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원의 책담화冊談話(https://booklistalk.podbean.com)에서 제공하는 「ε. Gilson, God & Philosophy」를 듣고 정리한다.
2024.06.06 ε. Gilson(16), God & Philosophy, Ch. 2
에티엔 질송, ⟪철학자들의 신 - 역사적 개관⟫(God and Philosophy, 2002)
텍스트: https://buymeacoffee.com/booklistalk/god-philosophy-ch-2
질송은 토마스 아퀴나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본질의 언어를 실존의 언어로 번역해서 형이상학을 완성했다고 이야기한다. "형이상학은 초기에 시작되었을 때부터 실존적이 되는 것을 언제나 모호하게나마 목표로 하고 있었습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시대부터 형이상학은 언제나 그러했으며, 그러한 점에서 형이상학은 그 실존성을 잃어버릴 때마다 어김없이 그 실존 자체를 상실했습니다." 이렇게 질송은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 말을 다르게 읽어보면 형이상학의 시작이라고 하는 것은 항상 본질의 언어만을 가지고 이야기하는데 그것이 실존 세계에서, existentia로서까지, 과학적인 의미에서의 증명은 아니고 논증되는 것, 그것이 논증되었을 때 형이상학은 사실 실현되었다 라고 말할 수 있겠다. 제가 보기에는 이것이 질송의 형이상학관이다. 그러니까 metaphysica view of Etienne Gilson, 질송의 형이상학 관점, 질송은 형이상학이라고 하는 것이 본질의 언어에서 그치면 완성이 아니라고 본다. 순수 사유 활동이 아니라 순수 실존 활동,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한 최고의 사유는 순수 실존 활동이 아니었기 때문에 존재자에 관한 지식, 현실태와 가능태가 수반되지는 않았기 때문에 형이상학이 완성되지 않았다 라고 얘기를 하는 것이다. 이 말이 맞는 얘기일까. 질송의 말이 맞다, 질송의 말처럼 실존의 언어까지 가야 한다는 것은 글쎄, 저는 아퀴나스를 읽으면서 너무 많이 간 거 아닐까, 아리스토텔레스를 읽으면서도 이질감을 느끼지는 못했다. 어쨌든 플라톤은 에이도스의 세계, 그러니까 본질의 세계와 현전하는 세계의 연결고리를 확보하지 못한 채 항상 그 사이에서 펄쩍펄쩍 뛰어오르려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저는 그게 형이상학적인 열망을 표현하는 것이고, 그렇게 열망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형이상학은 충분히 그것의 역할을 다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열망을 포기하고 그냥 현전하는 것에 대해서만 충실하게 노력을 하면, 물론 그렇게 되면 존재론에 그치게 된다, 존재의 일반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것, 그리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존재를, 형상 같은 것들을 굳이 우리가 다 드러내 보일 수 있겠는가, 거기에서 존재론과 형이상학의 그 경계선의 모호한 갈등들이 있다고 생각을 해왔는데. 질송은 그것은 완성된 것은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사실 이 문제는 이렇게 보면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을 같은 범주로 묶을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록 그 연결고리들을 다 플라톤과는 다르게 만들어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그가 말하는 신, 형이상학적인 최고 존재는 여전히 순수 사유이기 때문에, 질송이 지적한 것처럼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무리 그렇게 얘기를 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헬라스 존재론의, 헬라스 형이상학의 한계까지 밀어붙여본 것에 불과하다. 거기에 존재를 덧붙여서 존재자ens로서까지 논변해내지 못했기 때문에 이 문제는 이때 끝난 게 아니다. 이 문제는 중세에서 끝난 문제가 아니고 이제 이어지는 근대 철학에서도 얘기가 되겠지만, 계속 플라톤적인 또는 아우구스티누스적인 고민들이 근대 철학에서 계속 이어지고 결국 그것이 칸트에 와서 형이상학의 완전한 제거elimination까지 오게 된다. 그리고 칸트의 사유에서 그것을 받아들인 상태에서, 즉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 말하고 있는 그것을 이제 더 이상 부인할 수 없는 상태에서, 그렇다면 우리에게 윤리학과 미학이 남았는데 이것을 어떻게 되살려 볼 것인가 이런 고민들이 신칸트학파에서 계속되고, 신칸트만으로도 해결이 안 되니까 헤겔과 연결시키는 에른스트 카시러 같은 사람들이 나오게 되고, 차라리 아리스토텔레스에 근거해서 존재론을 그대로 한번 살려보자 그리고 그런 존재론을 그대로 살린 게 헤겔이 아닐까라고 해서 니콜라이 하르트만 같은 사람들이 작업을 하게 된다. 신칸트학파에서 이런 갈등들이 다시 등장을 하게 된다. 그러지 말고 토마스 아퀴나스처럼은 아니지만 되살릴 수 있다, 참된 존재의 실존화를, 즉 existentia를 제시할 수 있다 라고 가버리면 하이데거처럼 되겠다.
