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원의 책담화冊談話(https://booklistalk.podbean.com)에서 제공하는 「ε. Gilson, God & Philosophy」를 듣고 정리한다.
2024.07.06 ε. Gilson(20), God & Philosophy, Ch. 4
에티엔 질송, ⟪철학자들의 신 - 역사적 개관⟫(God and Philosophy, 2002)
텍스트: https://buymeacoffee.com/booklistalk/god-philosophy-ch-4
그동안 에티엔 질송의 《God & Philosophy》을 주석exēgēsis을 달면서 읽어왔다. 마지막 챕터는 God and contemporary thought이다. 앞에서는 modern philosophy, christian philosophy, greek philosophy였는데, 여기는 contemporary thought이다. 챕터가 꽤 긴데 오늘 설명을 다 들으면 알 수 있듯이 중간에 자연과학자들의 논의 부분들은 뺐다. 그런 부분들은 이 lecture도 오래전의 것이고 논의할 만한 필요가 없다고 생각되는 것들은 뺐다. 그리고 김진혁 교수는 contemporary thought를 현대 사상으로 번역했는데 '오늘날의 생각'이겠다. 질송이 보기에 형이상학적 논의들과 같은 것들은 philosophy, 그런데 챕터 4에서는 이제 오귀스트 콩트도 나오고 물리학자들 얘기도 나오고 하니까 좁은 의미에서의 철학, 즉 철학으로서의 철학, 형이상학만이 아니기 때문에 thought라는 말을 챕터 제목으로 삼지 않았나 라고 보여진다.
여기에서는 질송이 가지고 있는 자기 자신의 형이상학과 종교 개념을 가지고 근대 이후에 기계론적 철학들 또는 칸트 이런 사람들에 대해서 얘기를 하는데 어떤 특정 지점을 넘어가면 더 이상 논변으로서 뭔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주장만 나오는 부분들이 있다. 철학이라고 하는 것이 아주 엄밀한 논쟁으로 이루어진 학문은 아니다. 신념이 꽤나 많이 놓여 있는 부분이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지만 수학적 엄밀성 또는 기하학적 정합성이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 수학이라고 하는 학문 영역 안에도 굉장히 다양한 하위 영역들이 굉장히 많이 있어서 특정한 영역에 종사하고 있는 수학자들이 다른 영역에 종사하고 있는 수학자들을 그게 수학인가 라고 말할 수 있는 부분들이 있다. 철학하는 사람들은 왜 사람마다 철학 개념이 다른가. 철학이 무엇을 하는 학문인지에 대해 이렇게 합의하지 않은 것이 학문인가 하고 말할 수 있지만 사실 우리가 굉장히 엄밀한 학이라고 하는 수학, 물리학 이런 학문도 자기네들이 다루고 있는 것들이 같은 가족 유사성family resemblance 안에 모여 있긴 하지만 과연 정확하게 너와 나, 우리가 한 가족이라는 것을 그렇게 알 수 있을 만할까 하는 생각한다.
질송이 가지고 있는 형이상학 그리고 종교 개념은 이것이다. 최고 원인에 대한 관조contemplation는 형이상학과 종교가 궁극적으로 만나야 한다는 것을 제시한다. 이건 질송의 신념이다. 는 이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철학 선생 강유원이 가지고 있는 형이상학 개념과 질송이 가지고 있는 형이상학 개념은 다르다. 질송은 종교의 입장에서 형이상학을 종교로 수렴하려고 하는 입장에 있다. 그것을 염두에 두고 이번 챕터를 정리하려고 한다.
