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담화冊談話 | 시학 강독 5-1

 

2024.05.22 🎤 시학 강독 5-1

5강. 드라마의 주인공

• 2024. 5. 22. 오후 7시-9시  장소:수원시글로벌평생학습관

• 강의 안내: https://learning.suwon.go.kr/lmth/01_lecture01_view.asp?idx=3672
• 강의 자료: https://buymeacoffee.com/booklistalk/20240522-suwon


사랑에 대해서는 정리된 책이 앤서니 기든스의 《현대 사회의 성 사랑 에로티시즘》이 있는데, 그보다는 니클라스 루만의 《열정으로서의 사랑》이라는 책이 있다. 루만에 대한 애틋한 사랑이 없으면 도대체 읽을 수가 없는 책이다. 굉장히 어렵다. 거기에 있는 핵심 내용을 오늘 정리해서 여러분들에게 얘기하려는데, 이 사람은 체계이론system theory이라고 하는 큰 범위 안에서 사랑에 대해서 얘기를 하기 때문에 이 얘기를 듣고 가서 읽어도 어려워서 못 읽는다.  오늘은 드라마의 주인공에 관한 얘기를 할 것인데 지난번에 잘 만들어진 구성에 관한 얘기와 겹치는 지점이 있다. 드라마의 주인공 얘기는 구성과 관계가 있고, 그 구성은 강의자료를 보면 드라마의 행위, 배우가 있다. 그다음에 참고를 보면 셰익스피어의 작법作法, 헬라스 드라마와 근대 드라마 라고 되어 있는데, "근대 드라마는 삶을 보는 주관적인 방식들을 부각시키며, 특히 사랑이 다른 동기들을 압도한다. 셰익스피어는 인간의 주관적 감정을 보편화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다."라고 되어 있다.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 근대 드라마의 압도적인 동기이다. 근대 드라마를 읽을 때는 사랑에 대해서 잘 알고 있어야 된다. 그러니까 이 사랑이 어떤 종류의 사랑인가 이런 걸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다. 고대 헬라스 드라마에 사랑이라는 건 없다. 사실 헬라스 드라마에 나온 주인공들은 다 자기애가 강한, 자기 운명에 대한 사랑이 강한 주인공들인데 근대 드라마는 그렇지 않다.  

