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담화冊談話 | 시학 강독 8-1
- 강의노트/책담화冊談話 2021-24
- 2024. 6. 17.
📚 강유원의 책담화冊談話(https://booklistalk.podbean.com)에서 제공하는 「시학 강독」을 듣고 정리한다.
2024.06.12 🎤 시학 강독 8-1
8강. 고대 드라마와 근대 드라마
• 2024. 6. 12. 오후 7시-9시 장소:수원시글로벌평생학습관
• 강의 안내: https://learning.suwon.go.kr/lmth/01_lecture01_view.asp?idx=3672
• 강의 자료: https://buymeacoffee.com/booklistalk/20240612-suwon
강의 자료를 한번 펴보면 고대 드라마와 근대 드라마가 있는데, 우리가 읽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의 범위를 넘어서는 얘기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잘 알아야 되는 이유는 첫째 고대 서사시와 비극을 잘 이해할 수 있기 위해서이다. 서사시와 비극에 대한 당대에 나온 문학 이론이기 때문에, 《시학》을 배운 다음에 서사시 읽어보고 비극을 읽어보면 훨씬 더 어떻게 뼈대를 잡고 읽어야 되는지를 잘 알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발견해 놓은 그 규칙에 따라서 서사시를 읽으면 된다. 서사시나 비극은 규칙을 알면 잘 읽을 수 있는 텍스트이다. 고대 드라마 라고 하는 것은 규칙이 있는 것이다. ancient and modern이라고 하는 논의가 있는데, 고대인과 현대인이라고 번역하면 안 되고, ancient and modern는 antiqus와 moderns라는 라티움어를 그대로 번역을 한 것이다. antiqus라고 해서 옛날 사람이라는 뜻도 아니고 modernus라고 해서 현대인이라는 뜻도 아니다. 뭔가 사물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이 중요한 원칙이 되는데, 우리는 무슨 말을 할 때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에 근거해서 말을 하는 것이 올바르다. 그리고 아무리 변칙적인 것을 쓴다 해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을 넘어서는 건 과하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antiqus이다. 오늘날 살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도 antiqus가 있을 수 있다. modernus라고 하는 것은, 말 그대로 modern하다 라고 하는 것에는 어떤 적극적인 규정이 없다. antiqus만 아니면 된다. 규칙을 벗어난, 즉 이 사람들은 non이라는 것이 非라는 말인데, ~과 무관한이라는 뜻이다. no-rule이 아니라 non-rule은 규칙과는 무관하게 사는 사람, 규칙과는 무관한 사람들을 가리킬 때 modern이라고 한다. 현대라고 하는 말은 contemporary라고 번역한다. modern의 대표적인 것이 낭만주의라고 일반적으로 불리는 것이다. 괴테의 《파우스트》 같은 경우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맥락 속에 들어있는데, 《파우스트》까지는 우리가 규칙에 따라 이해할 수 있다. 더군다나 서부 유럽의 전통 중에 하나가 christian, 기독교적인 내용을 아리스토텔레스적인 규칙에 따라서 만들어 놓은 게 《파우스트》이다. 그러니까 《파우스트》는 고전 서사시라고 말할 수 있다. 