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원의 책담화冊談話(https://booklistalk.podbean.com)에서 제공하는 「ε. Gilson, God & Philosophy」를 듣고 정리한다.
2024.05.19 ε. Gilson(12), God & Philosophy, Ch. 2
에티엔 질송, ⟪철학자들의 신 - 역사적 개관⟫(God and Philosophy, 2002)
텍스트: https://buymeacoffee.com/booklistalk/god-philosophy-ch-2
에티엔 질송의 《신과 철학God and Philosophy》에서 첫째 챕터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서 신 개념을 검토한 뒤에 둘째 챕터 신과 그리스도교 철학으로 들어왔다. 질송이 생각하기에 신이라고 하는 것을 본격적으로 논의하는 것은 그리스도교 철학에서부터겠다. 신과 그리스도교 철학God and Christian Philosophy이라는 제목을 한번 생각을 해보면 그리스도교는 종교이다.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종교와 철학은 서로 다른 영역에서 움직인다. 물론 세계와 인간을 이해하고 삶을 영위하는 태도들의 근본적인 태도들에 관한 원리를 탐구한다라는 점에서는, 요즘에는 도이치어 Wissenschaft를 자연과학이라고 옮긴다, 자연과학 그리고 철학, 종교 그리고 자연과학을 모형으로 삼은 사회과학들이 있다. 역사는 예전에는 그냥 단순한 description, 연대기에 불과했는데, 동아시아 세계에서는 역사로부터 어떤 교훈을 얻어내야 한다 하니까, 역사가 철학적인 의미를 갖고 있었는데 그것이 요즘 동아시아에서는 역사학이라고 하는 학문이 성립하면서, 가령 일본의 동경대학에 역사학과가 설치되고 하면서, 오스터함멜의 책에 보면 그런 얘기들 나온다, 사실을 서술한다고 하는 실증학으로서의 역사 개념이 등장하고 자연과학을 모형으로 삼은 사회과학으로서의 역사가 등장하면서 역사도 과학과 철학과 종교라고 하는 커다란, 세계와 인간을 이해하고 삶을 영위하는 태도들에 관한 근본적인 원리들을 탐색하는 영역에서 역사가 이제 과학의 영역으로 빠져들어가게 되었다. 그래서 과학과 철학과 종교 이것만 있는데, 고대 그리스에서의 철학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 종교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질송은 챕터1의 마지막에서 종교와 철학의 분리라고 하는 것이 오히려 철학에게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었을까 라는 얘기를 했다. 읽을 때 그것이 조금 의아할 수 있다. 철학과 종교가 분리되는 것이 왜 다행스러운 일인가. 철학은 지성으로서 알 수 있는 세계에 대해서 탐구를 하고, 최상위로까지 탐구를 했을 때 형이상학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그런데 사실 형이상학의 영역으로 들어간다고 하면 현대 논리 실증주의자들logical positivist에 의해서, A. J. 에이어가 쓴 《Language, Truth, and Logic》을 보면 첫 번째 챕터가 형이상학의 붕괴The Elimination Of Metaphysics이다. 현대의 논리 실증주의자들은 형이상학이라고 하는 것을 종교하고 다르지 않은 것으로 본다. 그런 점에서는 그들은 아주 순전한 의미에서의 자연과학을 철학의 모형으로 삼으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논리적 실증주의가 된다. 결국 자연과학으로 귀결되는 고대 그리스의 자연 철학은 눈앞에 놓여 있는 자연physis에 대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해서 제한된 범위의 필연성만을 제시할 수 있고, arkhē를 탐구를 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형성의 궁극 원리라는 것에 대해서는, 또는 그런 arkhē와 원리를 결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라고 되니까 자연과학으로 귀결된다. 그런 점에서 고대 그리스의 자연 철학이 근대 자연과학의 원천이다 라고 하는 주장, 대표적으로 알프레드 화이트헤드의 《과학과 근대 세계》에 보면 그런 얘기들이 나와 있는데 틀린 얘기는 아닐 것이다.
