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담화冊談話 | 시학 강독 6-1

 

2024.05.29 🎤 시학 강독 6-1

6강. 비극과 카타르시스

• 2024. 5. 29. 오후 7시-9시  장소:수원시글로벌평생학습관

• 강의 안내: https://learning.suwon.go.kr/lmth/01_lecture01_view.asp?idx=3672
• 강의 자료: https://buymeacoffee.com/booklistalk/20240529-suwon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서 《시학》이라고 하는 것은 고유명사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작품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지만 시학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학문 장르이다. 시에 대한 학문적 연구, 여기서 시라고 하는 건 드라마를 포함해서 모든 문예 또는 문학이라고 하는 것을 말한다. 문학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라고 물어보면 언어 예술에 관한 학문적 탐구라고 말할 수 있다. 언어 예술에 관한 학문적 탐구라고 할 때는, 동양의 시문학은 그냥 한시를 읽고 즐기는 정도일 뿐이고 제가 학문적으로 얘기할 만큼 식견이 없으니 따지지 않는다. 서양의 언어 예술에 관한 출발점인 서정시 그다음에 서사시 그런 것도 있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 따르면 최종적으로 집약된 것이 바로 비극이다. 비극이라고 하는 것 안에, 우리가 일곱 번째 시간에 비극과 서사시에 대해 얘기를 할 텐데, 비극이라고 하는 것 안에 사실은 서사시도 들어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은 문학이라고 하는 학문 분야를 세운 책이다. 언어로 이루어진 예술 작품에 대한 학문적 탐구라고 할 때 그 학문적 탐구의 내용이 무엇인가. 우리가 뭔가에 대해서 탐구를 하고자 할 때는 무엇을 탐구할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탐구할 것인가, 즉 what과 how 이 두 가지가 학문의 내용과 방법이다. 그러니까 내용을 지금까지 우리가 계속해 온 것이다.  

