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담화冊談話 | 시학 강독 7-2

 

2024.06.05 🎤 시학 강독 7-2

7강. 비극과 서사시

• 2024. 6. 5. 오후 7시-9시  장소:수원시글로벌평생학습관

• 강의 안내: https://learning.suwon.go.kr/lmth/01_lecture01_view.asp?idx=3672
• 강의 자료: https://buymeacoffee.com/booklistalk/20240605-suwon


오뒷세우스가 만나는 인물들과 자아를 구축하는 서사 부분을 잘 봐야 된다. 자아를 구축하는 서사라고 했는데, 서사라고 하는 것은 구축하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 서술하는 건 것은 describe하는 것이고, 고대 그리스적인 의미에서의 역사이다. 《오뒷세이아》는 외부에서 벌어진 사건들을 가져다가 이렇게 쭉 놓고 그것에 대해서 오뒷세우스가 그 사건들을 대면하면서 자기가 그것에 대해서 뭔가를 해나가는 것의 과정을 얘기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오뒷세이아》는 자아 구축 서사로서는 가장 모범적인 본이 되는 텍스트이다. 《일리아스》에서 나오는 아킬레우스는 계속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아킬레우스이다. 아테네 여신을 만났을 때 오뒷세우스는 영웅으로서 등장하고 텔레마코스를 만난 오뒷세우스는 아버지이고,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에서 해야 되는 얘기가 있다, 그다음에 필로이티오스를 만났을 때는 주인 그리고 구혼자들을 만났을 때는 싸움하는 오뒷세우스가 되는 것이고, 페넬로페는 아내와 남편으로서 만나는 것이고 그다음에 라에르테스는 오뒷세우스가 아들이고 아버지하고 만난다.  

앞 시간에 오뒷세우스를 polytropos라고 얘기했다. 오뒷세우스는 polytropos한 사람이다 라고 하는 것을 항상 생각을 해야 된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도 어떤 국면이든지 똑같은 정체성을 가지고 인생을 살 수는 없다. 인생을 사는 가장 편리한 방법은 한 개의 정체성을 가지고 평생을 사는 것이다. 그런데 한 개의 정체성을 가지고 평생을 사는 것은 굉장히 힘들다. 언제 어디서나 똑같은 정체성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어렵다. 인간은 polytropos라고 하는 다양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어야만 하는데, 그래야 사회생활을 하는 최소한의 생활이 가능하다. 

《오뒷세이아》 1권 1행을 보면 "Tell me about a complicated man." Emily Wilson은 polytropos라는 희랍어를 complicated라고 번역을 했다. 복합적 인간 complicated man에 대해서 말해주시오라고 얘기한다. 그로면서 이 사람의 정체성이라고 하는 것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얘기한다. "트로이아에서 얻은 명성은 귀환 과정에서 소실되고 그가 만나는 타자에 의해서 다시 형성되는 정체성"인데, 트로이아에서 얻은 명성은 귀환 과정에서 소실되고 그가 만나는 타자에 의해서 다시 형성되는 정체성인데, self-identity가 형성이 된다. 《오뒷세이아》 구조를 보면 1-4권, 5-12권, 13-24권 이렇게 세 부분으로 나눠져 있다. 1-4권은 텔레마코스의 이야기인데 텔레마코스의 이야기는 일반적으로 오뒷세우스의 젊은 날 얘기라고 한다. 그러니까 지금 오뒷세우스의 젊은 날인 아들이 오뒷세우스가 전쟁터로 나가기 전에 젊은 날의 모습을 표상하는 있는 것인데, 1-4권까지는 아직 정체성이 형성되지 않았을 때이다. 오뒷세우스의 아들 텔레마코스가 그냥 아버지가 어찌되었는지 궁금해서 찾아보러 가야 될 것 같아요 라고 말을 하니까 텔레마코스의 유모가, 이게 중요한 부분인데, 2권 370행에서 이렇게 얘기한다. 그러니까 오뒷세우스의 유모이자 오뒷세우스의 아들 텔레마코스의 유모인 에우뤼클레이아가 이렇게 얘기한다. 지금 페넬로페는 자기 아들을 돌볼 틈이 없다. 구혼자들이 페넬로페에게 계속 와서 결혼하자고 난리를 죽이니까 그렇다. 그리고 이 서사시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절대로 정체성이 변하지 않는 사람이 페넬로페이다. 초지일관 배를 짜고 있다. 여기서 가장 신적인 존재가 페널로페이다. 페널로페가 배를 짠다는 것은 자기 의지로 세계를 구축한다는 의미이다. 

