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담화冊談話 | 시학 강독 6-2
- 강의노트/책담화冊談話 2021-24
- 2024. 5. 31.
📚 강유원의 책담화冊談話(https://booklistalk.podbean.com)에서 제공하는 「시학 강독」을 듣고 정리한다.
2024.05.29 🎤 시학 강독 6-2
6강. 비극과 카타르시스
• 2024. 5. 29. 오후 7시-9시 장소:수원시글로벌평생학습관
• 강의 안내: https://learning.suwon.go.kr/lmth/01_lecture01_view.asp?idx=3672
• 강의 자료: https://buymeacoffee.com/booklistalk/20240529-suwon
《정치학》의 카타르시스 개념에서 "이러한 것들의 목적이 카타르시스"인데, 여기서 카타르시스는 안정적 상태로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정치학》에서는 카타르시스가 공포와 연민을 없애는 것을 얘기하는 게 아니라 안정적 상태로 된다고 했다. "해없는 기쁨(ablabēs hēdonē)을 제공", 해로움이 없는 기쁨은 순수한 기쁨이다. 순수한 기쁨이라고 하는 것, 대체로 이것에 근거해서 우리 공부의 목적은 바로 이런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공부의 목적은 순수한 해로움이 없는 기쁨이다. 어떻게 보면 대가가 없는, 특별히 내가 이것을 통해서 뭔가를 했는데 그것의 성과가 그냥 내 안에 머물러 있는 것, 내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 소외되지 않은 것이다. 소외된 노동이라든가 이런 것들이 다 hēdonē와 해로움이 없는 순정한 기쁨하고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것들이 아리스토텔레스 시대부터 시작이 되었다. "그들 모두는 일종의 정화(tina katharsis)를 얻게 되고, 마음의 부담감은 즐거움을 동반해서 가벼워질(kouphizesthai) 것이다" 여기 《정치학》에 나오는 개념들은 공포와 연민 얘기가 없다. 《정치학》에 나오는 카타르시스는 순정한 Speil, 도덕적 의미의 순화라든가 이런 것들에 훨씬 가깝다. purificatio에 가까운 개념이다. 카타르시스는 의미가 여러 종류가 있는데 아까 얘기했던 것처럼 배출한다는 것도 있고 속죄한다는 것도 있고 순화라고 하는 것도 있다. 헬라스 세계에서는 1번 배출이라는 뜻과 3번 purificatio라고 하는 개념 이 두 개가 대체로 사용되었을 것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속죄라고 하는 말은, 이 당시에 사람들은 희생제를 치르면서 소 몇 마리를 바치면서 속되는 되는 것이고, 사람이 속죄하는 개념은 없다. 그게 희랍 종교의 특징이기도 하다.
이제 연민과 공포를 본격적으로 보겠다. 연민eleos은 "그런 일을 당할 만하지 않은 사람이 치명적이거나 고통스러운 변고를 당하는 것을 보고 느끼는 고통의 감정"이다. 지금 연민이라고 하는 것은 《수사학》에 설명이 돼 있고, 공포도 《수사학》에 설명이 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시학》에는 연민은 무엇이고 공포는 무엇인지에 대해서 설명이 없다. 그러니까 여기서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데, 《정치학》이라고 하는 것이 있고, 정치의 현장에서 사용되는 도구에 대한 연구가 《수사학》이라는 것이다. 《수사학》은 《정치학》에 딸려 있는 학문이자 연설술이다. 강의자료를 보면 지금 인용된 게 5개인데, 모두 《수사학》이다. 왜 연민과 공포 《수사학》에서 논의가 되었는가. 사람들로 하여금, 흔히 하는 말로 연설을 통해서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해야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설득을 해서 저 사람 말이 맞네 라고 하게 해야 된다. 그래서 사실 비극 드라마에서 연민과 공포라고 하는 게 《오이디푸스 왕》 이외에는 불러일으켜지는 경우가 없다. 셰익스피어 드라마 역시 카타르시스는 별로 없다. "그 변고는 연민의 정을 느끼는 사람이 볼 때 자신이나 자신의 친구 중 한 명이 머지않아 당할 법한 그런 것이어야 한다." 이 부분이 중요한데, "자신이나 자신의 친구 중 한 명이 머지않아 당할 법한"이 포인트이다. 연민은 예측하는 것이다. 저 사람의 저러한 모습을 보니 참 짠하네 하는 것이 일어나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연민의 정을 느끼는 것은, 사회심리학 같은 책에서 보면 공감 능력이 없는 사람은 연민을 느낄 수가 없다. 연민을 느낀다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이 정상적인 정서 상태에 있다는 것을 일단 전제한다. "완전히 망한 사람들은 연민의 정을 느끼지 않으며, 이 점은 자신을 엄청난 행운아라고 생각하는 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여기서 조금 조심해야 되는 것이 속된 말로 완전 나가리가 되어서 불행한 상황에 처해 있는 사람만이 완전히 망한 사람은 아니다. 완전히 망한 사람에 무슨 뜻도 여기에 함축되어 있는가 하면 모든 감정을 차단해버린 사람도 완전히 망한 사람이다. 그러니까 "이미 최악의 변고를 당한 만큼 더는 변고를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동시에 자신을 엄청난 행운아라고 생각하는 자들, 이들 모두 정서의 스펙트럼이 똑같다는 것이다. 자신을 엄청난 행운아 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렇게도 생각한다. 나는 이 모든 것을 다 이겨내고 결국엔 최후의 승자가 될 거라고 하는 자신감, 이런 자신감을 가진 자들도 똑같이 공감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다. 지나치게 인생에 스크래치가 많거나 또는 자기가 어떤 수를 써서라도 고통을 피해서 걸어온 사람들은 공감 능력이 없고, 연민의 정을 느낄 수가 없다.
