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담화冊談話 | 시학 강독 7-1

 

2024.06.05 🎤 시학 강독 7-1

7강. 비극과 서사시

• 2024. 6. 5. 오후 7시-9시  장소:수원시글로벌평생학습관

• 강의 안내: https://learning.suwon.go.kr/lmth/01_lecture01_view.asp?idx=3672
• 강의 자료: https://buymeacoffee.com/booklistalk/20240605-suwon


호메로스의 서사시를 즐길 줄 아는 능력을 가지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 오늘은 비극과 서사시이다. 호메로스의 서사시를 잘 어떤 지점을 잘 읽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은 모든 문학 작품을 읽는 가장 기본적인 것이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을 읽을 때애도 현대편부터 읽기 시작하면 끝내 잘 읽을 수가 없다. 문학 작품은 일단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를 읽은 다음에 다른 걸 읽어야 된다.  

[강의자료를 보면] 일단 서사시의 구성 준칙이 있고, 두 번째 항목이 서사시에 제기되는 문제들, 서사시에 대한 비극의 우위로 되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호메로스의 문제들⟫(Aporēmata Homērica) 6권을 저술했으나 소실되었다고 한다."라는 얘기가 있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가 쓴 《위대한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상》을 보면 아리스토텔레스가 《호메로스의 문제들》이라고 하는 책을 썼다고 나온다. 《시학》에서 비극과 서사시 부분은 《호메로스의 문제들》에 있는 내용 중에 핵심을 정리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니까 아리스토텔레스는 서사시에 대해서도 굉장한 식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서사시에 대한 비극의 우위라고 되어 있는 부분을 보자. "비극은 서사시가 가진 것을 다 가지고 있으며, 음악적 요소와 시각적 요소도 있다." 비극에는 코로스, 노래가 있다. 공연을 하니까 무대 장치가 있고 음악적 요소와 시각적 요소가 있다. 그러다 보니까 실제로 공연이 생생하다. 비극 드라마는 서사시보다는 훨씬 생생하다는 것, 생생하다는 점에서 비극이 우위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생생함이 있을 경우에 카타르시스가 훨씬 더 잘 쏟아져 나오니까 그게 좋다고 얘기를 하는 것 같다. 어떤 것을 선호하는지는 보편적인 기준이 없다. 왜냐하면 삶의 경험에 따라서 생겨나는 것이어서 그렇다. 그다음에 "모방의 목표가 더 짧은 길이에 의해 성취된다." 더 짧은 길이에 집중성이 있다. 서사시의 길이가 길어서 긴 것을 못 견디는 사람들은 비극을 본다. 그다음에 "행동의 통일성이 더 높다." 이것은 조금 이따 보충 설명을 하겠는데, 아무래도 드라마는 무대 위에서 짧은 시간 안에 집중적으로 해야 되니까 자잘하게 이런저런 거 할 거 없이 그것만 딱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다. 그다음에 "특정한 쾌감, 즉 연민과 공포에 기인하는 쾌감을 더 많이 산출한다." 연민과 공포에 기인하는 쾌감이 바로 카타르시스이다. 카타르시스를 더 많이 산출한다. 그것은 1번, 2번, 3번 모든 게 다 잘 모였을 때 카타르시스를 더 많이 산출해낼 수 있을 거라고 본다. 이것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서사시에 대한 비극의 우위라고 이야기한다. 그렇다고 해서 서사시가 비극보다 한참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첫 번째 항목에 "음악적 요소와 시각적 요소도 있다"고 했는데, 그 두 가지를 빼면 서사시도 비극과 같은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고 얘기할 수 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서사시에 대해서 공부를 한다고 하면 《시학》을 가지고 공부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공부했던 《시학》에서의 비극에 관한 얘기들이 있는데, 그런 비극에 관한 것들을 바탕으로 해서 서사시에 대해서 조금 더 보충하면 서사시에 대한 공부가 된다. 