사랑에 대해서 미리 아주 간단하게 얘기를 해보면 사랑이란 무엇인가. 일단 사랑이라고 하면 pathos, 겪음이다. 니클라스 루만의 《열정으로서의 사랑》의 원제가 Liebe als Passion인데, 독일어로 Passion이 열정이라고 번역이 되는데, Passion이라는 단어가 사실 희랍어로 pathos이다. 히랍어 pathos는 고통이다. 비극에 들어가 있는 비극의 구성 요소 중에 하나가 pathos이다.  그런데 pathos라고 하는 건 고통이라는 뜻도 되지만 os를 빼면 path, 경로라는 뜻도 된다. passion of christ는 예수 그리스도의 열정인데, 열정이 있으니까 고통스러운 것이다. passion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열정이라는 뜻을 떠올리면 좋지만 고통스럽다라는 뜻도 되고 뭔가 겪어간다 라고 하는, 경로를 겪어간다라고 하는 뜻도 된다. 세 가지 뜻을 다 떠올려야 된다. 열정이 1번 뜻은 아니다. 원래 1번 뜻은 겪음이다. 외국어 공부를 한다는 것을 떠나서 이렇게 강의를 하면서 독일어든 영어든 라티움어든 희랍라어든 이런 얘기를 하는 것들은, 제가 외국어를 많이 안다는 걸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의 단어에 우리말에 대응하는 외국어들 있는데, 그 외국어들이 가지고 있는 뜻을 여러 개를 알고 있는 게 중요하다. 생각의 폭을 넓히는 데 굉장히 도움이 된다. passion이라는 단어가 열정이라는 말만 알고 있는 것과 그것이 고난, 수난 그다음에 고통 그다음에 경로 그다음에 겪음 이렇게까지 알고 있는 것과는 아주 다른 것이다. 그것을 알고 있을 때 우리 생각이 넓어진다. 그러니까 Liebe als Passion에서 passion이라는 게 겪음이라고 하는 뜻부터 일단 있어야 된다.  겪음이 있고 인생을 겪다 보니까 고난도 있는 것이다. 고난을 겪으면서도 앞으로 가는 것이기 때문에 열정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실 passion이라는 단어는 겪음, 고난, 열정 이 순서대로 이해를 하고 있는 게 가장 좋다.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뭔가를 겪는 것을 말할다. 이때 겪는다는 것은 항상 상대가 있다는 걸 의미한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 전인격적 친밀성intimacy이 개입되어서 정체성의 변화를 초래하는 사태가 사랑이다. 전인격적 친밀성을 바탕으로 해서 사람들이 커뮤니케이션을 한다. 그 과정에서 정체성이 변화한다. 예를 들어서 내가 자녀를 사랑한다고 하면 아이들로 인해서 아이를 키우기 이전과 아이를 키운 다음에 내가 변화한 게 있어야 된다. 오셀로를 보면 데스데모나를 사랑한다더니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셰익스피어 드라마에서 사랑이 말하자면 Leitmotiv, 그 드라마를 끌고 가는 주조主調인 드라마는 오셀로 하나뿐이다. 맥베스 같은 경우는 야망, 명예 그런 것이고, 햄햄릿은 아무런 주조가 없는 지리멸렬한 드라마이고 리어왕 같은 경우에는 야망이다. 리어왕의 야망이 무너져버린 것이기 때문에 Tragedy of King Lear, 리어왕의 비극이다. 그러니까 거기에서 사랑처럼 보이는 셋째 딸 코델리아도 전반적인 주조를 사랑이 아닌 것이다. 사랑을 Leitmotiv로 하는 드라마는 18세기 낭만주의 이후에 나온다.  셰익스피어 시대에 이 드라마가 나온다는 건 불가능한데 오셀로에서 나온다. 거기에 보면 정체성의 변화를 말하는 것이다. 나르시스트들은 항상 자기의 이익만을 생각하고 그 어떤 경우에도 자기 정체성이 변하지 않는다. 자기 정체성이 변화한다는 것, 예를 들어서 나는 원래 이런 것들을 나의 정체성의 하나로 굳건히 지키고 있었는데, 내가 그 사람하고 이렇게 또는 아이를 키우면서 내가 변했어 라고 말하는 것은 말하자면 사랑의 결과이다. 전인격적 친밀성이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하고 나하고 어떤 범위에 걸쳐서 대화를 하는가에 달린 것이다. 친밀성을 구축하는 방식이 커뮤니케이션이다. 얼마나 자주 무엇을, 그러니까 커뮤니케이션의 빈도와 내용이 사실은 친밀성을 만들어내는 방식이다. 그냥 일상적으로 주고받는 내용만 하고 있다든가 그런 것이 아니라 사람들마다 자신이 커뮤니케이션하는 상대에 따라서 주고받는 내용이 다르다. 이런 것들이 사실 사랑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전인격적인 친밀성을 바탕으로 정체성의 변화를 초래하는 사태가 사랑이다.  전인격적으로 친밀해지는 것은 어렵다. 항상 유보 상태인 것이다. 더군다나 현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기능적으로 생각을 한다. 어떤 전통적인 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하고 결정적으로 다른 것은 기능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저 사람은 나에게 무엇이 도움이 되겠구나 하는 것이 일단 바탕이 되니까 그렇다. 도구적으로 생각을 한다. 인간을 도구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전인격적으로 커뮤니케이션을 한다는 게 사실 불가능하다. 그래서 현대사회가 더 발전하고 사람들이 기능적으로 인간관계를 생각하는 것이 습관이 될수록 사회적 재생산이 어렵게 된다. 이는 어쩔 수 없는 것인데 사람을 보는 시각 자체가 변한 것이다. 현대사회에서는 전인격적으로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 것 자체가 굉장히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현대사회는 기능중심적으로 체계가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각각의 기능들이 하나의 고유한 닫힌 체계를 갖고 있다. 현대사회를 구성하는 데 있어서 전자공학 체계도 필요하고 철학 체계도, 필요한지는 모르겠는데 일단, 필요하다고 해보자. 각각은 각각의 체계를 갖고 있다. 커뮤니케이션을 하려면 누군가 옆에서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데 도움을 줘야 된다. 그 도움을 주는 장치가 정치이다. 현대사회 정치라는 건 그런 것이다. 각각의 닫힌 체계들을 서로 커뮤니케이션 할 수 있게 해주는 하나의 장치이다. 그러면 생애 기회 Life Chance, 사람들이 앞으로 내가 무슨 일을 해서 먹고 살 것인가 라고 생각할 때 사람이 어떤 집단에 어떤 체계 속으로 들어갈 것인가를 생각한다. 가령 어떤 사람이 전자공학과를 갈까 의대를 갈까 생각하면 그 사람의 고려 사항은 누가 돈을 더 많이 버는가를 생각한다. 그러니까 서로 각각의 고유한 체계가 있어서, 그 체계는 닫힌 체계라 비교가 불가능하다. 억지로 비교를 하려면 돈을 많이 버는 쪽이 이제 사람들에게 선호가 된다는 것이다. 어떤 정치 체제에 살고 있느냐에 따라서 그 체제에서 말하자면 대접을 받는 그 고유한 기능 체계 집단이 다르다. 민주정 국가일수록 어떤 기능 체계 집단이 더 대접받는 일은 없다. 현대 사회에서 각각의 고유한 기능 체계들이 쭉 나열되어 있는데 그 그 체계들을 연결해 주는 가장 핵심적인 것이 커뮤니케이션이다. 그러니까 진정한 리더의 조건은 그 수많은 그 사회를 구성하는 기능 체계들을 잘 파악하고 그 기능 체계 고유의 코드와 그 코드에 따른 프로그램이 있다는 것을 잘 이해하고, 이것을 바탕으로 해서 서로 커뮤니케이션을 잘 원활하게 해주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리더인 것이다. 커뮤니케이션 능력이라고 하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 그리고 이런 기능 체계들이 있는 이런 체계 중에서도 유독 전인격적 친밀성을 가지고 사람들이 서로 커뮤니케이션하는 관계를 사랑이라고 부른다. 지금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기능적으로 분화된 사회이다. 한국 사회가 급속도로 기능적인 분화가 일어나고 그 기능 중심의 체계가 일어났기 때문에, 사랑은 전인격적인 친밀성이라고 하는 것인데 친밀해지려면 커뮤니케이션 빈도와 내용을 늘려야 된다. 코드라고 하는 것은 의도를 가지고 있는 신호이다. 니클라스 루만의 체계이론이라고 하는 것은 그런 체계를 연구하면서 인간의 친밀성까지 연구한 것이다. 어떤 커뮤니케이션이든 기능 집단들끼리 서로 연결시키려면 그 집단들 사이에 연결되는 코드가 있어야 된다. 귀담아듣고 저 집단에게 통하는 코드와 정책 의도를 가지고 정책 수단을 개발해서 그것을 적절한 선을 통해서 제공을 해야 된다. 그러니까 사랑의 기술이라고 하는 것이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필요한 기술이다. 루만은 사랑이라고 하는 것을 너무나 이제 무미건조하게 얘기한 측면이 없지 않아 있는데, 그렇게 해서 나의 정체성도 변했다고 하면 사랑인 것이고 그다음에 정치적인 맥락 속에서 그런 정책들이 시행되어서 이런 게 변한다 라고 하면 그것은 정치적 효능감이다. 정치적 효능감이 생겨야 사람들이 정치에 적극적으로 들어올 수도 있는 것이다. 


