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원의 책담화冊談話(https://booklistalk.podbean.com)에서 제공하는 「ε. Gilson, God & Philosophy」를 듣고 정리한다.
2024.05.27 ε. Gilson(14), God & Philosophy, Ch. 2
에티엔 질송, ⟪철학자들의 신 - 역사적 개관⟫(God and Philosophy, 2002)
텍스트: https://buymeacoffee.com/booklistalk/god-philosophy-ch-2
지난 시간에는 아우구스티누스가 포르퓌리오스를 거쳐서, 정확하게 말하면 플로티노스의 책을 편집한 사람이 포르퓌리오스니까, 예전에는 포르퓌리오스에 대해서는 좀 가볍게 그냥 편집자로서 생각을 했는데 포르퓌리오스가 내놓은 편집의 성취가 《엔네아데스》니까, 물론 포르퓌리오스가 편집했다고는 하지만 문헌학자들은 당연히 플로티노스의 저작임을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 그것을 제가 문헌학 전문가도 아닌데 뭐라고 할 수 있는 그런 상황은 아니지만 마음 한편에는 그런 생각을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다. 포르퓌리오스가 편집한 플로티노스를 통해서 플라톤을 읽었다고 하는 것, 그렇게 읽은 플라톤을 또 요한복음에 있는 내용을 입혀서 또 읽고, 그렇게 읽으면서 자신의 생각을 《고백록》에서 내놓았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플라톤을 읽는 우리가 아우구스티누스를 읽을 때 그 두 개의 상위相違를, 서로 다른 점들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플라톤의 인간관을 단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
플라톤의 인간관 역시 논란의 여지가 많은 주제이긴 하지만 《티마이오스》에 있는 구절을 한번 제가 생각을 해보면 지금 에티엔 질송은 플라톤의 인간을 "인간은 몸을 사용하는 영혼이다"라고 표현을 하고 있다. 그러니까 에티엔 질송이 플라톤이 말하는 인간의 본질은 "몸을 사용하는 영혼이다"라고 하면, 플라톤에서는 영혼이라고 하는 것이 몸 안에 들어있다고 하는데, 《티마이오스》 30b에 보면 "지성을 혼 안에 혼은 몸통 안에" 되어 있는데 이 구조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달려 있겠다. 그래서 인간은 몸을 사용하는 영혼이고 그에 따라서 인간은 영혼과 몸의 실체적 연합이 아니라 본질적으로는 영혼이라고 하는 해석을 내놓는다. 이것은 분명히 질송의 해석이다. 그렇다면 sōma, psykhē, nous의 구분이 엄격하게 이루어졌다고 보는 게 질송의 입장이다. 그러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명상록》 3권 16절에서 얘기하는 "신체, 영혼, 지성"이라고 하는 3분법과 질송이 해석해내는 플라톤의 영혼, 몸, 지성이 같은 것이 되고 만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텍스트에서는 이게 분명한데, 저는 《티마이오스》에 있는 "지성을 혼 안에 혼은 몸통 안에"라고 하는 것이 "인간의 본질은 영혼이다"하는 것으로 가는 것은 조금 의문의 여지가 있다. 그런데 그런 여지가 있다는 것은 일단 내버려 두고 질송의 논지를 따라가보기로 한다.
87 플라톤의 말을 인용하자면 인간은 "몸을 사용하는 영혼"입니다.
《티마이오스》 30b 바로 이런 헤아림(logismos)을 통해서, 그는 지성을 혼 안에, 혼은 몸통 안에 함께 있게 하여 이 우주를 구성하였는데, 이는 자기가 완성해 낸 제작물이 그 본성에 있어서 가능한 한 가장 아름답고 가장 훌륭한 것이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명상록》 3.16 신체, 영혼, 지성. 신체에는 감각, 영혼에는 충동, 지성에는 믿음(원리).
질송의 논지를 따라가 보면 인간은 신의 빛을 나누어 가진다. 여기서 도출되는 얘기가 그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가진 빛을 충분히 인식하도록 스스로를 고양하여 철학적 구원을 획득한다. 이것이 이제 질송의 플라톤 해석이다. 그러면 신의 빛을 나누어 가진다. 자신이 가진 빛을 충분히 인식하도록 스스로를 고양하여 철학적 구원을 획득한다고 하는 것은 질송이 스토아 철학을 입혀서 읽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렇게 해석을 하면 플라톤에 있어서 sōma는 전적으로 폐기되어버리는 영역에 있다. 그런데 이렇게 해석을 하면 아우구스티누스가 가져가기는 아주 좋은 그런 상태가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 쟁점으로 삼아야 할 것 그리고 우리가 반드시 고려해야 될 것은 아우구스티누스가 가지고 있는 플라톤이라고 하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늘 고려하고 염두에 둔 채로 읽어야 한다 하는 것이다.
