로부터의 창조 교리가 본격적으로 드러난 것은 아우톨뤼코스인데, 그 책 얘기는 조금 이따 하겠다. 플라톤의 《티마이오스》에 담긴 우주론은 아주 간단하게 말하면 신을 포함하여 자연의 생성에는 그 이유와 질서taxis가 있어야만 한다는 얘기이다. 질서taxis라고 하는 단어는 굉장히 포괄적으로 쓰인다. 예를 들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도 비극은 반드시 구성mythos에 있어서 질서가 있어야 한다고 얘기한다. 그리고 예술 이론에서도 미학에서도 질서라고 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 얘기를 그대로 갈레노스도 《신체 부위의 쓸모에 대하여》에서 되풀이한다. "자연은 어떤 것도 이유 없이 행하지 않는다." 아주 유명한 말이다. 이것은 갈레노스 고유의 생각이기보다는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사유 체계에서는 아주 당연시되고 있는 그런 것이다. 그렇다면 플라톤이 《티마이오스》의 우주론에 무엇이라 말하는가. 신은 모든 것이 훌륭하기를 바랐지, 그 어떤 것도 가능한 한에 있어서 훌륭하길 바란다. 그런데 볼품없기를 바라지 않았기 때문인데, 조화롭지 못하며 무질서하게 움직이는 가시적인 모든 것을 그가 받아서는, 무질서 상태ataxis에서 질서 있는 상태taxis로 이끌었다. 최선자가 신일까 인간일까는 좀 따져볼 문제가 있다. 《정치가》 편에서도 신이 다스리던 시대 뭐 이런 얘기를 한다. 신이 다스리던 시대에 우주가 항상 올바로 질서정연하게 움직이다가 신이 그걸 놓아버리면 질서정연하지 않았다는 얘기를 한다. 그런데 데미우르고스, 제작자인 신은 기존에 있는 진료를 가지고 만든다. 다시 말해서 완전히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우주를 만들지는 않는다. 

첫 번째, 그러니까 질서를 만드는데 무언가가 없는 상태에서, 무질서 상태에서 재료가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만들지는 않는다는 얘기이다. 그런데 창세기의 우주론에서 보면 신은 우주를 완전히 초월해 있다. 그래서 갈레노스는 그렇게 말한다. "모세는 단순히 배열을 재료의 배열을 원했고 그리하여 그렇게 되었다고 본다." 그러니까 신이 재료의 배열을 원했고 그렇게 되었다. 그러니까 "어떤 것도 자연적으로는 불가능하며, 신은 자연법칙에 위배되는 것을 결코 시도하지 않는다." 이게 바로 플라톤적인 티마이오스적 우주론이다. 오늘날 우리는 《티마이오스》를 그렇게 열심히 읽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근대 이후에 자연과학에 근거해서 우주를 파악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가 열심히 읽는 것들은 《향연》이라든가 《국가》라든가 이런 걸 열심히 읽는데 헬레니즘 시대에 플라톤 좀 읽는다 하는 사람들은 어쨌든 《티마이오스》를 열심히 읽었다. 

그러니까 두 가지 논점이 있다. 하나는 재료가 없는 상태에서 "원했고", "그렇게 되었다", 강조한 것은 제가 강조하는 것인데, 신은 제멋대로 아니냐 이렇게 얘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연을 초월했다고 보는 것이 바로 심각한 문제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은 바로 자연 법칙에 위배되는 것이다 라는 것이 갈레노스의 비판이다. 아무것도 없는, 재료가 없는 상태에서 뭔가를 만들어내는 것은 신이 하는 일은 아니다 라는 얘기가 되겠다. 갈레노스 시대의 기독교도들은 창세기 교리에는 거의 관심이 없었고 알렉산드리아의 필론, 오리게네스의 스승이다, 필론은 물론 이제 유대인이니까 기독교도는 아닌데, 필론은 플라톤이 전개한 구도에 따라서 신을 이미 존재하는 재료를 사용하여 뭔가 만들어내는 제작자로 보았다. 필론이 유대인이지만 창세기를 이렇게 해석해 들어간다. 그리고 유스티노스는, 순교자 유스티노스니까 아주 명백하게 기독교도인데, 플라톤과 그리스도교의 공통점을 강조해서 "동질의 재료에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형성한다"고 봤다. 필론의 《세상 창조에 관하여》는 아카넷에서 나온 책인 《알렉산드리아의 필론 작품집》에 들어있고, 그다음에 유스티노스의 《첫째 호교론》은 분도출판사에서 나온 신앙 원천 그 시리즈에 들어 있다. 그리고 《아우톨리쿠스에게》도 마찬가지로 분도출판사에서 나온 책이다. 