그에 비하면 종교는 그것이 긍정적인 의미에서든 부정적인 의미에서든 dogma를 정립하고, 이 dogma라고 하는 건 단적으로 규정되는 것이다. 유대인의 신 야웨 그러면 단적으로 규정되는 것이다. "우리의 신은 주님이시다. 주님 한 분뿐이시다"라는 신명기 6장 4절의 말이 왜 맞습니까 라고 하는 것은 무의미한 질문이 된다. 독단적으로 정립되는 것이다.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우리의 삶의 규범을 제시하고 그것을 얼마나 잘 지키는가 하는 것에 관심을 갖는다. 그리고 그 안에서 세계의 구조, 시작과 끝을 말하고, 삶의 의미에 대해서 체계적 이론을 구축하려고 한다. 그러니까 종교에서는 그 첫 번째 dogma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종교에 귀의할 수가 없다. 이것은 합리적으로 설명이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과학 그리고 자연철학과 양립하기가 어렵다. 지성으로써 알 수 있는 세계가 아니기 때문에 사실상 자연과학과 종교는 서로 양립하기가 어렵다. 그렇다면 자연과학자가 어떻게 해서 종교를 가질 수 있는가. 우리 삶의 궁극적인 목적, 의미를 자연과학으로부터 얻을 수는 없다. 그러니까 자기가 자연과학적인 탐구를 하고 그것을 전문적으로 비즈니스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이게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나 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자연과학으로부터 그 대답을 얻을 수가 없기 때문에 종교를 가지는 것이다. 자연과학자가 도대체 왜 종교를 믿고 있는가 하는 물음은 무지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물음이다. 자연과학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모르기 때문에, 그리고 종교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물어보는 것이다. 자연과학자들이라 할지라도 종교를 가질 수 있고, 가져야만 한다 까지는 아니어도 가질 수 있다. 철학은 항상 자연과학이 옳은지 종교가 옳은지에 대해서 의문을 갖는다. 그 중간에서 계속 방황하는 영혼이라고 할 수 있고 그것이 철학이 하고 있는 일이라고 하겠다. 방황하고 있는 영혼, 근본적으로 회의주의에 처해 있는 게 철학이다. 그렇다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이라고 하는 것이 성립되었다고는 해도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모두 다 지성으로써 알 수 있는 가지可知 세계에서의 형이상학을 추구하였기 때문에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기독교의 신과는 서로 양립할 수 없다. 그건 단적으로 명령된 것이다.
일단 유대인들이 말하는 신이 어떠한 것인가 그리고 그 신의 특성이 그대로 기독교로 계승되었기 때문에 그 세 가지를 한번 보겠다. 첫째가 유일성unicity이다. 신명기 6장 4절에 나와 있다. "너,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의 하느님은 야훼시다. 야훼 한 분뿐이시다." (신명기 6.4) 이것은 논증할 수 있는 명제가 아니다. 지성으로써 알 수 있는 세계에 있는 것만이 논증이 가능하고, 이건 단적으로 명령으로서imperative 주어진 것이다. 유일신에 대한 명령을 받아들이면 신자가 되는 것이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신자가 되지 않는 것이다. 아주 뚜렷하게 신자의 정체성을 확보해내는 방법이 그것이다. 그런데 헬라스 사람이라면, 즉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공부한 사람이라면 이 유일한 신, 명령으로서 주어진 신을 자신이 생각하는 철학적 원인과 같은 것이라고 봐야 되겠는데 그게 그렇게 쉽지 않다. 그 사람 머릿속에 이것이 정말 틀림없는가 하는 의심이 계속 주어지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그래서 유대인의 신을 따르는 사람은 철학적 원리와 종교적 원리가 세계에 관한 하나이고 동일한 설명one and the same explanation of the world을 제공함을 아는데, 유대교의 신자는 그렇게는 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기독교도가 그 신이 철학적 원리라고 하는 것을 반드시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앞서 얘기했듯이 과학자가 어떤 특정한 기독교도일 수는 있다. 그런데 그 과학자가 기독교를 받아들이면서 자신이 탐구하고 있는 과학적인 원인 또는 과학적인 탐구가 신에 의해서 정당화될 수 있다 또는 종교에 의해서 정당화될 수 있다 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 질송은 원칙적인 것을 얘기하는 것이지 모든 과학자가 모든 철학자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저도 가끔 철학 전공자인데, 철학 선생인데 왜 기독교도인가 라는 얘기를 듣는다. 철학 선생은 기독교이면 안 되는가. 그런 경우에는 철학이라고 하는 것을 철저하게 논리적 실증주의logical positivism 이후에 성립된 철학 개념에 근거한다면 종교를 가질 수 없다. 그런 경우에는 철학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개념이 다르기 때문에 그렇다. 철학 전공자들 사이에서도 철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이 다르다. 어떤 사람들은 종교와는 절대로 양립할 수 없는 철학 개념을 가지고 있고, 어떤 이들은 당연히 종교하고 공통적인 지점 또는 종교가 결여하고 있는 것을 철학이 줄 수 있다. 종교는 dogma 위에서 성립하는데 여기 신명기에 나오는 말처럼 "너,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의 하느님은 야훼시다. 야훼 한 분뿐이시다."를 종교적인 심성으로는 받아들일 수는 있겠지만 그래도 철학적인 사유 속에서는 이것을 의심해 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 철학적인 의심이 계속되면서 종교적인 믿음을 유지해 나갈 수 있다는 것은, 물론 혼란스럽기 하겠지만 그것은 가능하다.
