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담화冊談話 | 그리고 로마는 그들을 보았다(8) [9]
- 강의노트/책담화冊談話 2021-24
- 2024. 5. 22.
강유원의 책담화冊談話(https://booklistalk.podbean.com)에서 제공하는 「그리고 로마는 그들을 보았다」를 듣고 정리한다.
2024.05.21 📖 그리고 로마는 그들을 보았다(8) [9]
《그리고 로마는 그들을 보았다》 포르퓌리오스에 관한 두 번째 이야기를 하겠다. 포르퓌리오스의 철학적인 맥락 또는 문헌학적 비판은 초창기에 그러니까 5세기까지, 칼케돈 공의회가 451년이니까, 그때까지에 나온 여러 가지 그 비판들 중에서 가장 치명적이라고 할 수 있다. 앞서도 얘기했듯이 아우구스티누스가 포르퓌리오스의 그 비판을 가져다 놓고 굉장히 공을 들여서 논박을 하고 있기 때문인데, 오리게네스가 켈소스 논박을 한 정도와는 비교가 안 된다. 이를테면 아구스티누스의 《복음사가들의 일치De consensu evangelistarum》에 나타나는 얘기, 그러니까 복음사가들의 불일치가 있다 하는 비판들에 대해서 그렇지 않다고 얘기하고 있는 그런 것들이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가 《복음사가들의 일치》를 쓰면서 첫 부분에서 포르퓌리오스를 언급하며 그가 복음서에 대한 이런 비판의 근원이었음을 암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것을 보건대 포르퓌리오스는 상당한 분량을 할애해서 그리스도교 성서에 대한 문학적 역사적 비평을 시도했을 것이고, 그 결론은 "제자들마저 한목소리로 가르치지 않았으며, 교회는 처음부터 다툼과 분열이 있었다는 것"을 지적해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신약성서를 읽을 때도, 당장 〈갈라디아서〉를 읽다 보면 게파라고 불리는 베드로와 바울 사이에 다툼이 있었고, 할례 문제를 둘러싼 여러 가지 논쟁들이 벌어졌었다. 그리고 루이스 윌켄도 지적하고 있듯이 바울은 말하고 있는 게 굉장히 거칠다. 그런 것들을 포르퓌리오스는 문헌을 들여다보면서 제기했던 것이다. 여기서 핵심 쟁점이라고 하는 것은 복음서가 역사적 예수에 관한 신뢰할 만한 기록을 제공하는가 이다.
포르퓌리오스의 관점을 우리가 따른다면 "예수라는 인물과 그의 실제 업적을 살피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이나 공동체 내부의 기억, 자기 이해를 복음서에서 분리해야 했다"는 것, 흔히 하는 말로 역사적 예수하고 그다음에 메시아로서 구원을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줄 자로서 선포된 kerygma적 예수를 분리한다는 것, 이것은 오늘날 기독교 신학에서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데, 그런 것이 5세기까지는 확정적으로 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이고. 바로 이제 루이스 윌켄이 지적하고자 하는 바는 바로 그런 것이다. 이러한 포르퓌리오스의 지적이 있는데 그러니 기독교는 틀렸다 라고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처음에 자신의 책이 일역본으로 나왔을 때 일본인들이 좋아했다 하는 얘기를 듣고 좀 씁쓸했다는 얘기를 했었다. 왜 그러한가. 그런 포르퓌리오스의 논박들을 보면서 또 그것에 응하면서, 에필로그 부분에 이런 것들을 자세하게 이야기해 놓는데, 여러분들이 그 부분을 읽어보면 의도를 알 수 있다. 이것을 이렇게 로버트 루이스 윌켄이 자세하게 쓰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기독교 신학이 성립했다고 하는 것, 바로 그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포르퓌리오스의 비판 중에서 치명적인 것은 사실 《신탁으로부터의 철학》에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예수는 최고 신이 아니라는 것이다. 