99 형이상학은 초기에 시작되었을 때부터 실존적이 되는 것을 언제나 모호하게나마 목표로 하고 있었습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시대부터 형이상학은 언제나 그러했으며, 그러한 점에서 형이상학은 그 실존성을 잃어버릴 때마다 어김없이 그 실존 자체를 상실했습니다.
얘기를 다시 원래대로 돌리면 아퀴나스에 있어서 이 문제는 아퀴나스의 transformation, 있음을 가진 궁극적인 원인인 신이 있다까지 왔다. 그런데 질송은 그것이 자연신학 역사의 정점에 이르렀고 그런데 그 정점을 역행하는 일이 곧 발생했다고 말을 한다. 그 정점을 역행하는 일이 곧 발생했다 라고 하는 것은 사람들이 못 견딘다고 하는 것인데, 다시 말해서 인간의 자연적 이성만으로 그러한 앎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계속 인간이 스스로 부정한다는 것이다. 질송의 입장은 그렇게 볼 수 있겠다. 어쨌든 그것이 역행하는 일이 발생하기 전에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이 무엇인가 그걸 한번 좀 더 생각을 해보자면, 아퀴나스에서의 신이라고 하는 것은 최고 원인이다. a most deeply hidden God, 가장 깊숙이 숨어 있는 신. 숨은 신deus absconditus이라고 하는 개념은 아퀴나스에서도 적용되지만 사실은 파스칼이나 또는 거슬러 올라가면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적용되는 게 더 적절한 것일 수 있다. 신은 숨어 있다. 우리는 그 신을 알 수 없다. 다만 우리는 신을 열망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어쩌다 한 번 신이 우리에게 자신을 비춰줄 때에만 우리는 그 신을 알 수 있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게, 그 개념을 가지고 있는 게 숨어 있는 신이다. 그런데 아퀴나스에서 숨은 신은 deeply hidden God. 가장 깊숙이 숨어 있는 신으로 얘기되고 있지만 동시에 그 신은 우주의 최고 원인으로서,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최고 원인이긴 하지만 그 신의 본질essentia은 existentia로 실현된다. existentia로 실현되기 때문에 본질과 실존이 일치하는 궁극의 원인으로서 제시된다. 그렇다면 현존하는 모든 사물에 관철되어 있는 가장 분명히 드러난 신이 된다. a most obvious God, 그러니까 가장 깊숙이 숨어 있는 신이지만 그것에 우리가 도달할 수 없는 게 아니라 그 신은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 있는 신, 명백한 신most obvious God이 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숨은 신 개념과는 다르다. 숨은 신은 분명히 숨은 신인데 이 신이 눈앞에 드러나 있는 것이다. 파스칼은 눈앞에 드러나 있다는 걸 인정하지 못하고 계속 숨은 신을 찾는다. 저도 그런 쪽이다. 《숨은 신을 찾아서》는 신념 체계와 삶의 방식을 끊임없이 찾아야 된다는 것이다. 신념 체계와 삶의 방식의 궁극적인 원인, 제1원리라고 하는 것은 숨어 있고, 그것이 우리 눈앞에 현전하지 않으니까 우리는 플라톤적인 열망과 아우구스티누스적인 어떤 고통 또 그리고 그런 것을 찾아내는 것이 결국 자아를 구축하는 하나의, 그것을 찾아내는 과정이 자아를 구축하는 서사이기도 하니까 숨은 신이라고 하는 개념을 아퀴나스처럼 이해할 수 있고, 아우구스티누스처럼 이해할 수도 있다. 아우구스티누스처럼 이해하게 되면 그것이 계속 이어져서 둔스 스코투스, 보나벤투라 그다음에 데카르트, 파스칼까지 이어진다. 헤겔은 아퀴나스에 가깝다. 얼핏 보기에는 아리스토텔레스나 아퀴나스나 비슷한 것 같지만, 지금 질성이 잘 지적한 것처럼, 아리스토텔레스의 언어를 실존의 언어로 번역을 해내야 된다. 그런 점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도 숨은 신이라고 하는 것이 순수 사유라는 것을 밝히긴 했어도 그것이 숨어 있는 것이다.