괴테의 작품 중에는 낭만주의 작품도 있다고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데, 고전적 서사시의 작법을 벗어나 있는 것을 낭만적이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낭만적이다라고 말하는 건 어떤 내용이 있는 게 아니라, 아주 쉽게 이해하려면, 규칙이 없이 제멋대로 무엇이든 규칙이 될 수 있다 라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의미에서 아주 엄격한 antiqus는 첫째 규칙이 있어야 된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이 플롯이다. 지난번에 나온 것처럼 단순한 구성, 복합적 구성 그다음에 파토스를 드러내 보여줄 것인가 고통을 드러내 보여줄 것인가 아니면 인물이 peripeteia, 즉 다양한 반전을 통해서 어떻게 성격이 형성될 것인가. 서사시도 마찬가지고 비극도 마찬가지이다. 규칙에 따라서 주인공들을 보여줘야 된다. 그렇게 해서 전형적인 인물들을 내보여주는 것이다. 사실 셰익스피어도 근대 드라마라고는 하지만 전형적 인물들이 있다. 그 전형적 인물들이라는 것은 《오셀로》를 보면 셰익스피어의 역사 드라마를 통해서 만들어진 사람들이다. 《리차드 2세》를 읽어보면 오셀로와 같은 느낌이 있다. 《맥베스》는 영국 역사에 아주 흔한 인물이다. 셰익스피어의 초기 작품들 다 역사 드라마로, 처음에는 《맥베스》를 읽기 시작을 해야 되는데 《맥베스》를 읽다가 《리처드 2세》를 읽으면 여기서 생겨난 인물들이구나, 여기서 생겨나는 일들이구나 라고 생각할 수 있다. 《맥베스》는 Ernst Hartwig Kantorowicz의 왕의 두 신체와 함께 읽으면 되게 재미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구성mythos이 있어야 되고 그다음에 드라마의 주인공의 전형성이라는 게 있다. 두 가지가 반드시 있다. 주인공의 전형성이라고 하는 것은 드라마 주인공의 성격character이다. 그러니까 '오뒷세우스적 인간'이라고 하는 말이 성립하는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드라마도 주인공의 전형성이 있으니까 햄릿형 인간, 맥베스형, 오셀로형 인간 이런 게 있는데,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베르테르적 인간이라고 하면 전형성이 떨어진다. 그러니까 전형성이 기억이 나려면 그의 행위하고 연결이 되어야 한다. 전형적인 행위와 전형적인 character가 연결이 되어야 되는데 이게 아리스토텔레스의 드라마에 나타난다. 이것이 없다고 하면 모던 드라마이다. 모던 드라마에 가기 전에 중간 단계로 지난번에 강의했던 밀턴의 행위의 모방(actions well imitated)이 아니라 격정의 모방(passions well imitated)이라고 하는 얘기가 있었다. 여기서 강의 자료의 비극에 관한 관점들을 보면 "플라톤. 비극이 낳아 놓은 심리적 위력에 대한 우려. 참된 행복의 가능성을 압도하는, 정신을 쇠약하게 하는 절망적 표현들 비판"했다. 플라톤은 비극을 비판했는데 플라톤이 비극을 비판한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비극 드라마를 사람들이 많이 보면 강건한 마음을 갖지 못하게 될까 봐 걱정되었던 것이다. 이런 것들이 나라에서 널리 퍼지면 나라가 쇠악한 나라가 될까 봐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굉장히 박학다식하고 호기심이 많고 형이상학적인 탐구도 굉장히 노력을 많이 했지만 연구조사하면서 떠돌아다니면서 방랑하는 지식인 기질이 있다. 그에 비하면 플라톤은 좀 집요하다. 아주 강건하고도 건전한 폴리스에 대한 어떤 열망이 있는 사람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런 게 없는 사람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이나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읽어보면 플라톤적인 것을 볼 수 없다. 플라톤은 일단 센 사람이다. 굉장히 건전한 삶에 대한 그런 열망이 굉장히 가득한데, 아리스토텔레스는 건전한 삶을 살면 좋겠지만 안 되더라도 그렇게 인생이 나쁜 것 같지 않아 라고 말하는 사람에 가깝다.