자아 구축 서사로서 《오뒷세이아》를 읽어보면 그렇게 되는데, 거기서 텔레마코스가 그녀를 방으로 불러서 어머니를 잘 돌봐달라고 하면서 "나는 스파르타와, 모래 많은 퓔로스를 가려 하니까, 내 부친의 귀향을 알아보며 혹시 무슨 소식이라도 들을까 하여"라고 얘기를 한다. 그러자 에우뤼클레이아가 이렇게 얘기한다. "대체 왜, 사랑하는 도련님, 심중에 그런 생각을 하셨나요? 어째서 먼 땅에 가려 하세요, 외동아들이고 유일한 상속자인데? 고향에서 멀리 떨어져 제우스의 후손 오뒷세우스가 미지의 고장에서 돌아가셨지요. 그 자들은 도련님이 떠나자마자 사악한 짓을 꾸밀 겁니다. 계략으로 도련님을 죽이려 들고, 이 모든 걸 자기들끼리 나누겠죠. 제발, 도련님의 재산 위에 눌러 앉아 계세요. 지침 없는 바다에서 모든 일을 겪으며 떠도실 필요가 전혀 없다고요." 여기서 "지침 없는 바다에서"가 유명한 말인데, pontos atrygetos를 김기영 씨는 지침 없는 바다라고 번역을 했는데, unharvestable sea, 추수할 수 없는 바다라고 할 수 있다. 이 부분은 에우뤼클레이아가 텔레마코스에게 지금 떠나지 말 것을 권유하는 상황이다. pontos atrygetos는 미지의 세계를 가리키는 말이다. 죽을 수도 있다. 그러니까 에우뤼클레이아는 전형적인 유모의 태도이다. 텔레마코스가 세상으로 나아갔다 라고 하는 것은 사실 오뒷세우스가 나아간 것을 지금 표상하는 것이다. 뭔가를 겪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 그러니까 지금 텔레마코스도 이것을 통해서 온전한 상태로 가만히 있으면 자아는 구축되지 않는다. 에우뤼클레이아는 뭐 하러 pontos atrygetos에 나가는지를, 추수할 수 없는 바다에 왜 가는지를 말하지만 텔레마코스는 떠난다. 텔레마코스의 어머니인 페넬로페는 텔레마코스가 떠나는지 안 떠나는지도 알지 못한다. 페넬로페야말로 가장 엄중한, 말하자면 위협에 직면해 있다. 수없이 많은 구혼자들이 협박과 공갈을 일삼고 있다. 그런데 페넬로페는 거기에 대응해서 그들과 맞서 싸우지도 않고 그렇다고 해서 어딘가에 숨어 있지도 않고 베를 짠다. 자기 시아버지 라에르테스가 돌아가시면 입힐 수의를 짠다. 수의를 하루에 다 짜고 다시 밤에 수의를 풀어서 그 유명한 페널로페의 베짜기, 라에르테스의 수의라고 하는 말이 있다. 그런데 여기서 페넬로페는 어쨌든 무한히 되풀이되는, 똑같은 일을 되풀이함으로써 그들에게 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에우뤼클레이아가 될 것인지 페넬로페가 될 것인지 여기서 생각을 해 봐야 된다.  