서사시에 대해서 공부를 해두는 게 중요한 게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아무리 해도 이성적인 추론이나 논변이나 이런 것에 바탕을 둔 글만 있는 게 아니다. 문해력이 높다 라고 하는 것은 문학적인 작품들을 읽고 이해하는 것이 있다. 그런 것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는 서사시가 꼭 필요하다. 그리고 서양에서는 핀다로스의 시와 같은 서정시도 있는데, 서정시는 그렇게 널리 발전하지 않았다. 고대 서양 문학의 출발점은 대체로 봐서 서정 시인을, 제가 서양 서정시를 읽어보려고 했는데 읽어보니까 정서가 맞지 않아서 안 읽힌다. 서정시를 이해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는 식생에 대한 이해이다. 식생이 사람을 만든다. 그래서 일본 사람들은 자연물에 대한 숭배가 굉장한 것이다. 인격신이 발전하지 않고 자연물을 인격화한 애니미즘이 발전한 것이다. 굉장히 중요한 정서의 표현이다. 그러니까 서정시는 영원히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 살아보기 전에 이해 안 되는 것이다.  

서사시의 구성 준칙을 보면 서사시은 구성된 것이기 때문에 "처음-중간-끝을 가진 하나의 유기적 전체로 구성해야 한다." 이것은 비극과 마찬가지이다. 서사시는 처음과 중간과 끝이 비극하고 달리 길다는 차이가 있다. 길이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유기적 전체로 구성한다는 건 마찬가지이다. 유기적 전체로 구성을 하기는 하되 모든 자잘한 얘기를 다 쓰는 게 아니라 "전체의 일부만을 떼어낸 다음 다른 부분을 삽화로 이용"한다. 이것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 23장에서 dis dialambanei라고 한다. "이원화"라고 하는데 "이중적으로 배치"한다 라는 뜻이다. 그러면 여기 첫 번째 항목인 "유기적 전체"로 잘 구성되어 있으면 서사시이다. 그냥 얘기를 주절주절 써놓으면 역사 서술인데, 물론 오늘날의 역사 책과 지금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역사와는 다르다. "역사는 우연적 사건들을 필연성 없이 서술", 여기서 역사라는 말은 연대기를 말한다. 오늘날 우리가 역사책이다 라고 하는 것은 서사시이다. 서사로 구성을 한다. 우연적 사건들을 모아서 자기가 역사 속에서 중요하다 여기는 것들을 골라내서 서술한다. 그러니까 오늘날 역사 책은 좁은 의미에서 서사narrative이다. 서사라고 하는 말은 무슨 이야기를 주절주절하는 게 서사이기도 하지만 좁은 의미에서, 본격적인 의미에서의 서사는 지금 서사시를 말한다. 서사시라고 표현해도 되고 서사라고 말해도 된다.

 

지금부터 서사narrative를 얘기를 해보겠다. 언제나 이 얘기가 나오면 하는 말인데, 자기 인생에 대해서 얘기를 해봐라 그러면 태어나서 지금까지를 기억나는 대로 모두 다 말하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역사 서술, 연대기 서술이다. 궁금해하지 않는다. 그래서 서사를 구성한다고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핵심 계기를 찾는 것이다. 그다음에 핵심 계기에 도움이 되는 부수적 계기들을 찾아서 구성하는 것이다. 이게 바로 이중적 배치이다. 여기보면 사태의 가운데로 in medias res라고 되어있다. 서사시의 구성 원칙은 in medias res, 이것이 제일 처음으로 나온 전거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중적 배치라고 하는 말이다. "호메로스는 전체의 일부만을 떼어낸 다음 다른 부분을 삽화로 이용"했다. 삽화는 episodion, 끼워넣었다는 말이다. 핵심 계기를 하나 만들고 부수적 계기를 여기다 끼워넣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기본적인 서사 구성 방식이다. 핵심 계기와 부수적인 계기는 시인이 정한다. 그러니까 서사라고 하는 것은 사태에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항상 시인이 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사물을 시인의 머릿속에 있는 관념으로 관념으로 배치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서사는 관념의 산물이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서술하는 것은 서사가 아니다. 세상의 모든 서술은 있는 그대로가 아니다. 있는 그대로 우리에게 그냥 오지 않는다는 것을 항상 생각을 해야 된다. 서사는 그 목적이 무엇인가에 따라서 잘 짜는 게 중요하다. 그리고 우리는 뭐든지 서사로 만들어서 기억을 하려고 노력을 해야 된다. 