우리가 그동안 읽은 바에 따르면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이 적극적인 기능을 갖고 있다고 했다. 아까 얘기한 것처럼 mythos를 잘 짜고 주인공의 전형성을 가지고 만들어내면 이것으로부터 카타르시스, 정화가 일어난다고 했다. 연민과 공포를 배출시키는 효과가 있다. 비극이 가지고 있는 적극적인 의미가 있다고 얘기다. 셰익스피어도 마찬가지이다. 셰익스피어는 극장주이기도 하고 연극배우이기도 하고 대본을 쓴 사람이기도 했다. 밀턴의 《Paradise Lost》는 상연하기 위해서 쓴 게 아니다. 서사시이다. 괴테도 마찬가지이다. 그 사람들은 글로써 장엄함을 표현하기 위해서 작업을 시작한 것이다. 그러니까 셰익스피어와는 다르다. 밀턴도 구조가 있는 서사시이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카타르시스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의미에서의 비극을 목적을 하는다. 읽는 이에게 고통을 안겨주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드라마는 읽고 나서 고통이 나오면 안 되는데, 그러면 개운하지 않고 찜찜하다. 그러니까 억지로라도 현대의 드라마들은 해피엔딩으로 끝낸다. 정화라고 하는 것은 언짢게 끝나든 해피엔드로 끝나든 간에 개운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밀턴이나 괴테의 작품들은 개운하지 않다. 고통스러운 찝찝하고도 뭔가 이 지상에서는 해결이 될 것 같지 않은 그런 것이 남아 있다. 그것이 근대의 비극이다. modern tragedy는 정화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modern tragedy는 헤겔, 쇼펜하우어, 니체와 같은 도이치 이론가들이 만들었는데, modern tragedy의 이론을 만든 사람이 헤겔이다. 해결의 《예술 철학》에 나와 있다. 《에로스를 찾아서》 각주에는 헤겔의 예술 철학에 있는 비극 개념을 적어놓지 않았는데, 그건 아름다움이 아니기라 그냥 찜찜한 것이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의 미학도 있고 니체의 미학도 있긴 하지만 무엇보다도 쇼펜하우어와 니체는 헤겔 이후 사람들로 헤겔 미학에서의 비극 개념이 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형이상학적 실존주의적 경향"이라고 했는데, 형이상학적 경향은 헤겔에 있는 것이고, 쇼펜하우어와 니체가 실존주의적 경향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와 구별되는 더 공부를 해야 될 내용으로 얘기한 것이다.
적어도 이 지점에 와서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의미에서의 비극 규정이라고 하는 곳은 사라지고 "비극을 파악하는 핵심으로 비극적인 것의 암울한 본질과 다른 것으로 더이상 환원할 수 없는 개념을 판별"해냈다. 비극적인 것에 아무러한 본질과 다른 것으로 더 이상 환원할 수 없는 개념을 판별해냈다. 암울한 인생의 구석, 밑도 끝도 없이 고통스러운 곳, 그것에 대해서 이 사람들이 생각한 것이 헤겔의 비극 이론이다. 현대인들에게 괴롭고 쓸쓸함이라고 하는 것은 굉장히 심각한 문제이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괴롭고 쓸쓸함이라는 것을 몰랐다. 기쁨, 행복, 즐거움, 고통, 쓸쓸함, 불안함 이런 것들은 다 겪어봐야 불안과 공포가 식별이 되고, 이 공포를 조금만 견디면 이것이 나에게 어떤 보람으로서 주어진다 라고 하는, 우리의 감정 스펙트럼도 겪어봐야 아는 것이다. 불안함은 자기가 미래에 대해서 뭔가를 생각할 때 미래를 당겨오지 못할 때 불안함이 생긴다. 미래에 대한 긴장으로부터 생겨나는 게 불안함이다. 미래에 대한 긴장을 느끼고 있을 때 그 긴장을 살살 꼬드겨서 사람들로 하여금 열심히 해보자 하는 것이 근대적 진보 이념이다. 형이상학적인 우울함은 설명을 할 수 있는데 그것이 구체적인 삶 속에서, 당시 도이칠란트는 군사화가 되어서 삶이 굉장히 빡빡했다. 중세적 시기에서 근대 공업국가로 넘어가는 프로이센에 살고 있는 사람들, 니체가 살고 있는 세계가 그랬다. 그러니까 적응하기가 힘든 것이다. 우울함과 암울함과 이런 것들을 비극적인 것의 본질로 파악하고, 그것이 실존주의라고 하는 경향으로 드러나는 바로 modern tragedy이다. 그런데 영국이라는 나라는 뭐든지 조금 말랑말랑해지는 경향이 있다. 약간은 경멸적인 의미에서 중산층화되는 경향이 있다. 영국은 신분적 차이가 아주 엄격한 나라이다. 버지니아 울프 같은 경우는 middle class였는데, middle class로 흘러 들어가면 그 아래로 내려오지도 않고 그 위로 올라가지도 않는다. 그 영역에서 고만고만하게 소화가 되는 영역이 있다. 그다음에 Anglican Church, 버지니아 울프도 국교회 신자이다. 아무리 학교를 안 다녔다 해도 국교회 신자니까 사회 주류가 된 것이다. 버지니아 울프를 이해할 때는 영국의 Anglican Church와 middle class를 생각해야 한다. 아버지 레슬리 스티븐이 학교를 안 보냈다 하더라도 일단 기본적으로 책이 있는 집에서 자랐다. 중산층이다. 그리고 영국에서 중산층이라고 말하려면 성공회 신자라는 얘기이다. 성공회 신자가 아닌 사람들은 아무리 잘 살아도 중산층이 아니다. 가톨릭교도는 유대교들과 같은 취급을 받았다.