임마누엘 칸트와 오귀스트 콩트가 현대의 종교와 형이상학이 굉장히 큰 고통을 주고 있다고 얘기를 하는데 콩트는 몰라도 칸트는 아주 틀림없다. 유명한 말로 니체가 신은 죽었다 라고 말을 했다. 실제로 그런 말을 했는지 아니면 그냥 죽었으면 좋겠다는 희망사항을 말했는지는 차치하고 신은 죽었다 라고 말했다. 그러면 내가 죽였다가 아니라 신이 죽었다니까 자기가 죽인 건 아니다. 니체가 보니까 이미 신이 죽어 있더라는 것이다. 누군가 누가 죽였냐고 물었더니 칸트가 죽였다 라고 하는 것이 근대 철학, 현대 철학의 기본적인 우스개 소리이다. 아주 확실하게 신을 죽였다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칸트인데 그것은 어떤 것인가. 여기에 칸트의 생몰연대와 콩트의 생몰연대를 적어놓았고, 그 밑에 아퀴나스, 스피노자 생몰연대들을 적어놓았다. 형이상학을 공부할 때는 이런 사람들의 생몰연도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데 여기에 적어놓은 이유가 있다. 칸트가 1724~1804년이고 스피노자가 1632년~1677년이다. 그러니까 스피노자와 칸트 사이에 50년 차이가 있고, 아퀴나스와 스피노자 사이에는 400년 가까운 차이가 있다. 그런데 질송도 인정하고 있다시피 아퀴나스와 스피노자의 거리는 그렇게 멀지 않다. 공통의 난제를 갖고 있다. 자연을 만든 이로서의 신을 형이상학적으로 정당화한다 라고 하는 신을 형이상학적으로 정당화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그 신의 성격이 어떠하든 간에 다만 방법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자연신학의 방법을 사용했고 우주론적 신존재증명을 했으니까 그렇다. 그런데 스피노자는, 제가 보기엔 그건 양적인 측정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니까, 기하학적 방법은 아니고 기하학의 형식을 빌려온 그런 얘기이다. 두 사람은 방법은 차이가 있다 해도 자연을 만든 이로서의 신을 형이상학적으로 정당화한다 라고 하는 공통의 목표가 있다. 다시 말해서 스피노자가 비록 범신론적인 얘기를 했고, 신이라고 하는 것으로부터 인격적 개념을 다 삭제해버리고 소거해버렸다고는 할지라도 스피노자는 신개념을 중시하고 우주를 움직이는 근본 원리로서, 자기원인causa sui으로서의 신 얘기를 해 한다는 점에서는 400년 전의 아퀴나스와 문제의식은 똑같다. 그런데 방법이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질송도 지적하고 있듯이 그들이 사용하고 있는 언어는 데카르트, 말브랑슈, 스피노자 이런 사람들 모두 다 스콜라 철학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러니까 토마스 아퀴나스가 집대성해 놓은 스콜라 철학의 용어가 400년 후에도 계속해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학문의 기본적인 술어terminology가 이 사람들에게는 변함이 없다. 이게 별거 아닌 것 같은데 어떤 terminology를, 간단히 말해서 어떤 lexicon에 근거해서 학문적인 서술을 계속하는가가 사실 방법론의 차이를 무색하게 하는 중요한 포인트가 된다.
그런데 칸트와 콩트에서는 갑자기 이게 단절된다. 스피노자가 1677년에 죽었는데, 칸트가 1724년에 태어났으니까 50년 정도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데도 그렇다. 칸트나 콩트는 기본적으로 지식이라고 하는 개념을 그들과 다르게, 신에 대한 지식은 우리가 가질 수 없다 라고 본다. 칸트 철학은 간단하게 정리를 해보면 자연과학적 지식 개념만이 확실한 지식이다. 그러니까 순수 수학과 순수 물리학에 학문적인 기초를 놓겠다 라고 하는 것이 칸트의 학문적인 목표이다. 그렇다면 그것이 무엇인가. 뉴턴 물리학을 확실한 학문의 길을 갈 수 있도록 내가 철학자로서 도와야겠다 라고 하는 것이 바로 칸트가 가지고 있던 학문적인 목표이다. 그래서 주어진 사실들 사이에 관찰 가능한 관계를 수학적으로 표현한다. 이제 그들이 시도한 것이다. 주어진 사실들, '그는 악한 자다'라는 것은 주어진 사실이 아니다. 경험으로써 받아들인 것, 다시 말해서 감각, 소요라고 번역하는 sense-data이다. sense-data는 확인 가능하고 측정 가능한 것이다. sense-data들 사이의 관계를 수학적으로 표현한다. 수학은 인간이 선험적 범주로서 가진 것을 말하는데, 이 두 개를 결합해서 칸트는 지식이라고 하는 것으로 만들어 낸다. 신이라고 하는 존재는 우리에게 아무런 감각 데이터를 주지 않는데, 그러니까 신존재증명이라고 하는 건 무의미한 것이다. 칸트의 얘기가 나오는데, 우리가 머릿속에서 완전한 100탈러짜리 지폐를 상상해 보면 그것은 완전하다. 그렇다고 해서 완전한 100탈러짜리 지폐가 머릿속에서 상상된다고 해서 내 손에 100탈러짜리 지폐가 쥐어져 있는 건 아니다. 즉 완전한 의미에서의, 완전자로서의 뭔가를 우리가 개념적으로 상상할 수 있다고 해서 그 개념 안에 실존existentia가 반드시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것은 아니라고 얘기하는 것이다. 칸트에서 신이라고 하는 존재는 이성의 순수 이념, 즉 우리의 인식의 통일성을 부여하는 일반 원리이고 실천이성의 필요에 따라 요청되는 실존이다.