굉장히 치명적이다. 오늘날에도 이 문제가 영지주의자들, 기독교 초기에 영지주의자들과의 싸움이 교리 형성에서는 정말 불타오르는 주제였다. 불타오르는 주제란 예수는 인간이라고 하는 것이다. 하느님은 시간을 초월하는, 정념이 없는, 무형의 신적 존재이고, 정신으로만 알 수 있다는 것이 호교론의 근간인데, 그리스도인들이 자꾸 이교도들에게 비판을 받는 것이 너희들은 예수를 숭배하지 않는가 라고 말을 하고 있으니까, 포르퓌리오스는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숭배함으로써 최고 신에 대한 숭배를 버렸다 라고 얘기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성서에 근거해서 증명해 보이려고 한 것이 포르퓌리오스의 치명적인 전략이 된 것이다. 그러면 예수가 최고신과 동등한 완전한 신인지, 아니면 성부 하느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지만 최고신보다는 아래의 신적 존재인지의 문제는 이른바 ‘아리우스 논쟁’ 시기에 그리스도인들에게 뼈아픈 공격이 되었던 것이다. 아리우스 논쟁은 한마디로 말해서 예수의 인성을 강조하는 것, 예수는 신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아리우스가 그렇게 함으로써 삼위일체 교리는 무너지게 되는 것인데, 이것에 이어지는 율리아누스 황제의 비판도 이런 것이고, 율리아누스는 특히나 이런 것들을 바탕으로 해서 유대교와 기독교의 관계 문제에 집중을 하게 된다.
여기에 제가 로버트 루이스 윌켄의 책에 덧붙여보자면 헬레니즘 시기는 기본적으로 여러 종교가 하나의 시장 속에 나와서 자기의 신도를 끌어당기는 다원적 종교의 시대였다. 그러니까 다원적 종교의 시대이기 때문에 어떤 것이 더 사람들에게 설득력 있고 정당성을 얻을 수 있는가가 굉장히 중요한 문제가 된다. 그러면 일단 로마 제국의 시대에 거의 국교로서 받아들여지고 있던 기독교는, 아직은 이런 포르퓌리오스와 같은 이교도들에게 공격을 받고 있을 때, 이것을 물리적으로 파괴하고 격리시킬 수 있는 그런 힘을 갖고 있지는 못했다. 즉 아직은 다원주의적 경쟁 상태에 진입해 있는 상태이다. 이를테면 중세 같은 경우에는 기독교가 정통이고 그 외의 종교는 이단이기 때문에 파괴할 수 있고 물리적으로 격리할 수 있다. 예를 들어서 유대인들을 게토에 격리시키고 그럴 수 있다. 그리고 이단들은 화형을 시키고 마녀 사냥을 했다. 그런데 다원주의적 경쟁 상태에 진입했을 때는 그것이 불가능하다. 그리고 배교자 율리아누스처럼, 루이스 윌켄은 개종자라고 부르는데, 다른 세계로 이전해 갈 가능성이 아주 높다.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최대한 사람들에게 설득력 있는 변론들을 펼쳐 보여야 한다. 이론적으로는 그렇다. 그러니까 호교론이라고 하는 것도 나와야 되고, 여기서 동시에 일종의 유지보수maintenance를 위한 여러 절차들이 덧붙여져야 된다. 교육이 있을 수 있고 또 우리 종교를 믿으면 이익이 됩니다 하는 친목 그리고 실질적으로 자선사업을 해야 된다. 그런 것들이 다 결합이 되어서 설득력을 만들어낼 테고 그러한 설득력에 바탕을 두고 종교의 정당성 또는 정당화가 만들어지게 된다 라고 볼 수 있다. 그러면 이 경우에 어떤 종교에 바탕을 두고 사람들을 결집시키고 그 결집에 있어서 정당화를 만들어내는 것이 로마제국의 유지를 위해서 더 좋은가 라고 하는 것이 황제들에게는 굉장히 강한 관심사였을 것이다. 여기서 갑자기 종교사회학적인 논의로 들어갈 수 있게 된다. 