버지니아 울프의 문학론을 과장해서 중요하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그 영역, 그만큼이 있다. 그러니까 따뜻한 중산층적 문학이론이다. "1910년 12월이나 그 즈음에 인간이라는 존재의 성격이 달라졌다", 흔히 말하는 버지니아 울프의 모더니티 선언으로 알려진 문장이다. human character changed라고 되어 있는데 Mr. Bennet and Mrs. Browon이라는 글에서 나온 것이다. "존재의 성격이 달라졌다", 성격이라고 하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서 캐릭터는 주인공이다. 이 주인공은 시대를 반영할 필요가 없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주인공은 우리보다 딱히 잘난 것도 없고 적당하게 고만고만한 사람으로 정해져 있다. 그러니까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서 등장 인물은 전형적으로 정해져 있고 등장 인물들을 만들어내는 규칙이 있다. 그런데 버지니아 울프의 시대에 오면, 헤겔에 오면 이런 주인공 따위는 안 중요한데, 버지니아 울프의 시대에 오면 이 캐릭터라고 하는 것이 시대의 성격과, 이것[성격]도 캐릭터이다, 시대의 성격과 등장인물, 등장인물도 캐릭터이다, 캐릭터라는 단어가 성격이라는 뜻도 되고 등장 인물이라는 뜻도 된다, 이 두 개를 동조화해야 될 요구가 생긴 것이다. 즉 시대의 성격을 반영하는 등장 인물들을 내놓아야 하는 것이 된 것이다. 예를 들어 《공산당 선언》의 주인공은, 그것을 하나의 소설이라고 보면, 프롤레타리아이다. 《공산당 선언》이 읽는 독법 중에 하나가 문학 작품으로서의 《공산당 선언》이다. 《공산당 선언》의 주인공인 프롤레타리아는 고통받고 있다. 역사 속에서 부르주아에 의해서 엄청나게 고통을 받고 있다가 프롤레타리아가 결국 자기 자신을 새로운 종류의 인간으로 거듭나게 함으로써 세계를 바꾸 영웅적인 서사가 쓰여 있다. 그것은 고전적 전형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오뒷세우스가 고통당하고 있다가, 여기 떠돌아다니고 저기 돌아다니고 그러다가 돌아왔다. 새로운 인간으로 변신해서 왔다. 이타케로 돌아와서 구혼자들을 죽이고, 부르주아들이다, 새로운 이타케를 만든다. 그러니까는 마르크스 같은 사람은 셰익스피어를 열심히 읽었는데, 고전적 서사를 이용해서 《공산당 선언》을 쓴 사람이다. 재밌는 것은 그 안에다가 시대의 성격을 반영한 등장 인물들을 내놓은 것이다. 고대적 서사 형식을 가져다가 근대적인 등장인물들을 제시해 놓았다는 것이다. 문학 작품을 읽을 때 이것을 알고 있어야 된다.
