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담화冊談話 | 시학 강독 8-2

 

2024.06.12 🎤 시학 강독 8-2

8강. 고대 드라마와 근대 드라마

• 2024. 6. 12. 오후 7시-9시  장소:수원시글로벌평생학습관

• 강의 안내: https://learning.suwon.go.kr/lmth/01_lecture01_view.asp?idx=3672
• 강의 자료: https://buymeacoffee.com/booklistalk/20240612-suwon


은유(metaphora)는 아리스토텔레스 《시학》을 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제 어떤 식으로 표현을 해야 된다라든가 하는 얘기는 《수사학》에다가 얘기를 많이 해놓았으니까 《수사학》을 많이 참조해야 되는데, 일단 metaphora라고 되어 있다. 은유라고 하는 것은 metaphora인데, meta라는 게 두 번째라는 말로 말을 넘기는 것을 말한다. 간단히 말해서 "본래 표현하려는 것과 다른 것을 의미하는 단어의 이전"이다. 은유를 얼마나 잘 사용하는가 라고 하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 시대뿐만 아니라 적어도 버지니아 울프 이전 시대까지라고 할 수 있다. 1800년대 말까지는 은유를 어떻게 사용하는가 하는 것이 바로 서구에서는 교양의 지표라고 할 수 있다.  

은유의 방법은 세가지인데 genos에서 eidos로, eidos에서 genos로, eidos에서 eidos로 이렇게 되어 있는데, 뭘 말하는지를 일단 보고, 은유를 잘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보겠다. 《시학》 21장 213페이지에 내용이 있다. 일단 genos에서 eidos로 규칙을 알아놓아야 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드는 예는 "내 배가 여기 서 있다my ship stands here"이다.  my ship stands here.” stand(서다)는 유개념이고 moor(정박하다)는 종개념. ‘배가 정박하다’라고 하는 것이 정합적이나 종의 자리에 유를 보낸 것이다. 은유의 규정은 본래 그 자리에 딱 들어맞는 단어가 있는데 그것을 쓰지 않고 다른 단어를 사용한다는 것을 얘기한다. 내 배가 여기 서 있다 라고 말할 때 원래는 배가 정박moor해 있다 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원래는 moor를 쓸 자리에 stand를 썼다. stand라고 하는 단어가 정박이나 닻을 내리다 보다는 더 범위가 넓은, 위쪽에 있는 단어이다. 그러니까 eidos(種)에 해당하는 자리에 genos(類)에 해당하는 단어를 쓴 것이다. 그래서 genos를 eidos 자리에 썼다는 말이다. 기본적으로 은유를 사용할 줄 안다 라는 것은 어떤 단어들이 좌우로 서로 횡으로 나란히 놓여 있는 단어들을 안다는 것을 전제한다.  이것은 종에 해당하는 단어들을 일단 아는 것, 유의어thesaurus를 많이 아는 것을 의미한다. metaphora를 공부한다 라고 하는 것은 일단 thesaurus를 아는 것이다. 이건 수많은 종들을 알 뿐만 아니라 그 종들의 위계hierarchy 관계도 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metaphora가 굉장히 공부하기가 어렵다는 얘기이다. eidos에서 genos로는 genos를 써야 될 자리에 eidos를 쓰는 것을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예를 들어서 말하는 것을 보면 "청동으로 생명을 퍼내면서", 퍼낸다라는 말이 청동이라는 게 칼이니 칼로 생명력을 제거한다는 말인데, 생명력을 고갈시킨다 라고 하는 단어가 상위에 있는데, 그 아래 있는 퍼내다, 배다 이런 단어를 쓴다는 것이다. 세 번째가 유추analogon인데, 유추는 a와 b의 관계는 c와 d의 관계가 같다는 구문을 활용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디오니소스는 포도주의 신이니까 디오니드소스의 잔, 아레스는 전쟁의 신이니까 아레스의 방패, 디오니소스와 잔, 아레스와 방패 그러면 디오니소스의 방패 라고 말해도 알아들어야 되는 것이다. 이것은 첫 시간에 얘기했던 고사성어故事成語를 알아야만 하는 것이다. 이게 고사故事, 어떤 일을 근거로 해서 말을 만든 것이다. 일에 바탕을 두고 말을 만들었다. 그러니까 metaphora를 잘하는 방법은 두 가지이다.  첫째 많은 단어를 알아야 된다. 한국어 공부를 계속해야 된다.  