5강. 드라마의 주인공. 드라마의 주인공에서 피해야 할 세 가지 구성이 있다. 선한 사람이 행복해서 불행으로 이행하는 것. 드라마에서 너무 선한 사람이 나오면 안 된다. 선한 사람은 일단 행복해야 되는데 그 사람이 불행해진다고 하면 드라마를 보는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유발한다. 드라마는 어쨌든 관객의 반응에 따른다. 그다음에 악한 사람이 불행해서 행복해지는 것. ponēros라는 단어가 악하다는 것인데, 악한 사람이 불행한 상태에 있다가 행복해지는 것은 인정(philanthrōpon)에 호소하지 않으며 연민과 공포도 유발하지 않는다. 연민과 공포가 있어야 카타르시스가 있는데 악한 사람이 불행해서 행복으로 가면 개운하지 않고 찜찜함만 남는다.  카타르시스를 만들어내는 게 연민과 공포인데, 그것을 유발하지도 않는다. 그러면 세 번째 극악한 사람이 행복에서 불행으로 떨어지는 것은 마땅한 일이니까 의분義憤(nemesis)을 만족시키나 비극적 성질은 없다. 그러니까 그것은 비극 드라마는 아닌 것이다. 가장 형편없는 드라마가 권선징악, 나쁜 놈이 벌받고 착한 사람이 행복하게 되는 것이다. 드라마라고 하는 것은 고만고만해서는 안 된다. "[연민은] 우리가 부당하게 불행에 빠지는 사람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고", 연민이라고 하는 단어가 나오는데, 그 사람이 나하고 처지가 비슷하든 안 하든 암만 봐도 저 사람은 참 딱하다 라고 느낌이 드는 것, 딱하다 라는 느낌이 드는 게 연민이다. 나와 유사한 사람이 불행에 빠지는 것에 느끼는 감정은 공포이고, 딱하다는 느낌이 연민이다. 