두 번째로 Modern Fiction이라고 하는 글에서 보면 버지니아 올프는 소설의 소재로서의 삶, 인간의 삶을 소재로 써야 되는데, "삶은 체계적으로 배열된 일련의 마차 등이 아니라 빛무리이며, 의식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반투명한 외피이다." "체계적으로"라는 말을 굳게 써놨는데, 영어 원문은 symmetrically인데, "규칙적으로 배열된"으로 되어 있다. 규칙적으로라고 해도 번역이 해도 틀리지 않지만 체계적으로 라고 번역하는 게 맞다. 왜냐하면 체계적으로 배열되었다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창작 예술론 작법이다. 즉 플롯도 있어야 되고 전형적인 스타일이 있어야 된다. 그래서 어떤 방법으로 하는가. "그가 자신의 작품을 관습이 아닌 자신의 느낌에 기초할 수 있다면, [이미] 받아 들여진 양식에 따르는(in the accepted style)구성도, 희극도, 비극도 사랑 이야기도 파국도 없어져서", 번역본에 보면 그렇게 돼 있지 않고 "전형적인 스타일"로 되어있다. 틀린 번역은 아닌데, 버지니아 울프가 in the accepted style라고 얘기하는 것은 받아들여진 양식이다. 문장의 영어 원문을 앞뒤로 살피면 accepted에 해당하는 뭔가 있어야 될 것이 없다. 이건 사람들이 다 알고 있을 거라는 걸 전제하고 얘기하는 것이다. 사람들 사이에 받아들여진이라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작법이다. 그러니까 버지니아 울프는 문학 공부를 하는 데 있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작법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이미 받아 들여진 양식에 따르는 구성도, 희극도, 비극", 희극은 몰라도 구성과 비극은 아리스토텔레스이고, "희극, 사랑 이야기, 파국"은 셰익스피어이라고 읽을 수 있다. 우리가 번역자한테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염두에 두고 이렇게 주석을 달아 달라고 얘기를 할 수는 없다. 그런데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배웠기 때문에 이것을 읽을 때, 버지니아 울프를 얘기를 할 때는 기본적으로 깔고 들어가는 게 두 개는 있겠다는 것, 첫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두 번째로는 셰익스피어이다. 버니지아 울프의 책을 보면 "『아가멤논』을 읽어 보십시오. 그리고 시간이 갈수록 여러분의 공감이 거의 전적으로 클리타임네스트라에게 쏠리지 않는지 보십시오."라는 얘기가 있다. 그러니까 똑같은 작품인데도 modernus의 시각을 가지게 되면 클리타임네스트라가 눈에 들어온다는 것이다. 아이스킬로스를 읽을 때도, 가장 고답적인 작품임에도, 클리타임네스트라가 눈에 들어온다는 것이다. 어떤 사조나 이런 것은 나중 얘기이고 일단 기본적으로 이 사람은 문학에 등장하는 가장 기본적인 캐릭터와 스타일에서 차이를 보인다. 그것이 바로 modernus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앞에 나오는 헤겔이나 쇼펜하우어나 니체 이런 사람들이 말하는 형이상학적 실존주의와는 또 다른 영역이다. 그래서 독일 미학과 영국의 예술론은 차이가 있다. 독일의 미학은 형이상학적으로 이론을 만들어내고 니체 같은 얘기들이 나온다면, 영국은 구체적인 작품들 하나하나를 보면서 거기에 들어가 있는 스타일과 등장인물들을 분석하는 데 있다.
《문학은 공유지입니다》
54 자신의 작품을 관습이 아니라 자신의 느낌에 기초할 수 있다면, 플롯도 없어지고 희극도 비극도 전형적인 스타일의 사랑 이야기도 파국도 없어져서, 단추 한 개도 본드가의 양복쟁이들이 다는 방식으로 달려 있지 않을 것이다.
54 삶은 규칙적으로 배열된 일련의 마차 등이 아니라 빛무리이며, 의식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반투명한 외피이다.
66 1910년 12월이나 그 즈음에 인간이라는 존재의 성격이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67 『아가멤논』을 읽어 보십시오. 그리고 시간이 갈수록 여러분의 공감이 거의 전적으로 클리타임네스트라에게 쏠리지 않는지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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