99 토마스 아퀴나스의 형이상학은 자연신학 역사의 정점에 있었고, 여전히 정점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 정점을 역행하는 일이 곧 발생했다는 것은 놀랍지 않습니다.
아퀴나스에서는 가장 분명히 드러난 신이다. 그러니까 더 이상 인간은 세계를 표징으로서만, 즉 sēmeion으로서만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 도처에서 신을 발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봐야 토마스 아퀴나스의 우주론적 신존재 증명이라고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예를 들어서 중세 철학사를 배운다 하면 시험 문제에 꼭 나오는 게 있다. 존재론적 신존재 증명과 우주론적 신존재 증명을 서술하시오. 그런데 존재론적 신존재 증명이라고 하는 것은 신이라고 하는 개념을 분석하고 그것의 본질이 무엇인가, 본질적으로 이러이러하니까 있을 수밖에 없다 라고 하는 일종의 개념, 나쁘게 말하면 말장난, 그런 개념적인 증명인데, 아우구스티누스라든가 둔스 스코투라스라든가 대표적으로는 켄터베리의 안셀름을 가지고 얘기한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모두 existentia까지는 증명해내지 못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우주론적 신존재 증명은 가장 깊숙이 숨어 있는 신이면서 가장 분명히 드러난 신이기 때문에 우주 도처에서 신을 발견할 수 있고, 그런 까닭에 우리는 신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서 개념 분석을 할 필요가 없고, 고개를 들어서 그대의 눈앞에 펼쳐져 있는 우주를 보라, 자연을 보라 그러면 그것이 신의 증명이다 라고 나온다. 그래서 우주론적 신존재 증명이라고 일반적으로 불리고 있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존재 증명은 정확히 말하면 우주론적 논변은 4가지가 있고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목적론적 논변이다. 이를 우주론적 · 목적론적 논변cosmological and teleological arguments라고 불린다.
원래 《신학대전》에서는 Quinque viæ, five, ways, 하느님의 존재를 알려주는 다섯 가지 증명, 다섯 가지 길 이렇게 되어 있다. 4개가 우주론적 논변이고 마지막으로 한 개가 목적론적 논변이다. 우주론적 논변은 4개, first mover, 움직임에 대한 관찰, via ex motu, 우리 눈앞에 펼쳐져 있는 사물들이 운동을 하고 있지 않나, 이 운동이라는 게 어디서 시작되었겠는가. 유기체의 운동만이 아니라 local motion, A라는 장소에서 B라는 장소로 움직이는 것들도 운동인데, 데카르트에서 운동을 얘기할 때는 눈에 보이지 않는 원인에 의한 운동, 이런 local motion이 아닌 것들에 대해서는 더 이상 논의하지 않는다. 데카르트가 비록 아리스토텔레스를 부정했다고는 하지만 데카르트도 아퀴나스 수준까지 가지는 못했다. 그건 데카르트 할 때 얘기하기로 하고, 움직임(운동)에 관한 관찰을 통해서 일단 신 존재를 증명할 수 있다. 두 번째가 via ex causa efficientis, 즉 universal causation, 능동 원인에 대한 통찰을 통해서 우리는 신존재를 증명할 수 있고, 신존재 증명의 구체적인 내용은 《신학대전》을 볼 필요 없이 어떤 철학사에서든지 이건 논의를 하고 있으니까 펼쳐보면 된다. 그리고 via ex possibilii et necessario, 우연적인 것과 필연적인 것에 대한 통찰. 