88 플라톤과 플로티노스가 이해한 변증법은 인간이 자기 고유의 신성을 충만히 인식하도록 자신을 점점 고양하여 철학적 구원 같은 것을 획득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질송의 해석을 그렇게 두어 두고, 그렇지만 기독교 철학에서는 형이상학적으로 말하자면 인간은 실적 신적 질서에 속하지 않는다. 인간은 신적인 것을 부여받은 피조물이다. 이것은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서나 아퀴나스에 있어서나, 보나벤투라도 그렇고 둔스 스코투스도 그렇고 모든 기독교 철학자, 기독교 신학자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전제이다. 그런데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를 신적인 피조물로 본다 하는 것을 바탕에 놓는데, 인간이 스스로를 고양해서 신적인 위치로까지 올라갈 수 있겠는가, 즉 sōma를 가진 존재로서의 존재는 자연적 인간인데 자연적 인간이 deification, 즉 theosis가 가능한 존재일 수 있는가, 이것에서 아우구스티누스와 아퀴나스가 결정적으로 갈라진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어쨌든 그가 읽은 플라톤에 따라서 인간의 신적 본성이라든가 신이 될 가능성을 제거했다. 그런데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는 신이라고 하는 것은 고작해야 dēmiourgos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보기에는 플라톤의 신은 dēmiourgos이고 그 위에 있는 최고 원리로서의 신은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영역으로 제1원리로써 있을 뿐이다. 그렇게 읽을 수 있겠는가. dēmiourgos을 닮아야 한다 라고 하는 것은 플라톤이 여러 차례 말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읽는 것이 일정한 정도로 정합적이긴 하다. 그런데 아퀴나스에서는 자연적 인간이 deificatio가 가능한 존재라는 걸 전제로 하게 된다. 그러면 거기서 자연신학의 hierarchy가 성립한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에서는 그렇지 않다. 그래서 진리를 안다는 것은 신이 어쩌다 한 모금 내려주는 은총, 즉 신의 빛 안에서만 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미사통상문에서는 "포도주의 신비를 허락한다"라고 얘기를 한다. 바로 그런 점에서 알기 위해서는 믿어야 한다. 그러니까 일단 믿음이 있은 다음에 앎이라는 게 가능하다. 이게 안셀무스 칸투아리엔시스, 즉 켄터베리의 안셀름의 표현이다. credo ut intelligam, 이 표현이 굉장히 어이가 없다 라고 생각했는데, 믿으면 알 수 있다 라는 것이었고, 믿으면 알 수 있다 라고 하는 말은 일단 확증편향을 가져라 라는 뜻이 아니라 신의 존재 안에서 신의 빛 안에서만 우리의 앎이 가능하다 라고 하는 표현이다. 그러므로 아우구스티누스가 생각하는 인간의 진리 도달 범위는 안셀무스에 있어서 credo ut intelligam이라고 하는 명제로 뚜렷하게, 《프로슬로기온》은 번역되어 있다. 안셀름의 《프로슬로기온》 첫째 명제에서 이게 얘기가 되고 있다. 영어로 옮겨보면 I believe so that I may understand. 나는 믿는다 이해하기 위해서. 그다음에 《프로슬로기온》의 서문을 보면 그것을 또 다른 형식으로 표현한 게 있다. fides quaerens intellectum[faith seeking intelligence], 앎을 추구하는 믿음. 여기서 faith와 intelligence의 관계는 여기서 안셀름에서 끝나는 문제도 아니고, 사실 아퀴나스에서는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되질 않는데, 아우구스티누스하고 안셀름에서 끝나는 문제가 아니라 관념주의에서 계속 문제가 된다. 예를 들면 헤겔의 논문 《믿음과 지식Glauben und Wissen》이라고 하는 게 있다. 이제 종교와 철학의 관계의 문제이다. 그래서 종교와 철학의 관계 문제를 얘기할 때는 faith and intelligence라는 표현을 쓰는데, 이때 faith라고 하는 게 intelligence의 전제라고 한다면, 일단 믿음이 있어야 하고 그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 신이 인간에게 어떤 빛을 비추어 주었고, 인간에게 비추어진 그 빛의 영역 안에서만 앎이 가능하다, 데카르트 얘기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아우구스티누스 그다음에 안셀름 그다음에 둔스 스코투스를 거쳐서 데카르트까지 이어지는 계보가 성립 가능하다.
89 형이상학적으로 말하자면, 그리스도교 철학에서 인간은 신적 질서에 속하지 않습니다.