그다음에 "우리는 나이, 성격, 습관, 사회적 지위, 출신에서 우리와 같은 사람에게 연민의 정을 느낀다." 이 말을 다르게 해석하면 앎이라고 하는 것이 있어야 공감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저 사람이 나랑 비슷한 나이대이네, 성격이 비슷하네 하는 것들, 즉 습관, 사회적 지위, 출신 이런 것들을 고려할 줄 아는 지적인 능력이 있어야 된다. 연민이라고 하는 것은 정서적으로만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지적인 능력이 수반이 된다. 연민을 못 느끼는 사람은 누구나 다 백치인 것이다. 지적으로 모자라기 때문에, 앎이 없기 때문에, 희랍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을 한다. 희랍 사람들은 주지주의이다. 앎이 있어야 이 앎으로부터 생겨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도 같은 변고를 당할 개연성이 높기 때문이다"라고 하는 것, 나랑 저 사람이 처지가 비슷하니까 연민의 정을 느끼는 이유는 나도 그렇게 될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희랍 사람들은 무조건 앎이 먼저이다. 앎이 있고 그 앎으로부터 어떤 정서가 있고 정서가 있고 행동이 있고 그런 것이다. 정보가 먼저 일어나는 것, 이것이 말하자면 희랍의 주지주의이다. "여기서도 우리 자신에게 일어날까 두려운 것이 남에게 일어날 때 우리가 연민의 정을 느낀다는 원칙을 명심해야 한다."
이제 공포 부분을 보면 공포는 앎이 없어도 가능한 것이다. 그러니까 범위가 훨씬 더 넓다. 모르는 것에 의해서 우리가 공포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공포를 느끼는 것은 지적인 인간이 아니어도 된다. 정서적으로 망가진 사람도 공포를 느낄 수 있다. 그래서 "두려움은 파괴나 고통을 야기할 임박할 위험을 생각할 때 느끼는 일종의 고통 또는 불안"이다. 그다음에 "자신에게 아무 일도 없을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분명 아무도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부분은 연민과 연결되어 있다. 이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어떠한 강박도 없는 상태인 것이다. 그다음에 "끔찍한 것은 가련한 것과 다르다." 가련하다는 것은 연민하고 가깝다. 그러니까 공포 영화가 만들어내는 배출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에서는 굉장히 저급한 것이다. "그것은 연민의 정을 몰아내는 경향이 있으며, 때로는 연민과 반대되는 감정을 유발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연민과 공포는 일종의 고통(lypē)이며 배출되어야 할 것들"이고, 그냥 마구 배출하는 것이 아니라 정교하게 그 배출 과정을 다듬는 것이 비극이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비극은 만들기가 굉장히 어렵다.