우리 지식이라고 하는 것은 주어진 사실들, 즉 경험으로서 받아들이는 것, 즉 감각, 소요, sens-data들 사이에 관찰 가능한 관계를 인간이 선험적 범주로서 가진 것인 수학적인 어떤 관계망 속에다 집어넣어서 지식을 만들어낸다. 그런데 그렇게 지식을 만들어냈는데 그것이 확실할까, 과연 다른 것과도 연결될까가 늘 의심스러운데 항상 오류 가능성에 직면해 있기 때문이다. 그럴 때 칸트는 신이 있다고 일단 전제해두자는 것, 신이 존재하든 안 하든 일반 원리로서 보편원리로서 전제하자는 것이다. 그다음에 우리가 착한 일을 왜 해야 되는데 라고 할 때 영원불변한 것을 전제해야만 착한 일이 guarantee된다. 그때 신을 실천이성의 원리로서 필요에 따라 요청한다는 얘기이다. 게다가 콩트는 아주 명료하게 말한다. 어떤 사태를 설명할 때 왜 그것이 일어났는가. 그런 목적인은 우리는 설명할 수 없다. 그게 자연과학이다. 간단한 예를 들어보면 이 우주는 왜 생겨났는가는 알 수 없다. 그냥 생겨났다. 생겨난 것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다. 그다음에 이 우주는 어떻게 작동하는가만 묻는다. 그게 천체 물리학자들이 하는 일이다. 물리학이라고 하는 학문이 그렇다. '왜'를 배제하고 '어떻게' 일어나는가만 묻는다. 그러면 콩트를 제외하고라도 칸트에 따르면 칸트의 철학 개념은 무엇인가. "근대과학의 기계론적 우주에 부합하는 완벽하게 일관성 있는 철학", 여기서 핵심은 근대과학의 기계론적 우주에 부합하는, 그러니까 근대과학의 기계론적 우주에 대한 설명을 확실하게 뒷받침하는 인식의 원리를 제공하는 것이 바로 철학이고, 주어진 과학의 세계에 대한 이성적인 해석으로 만족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현대 철학을 구성하게 되는데, 이를테면 콩트의 실증주의, 그다음에 신비판철학, 질송이 거론한 파울젠이나 파이힝어, 요즘엔 신비판철학은 그렇게 익히지 않는다. 그다음에 존 스튜어트 밀, 허버트 스펜서, 에밀 리트레, 에밀 뒤르켐, 빈 학단의 신실증주의 사람들이 있다.
여기서 생겨나는 문제는, 칸트에서는 대상으로부터 우리에게 어떤 감각 데이터가 온다는 것을 일단 전제한다. 그런데 칸트에 대해서 비판을 하고 싶으면 대상으로부터 우리에게 온다고 하는 sense-data가 진짜인가를 물어보면 된다. 대상은 왜 그것을 주는가, 그리고 대상은 불변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칸트는 물 자체Ding an sich, 진짜 속성은 모른다고 말을 했는데 그렇다면 우리는 영원히 뭔가를 모르고 있는 건 아닐까.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감각 데이터라고 하는 것은 대상으로부터 주어진 것인데, 대상 자체가 과연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영원히 알 수 없다고 말했는데, 그러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감각 데이터를 이렇게 저렇게 구성해서 만들어내는 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칸트의 인식이론만 가지면 과학이라고 하는 것이 확실한 학문의 기반위에 서지는 않는다. 현대 실재론에 관한 논의들이 이렇게 있다.