90 지극히 가지적이고 스스로 존속하는 진리의 영원한 빛, 말하자면 신의 빛 안에서 인간이 진리를 안다고 간주하는 방법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얘기를 다시 정리를 해보면 진리는 본래 신적인 것이고 인간은 신이 아니다. 거기부터 바로 도출되는 것은 인간은 진리를 가질 수 없다. 가질 수 없다 라고 하는 표현에 강조가 있다. 그러니까 인간은 본래적으로는 진리를 가질 수 없다. 가질 수 없는 존재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진리를 가지는 경우가 가끔 있다. 그것은 인간 안에 신적인 영혼이 있기 때문이며, 이 영혼은 신이 인간을 창조할 때 부여한 것이다. 본질적으로 인간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진리를 가질 수 없지만 그래도 가끔은 가질 수 있다. 그 까닭은 신이 인간을 창조할 때 영혼을 부여했다. 그것이 바로 신의 빛 안에서만 앎이 가능하다. 이것이 아우구스티누스하고 안셀무스하고 둔스 스코투스 그리고 근대 철학이라고 하는 데카르트에까지 연결되는 지점이다. 그래서 데카르트의 형이상학에서는, 이 부분은 《철학 고전 강의》의 데카르트 부분을 참조하면 되는데, 데카르트 형이상학에서는 우리가 어떤 인간이 진리를 갖는다 하는 것에 있어서는 신의 보증이 바로 암묵적으로 전제되어 있다. 그리고 바로 인간이 진리를 갖는다고 하는 것이 곧바로 신존재증명이 되어 버린다. 말이 안 되는 것 같지만 이게 아우구스티누스의 신존재증명이다. 즉 인간이 진리를 갖는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고 유한한 존재이고 인간의 앎이라고 하는 건 아주 조금, 기껏 가진다 해도 아주 조금만 가질 수도 있는데, 신이 인간에게 정신이라고 하는, 영혼이라고 하는 것은 정신이라고 말할 수 있고, 정신이라고 하는 신적인 속성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신이 인간에게 창조할 때영혼을 부여했고 그 영혼은 신적인 속성이다 라고 하는 것도 사실은, 그게 바로 관념주의의 숨겨져 있는 제1 전제인데, 그것은 깨뜨려질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의 앎이라고 하는 게 전적으로 유한한 감각에만 의존하고 있다 라는 것을 확실하다고 받아들여버리면 신존재 증명은 여기서 파탄에 이른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의 신존재증명 그리고 안셀무스나 둔스 스코투스나 데카르트의 신존재 증명이 다 이런 맥락 속에 있는데 이것이 관념주의의 기획이다. 그리고 이 관념주의가 파탄에 이르는 것은 아주 명백한데, 오늘날은 이것은 파탄에 이르렀다. 어찌 보면 이것은 과거의 판타지를 우리가 붙들고서 있는 게 아닐까 라고 생각을 해보게 된다. 그리고 관념주의가 파탄에 이르렀다고 하면 사실 자연과학의 절대적 진리 값을 내놓을 수 없다는 것으로도 이어진다. 모든 학문이 파탄에 이르게 된다. 그러니까 고대 헬라스의 자연철학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으로부터 인간 철학으로 가는 소크라테스의 경로가 하나 있고, 그 경로를 더 밀고 가면 플라톤으로 귀결이 된다. 플라톤으로 귀결이 되면 이제 질송의 플라톤 해석을 따라간다면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는 신적인 측면이 있다. 영원불멸한 신적인 측면은 영혼이다 라는 것이 관념론의 기획이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 세계에 있는 것들도 신적인 질서 안에다 집어넣어서 거대한 존재의 연쇄를 만들어냈고, 그것이 중세로 오면 플라톤의 관념론 기획의 구도를 가지고 신 안에서만 앎이 가능하다 라고 하는 것이 아우구스티누스고 헤겔에 이르기까지 계속 관념주의의 기획으로 이어진다. 그렇게 관념주의의 기획으로 가면 결국 감각 세계는 알 수 없는 것이 된다. 감각 세계는 철저하게 배척되는 것이고, 알 수 없는 건 mystērion이니까 감각 세계에 대한 신비주의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데카르트를 읽어보면 감각적인 사물들에 대한 앎이 불가능해진다. 의외로 신이 우리에게 부여한 이성의 빛을 가지고 감각적인 사물들을 그때그때 알아낼 뿐이지 그것에 대한 확고한 진리는 가질 수가 없게 된다. 그것이 관념주의의 결정적인 파탄이다. 인간이 진리를 안다는 사실 자체가 신의 실존Existenz을 확실하게 입증한다 하는 그런 기묘한 신존재증명이 도출된다. 그리고 진리를 찰나적이나마 안다는 것이 진리를 가진다는 것을 함유하지는 않는다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지점이다. 플라톤과 플로티노스 두 사람은 안다는 것이 가지는 것이다 라고 얘기를 했던 반면에, 아우구스티누스의 기독교에서는 인간이 아니라 신만이 진리를 가지며 신 안에서만 진리를 알 뿐이지 가질 수는 없다. 여기까지 아우구스티누스의 논지가 전개가 되었다. 