일단 하나, 유기적 전체로 구성해야 한다. 그러니까 비극도 마찬가지고 서사시도 마찬가지로 유기적 전체로 구성한다. 그러니까 유기적 전체로 내가 잘 구성을 했는데, 읽는 사람이 이것을 가지고, 비극은 유기적 전체로 구성했음에도 시각적 요소와 음악적 요소가 있어서 카타르시스를 만들어내는데, 서사시는 그런 것을 만들어내기 생생함이 떨어지니까 어렵다. 그러니까 서사시를 읽고 쾌감을 얻으려면 굉장히 노력을 많이 해야 된다. 읽고서 그것이 가지고 있는 핵심 계기와 부수적 계기가 뭔지를 일단 찾아내야 하니까 읽기가 어렵다. 드라마는 꼭 그 핵심적 계기가 무엇인지를 모른다 해도 드라마의 여러 장치들에 의해서 이것이 핵심적인 계기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줄 수가 있다. 그런데 서사시는 아니다. 그 부분의 글자를 크게 써주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 그러니까 서사시인들은 독자들이 못 알아차릴 위험이 있으니까 규칙에 따라서 한다. 벗어나질 않는다. 그러니까 서사시에 있는 규칙을 잘 알아차리는 것이 좋다. 그러면 narrative, 서사 좁은 의미에서의 서사, 좁은 의미의 서사라고 할 것도 없는게 세상의 모든 이야기를 서사라고 하니까, 이것의 반대말이 novel이다. novel이라는 게 새롭다는 말도 되는데, narrative는 항상 핵심 계기와 부수적 계기를 가지고 짜 맞춘다. 유기적으로 구성한다. 그런데 novel는 산문散文이다. 산문라고 하는 말이 단순히 운율이 없다는 의미에서의 산문이 아니라 흩어져 있는 문장이라는 뜻이다. 소설은 작법이라는 게 없다. 아무 얘기나 막 쓰는 게 산문이다. 서사는 유기적 전체를 구성하지만 산문은 유기적 전체를 구성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서사는 관념에 따라 구성하는 것이고, 소설은 collect하는 것이다. 소설은 어디를 읽고 어디를 즐겨라 라고 말할 수가 없는데, 구조가 없기 때문이다. 뭐가 중요하다, 어느 부분을 읽고 괜찮았다 라고 생각하는 것은 누구나 자기 마음이다. 소설을 비하하는 게 루카치가 《소설의 이론Die Theorie des Romans》에서 근대의 소설은 근대의 산문 형식이라고 했다. 근대인이 되니까, 루카치는 괴테의 《파우스트》로써 서사시의 시대는 끝났다는 것이다. 우리가 유기적 전체로서 세계를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서사시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 핵심이고 무엇이 부수적인가를 자기가 눈앞에서 펼쳐진 사태를 보고 알아차릴 수 있어야 되는데,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어떤 것이 말하자면 main이고 어떤 것이 subsidiary한 것인지 알 수 없는 세계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에 적합한 형식이 하나 나왔는데 그게 roman이다. romantic하다는 것은 아무런 형식이 없다는 뜻이다. 제멋대로인, 그래서 소설이다, 그러니까 narrative의 반대말이 novel, roman이다. 소설은 아무거나 아무 얘기나 쓴 것이니까 그냥 읽으면 된다. 그렇지만 소설의 형식을 띠고 있는, 소설인 것 같지만 사서들이 더러 있다. 그럴 경우에는 어떻게 읽어내느냐가 문제가 되는데, 서사라고 하는 것에 대한 이해가 있으면 그것을 찾아낼 수 있겠다. 소설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는 가르쳐줄 수 없다. 그냥 각자 읽으면 되는데 서사는 규칙이 있다. 규칙이 있다는 것은 고전Classic이고, 규칙이 없는 것을 Roman, 낭만적이라고 말한다.  