그다음에 어떤 주인공이어야 하는가. 중간에 있는 인물, 그런데 "덕과 정의(aretē, dikaiosynē)에서는 특출나지 않아도 악덕과 악 때문이 아니라 어떤 잘못(hamartia tis) 때문에 불행에 빠지는 사람"이다. hamartia는 잘 모르고 있는데 알고 보니 내가 잘못했네 하는 것이다. 드라마가 시작되기 전에 뭔가 일어났을 수도 있다. 그 밑에 두 가지 정도를 한번 보겠다. 우리가 오이디푸스 드라마를 잘 알고 있듯이, 길을 가다가 길을 비키지 않으니까 누군가 와서 죽이려고 했다. 오이디푸스가 화가 나가지고 그 사람을 죽였어. 그런데 알고 보니 아버지더라 그렇게 되었던 것이다. 자기가 아버지를 아버지인 줄 모르고 죽였다. 그게 바로 오이디푸스의 잘못이다. 오디이푸스는 자기가 굉장히 잘난 사람인 줄 알았는데, 테바이에 와서 왕 노릇을 하다가 알고 보니, 테바이에 역병이 돌고 아폴론에게 가서 신탁을 물어보니까 그 신탁이 오이디푸스 때문에 문제가 생겼다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신탁에 따라서 오이디푸스가 이제 말하자면 벌을 받아야 된다. 오이디푸스가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오이디푸스의 부모들인 라이오스 왕과 이오카스테는 이 애가 커서 아버지를 죽일 것이라고 하니까 애를 갖다 버렸다. 그 위탁을 받은 목동이 애를 안 죽이고 다른 나라로 살려둬가지고 이 사건이 벌어졌다. 그 부모가 비극적인 결말을 피하고 싶어서 저지른 행위가 사실은 그 피하고 싶은 행위의 원인이 되어버렸다. 오이디푸스는 모르고 한 일어난 일이다. 그러니까 오이디푸스는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이것은 오이디푸스의 성격 때문이라기보다는 일단 드라마 자체가 이렇게 세팅이 된 것이다. 오이디푸스는 딱히 나쁜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특별히 훌륭한 사람도 아니고 그런 사람이다. 

그다음에 맥베스를 보면 맥베스도 약간 그런 성격이 있는 것이다. 약간의 고귀함을 가지고 있고 우리와 비슷한 사람인데 맥베스는 야심이 있었다. 그 야심이 성격에 기인한 결함이다. 맥베스는 운명에 기인한 결함이 있는 게 아니라 성격에 기인한 결함이 있는데 이게 근대 드라마의 특징이다.  처음에 보면 굉장히 명예를 중시하는 모습이 보이는데, 그 야심에 의해서 명예를 중시하는 것이 파괴되고 그다음에 결과적으로는 비극적인 참사에 이르게 된다. 맥베스는 성격적으로 야심이 있는 놈이다. 이 야심이 이렇게 굴곡을 따라서 그냥 가라앉았으면 비극적으로 죽지 않았을 텐데 야심을 계속 이어붙여서 맥베스의 파멸, 이 연결고리들을 잘 만들어 놓았다. 그래서 셰익스피어 드라마가 기가 막힌 것이다. 그 중에 대표적으로 레이디 맥베스가 있다. 오이디푸스에서는 운명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오이디푸스를 불행으로 몰고 가는 인간은 아무도 없다. 맥베스는 근대 드라마이기 때문에 야심이라고 하는 성격적 결함이 있는데, 이건 운명적으로 미리 정해진 게 아니다.  자기가 모르는 사이에 만들어진 게 아니라 알고 있는 것이다. 이 야심을 가라앉히면 비극적인 참사에 이르지 않는데 이 야심을 부추기는 필연적인 연쇄들이 중간에 있었다. 마녀와 레이디 맥베스 그다음에 몇 가지 사건들이 자기에게 유리해 보이는 국면들이 있었다. 그런 국면들이 필연적 연쇄를 이루어서 그쪽으로 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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