이 세상에는 우연적으로 보이는 것들이 있지만 사실은 이 우주에는 신의 전지전능이 관철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우연적인 것이다 라고 말하는 것조차도 사실은 신의 필연적인 원인이 그 뒤에 있다 라고 말을 하는 것이고, 우주론적 논변의 네 번째 마지막에 해당하는 것은 완전성에 대한 통찰, degree라고 할 수 있는데, via ex gradu rei, 사물의 등급에 관한 통찰, 덜 완전해 보이는 것이 있고 조금 더 완전한 것에 가까운 것이 있지 않는가, 그러니 이것은 신이 만들어 놓은 질서의 현연이다. 네 번째 완전성에 대한 통찰까지 가면, 완전가능성이라는 개념과 완전성은 다르다. 완전가능성과 완전성을 구별한 것이 루소에 와서 이루어진 것인데, 그것은 근대에 있어서의 진보 목적론과 연결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완전성에 대한 통찰 지점에서 이제 아퀴나스는 목적론적 논변으로 넘어간다. 즉 질서의 목적, 또는 gubernatione rerum, 사물의 지배이다, 그러니까 fine sive, 목적과 끝, 사물의 끝으로부터 증명하는 것, final cause or ends, 이것이 바로 목적론적 논변인데, 목적론적 논변은 완전성에 대한 통찰에서 곧바로 넘어갈 수 있다. 이렇게 하면 궁극적으로는 Unmoved Mover라고 하는, 그런데 이제 아리스토텔레스에서처럼 순수 사유 활동으로서의 Unmoved Mover가 있는 게 아니라 existentia, 즉 실존을 만들어내는 제1원인으로서 또는 궁극적 능동 원인으로서의 신까지 가게 된다. 그러면 이게 바로 토마스주의 정통교설 thomist orthodoxy가 된다. 토마스주의의 정통교설이 바로 이것이다. 이것이 로만 가톨릭의 정통 교리이다. 그러니까 토마스주의를 부정할 수 없다. 에티엔 질송은 이러한 orthodoxy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로마 가톨릭 신자는 일단 이것을 믿어야 한다. "믿어야 해요"라고 지금 말했는데 믿기 어려운 사람은 로만 가톨릭 신자가 아닌가, 괴로워하면서 계속 버티고 있는 것이다. 저는 thomist orthodoxy에 대해서는 이미 《숨은 신을 찾아서》에서 이것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자백을 했기 때문에, 아직도 자신의 자아self-identity를 찾아서 과연 이 길이 나의 주요 계기인가 그리고 이 계기를 중심으로 해서 여타의 것들은 삽화에 불과한 것인가에 대해서 계속 고민을 하고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고민이 끝난 상태이다.
저는 아구스티누스나 데카르트나 파스칼이나 이런 사람들의 입장에 동조하고 있고, 그것에 동조하고 있다는 것은 자신이 끊임없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흔들리기 싫은 사람, 그 흔들림을 극복해버리고 그 극복의 순간에 삶의 절정에 이르러서 자신의 삶을 마무리해 버리는 사람들은 에이해브 선장 같은 사람들이다. 에이해브 선장은 thomist이다. 이게 형이상학을 공부하는 즐거움이라고 할 수 있다. 에이해브 선장은 thomist인가. 어이없는 질문일 수 있는데, 이번에 《모비딕이》이 김석희씨에 의해서 전면개역판이 나왔다. 전면 개역판을 구입해서 《모비딕》을 다시 읽으면서 생각을 한번 해보는데, 어떤 물음을 가지고 읽는가. 에이해브는 thomist인가, 형이사학을 공부한 사람은 그런 물음을 가지고 에이해브를 읽을 수 있다. 다만 이슈마엘은 그걸 기록한 사람이니까, 이슈마엘은 무관점적 관찰자의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 같고, 그러면 거기서 멜빌은 자신을 에이해브에다가 투영을 시키는가 아니면 이슈마엘에 투영을 시키는가, 이슈마엘에 투영을 시키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에이해브가 되고 싶은 건 아닐까, 에이해브가 된다고 하는 것은 thomist가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일테고, thomist가 된다면 Unmoved Mover에 대한 앎에 이르는 순간 죽어야 한다. 