어쨌든 첫째가 하나의 유기적 전체로 구성하는데 이중적으로 배치된다. 그다음에 "비극과 종류가 같아야 한다." mythos가 단순하냐 복잡한가가 있고 그다음에 성격을 드러내 보여주는 것안가 아니면 고통을 드러내 보여주는 것인가가 있는데, 구성은 단순하게 되어 있는데 주제가 고통이다 하는 것의 대표가 《일리아스》이다. 구성이 단순하다. 《일리아스》을 읽다 보면 딱히 다른 얘기가 없는데, 간단히 말하면 다음에 무슨 사건이 일어날 것인지 예견이 가능하다. 그것이 단순한 구성이다. 아킬레우스가 화가났다. "분노를 노래하소서, 여신이여.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 가 시작이다. 분노가 유발한 사건들이 무엇인가. 아킬레우스가 열받아가지고 안 나가니까 친구 파트로클로스가 나갔고 그래서 파트로클로스가 죽고, 파트로클로스가 죽으니까 아킬레우스가 열받아서 전쟁터에 나와서 헥토르를 죽이고, 헥토르가 죽으니까 프리아모스 왕이 와서 헥토르 시신을 달라고 하니까 아킬레우스도 마음이 아프고, 그래다가 결국 얘기가 끝나는데 너무 간단하다. 아킬레우스의 분노에 의해서 시작된 파트로클로스, 헥토르의 죽음이 일어난 고통이다. 그런데 《오뒷세이아》는 일단 복잡하다는 것인데, 복잡하다는 것은 반전과 발견이 전체에 걸쳐 있다. 《오뒷세이아》 첫 부분을 보면 "그 남자에 대하여 내게 들려주소서, 무사 여신이여. 꾀가 많은 그 사람"이다. 응변에 능한 자로서 꾀가 많은 사람이다. 꾀가 많은 이라는 것이 오뒷세우스라고 하는 사람은 굉장히 복합적인 성격을 가진 사람이라는 말이다. 오뒷세우스라고 하는 사람을 얘기할 때 polytropos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poly는 많다는 뜻이고, tropos는 아주 다양한 얼굴, 다채로운 사람이라는 뜻이다. 오뒷세우스라고 하는 사람에 대해서 첫 문장에 규정을 해놓았는데, 이미 수없이 많은 반전이 있을 거라고 하는 것을 예상케 하는 것이다. 《오뒷세이아》는 구성 자체가 복잡한 것이고 그다음에 성격 드라마라고 하는, 등장인물들의 다양한 성격에 의해서 자아 정체성을 만들어낸다. 서사시에 대해서 이해를 한다고 하면 《오뒷세이아》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오뒷세이아》를 잘 읽고 여러 번 읽고 정확하게 규칙이 뭔가를 찾아내서 이해해두면 이서사적 소설들도 이해할 수가 있게 된다. 

그다음에 "놀라운 것의 허용. 서사시에서는 더 많이 허용된다." 갑작스러운 사태들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예상치 못한 사태들을 허용한다. 비극이나 서사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다음 "거짓을 제대로 말하는 방법"과 그 아래에 "적절하게 섞어hedynein", 이 두 개는 픽션이라고 하는 허구의 이야기, 픽션이라고 하는 것을 비극이나 서사시나 용납할 수 있다는 말이다. 거짓을 제대로 말하는 방법은 그럴싸하게 말해야 한다는 얘기이다. "경험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라해도 창작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창작의 내적 일관성이 유지된다면 자연의 법칙과 생존의 본질적 조건이 희생될 수 있다." "창작의 내적 일관성이 유지된다면"은 다르게 말하면 "미학적 쾌감을 준다면"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오류추론(예, 후건긍정의 오류)도 허용된다." 후건긍정의 오류라든가 전건부정의 오류는 논리학에서 사실 가장 기본적인 것인데, 예를 들면 사람들이 착각하기 쉬운 오류들이 있다. 강유원이 선생이라면 강의를 열심히 한다. if로 된 문장이다. 그러면 강유원은 강의를 열심히 한다. 그러면 그는 선생이다 라고 하면 틀리다. 뒤에 있는 것을 긍정한다고 해서 앞이 맞는 건 아니다. p라면 q다 라고 하면 p 안에 q가 들어갈 수 있었지만 q가 p의 전부는 아니다. 이런 것들이 후건긍정의 오류이다. 이제 드라마에서는 이런 걸 써도 된다는 얘기이다. "부조리한 장면은 다른 좋은 장면들과 적절하게 섞어(hedynein, 양념을 쳐서 조미하다) 눈에 띄지 않게 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이 hedynein이라고 하는 말을 쓴다. 양념을 친다는 것은 거짓을 제대로 말하는 방법에 용납이 된다. 이런 것들은 다 예술적 기교에 해당하는 것이고 이런 기교에 해당하는 것들은 괜찮다는 것이다. 