본격적으로 무로부터의 창조 교리가 등장하게 된 것은 안티오키아의 테오필루스이다. 연대를 보면 유스티노스만 해도 165년쯤에 죽은 걸로 되어 있고, 그다음에 데오필로스도 유스티노스하고 생몰연대가 그렇게 멀지 않은 그 간격을 갖고 있다. 언제 태어났는지는 좀 불명하다. 그런데 데오필로스만 해도 "하느님의 권능은 존재하지 않는 것에서 당신이 원하시는 모든 것을 만들고 행사하는 것에 있다." 즉 이렇게 해야만 하느님이 우주의 창조자로서, 주재자와 주권자를 구별해야 되는데, 주재자는 이미 만들어진 것들을 이렇게 관리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되고, 주권자는 온전히 시작부터 끝까지 모든 걸 관할하고 창조하는 자가 주권자이다. 무로부터의 창조 교리가 있어야만 신의 monarkhia가 가능하다는 것이 테오필로스의 생각이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테오필로스와 유스티노스의 생몰연들을 보면 그들의 간격이 그렇게 크지 않은데, 이때만 해도 무로부터의 창조 교리와 플라톤주의적인 생각이 혼재되어 있는 상태였다고 볼 수 있다. 기독교 초기 교리들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 신약성서라든가 이런 데서 이미 확정되어서 그것이 그대로 전해지기보다는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서 이렇게 저렇게 만들어졌다 라고 보는 게 타당하겠다. 이 부분은 야로슬라프 펠리칸이 쓴 초대교회 교리의 역사를 보면 뚜렷하게 알 수 있는데, 그게 기회가 있을는지 모르겠다. 정통의 합의라고 하는 것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게, 여러 가지 복잡한 과정들을 거쳐서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러니까 로마 가톨릭 교회라고 해도 그 교리가 처음부터 완벽하게 세팅이 되어서 전해지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나 삼위일체 교리 같은 경우에는 거의, 정말 삼위일체론을 공부하다 보면, 철학사는 그래도 깔끔한데 기독교 신학의 역사, 교리사는 온전히 다 이해하지는 못할 것 같다. 

《세상 창조에 관하여》와 《첫째 호교론》, 그리고 《아우톨뤼코스에게》 이런 것들은, 분도출판사에서 그리스도교 신앙 원천 시리즈로 나온 책으로는 테르툴리아누스의 호교론, 유스티누스의 첫째 호교론 그리고 안티오키아의 테오필루스의 아우톨리쿠스에게 그다음에 크리소스토무스도 읽어보긴 해야 되는데 아직 읽지 않았다. 그리고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가 쓴 어떤 부자가 구원받는가도 읽는 게 좋다. 필론은 오리게네스의 스승이다. 그래서 《알렉산드리아의 필론 작품집》은 어쨌거나 좀 봐야 된다. 오리게네스를 공부하려고 한다 그러면 안 볼 수가 없다. 그리고 분도출판사에서 나온 책들도 간단히 지나갈 수 있는 것들은 아니다. 특히나 교부들의 가르침, 교부 신서로 나오는 것들은 꼭 봐야 될 필요가 있지 않나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다. 오리게네스를 공부하려면 어쨌든 필론 책은 읽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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