플라톤처럼 또는 플로티노스는 그냥 올라가면 된다. 상승해서 영원히 신적인 영혼이다 라는 것, 그러니까 신적인 영혼을 sōma의 억압에서 벗어나서, 물론 sōma의 억압에서 벗어나서 라고 하는 말은 플라톤에 전적으로 해당되지 않을 수 있고 다르게 읽을 수 있다. 그런데 일단 질송의 해석에 따라서 읽어보면 신적인 영혼은 그냥 쭉 따라서 올라가면, 플로티노스도 명백하게 《엔네아데스》에서 그렇게 얘기를 한다, emanatio를 거슬러 올라가면 illuminatio이다. 이제 플로티노스의 illuminatio의 경로를 따라가는 것이다. 이 경로를 따라가지 않으면 아우구스티누스의 기독교이다. 물론 토마스 아퀴나스는 자연신학을 얘기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존재의 대연쇄를 구상한다. 그렇다고 해서 토마스 아퀴나스가 기독교의 대전제를 포기하지는 않았다. 인간은 신적인 것을 부여받은 피조물이다. 어찌보면 토마스 아퀴나스가 살짝 아슬아슬한 간발의 차이로 또는 터럭 하나의 차이로 무신론에서 벗어난, 거대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가 되고야 말았을 터인데 간발의 차이로 벗어난 게 아닐까 생각이 된다. 여기까지가 일단 결론이다. 기독교에서는 인간은 신 안에서만 진리를 알 수 있을 뿐이지 가질 수는 없다는 것이다.
91 인간이 진리를 안다는 사실 자체가 신의 실존을 확실하게 입증합니다.
91 그리스도교에서는 인간이 진리를 소유할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은 결코 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인간은 진리를 가질 수 없는가. 인간과 신의 존재론적 규정의 차이에 있다. 신은 본질이라고 하는 것. 신이라고 하는 존재는 essentia가 vere esse, 비물질성이고, 오로지 지성을 통해서 알아야 알 수 있는 것이고, 불변성, 통일성만을 가진 존재이고, 우연적이고 가변적인 속성은 전혀 갖지 않은 존재이다. 그러니까 what is it for a thing to be, 어떤 사물은 무엇으로써 존재하는가 라는 질문을 해보면 It is to be that which it is, 그것은 그것으로 있음으로써 있다. 그러니까 신이라고 하는 존재는 비물질성, 가지성, 불변성, 통일성만으로써 있다. 그렇게 얘기하는 반면에 인간을 비롯한 현전하는 것들은, 현전은 우연적으로 그냥 우리 눈앞에 놓여 있는 것만을 말한다, 참으로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아우구스티누스에서는 우주의 사물들, 이것은 자연 사물인데, 자연 사물들은 그냥 하나의 표징sēmeion에 불과한 것이고, 희미한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고, 신에 대한 관념은 신 자신 그리고 신적 정신을 나누어 가진 인간의 영혼에서만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플로티노스의 구도를 그대로 갖고 있다. 플로티노스에서는 저 밑바닥에 놓여 있는 자연 사물들은 신적인 정신은 거의 발견하기도 어려울 정도로만 가지고 있다. 그런데 아우구스티누스는 그것마저도 허용하지 않고 신적 정신을 나누어 가진 존재는 인간 영혼뿐이다. 그 얘기가 보나벤투라의 《하느님께 이르는 영혼의 순례 Itinerarium mentis in Deum》에도 나오는데, mentis를 대체로 영혼이라고 번역을 하는데, 도이치어로 Pilgerbuch der Seele zu Gott, mens는 animus의 최상층, animus가 인간의 영혼psykhē이라면 그것의 최상층은 Seele라고 하는데, 보나벤투라 얘기를 더 하려면 Seele와 Geist, Geist는 대체로 pneuma에 대체로 대응하는 말인데, 이것의 구분을 더 얘기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그냥 보나벤투라도 아우구스티누스, 안셀무스의 계보 안에서 놓을 수 있다. 그러고 이 사람들이 바로 이제 신비주의자다. 그런데 이들이 신비주의자라고 하는 것은 우주의 사물들을 표징에 불과하다는 것으로 본다는 점에서 신비주의이다. 신은 우리에게 뭔가를 감추고 있다 라는 의미에서의 신비주의는 아니다 라는 것을 유념해 둘 필요가 있겠다.
92 아우구스티누스는 철학적 용어로 실존을 설명하는 일에 착수하면서 존재를 비물질성, 가지성, 불변성, 통일성 개념과 동일시하는 그리스적 방법에 빠졌습니다.
93 '어떤 사물이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what is it for a thing to be라는 물음에 '그것이 그것으로 있다는 것이다'It is to be that which it is하고 대답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정도로 정리를 하고 토마스 아퀴나스를 다음에는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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