은유가 성립하는 영역을 가족 유사성family resemblance라고 한다. 비슷한 것들끼리 모인다는 말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한국의 가족 그런 게 아니라 은유metaphora라고 하는 것은 비슷해야 된다.  가족 유사성이 있는 개념이라고 말할 때 빡친다, 화가 난다, 열받는다 이런 거 단어들을 볼 때 뚜껑 열린다 까지는 되는데, 마음이 많이 상하네는 가족 유사성이 아니다. 빡친다, 열받는다, 뚜껑 열린다는 비속어로, 비속어라고 하는 가족 유사성 속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가족 유사성을 바탕으로 해서 의사소통, 커뮤니케이션이 형성되는 것이다. 언어 게임에 있어서도 가족 유사성의 규칙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데, 좀 더 파고들어서 얘기하면 비트겐슈타인의 언어 철학에서의 후기 철학에 해당하는 것인데 이 가족 유사성 개념으로 성립한다. 은유라고 하는 것은 a라는 것에 딱 들어맞는 b라고 하는 개념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들어맞는 은유라는 건 있을 수 없다. 대충 그 시대와 그 시기와 그 공간에서 언어 게임을 하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서로 통용되고 있는 암묵적인 규칙에 의해서 사람들 사이에 받아들여지는 언어들을 은유라고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오늘날을 살았으면 그렇게 얘기했을 것이다. 그것이 가장 극도로 발달된 것이 슬랭Slang, 그 그 영역에서만 사용되는 것이다.  지금 얘기한 것처럼 가족 유사성이라고 하는 것은 특정 시기, 시대도 아니다, 특정 시기에 특정한 공간에서 살아가고 있는 다수의 사람들 사이에서 받아들여지고 있는 언어들을 말한다. 이것을 잘못하면 그 속에 녹아들어가서 대화하기가 어렵다. 가족 유사성을 지나치게 강조하게 되면 생겨나게 되는 문제점은 규범을 훼손하는 수가 생긴다는 것이다. 은유라고 하는 것이 지나치면 아무도 커뮤니케이션이 안 된다. 가족의 유사성은 현대에 있어서 진리 이론에 일정한 정도 역할을 한 건 사실이지만 이것이 지나치게 진리의 기준으로 받아들이게 된다면 규범이 훼손되는 수가 있다. 은유도 과잉해서 사용하면 안 된다. 가장 좋은 건 적절하게 사용하는 것인데 그 적절함이라고 하는 것을 찾기가 어렵다. 