오늘 얘기하는 내용은 카타르시스이다. 강의자료 두 번째 페이지인 "후대의 논의들"을 보면 《Paradise Lost》, 일반적으로 《실낙원》으로 알려진 존 밀턴이 내놓은 시에 관한 논의가 있다.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 부분을 보면" actions well imitated", 밀턴은 "passions well imitated"라고 되어 있다. 무엇이 예술 작품을 잘 된 것이라고 하는가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는 구성이 치밀해야 되고 이런저런 예를 들어서 얘기를 하는데, 그것을 탐구한 다음에는 어떻게 탐구하는가. 아리스토텔레스가 시 예술 또는 언어 예술을 내용을 탐구하는 방법은 일단 역사적으로 언제부터 그것이 시작되었는가이다. 방법으로 보면 역사적 연원이 하나 있고 그다음에 비극하고 서사시를 비교한다. 이 두 개를 가지고 우리가 이른바 문학이라고 하는 것, 언어로 이루어진 예술 작품에 대한 학문적 탐구가 문학이다. 사실 셰익스피어를 읽어보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제시된 기본 논의가 많이 바뀐 것 같은데, 셰익스피어는 드라마 작가이자 배우이자 극장주였다. 그러다 보니까 셰익스피어는 문학 이론을 정립한 사람은 아니다. 그런데 셰익스피어 드라마를 보면 뭔가 달라지긴 했다. 행위를 모방한 것이 아니라 격정들이 나온다. 특히나 아리스토텔레스가 분석한 드라마에서는 전혀 등장하지 않았던 아주 놀라운 정서가 하나 있는데 바로 사랑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드라마 분석에는 사랑이라는 얘기가 없다. 희랍 서사시를 보면 다 우정이다. 파트로클로스와 아킬레우스의 관계, 심지어 헥토르와 아킬레우스도 우정을 나눈다고 말한다. 남녀 간의 사랑은 나오지 않는다. 오뒷세우스가 페넬로페를 과연 사랑했는가에 대해서는 많이 생각을 해봐야 하는데, 우리가 생각하는 격정적 사랑은 사실 찾아보기 어렵다. 어쨌든 셰익스피어는 사랑을 얘기했다. 《오셀로》 같은 작품이 나온다는 말이다. 이제 사랑이라고 하는 격정이 등장했다. 밀턴은 《시학》으로는 셰익스피어 드라마가 설명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을 슬쩍 고쳤다. 이론의 변경이 일어나는 것이다. 밀턴이라고 하는 사람의 의의가 여기에 있다. "비극은 연민과 두려움 또는 공포를 일으킴으로써 마음으로부터 그러한 격정들과 이와 비슷한 격정들을 씻어 낼 힘을 가졌다고", 카타르시스를 일으키는 힘을 가졌다는 것이 비극이다. 그다음을 보면 "다시 말해서 잘 모방된 격정을 읽거나 봄으로써 불러일으켜진 일종의 기쁨으로써 그것들을 적절한 정도로 진정시키거나 감소시킨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했다." "잘 모방된 격정passions well imitated"은 밀턴이 일부러 틀리게 인용을 한 것이다. 6장의 비극의 정의를 보면 "잘 모방된 행위actions well imitated"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의 행위를 잘 모방한다 얘기했는데, 밀턴은 잘 모방된 격정, 즉 "passions well imitated"라는 말을 씀으로써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론을 살짝 고쳤고 그렇게 함으로써 셰익스피어 드라마를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의 관점에서 해석해내는 방법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것이 문학이론의 변경이라고 할 수 있다. 밀턴이 그동안 우리는 비극에 대해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참조했었는데, 셰익스피어를 보니까 이건 들어맞지 않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러니 우리는 전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를 폐기하고 새로운 이론을 내가 내세우겠다 라고 했으면 밀턴은 우리에게 전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과거의 전승들이 있는데 이를 완전히 폐기하고 자기 것을 새롭게 세울 수 있는 자신감은 없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perspective 위에서, 다른 건 몰라도 passions을 모방한다고 하는 것은 고쳐야 될 필요가 있다 해서, 부분수정의 방식으로서 이론이 발전해 나아간다. 이런 것 정도만 이루어져도 패러다임 시프트가 일어나는 이 정도만 이루어져도 perspective shift가 일어난다. 그러니까 자연과학의 세계와 문필의 세계science of letters와의 차이는 무엇인가. 자연과학의 세계는 제1전제를 바꿔는 것인데, 이 세계에서는 그런 방식으로 이론의 변경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 변경을 추적하는 일이 굉장히 까다롭고 그 변경이 일어나는 데 굉장히 오래 걸린다. 그래서 지금 밀턴이라고 하는 사람은 《실낙원》 때문에 탁월한 서사시인이기도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이론에 정말 단어 하나를 바꿔서 위대한 시 이론가이기도 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밀턴 그다음에 괴테 이렇게 딱 3명, 괴테도 《파우스트》를 통해서 문학이론이 변화가 일어났다. 괴테는 고전주의적인, 문학에서 고전주의라고 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다, 고전주의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새로운 격정을 도입해 오면서도 그다음에 기독교의 정통orthodox 이론을 집어넣으면서도 그렇다고 해서 꼭 기독교적인 것도 아닌 세계를 적당히 버무려서 제3의 뭔가를 만들어내었다. 그렇게 해서 괴테가 위대한 것이다. 그 변경점을 만들어낸 사람들을 생각하면 읽을 필요가 있는 작가가 몇 명이 안 된다. 그걸 가져다가 Dryden이라고 하는 영국의 시 이론가가 《An Essay of Dramatic Poesy》에서 또 이런 얘기를 했다. "to represent the passions” is “the poet’s work." 이때쯤 오면 Dryden의 이 저작이 1668년이고, 존 밀턴이 1671년이다. 17세기 후반에 들어서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정념passion, 즉 내면의 정서를 가져다가 내면의 정서를 드러내 보여주는 게 드라마라고 하는 이론이 확정이 됐다고 볼 수 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먼저 시작이 되었고 그다음에 그것이 17세기 후반에 이것이 바뀌었다 라고 생각할 수 있다. 셰익스피어 드라마에서 이 이론이 세워지기까지는 굉장히 오래 걸린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이론도 굉장히 오랫동안 유지가 되었다는 점을 잘 생각을 해서 봐야 된다. 간단히 말해서 후대의 비극 이론가들은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2개를 받아들였는데, 첫째가 카타르시스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이론 중에 가장 틀림없는 건 카타르시스이고, 카타르시스는 오늘날에도 받아들여지고 있다. 또 하나는 "잘 모방된", 무엇을 모방할 것인가에서 약간 모방 항목을 바꿔서 받아들였던 것이다. 이게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이론의 계승사이다. 