《오뒷세이아》
2권 359행 나는 스파르타와, 모래 많은 퓔로스를 가려 하니까, / 내 부친의 귀향을 알아보며 혹시 무슨 소식이라도 들을까 하여. 
2권 364행 대체 왜, 사랑하는 도련님, 심중에 그런 생각을 / 하셨나요? 어째서 먼 땅에 가려 하세요, / 외동아들이고 유일한 상속자인데? 고향에서 멀리 떨어져 / 제우스의 후손 오뒷세우스가 미지의 고장에서 돌아가셨지요. / 그 자들은 도련님이 떠나자마자 사악한 짓을 꾸밀 겁니다. / 계략으로 도련님을 죽이려 들고, 이 모든 걸 자기들끼리 나누겠죠. / 제발, 도련님의 재산 위에 눌러 앉아 계세요. 지침 없는 / 바다에서 모든 일을 겪으며 떠도실 필요가 전혀 없다고요. 


텔레마코스 이야기가 이제 1-4권까지이고, 그다음에 5-12권까지가 오뒷세우스의 떠돌아다니는 이야기이다. 이를테면 peripeteia, 반전이다. 앞을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사태를 겪는다. 영어에서는 adventure라고 한다. 대개 그것을 오뒷세우스의 모험이라고 하는데, 모험이라는 말은 별로 안 좋아하고 라티움어로 adventus라고 말한다. adventus가 대망, 기다린다는 듯이다. 라티움어 adventus라는 말에서 영어 adventure라는 말이 나왔다. adventure를 모험이라고 번역하면 안 되고 알 수 없는 사태를 기다리는 것이다. 교회에서는 adventus가 부활절 앞에 대림절을 말한다. 그래서 5-8권까지가 스케리아 섬으로 가는 것이고, 조난을 당해 칼륍소를 만난다. 칼륍소는 숨겨져 있는 그런 뜻으로, kalypto라고 하는 희랍어에서 나온 말이다. 칼륍소를 만났다는 것은 앞으로도 오뒷세우스가 어떤 일이 벌어질지를 알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5권을 보면 텔레마코스도 바다를 향해서 간다. 추수할 수 없는 바다를 가는데, 오뒷세우스는 실제로 바다를 간다. 그래서 5권 242행을 바다로 가기 위해서 뗏목을 만드는 장면이 나온다. 이 부분이 어떻게 나뉘는지를 잘 보고 읽어내야 하는데, 《오뒷세이아》는 재미로 읽는 게 아니라 교과서 읽듯이 읽어야 된는데, 지금 읽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다. 부분 부분 조각 조각을 내서 읽으면 되며 순서대로 읽을 필요는 없다. 그다음에 5권 394행을 보면 죽음을 마주해서 새로 태어난 얘기가 나온다. "마치 오래 시달리며 엄청난 고통을 겪으며 병상에 누워 있던 아버지의 생명이 아이들에게도 반갑게도 되살아날 때처럼, 또 어떤 가증스러운 신이 공격했으나 다행하게도, 신들이 불행에서 아버지를 풀어줄 때처럼 그렇게 반갑게도 육지와 삼림이 오뒷세우스 앞에 나타났다. 그는 두 발로 육지를 디디길 열망하며 헤엄쳐 갔다." 이런 장면들이, 그러니까 육지를 딛기를 열망하며 헤엄쳐 갔다는 생명을 구하는 장면들이 나오면 새로운 자아를 만들어 가려고 한다고 이해를 할 수 있다. 그런 것들을 보면서 읽으면 된다. 

《오뒷세이아》
5권 394행 마치 오래 시달리며 엄청난 고통을 겪으며 / 병상에 누워 있던 아버지의 생명이 아이들에게도 반갑게도 / 되살아날 때처럼, 또 어떤 가증스러운 신이 공격했으나 / 다행하게도, 신들이 불행에서 아버지를 풀어줄 때처럼 / 그렇게 반갑게도 육지와 삼림이 오뒷세우스 앞에 나타났다. / 그는 두 발로 육지를 디디길 열망하며 헤엄쳐 갔다. 