그러면 그 과정을 한번 보면, 일단 아리스토텔레스가 얘기한 것을 가지고 재정리를 해보면 공포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공포에서 시작을 해서 그다음에 연민으로 넓혀지면서, 공포로 사람들을 자극한 다음에 저런 공포가 남의 일이 아니구나 라는 것이 느껴지게끔 연민으로 넓혀가는 것이다. "인간의 운명에 대응하는 행위의 일반적 경로가 결부된다." 행위의 일반적 경로라고 할 때 연민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래도 공감 위에서 성립하는 것이니까 저 사람이 저러하면 나도 그러겠지, 그리고 나이, 성격, 습관, 사회적 지위, 출신 이런 것들 서로 겹치고 있을 때 일반적 경로라고 하는 것, 공통 요소들이 부각될 것이다. "그렇게 전개된 사태의 결말이 경외와 전율을 일으키면 여기서 공포와 연민이 뒤섞인다." 그러니까 지나치게 연민만 많으면 sentimentalism에 빠지는 것이고, 공포만 있으면 그냥 무서운 사람은 무섭고 안 무서운 사람은 안 무섭고 이렇게 된다. 그래서 현실적으로 드라마 속에다가 구현하기가 어렵다. 예를 들어서 《오이디푸스 왕》를 보면 공포는 별로 없고 연민도 별로 없다. 우리가 아버지 죽일 일이 없으니까 그렇다. 그러니까 공포와 연민이 결합이 되어서 카타르시스를 만들어내는 것은 꽤나 어렵다. 오히려 《콜로노스의 오이디프스》가 훨씬 더 연민을 많이 불러일으킨다. 일단 오이디프스가 아버지를 죽였다 이런 걸 다 떠나서 자기 인생이 꼬일 대로 꼬인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어쨌든 자기가 책임을 지려고 했다. 그래서 자기 눈을 찌를 것인데, 헬라스 세계에서는 눈을 찔렀다 하면 스스로 죽음의 길에 들어선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눈을 찌른 건 아니지만 내 인생이 꼬였는데 그래도 꼬일 대로 꼬인 순간 내가 책임을 져야겠다 라고 생각하고 자기가 책임질 수 있는 최대한의 범위까지 책임을 져본 적이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소포클레스의 3부작인 《오이디푸스 왕》, 《안티고네》,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중에서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은 오디디푸스가 딸과 콜로노스로 떠난 얘기이다. 거기서 오이디푸스는 자기 인생을 한탄하면서 얘기를 한다. 《오이디푸스 왕》보다는 오히려 그것이 굉장히 연민을 불러일으킨다.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문학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것, 공포는 쉽다는 것, 그러니까 이젠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작품을 또는 그 장면들을 읽으면서, 기이한 감상주의가 아니라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호소할 수 있으려면 어떤 종류의 연민을 불러일으켜야 하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정치 현장은 일단 연민의 문제가 있어야 공감이 형성된다는 것을 아리스토텔레스가 알고 있었다. . 그리고 그것을 드라마로 가져오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연민이라고 하는 건 아까 말한 것처럼 희랍 사람들은 일단 이것도 최소한의 앎이 있어야 된다는 생각했다. "연민만 있다면 기이한 감상주의에 빠지게 된다"고 했는데, 가 드라마의 성패는 연민이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잘 만들어내는가에 달려 있다. 그러려면 아까 말한 것처럼 연민을 잘 만들어내는 것은 지식이 있어야 된다. 그 지식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나이, 성격, 습관, 사회적 지위, 출신에서 우리와 같은 사람에게 연민의 정을 느낀다." 그러면 앞서 얘기했던 것처럼 비극의 주인공을 설정할 때는 어떤 나이, 어떤 연령대에 어떤 성격, 어떤 습관, 어떤 사회적 지위, 어떤 출신의 사람을 갖다가 어떤 상황에다 넣어야 관객들에게 연민을 불러일으킬 것인가를 고민을 해야 된다. 이런 얘기들, 드라마의 주인공을 설정하는 방법은 구체적으로는 《수사학》에 나온다. "자신에 대한 것으로 여겨졌던 공포가 연민과 결합함으로써 협소함을 벗고 보편화된다. 공포가 타인의 삶과의 상상적 결합인 연민으로 전이되기 때문이다." 보편화된다고 하는 것은 많은 사람이 공감한다는 얘기다. 많은 사람이 공감하려면 연민을 가지고 해야 된다 하는 점이 되겠다. "관객이 자신을 벗어나 비극적 고난을 당하는 사람과 하나가 되는 과정에서 공감력이 증대한다." 그런데 지난 시간에 나온 것처럼 허약한 관객들은 이런 것을 못 견디고 해피엔드를 원한다. 그러니까 허약한 관객이라고 하는 것은 앎이 없는 관객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후대의 논의들을 한번 다시 정리하겠다. 밀턴은 셰익스피어를 굉장히 열심히 읽었다고 한다. 그리고 근대 드라마의 정의를 창안했는데, 근대 드라마는 행동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격정을 모방하는 것이다. 격정을 모방한다 라고 하는 근대 드라마의 정의를 만들어 내게 된 계기가 셰익스피어이다.
다음번에 7강 비극과 서사시 그다음에 8강이 고전 드라마와 현대 드라마이다. 호메로스의 서사시를 보면서 아리스토텔레스와 비교해보고, 마지막 시간에는 고전 드라마와 현대 드라마, 셰익스피어의 《리차드 2세》를 한번 정리해서 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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