그러니까 교회가 로마제국에서 국교의 자리에 올라서게 된 것은 이론적으로 탁월한 입장에 있었다고 말하기보다는 오히려 공동체를 유지하는 힘, 호교론에 있어서는 포르퓌리오스 같은 사람들의 반론이 굉장히 뼈 아팠다, 그런데 그것보다는 유지보수에 들어가는 위력이 훨씬 더 강하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종교 집단이든지 교리를 만들어내는 일종의 싱크탱크가 있다. 예를 들어서 교의학, Ecclesiology라고 하는 집단인데, 기독교에서는 Koinonia라고 부르고, 이슬람교에서는 움마Ummah, 불교에서는 승가僧家, 산스크리트어로 상가Saṅgha라고 한다. 그들이 만들어낸 호교론이 설득력을 발휘한다면 그것이 유지보수하는 실제적 조처들과 결합이 되면서 지속성을 가지게 되고, 그게 바로 체제를 뒷받침하는 하나의 종합적인 이데올로기 장치가 된다. 그 지속성이 상실되면 그 세계에서 통용되고 있던 규범nomos이 흔들리게 되고 그러면서 곧바로 아노미 상태로 빠져든다 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리고 국가 체제 입장에서는 정당화 체계가 굉장히 필요하고 그런 정당화 체계가 있음으로써 그 국가가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제도적인 장치들이 설득력 있게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게 된다.
사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대사회는, 특히 한국 사회 같은 경우는, 국민이 주권자이다. 국민이 존재하는 한 국가의 정당성은 바로 확보가 된다. 국민이 주권자이기 때문에 국민이 다 사라지기 전에는 정당성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니까 국민이 얼마나 국가를 사랑하게 하는가, 나라를 유지해야 된다 라고 하는 강한 열망을 갖게 하는가, 이것이 사실은 국가의 정당성을 만들어낸다. 그러니까 민주 국가는 국가가 종교인 셈이다. 그런데 로마제국이나 이런 중세의 여러 나라들, 중세는 제국은 아니었으니까, 신성로마제국이라고 하는 게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허울뿐이고 그런 여러 나라들은 국민이 주권자가 아니기 때문에 그 국민들을 결집시키는 정당성 체계들이, 즉 이론적인 규범과 실제적인 조처들이 결합된 정당성 체계가 아주 강력하게 요구되었다고 할 수 있다. 5세기의 기독교 그리고 포르퓌리오스 같은 이교도들의 논박들을 보면서 로마제국이라고 하는 나라가 그냥 단순히 싸움을 잘해서 영토를 많이 늘렸고 속주에서 많은 것을 착취함으로써 제국을 유지했다 라고 보는 것은 지극히 단편적인 견해가 아닐 수 없다. 오히려 굉장히 치열한 종교적인 논쟁들이 있었고, 이때 이교도와 기독교도들 사이의 논쟁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한 신앙의 다툼이 아니라 로마제국이라고 하는 그 체제가 어떻게 유지될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 체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결집시켜서 체제에 대한 충성심을 다할 수 있게 할 것인가 하는 일종의 정치 신학적인 의도들이 있었기 때문에 율리아누스 같은 황제들도 여기에 가담했던 것이다 라고 이야기를 할 수 있겠다.
이 책은 굉장히 밀도 있고 좋은 책인데 제가 8번[9번]에 걸쳐서 얘기를 했지만 제대로 다 소개하지 못했고, 여러분들이 꼭 읽어봤으면 한다. 그러니까 종교의 문제로 보지 말고 자신이 몸담고 있는 세계,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나라를 어떻게 정당화할 것인가 하는 문제의 측면에서 본다면 이들의 논쟁은 굉장히 고도의 정치적인 논쟁이었다 라고 말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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