5권 135행을 보면 칼륍소의 유혹이라고 알려져 있는 부분이 나온다. "그 사내는 내가 환대하고 보살폈고, 날마다 죽지도 늙지도 않게 해주겠다고 약속하곤 했지요." 우리 인간이라는 존재는 생물학적으로는 아무 의미가 없다. 어떤 때는 이제 좀 죽고 싶다 라고 할 때가 있겠는데 못 죽은 게 얼마나 괴롭겠는가.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죽음과 죽어감》과 같은 책을 보면 특정한 지점에 넘으면 생물학적으로 살아야겠다 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사람들이 된다고 한다. 칼륍소는 죽지도 늙지도 않게 해준다고 약속했다. 모든 사람에게는 즉자적으로 생물학적으로 가장 원하는 것이다. 칼륍소가 말하는 것은 인간이 가장 원하는 것, 가장 좋은 것을 얘기한 것이다. 좋은 것에 대한 열망이 에로스이다. 그러니까 거기에 대해서 오뒷세우스는 215행에서 자기 집에 가서 페넬로페와 행복하게 살고 싶다고 얘기한다. 여기서 의미를 생각을 해봐야 되는데 오뒷세우스가 집에 가고 싶다라고 말할 때 사용하는 단어가 oikos이다. oikos라고 하는 말이 희랍어로 집인데, oikos는 유형의 어떤 구조물로서의 집일 수도 있지만, oikos라는 희랍어를 찾아보면 가까운 것, 나만의 것, 그러니까 at home이 편안한이라는 뜻이다. 지금 여기서 오뒷세우스에게 oikos는 페넬로페를 만나는 것, 나중에 23권에 가면 페넬로페가 있는 집을 떠나서 아버지 라에르테스를 만나러 가는데, 어떻게 보면 페넬로피도 아닌 것이다. oikos는 가까운 곳이니까 친구라는 뜻도 되는데, 오뒷세우스는 친구가 하나도 없다. 그리고 이 사람은 잔꾀가 많아서 트로이아 원정을 같이 갔던 동료 장군들을 버리고 떠났다. 그러면 오뒷세우스에게 남는 것, 오뒷세우스에게 고유한 것이라는 것은 즉 정말 전적으로 내가 손아귀에 쥐고 있는 것만 남는 것이다. 자기 정체성self-identity이 남는 것이다. 도이체어로 Das Meine라고 하는데, 오로지 내 것인 것,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나의 것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일단 5권에서는 오뒷세우스가 트로이아에서 얻은 명성을 귀환 과정에서 상실했다고 말한다. 오뒷세우스는 사실 트로이아에 안 가려고 했으나 억지로 갔다. 그렇기 때문에 아킬레우스라든가 이런 사람들하고는 다르다. 트로이아에 가서 뭔가를 얻으려고 했던 사람들은 아가멤논과 같은 사람들이다. 그 사람은 명성timē을 얻으러 갔다. 어쨌든 오뒷세우스는 트로이아에서 자기가 원래 원했던 원하지 않았던 명성을 얻었다.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 난파를 당했고 다 잃어버렸다. 완전히 제로 베이스로 돌아갔다. 그런데 칼륍소가 당신이 나와 있으면 생물학적으로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게 해준다고 말했다. 칼립소를 만났을 때 오뒷세우스는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은 상태이다. 그런데 자기는 집으로 가겠다고 했다. 집으로 가서 자기 아내 페넬로페와 같은 마음homophrosynē으로 지내고 싶다고 얘기했다. homophrosynē는 사실 페넬로페도 오뒷세우스와 같은 마음이어야 유지가 된다. 페널로페와 오뒷세우스는 23권에서 끊임없이 밤새도록 이야기를 한다. 그러니까 같은 마음을 유지하는 방법은 이야기밖에 없다. homophrosynē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야기를 계속해야 하는데, 이야기를 그만하고 돌아가신 라에르테스의 영혼을 만나러 간다.  