그 죽음이 아깝지 않은 그런 것이다. 그러니까 "앎을 가지는 모든 존재자는 그들이 아는 모든 것에서 신을 암묵적으로 안다". 신을 안다는 것, 그런데 그 에이브처럼 암묵적으로 아는 게 아니라 뚜렷하게 알아버리니까 그것은 그냥 thomist도 아니고 radical thomist이다. 극단적이라기보다는 철저한, radical 단어의 3개 뜻(철저한, 급진적인, 극단적인) 중에 철저한이라는 뜻을 취해서, 그럴 때 에이헤브는 radical thomist로서 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그런 점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형이상학을 배경으로 해서 소설 하나를 읽어볼 수 있다. 앎을 가지는 모든 존재자는, all knowing beings, existentia를 가진, 실존으로서 실현된 자, en과 essentia가 결합이 되어서 거기에 이제 존재를 부여받고 실존으로서 실현된 자, all knowing beings implicitly know, 암묵적으로 안다, 어쨌든 안다 라는 뜻이다. God in any and everything that they know, 그들이 아는 모든 것에서 라고 번역이 되어 있는데, any and everything는 어떤 것에서 그리고 모든 것에서 라고 번역해야 한다. any라고 하는 말을 할 때는 어떤 우연히 마주치는, 그런데 우연히 마주치는 것이 한두 번이 아니더라 하면 every이다. 그러면 그것이 contingency가 아니라 necessary가 된다. 우연히 알게 됐는데 우연이 계속 겹쳐 들어가면 필연으로 들어가는 것이고 그러면 그것이 every가 되는 것이다. any and everything that they know, 그들이 알고 있는 어떤 것에서나 그리고 모든 곳에서, 그런데 이것이 과연 가능할까 이렇게 thomist orthodoxy에 이르면 그대로 아 그렇지 하고 믿어버리면 되는데 사람은 그게 안 된다. 그래서 삶의 물마루에 올라 절정에 오른 사람이 죽어야 되는 이유가 뭐하면 거기서 살아나면 thomist orthodoxy에 이르렀다는 것을 알고 난 다음에 그 상태를 계속 유지하면서 평생을 살 수가 없다. 그걸 깨달은 다음에는 죽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또다시 우리는 아우구스티누스주의자로 전락하게 된다. 전락이라는 말을 일부러 썼는데 thomist의 관점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전락이다. in any and everything에서 신을 알고 있는데 왜 그걸 또 의심하는가. 즉 skeptic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계시의 도움 없이 인간적 · 자연적 이성만으로는 이러한 앎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입장이었다. 앞에서 어쩌다 한 번 가끔씩 우리에게 준다는 것이다. 다시 그러다 보니까 둔스 스코투스 같은 사람 이후로 또다시 이 얘기가, 앞에서는 보나벤투라를 얘기했는데 지금 둔스 스코투스 이후로는 사물들의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것의 실존을 안다는 것이 아니라 본질과 개념을 법칙으로 포착하고 정의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하는 정도로 가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 ultima ratio, 궁극적 설명을 제시하는 것에 그친다.
105 "앎을 가지는 모든 존재자는 그들이 아는 모든 것에서 신을 암묵적으로 안다"
78 "all knowing beings implicitly know God in any and everything that they know."