그다음에 서사시에 제기되는 문제들, 서사시가 되었건 비극이 되었건 제기되는 문제들, problēmata라고 되어 있는데, 사람들이 서사시를 가지고 이렇게 저렇게 뭐라고들 할 텐데 이런 것들에 대한 질의응답이다. 《시학 》24장에 있는 얘기인데, "시인은 모방자인데 세 가지 중 하나를 모방해야 한다. 어떤 것의 과거나 현재의 상태(어떻게 있었는지), 어떤 것의 과거나 현재의 상태에 대해 말해지고 생각되는 것, 어떤 것이 어떻게 있어야 하는지(사물의 마땅한 상태)"를 모방해야 한다. 그다음에 "언어의 변형태, 외래어, 은유가 허용된다." 서사시가 되었건 비극이 되었건 이런 말장난이 허용된다는 얘기이다. 엄밀한 논변apodeixis에서는 이런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그다음에 세 번째 중요한데, "‘옳음’(orthotēs)의 기준이 정치술과 시 예술에 동일하게 적용되지 않는다." orthotēs는 올바름, 정당함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orthodoxy라고 하면 정통교리이다. 정치술, 실천적 행위의 올바름과 예술적 행위의 올바름은 다르다는 말이다. 올바름의 기준이 다르다. 흔히 서양에서는 예술가들에게 도덕의 잣대를 들이댈 수 없다 라는 얘기를 한다. 예술적 표현의 한계가 어디에 있는가를 가지고 계속해서 논란이 있을 수 있다. 그것에 옛날부터 있었던 것이라 아리스토텔레스도 여기에다 써놓았다. 논란이 있으니까, problēmata라는 것은 사람들이 제기하는 문제들이다. 

그다음에 "시인이 불가능한 행위, 사실이 아닌 것을 모방했을 경우 — 이상적인 것을 모방했다고 할 수 있다. 도덕적 당위가 아닌 미적 당위를 제시한 것이다. ‘사람들이 그렇게 말했다’는 식으로 해결할 수 있다." 그다음에 "극중 인물의 사악함(mokhthēria)이 필연적인 것도 필요한 것도 아닌데 도입되었을 경우에는 필연성이 있다면 가능하다." mokhthēria는 지나치게 잔인한 것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예술용어이다. 예를 들어서 셰익스피어 드라마에 대해서 문제가 많이 되는데, 맥베스가 mokhthēria가 아닌가 하는 얘기가 있다. 맥베스가 덩컨 왕을 죽인 것이 필연적이지 않더라는 것이다. 레이디 맥베스가 맥베스를 너무 다그쳐 가지고 그런 것이 아닐까 하는 것들을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 시대의 mokhthēria 문제는, 에우리피데스의 《메데이아》를 보면 사실 설득력이 없다. 메데이아가 애들을 너무 죽인다. 남편을 죽여야지 왜 애들을 죽여 라는 생각도 들기도 하는데, 이게 mokhthēria 문제이다. 이런 것들이 있다는 것, 서사시에 제기되는 문제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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