《오뒷세이아》
5권 135행 그 사내는 내가 환대하고 보살폈고, 날마다 / 죽지도 늙지도 않게 해주겠다고 약속하곤 했지요.
5권 220행 정말로 이렇게 날마다 집에 돌아가 / 귀향 날을 보기를 소망하고 열망한답니다. 


나만이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생각을 해야 된다. Das Meine, it's mine, 나의 것, 오로지 내 것인 것, 나만이 가지고 있는 것, 사실은 이것이 oikos의 의미이다. 그러니까 페넬로페도 아닌 것이다. 이것이 일반적으로 서양에서의 개인주의의 원천이다. individual, 나눌 수 없는 것이라는 뜻인데, 나로부터 분리해낼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oikos라고 하는 것을, 그냥 페널로페와 둘이 밤새도록 얘기하고 거기서 《오뒷세이아》가 끝났으면, 이 사람에게 Das Meine는 페넬로페와 대화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람이 돌아가신 라에르테스를 만나러 간다. 라에르테스를 만나러 가게 되어 있다고 하는 것은 테이레시아스가 예언을 하는데, 그 장면이 11권 119행에 있다. 테이레시아스의 혼령이 왔는데 "제우스 후손, 라에르테스의 아들, 술수 많은 오뒷세우스여"부터 얘기를 한다. "그대 자신은 파멸을 피하더라도 뒤늦게, 비참하게, 모든 전우를 잃고 나서", 전쟁터에 나갔다 왔는데 전우를 잃었다는 건 다 잃어버린 것이다. "그대 궁전을 홀에서 구혼자들을, 암수나 정수로 날 선 청동으로 휘둘러 죽이고 나서는 다루기 쉬운 노 하나를 들고서 길을 떠나라, 바다를 모르고 소금 밴 음식을 먹지 않는 사내들에게 도달할 때까지 말이다." "바다를 모르고 소금 밴 음식을 먹지 않는 사내들에게 도달할 때까지", 그러니까 진정한 의미에서 육지에 도달하는 것이다. 아까 텔레마코스가 떠나려고 그러니까 에우뤼클레이아가 추수할 수 없는 바다에 왜 가냐고 그랬다. 그러니까 바다와 아무 관계없는 곳에 가야 진정으로 인생이 완성된다는 얘기이다. 오뒷세우는 이 얘기를 듣고 나서 "테이레시아스여, 이런 운명은 신들이 손수 자아내신 듯하오."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9-12권까지는 오뒷세우스의 회상인데 테이레시아스의 예언과 조언을 꼭 기억을 해야 된다. 우리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것이 우리에게 더 이상 바다 냄새가 나지 않는 땅을 만나는 것인가. 죽음밖에 없는 가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나의 것, 나의 고유한 것을 무엇으로 규정하는가가 그 사람의 인생관이다. 다 털어내도 이것은 나의 것이다 라고 하는 것 있다. 그것이 대체로 문화적인 배경에서 멘탈리티가 있다. 참으로 나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범주가 다르다.  

《오뒷세이아》
11권 93행 제우스 후손, 라에르테스의 아들, 술수 많은 오뒷세우스여
11권 114행 그대 자신은 파멸을 피하더라도 / 뒤늦게, 비참하게, 모든 전우를 잃고 나서
11권 119행 그대 궁전을 홀에서 구혼자들을, 암수나 / 정수로 날 선 청동으로 휘둘러 죽이고 나서는 / 다루기 쉬운 노 하나를 들고서 길을 떠나라, / 바다를 모르고 소금 밴 음식을 먹지 않는 / 사내들에게 도달할 때까지 말이다. 
11권 139행 테이레시아스여, 이런 운명은 신들이 손수 자아내신 듯하오. 