강의자료에서 은유와 단어의 사용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 3권 2·3·4·5·6·7장에 있는 것을 발췌한 것이다. 오늘날에도 꽤나 도움이 될 만한 조언들이 많이 있으니까 관심 있는 분들은 보면 좋을 것이다. 제일 밑에 있는 부분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얘기한 것은 아니고 뇌과학 책에 나온 얘기이다. 일단 "낯선 것과 복합어와 신조어는 드물게 간간히 사용해야 한다." 이건 규칙이다. 두 번째 "은유는 문체에 명료성과 즐거움과 이색적 분위기를 부여하며, 그것이 가리키는 대상에 부합해야 한다." 가리키는 대상에 부합하는 것이 가족 유사성의 영역에 들어가는 것이겠다. "은유를 쓸 때는 멀리 떨어진 것이 아니라 같은 유類에 속하는 것에서 빌려와야 한다." 그러니까 같은 유에 속하는 것을 말하기 어려우니까 은유를 쓰는 것이 굉장히 어렵다. 그다음에 "무미건조한 문체의 원인으로는 합성어를 잘못 쓰는 것, 이색적인 낱말 사용, 너무 길거나 시의적절하지 않거나 흔해빠진 형용사구의 사용이 있다. 형용사는 과도하게 사용하면 기교임이 노출되므로 많고 길고 노골적이어서는 안 된다." 사실 그 사태에 딱 들어맞는 형용사를 찾는 것 자체가 굉장히 어렵다. 그래서 아까 말한 것처럼 국어 사전을 봐야 된다. 그다음에 "우스꽝스럽고 너무 엄숙한 은유는 부적절하다. 진부한 은유를 남용하면 닳고 닳은 표현이 되어 호소력이 떨어진다." 그다음에 "유추에 의한 은유는 언제나 상호적이어야 하며 같은 부류의 두 사물 가운데 어느 것에도 적용될 수 있어야 한다." 그다음에 "훌륭한 문체를 구사하는 규칙으로는 적절한 접속어 사용"한다. 접속어를 생략하는 것도 어렵다. 그리고, 그런데, 그러므로, 그런 까닭에, 따라서, 하지만, 요즘에는 뭐든지 하지만으로 통일하는 경향이 있는데 조심해야 한다. 그렇다고는 해도, 그렇다 그렇다손 치더라도, 이런 거들을 궁리해야 한다. "사물에 흔해빠진 이름이 아니라 특별한 이름으로 부르는 것", 그다음에 "사물의 이름을 말하지 않고 정의定義를 내리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간결함이 필요할 때는 이름을 사용한다." 이 방법을 사용하려면 정의를 알아야 하는데, 국어 사전을 공부하는 게 정의를 외우는 것이다. 그다음에 "독자가 읽으면서 모형을 그려볼 수 있게, 다시 말해서 뇌가 볼 수 있게", 이것은 어떤 것을 묘사할 때는 추상적인 단어로만 사용하지 말고 구체적으로 모양을 그리라는 얘기이다. 그다음에 "단어를 배치하는 순서는 실제 현실의 행동을 잘 모방할 수 있도록", 어떤 사람에게 행동을 유도하는 글을 쓸 때는 그 사람이 이 글을 읽자마자 할 수 있도록 쓰는 게 좋다. 또는 이 글을 읽자마자 생각을 많이 하게 하려면 행동을 유발하지 않도록 글을 쓰는 것도 중요하겠다. 이런 것들이 글쓰기의 요체이다. 소리 내서 읽어보고, 언제 어디서 어떻게를 쓸 것인지, 어떻게 언제 어디서 순서로 쓸 것인지, 아니면 어디서 어떻게 언제 순서로 쓸 것인지, 이런 것들이 독자 대상에 따라서 달리 사용될 수 있다. 말을 할 때도 물론이지만 글을 쓸 때 이를테면 user experience를 고려하는 글쓰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다음에 "촉감, 맛, 냄새, 소리를 표현하는 단어를 볼 때 읽는 이의 뇌에서 이 감각과 연관된 신경망이 활성화되면서 감각이 재현되도록", 이런 것에 관련된 뭔가를 쓸 때는 가장 그것에 직접적인immediate 단어를 쓰라는 것이다. 뭔가 좀 쓰려는 사람은 단어 묶음집을 갖고 있어야 된다. 부드러움 쪽에 해당하는 단어, 딱딱함에 해당하는 단어들, 그림 그린 사람들에게 채도표, 명도표가 있는 것처럼 가족 유사성이 있는 단어장. 단어 스펙트럼 장이 있어야 된다. 그다음 맨 밑에 "마음 모형 이론: 인간은 타인의 행동을 모방하여 그것을 자신의 언어로 재구성한다. 인간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잘 읽을 수 있도록 진화되었다." 이것은 진화론의 정설이다. 그런데 주의해야 되는 게 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잘 읽을 수 있어야만 사이코패스가 안 되는 것이다. 그런데 다른 사람의 마음을 너무 많이 읽으면 또 피곤할 수가 있다. 의도적으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을 한 글자로 독獨이라고 한다. 고孤와는 다르다. 이백李白의 월하독작月下獨酌이라는 시가 있다.  처음에 "꽃들 사이에 술 한 병 놓고 서로 아는 이 없이 혼자 마신다"[花間一壺酒 獨酌無相親 화간일호주 독작무상친]라는 표현이 나온다. 여기서 親이라고 하는 것은 친하게 지내는것, 마음을 주고받는 사이를 말한다. homophrosynē, 같은 마음이 되는 사람들을 한자로 親이라고 한다.  서로 같은 마음인 사람이 없다는 것[無相親]이 끊었다는 얘기로, 이백의 월하독작은 술을 마시는데 인간을 끊고 일부러 혼자 마시는 것이다. 술 한잔 할 때 아무도 없으니까 달빛이 비춰서 달과 마시는 형국이 되었다.  그러니까 孤舟蓑笠翁고주사립옹 [유종원柳宗元, 강설江雪], 배 한 척 띄워놓고 혼자서 낚시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그건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어 떠밀려온 것이고, 월하독작은 누가 나랑 한잔하지 라고 해도 됐어 라고 하면서 혼자 마시는 것이다. 일부러 끊어내는 단계를 말하는 것이다. 

어떤 텍스트를 읽을 때 어떻게 읽을 것인가 이것이 사실은 《시학》을 공부하는 궁극적인 목표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한 고대 드라마의 목표는 관객들에게 카타르시스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카타르시스를 불러일으키려면 타인의 마음을 읽을 줄 알아야 되는 것이 고대나 근대나 불변의 목표이다. 물론 예외는 있다. 헤겔이나 니체나 쇼펜하우어와 같은 사람은 비극적인 것을 비극적인 것 자체로 추구하는데, 말하자면 낭만주의 비극이다. 그것은 감동을 불러일으키든 말든 나는 내 갈 길 간다라는 약간 그런 게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되었건 셰익스피어가 되었건 버지니아 울프가 되었건, 특히나 관객들의 반응에 민감한 작품은 셰익스피어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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