칸트의 이런 얘기는 결국 우리 눈앞에 놓여 있는 아주 딱딱한 책상이나 사각사각한 종이나 이런 것에 대해서도 확실한 앎을 만들어낼 수 없는데 하물며 신에 대해서는 만들어낼 수 없으니까 칸트는 종교적 불가지론이다. 그리고 굳이 종교가 요구한다고 하면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라고 하는 것을 얘기한다. 그러니까 완전히 신을 완전히 부정한 사람은 아니다. 칸트에 있어서 신이라고 불릴 만한 그런 후보자들은 무엇이 있겠는가. 사변적 이성의 질서에 통일성을 부여하는 통제적 이념 그다음에 도덕의 궁극적인 근거라고 하는 실천이성의 요청, 그다음에 자연의 객관적 합목적성 원리로서의 신 개념 이런 것들이 있을 수 있다. 우리가 자연의 질서라고 하는 말을 쓰는데, 신이라고 얘기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자연의 질서가 있다 라고 하는 걸 전제하는 것이다. 그런데 저는 사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서 경향성propensity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엄밀한 필연적 질서다 라고 말할 수는 없다. 요즘에 기후 위기 시대가 되니까 더욱이 그렇다. 물론 예전에도 그랬지만 이제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다. 자연의 질서가 있는 것인가. 과연 질서라고 말할 수 있는 게 있는가. 천 년 동안 우연히 되풀이되고 그 똑같은 일이 되풀이되고 있는 것을 우리는 질서라고 말하고 있는 건 아닐까. 1001년 1월 1일 1분 1초에 질서가 깨질 수 있다. 그러면 그건 질서가 아니다. 질서라는 건 필연성이고 항존성을 전제로 해야 되기 때문이다.
칸트는 사변적 이성의 질서에 통일성을 부여하는 통제적 이념 있다고 해보자고 말한다. 통제적 이념, 사변적 이성이라고 하는 것은 감각 데이터가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도 뭔가 알고 있다고 떠드는 것이다. 헤겔에서는 사변적이라고 하는 말이 굉장히 고차원의 인식을 말하는데 칸트에서는 그냥 판타스틱한 것이다. 우리는 가끔 이성적으로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한다. 그런 것들을 마구마구 쏟아내고 있는데 그래도 최소한 이 선은 넘어오면 안 된다 라고 해주는 그때의 통제적 이념으로서의 신, 이 정도가 된다. 어쨌든 칸트는 자연의 객관적 합목적성 원리로서의 신을 얘기했다고는 하더라도 자연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논의는 하지 않는다.