궁극적 설명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자연과학을 말한다. 예를 들어 천체 물리학이 이야기하는 어떤 우주의 법칙이 있다. 그 법칙을 설명하는 것으로 천체에 대한 해명이 끝났다고 생각을 하는데, 가령 수백만 광년 저 너머에 뭐가 있을 것이다 라고 수학적으로 계산을 한다. 그런데 그건 수학의 계산일 뿐이다. 그리고 궁극적 설명ultima ratio에 접근해 가 있는 것이다. 천체 물리학자들은 그것으로써 자신들이 우주의 비밀을 풀었다 라고 말을 할 텐데 thomist들이 보기에는 어림도 없는 얘기이다. 실존을 논변으로서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것의 essentia와 개념Begriff을 하나의 principle로 내놨을 뿐이지 그 법칙principle이라고 하는 것이 반드시 그것에 실존을 입혀가지고 있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가능의 세계일 뿐이다. 그 가능의 세계를 발견하는 것으로서 만족하는가, 만족할 수 없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가능태로서의 원리일 뿐이고 그것이 정말로 실존으로서, 실존, 실제로 있는 것으로서 있다는 것, existentia의 설명을 배제하고 있는 것, 그러면 천체물리학자들은 모두 플라톤주의자인 것이다. 그러니까 아우구스티누스주의자인 것이고 데카르트주의자인 것이고, 데카르트는 그런 점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잘못 읽었다. 아리스토텔레스를 변형해서 스콜라 철학이 성립했고 그 변형에서 성립된 스콜라 철학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원래 이야기라고 착각을 한 셈이다. 데카르트가 아리스토텔레스를 얼마나 열심히 읽었겠는가. 읽지 않았으리라는 것을 추정하는데, 그냥 스콜라 철학에 들어있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읽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아주 명백하게 회의주의를 벗어난 사람이라서 마다했던 것이겠다. 데카르트가 과연 얼마나 열심히 아리스토텔레스를 읽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굉장히 많다. 그러니까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데카르트의 미움은 근거 없는 것일 수 있다. 그 얘기는 데카르트 할 때 다시 하기로 하고, 둔스 스코투스 이후에는 다시 사물들의 본질과 개념을 법칙으로 포착하고 정의하는 것으로, 즉 ultima ratio를 제시하는 것으로 충분한 상태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이게 바로 우리에게 또다시 아우구스티누스의 한계를 얘기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한계라고 하는 게 과연 한계인가.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가 thomist orthodoxy에 머무를 수 있는가, 저는 없다고 생각한다. 머무를 수 없기 때문에 에이해브는 죽어야만 했던 것이다. 그래서 도을 깨달은 사람들이 도을 설파하러 오는 것은 거대한 사기다. 도를 깨달은 사람은 존재할 수 없다. 이것이 저의 이를테면 신념인데, 끊임없이 인간은 아우구스티누스적인, 고뇌의 여행, 의심의 여행을 계속해 나갈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아우구스티누스의 한계들을 얘기한다고 하면 그것이 헬라스인들의 한계인 것이고 인간의 한계인 것이다. 아주 예외적인 토마스 아퀴나스의 확신이라든가 형이상학과 종교의 경계를 없애 버리는, 그것은 지극히 예외적인 사태가 아닐까 생각을 해본다.
100 사실들을 사실들로 다룰 때, 혹은 일어난 일들을 단순히 일어난 일들로 다룰 때는 항상 궁극의 설명ultima ratio이 있고 그것으로 끝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이런 한계를 고백한 지점을 《고백록》에서 한번 읽어보기로 하겠다. 질송이 이 부분은 얘기하지 않고 있는데, 질송이 얘기하지 않고 있다고 해서 우리가 안 읽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건 질송의 lecture니까 이것을 충분히 드러내 보여서 말하지는 못했다고 전제하고, 신적인 빛에 의한 진리로의 접근을 이야기하는 《고백록》 7권 10장 16절을 한번 보겠다. 이 부분을 이번에 다시 읽어보니까 소름이 쫙 돋는 그런 느낌이 있었다. 그리고 이것이 플로티노스의 《엔네아데스》와 연결되는 지점이 뚜렷하다. 자학적이라고 말하는 건 지나친 것이고, 겸손하다고 말하는 것은 표현이 적절치 않고, 걱정스러운 것이다. 내가 과연 thomist orthodoxy를 가질 수 있겠는가 하는 걱정, 그런 걱정이 많이 있으니까 아우구스티누스를 읽으면서 위안을 삼게 되는 것 같다. 한번 읽어 보겠다.