13-24권은 이타케로의 귀환이라고 했는데, 이런 과정을 거쳐서 이제 이타케로 돌아온다. 오뒷세우스가 이타케로 돌아왔는데 페넬로페는 베를 짜고 있다. 그리고 페넬로페와 재회를 homophrosynē의 단계에 일단 이르렀으나 거기서 다시 라에르테스를 만나러 간다. 그러면 《오뒷세이아》라고 하는 작품은 개인의 서사를 구축하는 과정에 대한 얘기라는 걸 알 수 있다. 사람이 자기 인생을 이 방식으로 구축을 해봐야 되는 것이다. 오뒷세우스는 바깥으로 갔다가 명성timē을 얻었다. 그러다가 무화의 단계에 이르렀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상태에서 칼큅소를 만난다. 고향 이타케를 원래 떠날 때는 텔레마코스처럼 아무 생각 없이 떠났을 것이다. 그런데 온갖 우여곡절을 겪어, peripeteia를 겪어서 이타케로 돌아왔다. 이타케로 돌아와서 다시 아버지 라에르테스를 만나러 간다. 여기서 이 반전들이 일어났다. 어느 지점이 개심metanoia을 하는 지점일까를 우리가 잡아내는 게 이것을 읽을 때 굉장히 재미가 있겠다. 그 지점은 테이레시아스가 이렇게 얘기했을 때, 신에 의해서 예견된 길을 자기가 가는 지점일 수도 있겠다. 이건 각자가 이제 생각을 해봐야 된다.  

아우스티누스의 《고백록》을 보면 아우스티누스는 히포에서 밀라노로 가서 명성을 얻는다. 그러다가 tolle lege를 듣고 metanoia를 한다. metanoia는 두 번째 생각, second thinking이다. 《고백록》의 구조와 《오뒷세이아》의 구조가 결국 어느 지점인가에서 metanoia를 전제로 하고 있다. 그리고 결국엔 제자리로 돌아온다. 돌아온다는 점에서는 귀향의 서사이다. 《오뒷세이아》가 모든 서사의 원형이 된다. 원형 중에 원형의 서사가 자기 서사이다. 이것을 호메로스가 떠드니까 그런 것인데, 가령 오뒷세우스가 떠든다면 자기 인생 얘기가 된다. 그래서 아까 얘기한 것처럼 자신의 삶에 대해서 자기 서사를 쓴다고 하면 메인 모멘트를 만들고 부수적인 삽화를 끼워넣어야 한다. 그것을 생각해 볼 때 무엇을 메인으로 할 것인가 그리고 어느 지점을 metanoia로 할 것인가를 생각해봐야 되겠다. 이것을 인류 역사 전체로까지 투사를 시키면 종말론인 것이다. apokalypticism, 즉 묵시록이 된다. 기독교에서는 metanoia에 해당하는 게 예수가 온 것이다. 그다음에 두 번째 온다. parousia는 두 번째 오는 것, 똑같은 구조이다. 우리 인간이 생겨났다. 성서의 서사가 그렇게 되어 있다. 구약성서 또는 요한복음 1장 한 처음에 천지가 창조되었다. 인간이 생겨났다. 그러다가 예수 그리스도가 처음에 오면서 완전히 제로베이스로 들어갔다. 그것이 예수의 초림이고, 지금부터 이때까지 끝없이 기다리는 시기가 대망의 시기, 그래서 이 지점이 되면 바로 parousia가 일어나는 것이다. 이 구조를 기억하고 이것이 결국 《고백록》의 구조와 같은 것이다 라고 생각을 하고 내 삶에서 메인 모먼트를 무엇으로 할 것인가를 항상 생각을 해야 된다. 여기에서는 테이레시아스가 해주지만 우리 현대인들은 자기가 설정하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도 결국은 하느님이 자기에게 설정해 줬다고 여기지만 우리들은 우리 자신이 우리에게 신이다. 자기가 설정하는 것이 좋다. 자기가 혼자 자기 삶의 《오뒷세이아》, 자기 삶의 《고백록》을 써봐야 된다. 메인 모멘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계속 생각을 해봐야 된다. 《오뒷세이아》라고 하는 서사시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왜 이것이 모든 서사의 본paradeigma인가. 여기 나온 이 구조를 가지고 자기 서사를 계속 써봐야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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