자연의 객관적 합목적성 원리로서의 신 개념은 《판단력 비판》에서 얘기를 하는데 그러다 보니까 줄리안 헉슬리가 얘기하는 것을 질송은 거론한다. "목적은 심리학적 용어"다. 여기서 심리학적 용어라는 것은 그냥 우리가 마음속에서 있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일 뿐이다 라는 말이다. 그것이 목적론에 관한 가장 강력한 현대의 알기 쉬운 논박이다. '어떤 과정의 결과물이 실제로 목적이 있는 과정의 결과물과 유사하다고 해서 그 과정에 목적이 있다고 보는 것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이는 우리의 관념을 자연의 질서에 투사하는 것일 뿐이다." 어느 날 자연을 보니까, 창밖에 있는 아카시아 나무가 움직이고 난리를 쳐서 갑자기 저에게 공부가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아카시아 나무는 공부를 시키기 위해서 자란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은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을, 우리 머릿속에 있는 어떤 좁은 범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그런 것들을 자연에다가 덧입혀서 말하는 것에 불과하다. 자연의 질서에 투사한다는 것, 다시 말해서 자연의 질서라는 개념도 목적론적 함의를 갖고 있는 것이다. 헉슬리가 이렇게 얘기를 했기 때문에 이것에 더 이상 논박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질송은 논박을 하겠다고 나섰다. 그래서 제가 여기다 질송의 논박이라고 했는데, 이 논박이라고 하는 것은 신념을 토로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 정도의 신념은 철학자나 형이상학 연구자나 신학자나 다 가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질송의 신념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한번 살펴볼 필요는 있다. 인간이 지적으로 하는 일에는 목적이 있다, 이건 인정할 수 있다. 그런데 그다음 테제인 자연의 일부인 인간을 통한 목적성은 분명히 자연의 일부이다. 이건 오류이다. 인간은 분명히 자연의 일부이다. 그런데 자연의 일부에서 미시적 차원에서는 목적성이 드러날 수는 있다. 그런데 미시적 차원에서 일어나는 목적성이라고 하는 것을 자연이라고 하는 대규모에다가 투사를 하면 안 된다. 그러니까 헉슬리가 바로 앞에서 하면 안 된다 하는 것을 지금 질송이 하고 있다. 부분의 오류, 전체의 오류에 해당한다. 이제 질송이 질문하는 부분부터는 질송의 주장이다. "생물학적 진보에 기초하여 우주의 목적이 있다고 추론하는 것에 왜 오류가 있어야 합니까?" 오류가 있는데, 오류는 없습니다 라는 것보다도 왜 오류가 있어야만 합니까 라고 물어보는 것은 굉장히 강력한 신념의 표현이다. 생물학적 진보라는 말 자체도 그렇다. 생물학적으로 진보한다는 것도 이게 진부한 개념이다. 그다음에 "현대 불가지론자들이 가장 흔하게 논하는 것은 아마 목적인의 문제일 것입니다." 현대의 불가지론자들은 목적인을 부정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당연히 과학이라고 하는 것도 무언가 존재 내지 실존하는 이유를 모른다. 현대 불가지론자들은 과학에 근거해서 말하는데, 질송은 이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한다. "이 질문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답변은 개개의 실존 에너지 혹은 개개의 실존 사물이 모두 순수 실존 활동에 의존하여 실존한다는 것"이라는 답이라고 내놓았는데, 순수 실존 활동에 의존하여 실존하는 것은 신이다. 이 대답은 질송이 다시 한 번 자신의 신 개념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신이라고 하는 존재는 그 어떤 것에서, 질송에 의하면 내가 가지고 있는 신 개념은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고 자기 스스로가 존재할 뿐만 아니라 다른 것들도 존재하게 하는 궁극적인 원인, 앞에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개념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에 따르면 to be, ~이 있다 라고 하는 것은, 첫째는 actu essendi, 본질적 활동, 존재하려는 활동이고, 그다음에 주어와 술어의 결합, 이것은 굴절어에서 나타나는데, I'm은 나는 있다 라는 뜻도 되지만 I'm이라고 하는 말에 뒤에다가 I'm a man이라고 할 때는 am이라고 하는 단어가 연결 계사에 불과한 것이다. 마지막 부분에서 질송은 자신의 신 개념 그리고 형이상학과 종교가 같은 차원에 놓여 있는 것을 다시 한 번 천명하고, 토마스 아퀴나스의 자연 신학이 자기 입장이다 라고 하는 것을 선언하는 것으로서 논의를 마무리한다.
우리는 이 책을 읽으면서 질송의 신개념을 받아들여서 그것을 그대로 따라갈 필요는 없다. 또 스피노자의 개념을 따라갈 필요는 없다. 지금 우리가 질송의 《God & Philosophy》를 읽으면서 해야 되는 것은 우선 탐구의 방법, 1차 문헌들을 충실하게 주석을 달아서 자신의 주장을 그것에 정초시키려는 탐구의 방법을 본받아야 될 것 같고, 두 번째로는 형이상학의 가장 기본적인 테제들이 여기에 다 등장하였기 때문에 이것을 일단 머릿속에 담고 있어야만 이것을 이용한 여러 논의들, 예를 들어서 삼위일체론이라든가 이런 것들도 이해할 수 있는 바탕이 된다 라고 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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