"오, 영원한 진리여, 참된 사랑이여, 사랑스러운 영원이여! 당신께서 저의 하느님이시니 밤낮으로 당신을 향해 한숨 짓습니다." 이 문장에서 영원한 진리, 참된 사랑, 사랑스러운 영혼은 신에 대한 온갖 미사여구를 다 드러내 보여준 것인데, “당신께서 저의 하느님이시니", 진리와 사랑과 영혼을 가진 하느님이시니, "밤낮으로", 쉴 새 없이, "당신을 향해 한숨 짓습니다." 향해라고 하는 말이 포인트가 있다. thomist는 한숨 짓지 않는다. thomist라면 이렇게 얘기할 것이다. 당신께서 저의 하느님이시니 밤낮으로 저의 이성으로써 당신을 논변합니다 라고 말할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을 이렇게 멀리 바라보면서 한숨을 짓는 것이다. "당신을 향해 한숨을 짓는다"라고 하는 것이 이 문장에서 밑줄 쳐야 되는 부분이 되겠다. 하느님의 본질은 존재esse의 측면에서는 영원한 것aeternitas이고, 인식nosse의 측면에서는 진리veritas이다. 하느님의 본질만을 얘기한다면, 존재와 인식과 작용의 측면에서 얘기하는 것이다. 존재의 측면에서는 영원한 것이고, 인식의 측면에서는 진리인 것이고, 그다음에 작용velle의 측면에서는 사랑caritas, 그러니까 하느님은 영원한 것이고 사랑스러운 영혼이고, 참된 사랑이고 사랑이다. 그러니까 aeternitas, veritas, caritas는 아우구스티누스가 발견한 하느님의 본질이다. 아우구스티누스에서는 그 본질만을 얘기하면 끝나는 것이다. ultima ratio이다. 그러니까 하느님에 관한 ultima ratio는 존재esse의 측면에서는aeternitas이고 인식nosse의 측면에서는 진리veritas, 작용velle의 측면에서는 사랑caritas라고 얘기를 하고 나서, 그 본질을 향해서 한숨을 짓는 것이다. "제가 봐야 할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게 해 주셨는데 제가 아직 그것을 볼 만한 존재가 아님도 제가 알아보게 하셨습니다. ut viderem esse quod viderem, et nondum me esse qui viderem." 볼 만한 존재가 아니다 라고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한계를 아주 명백하게 얘기한다. 신 존재의 본질을 알게 되면 그것에 곧바로 대비되어서 인간이 얼마나 비진리로 가득 차 있고 유한한 존재이고 얼마나 사랑이 없는 존재인지 안다. "저는 제가 당신께로부터 멀리 떨어져 그야말로 '비유사성의 영역'에 존재하고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et inveni longe me esse a te in regione dissimilitudinis" 비유사성의 영역이라는 말은 in regione dissimilitudo가 달라짐, 똑같지 않음이라는 말이다. 이것이 이제 아우구스티누스가 플로티노스에서 받아들였다라고 일반적으로 주해가 된다. "영혼이 악에 동화되면서 일자와의 유사성을 잃고 비유사성의 영역에 있게 된다."가 《엔네아데스》 1.8.13.16에 있는 것이다. 비유사성의 영역region of unlikeness, anomoiotētos topō,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가 바로 이 비유사성의 영역에 있는데, 비유사성 영역에 있는 인간이 유사성을 획득하려고 노력하는 것, 그게 이제 찾아서 가는 일이다. 이것이 thomist에서 한 번 절정에 이른 다음에, 짐작컨데 헤겔 형이상학에서 다시 한 번 thomism적인 것이 드러나 보이고, 그 이후로는 하이데커도 나름 만만치 않게 이걸 해보려고 했는데 시적인 어떤 노력으로서 그것이 가능하다고 했다. 하이데거는 thomism적인 방식은 아니다. 플로티노스의 이야기를 가지고 아우구스티누스는 논변하고 있다. 아구스티누스의 한계가 다시금 제기되고 그 한계를 출발점으로 삼아서 근대 철학이 시작이 된다. 근대 철학에 관한 부분은 아주 명백하게 아우구스티누스적인 한계에서 시작을 한다고 보아두고 이제 근대 철학으로 들어가면 될 것 같다.
《고백록》 7.10.16
오, 영원한 진리여, 참된 사랑이여, 사랑스러운 영원이여! 당신께서 저의 하느님이시니 밤낮으로 당신을 향해 한숨짓습니다.
o aeterna veritas et vera caritas et cara aeternitas, tu es deus meus, tibi suspiro die ac nocte!
제가 봐야 할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게 해 주셨는데 제가 아직 그것을 볼 만한 존재가 아님도 제가 알아보게 하셨습니다.
ut viderem esse quod viderem, et nondum me esse qui viderem.
저는 제가 당신께로부터 멀리 떨어져 그야말로 '비유사성의 영역'에 존재하고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et inveni longe me esse a te in regione dissimilitudin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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