그다음에 이 한 분뿐인 야웨가 그저 단순한 법칙이라든가 그건 단순한 thing이 아니라 somebody다, 인격적 존재다. 신과 인간은 인격적 관계personal relation에 놓이게 된다. 신의 명령을 듣는다고 한다. 우리가 자연과학의 법칙이라고 하는 것은 잠정적인 것이기도 하지만 그 법칙을 따른다고 하는데, 그 법칙에게 인격성을 부여하거나 그러지는 않는다.
셋째로 신의 이름, 이것에서 많은 논의들이 전개되는데, 일단 간단하게 규정부터 해두면 출애굽기Exodus의 3장 14절인 "나는 곧 나다." 모세에게 "너는,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분은 '나다.' 하고 말씀하시는 그분이라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일러라." 모세가 신에게 들은 얘기라고는 하지만 이 얘기는 결국 유대인들이 쓴 것, 유대인들이 신을 이렇게 규정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지금 현존하는 자로서 현존한다. 그리고 현존할 자로서 현존한다. 현존할 자로서 현존할 것이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 어제와 오늘과 내일, 앞날 모두를 아우르는 존재이다. 라티움으로 적으면 ipsum esse, 존재 자체이다. 그래서 흔히 영어로 I AM WHO AM. HE WHO IS라고 규정을 하는데, 존재론적으로 보면 정적으로 고정되어 있는 것으로, 그러니까 아리스토텔레스에서는 부동의 원동자라고 말하는, 그런 것으로 규정되지 않고, 역동적으로 존재한다 라는 점에서 existential라고 얘기한다. 단순히 exist하다는 것이 아니라 실존적으로 존재한다 라고 표현을 한다. 그래서 기독교 철학자는 신이라고 하는 존재가 유일한 존재이고 인격 존재인데, 이 두 가지를 포괄하면서도 역동적으로 존재하는 신이라고 얘기한다. 1번 2번을 3번 안에 포섭시켜서 말한다면 제1원리, 최고 원인으로 삼아야만 하는 것이고, 이게 바로 실존적인 신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면 실존한다라고 하는 것에는 지속적으로 생성되고 있는 것, 여기서 신이 우주의 역사 속에서 신이 지속적으로 활동한다고 하는 것이 계속해서 도출되어 나오기 시작한다. 그러면 아우구스티누스 얘기는 다음번에는 하겠는데, 헬라스의 철학적 사변이라고 하는 것, 지성으로써 알 수 있는 세계, 그것에 관한 헬라스의 철학적 사변과 유대 기독교의 종교적 계시, 계시라고 하는 건 단적인 명령이다, 그 둘이 어떻게 결합될 수 있는가 라는 것은 굉장히 까탈스러운 문제이다. 왜냐하면 전혀 그 원천이 다른 영역에서 등장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이 부분을 플로티노스를 읽은, 신플라톤주의를 읽은 아우구스티수스, 에티엔 질송은 여기서 아우구스티누스와 아퀴나스 두 사람을 얘기하는데, 흔히 그 계보를 단순화해서 말할 때는 플라톤의 계보에서 아우구스티누스 그다음에 아리스토텔레스의 계보에서 토마스 아퀴나스를 얘기한다. 물론 플라톤의 얘기를 전적으로 아우구스티누스가 받아들여서 뭘 한 것도 아니고, 토마스 아퀴나스가 아리스토텔레스 얘기를 전적으로 받아들여서 뭘 한 것도 아니지만, 대체로 사유하는 큰 방향, 그들이 주로 활용하였던 사상 자원 그렇게 생각한다면 아구스티누스는 플라톤 그리고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 그렇게 전개되어 나간다. 그것들을 보는 게 챕터2 신과 그리스도교 철학의 핵심적인 내용이 될 것이다.
그 이전에 먼저 유대인의 신의 특성인 세 가지, 유일성, 인격적 존재 그리고 그 둘을 포괄하고 있는 신의 이름, 실존하는 존재로서의 신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겠다. 여러 번 오늘 말하듯이 이것은 지성으로써 알 수 있는 세계가 아닌 단적으로 주어지는 명령되는 것으로서의 신이다 라는 것을 꼭 유념해 둘 필요가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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