[강의자료 첫번째] 비극과 카타르시스. 지난번에 비극에서는 구성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잘 모방을 하려면 구성을 잘해야 하는데, 잘 구성하는 목적은 카타르시스를 위한 것이다.  사실 카타르시스를 한국어 한 단어로 나타내기가 어렵다. 정화의 종류 부분을 보면 우선 의학적 의미가 있다. 세정 또는 배출purgatio, 씻어서 깨끗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이상하점이 희랍어는 카타르시스 하나인데 라티움어는 종류가 많다. 이게 좀 미묘한 지점이 있는데 라티움어를 사용하는 라틴인들이 이런 것에 민감했다기보다는 기독교적인 영향이다. 기독교는 속죄, 세정 이런 것들을 굉장히 세세하게 다루는 것이다. 사태를 지칭하는 단어가 세분화되어 있다는 것은 그만큼 그 사회가 그 영역에 대한 굉장히 강력한 탐구를 했다는 얘기다. 단테 《신곡》의 연옥 편을 가리킬 때 purgatio이다. 지옥편이 inferno이고, 천국편이 paradiso이다. purgatio라고 하는 말은 세정 때는 배출인데, 단테가 《신곡》을 쓴 건 중세 말이다. 단테는 중세 사람이지 근대 사람이 아니다. 단테가 《신곡》을 쓸 때는 purgatio가 의학적인 의미하고 그 밑에 있는 정화, 속죄의 의미가 덧붙여진 다음에 약간의 희망이 덧붙여진 것이 purgatio이다. 그러니까 purgatio라고 하는 단어가 《신곡》에 쓰일 때는 상당히 복합적인 의미가 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그냥 배출이다. 그다음에 종교적·제의적 의미, 즉 정화, lustratio라고 하는 것은 때를 벗겨낸다는 뜻이다.  그 다음에 도덕적 의미의 순화, purificatio라고 되어 있다. 우리말로는 순화라고 하는데, 한자는 두 개를 쓸 수 있다. 맑게 한다라는 뜻으로 나쁜 행동을 하는 애들을 교정해서 바른 길로 가게 하는 것이 앞에 있는 순화醇化이다. 뒤에 있는 순화純化는 악에서 선으로 움직여가는 의미는 없다.  문학은 단어의 미세한 뜻을 아는 것이다. 일단 정화가 그러한 것인데, 정화라고 하는 단어가 희랍어에서는 카타르시스이다. 이렇게 카타르시스라고 하는 단어가 라티움어에서는 최소한 4개의 의미를 가진다. 4개의 뜻으로 분화되어 나왔다는 것은 로마에서도, 라티움어라고 하면 중세의 공식어이니까 중세도 의미하는 하는 것인데, 로마에서도 중세에서도 쉴 새 없이 사람들에게 거론되는 주제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시학에서 후대에 남긴 가장 중요한 주제 중에 하나가 카타르시스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시학에서의 출처와 《정치학》에서의 카타르시스 개념을 보자. 사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는 카타르시스에 대해서 정확하게 규정을 하지 않고 《정치학》에 있는 내용이 훨씬 더 많다. 그것에 비하면 《시학》에서는 적은데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를 생각해 봐야 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카타르시스의 용례로서 활용할 만한 사례를 정치적 현장에서 더 많이 발견했다는 얘기이겠다. 정치적 현장이라고 하는 것은 연설이니까 수사학의 영역에서 훨씬 많이 발견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드라마 속으로 들어오면 저런 정도의 효과가 있겠구나 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카타르시스 이론은 아직 문학 이론으로서는 완성되지 않은 상태로 시학으로 들어오지 않았을까 라고 생각을 해본 바 있다. 우리가 어떤 드라마를 보고 카타르시스를 느끼기보다는 현실 속에서, 우리가 현실이 소설보다 더 소설 같다 라고 얘기하는 것처럼, 아리스토텔레스 시대에는 또 로마 시대에는 그렇고 누구나 다 정치적인 공공 영역에서 뭔가를 하는 사람은 연설을 잘해야 된다. 연설을 잘한다는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뭔가 눈앞에 펼쳐져 있는 부조리한 사태이 말로써 개운하게 해결되는 것을 느낄 수 있게 해줘야 된다. 그러니까 《정치학》이나 《수사학》에서 훨씬 더 이것이 효과적이었을 것이고, 거기에서 자기가 목격한 것을 《시학》으로 가져다가 드라마에서도 이것을 펼쳐보면 대단하겠구나 한 것이다. 《시학》에서의 카타르시스 이론은 그렇게까지 정교하게 완성된 것은 아닌데, 구성mythos은 정교하게 완성된 것이라고 볼 수 있고, 카타르시스 이론은 정교하게 완성된 것이 아니고 오히려 《정치학》에서 많은 것이 있다 라고 설명을 할 수 있겠다. 그래서 출처를 보면 《시학》에서의 출처와 《정치학》의 카타르시스 개념이 두 가지가 있는데 《정치학》에 있는 것들이 훨씬 더 내용이 많다. 특히나 음악의 효용 이런 부분들 그리고 뒷부분에 공교육에 관해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얘기한 부분인데 거기에 가면 훨씬 더 내용이 많다. 

《시학》에서의 출처를 보면 "연민과 공포를 통해 바로 이 감정들의 ‘정화’를 이끌어내는 모방", 정화가 카타르시스이다. 연민과 공포, 이열치열 요법이라는 것이다. 관객들의 마음속에 있는 연민과 공포를 불러일으켜서 없애는 것, 정화니까 없앤다는 것이다. 그다음에 "정화의식을 통한 구원이 [전체적 구도에] 부합하는"는 것이 세정이고, 그다음에 세 번째 세 번째가 "술어가 등장하지는 않으나 내용이 같은 것", 그러니까 카타르시스라는 말은 없는데, "시인은 연민과 공포에서 비롯되는 쾌감(hēdonē)을 모방을 통해서 만들어내야 하므로"라고 되어 있다.  카타르시스도 뒤에도 있듯이 hēdonē의 일종이라는 얘기이다. 쾌감hēdonē이라고 하는 것 아래에 카타르시스가 있는 것이다. 연민과 공포에서 비롯되는 쾌감을 모방을 통해서 만들어낸다. 그러니까 쾌감으로서의 카타르시스이다. 일단 카타르시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규정에 따르면 연민과 공포이다. 《정치학》에서의 카타르시스는 《시학》의 그런 내용과는 무관하게 그것 자체로 알아두어야 할 중요한 부분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이라고 하는 텍스트는 정치에 대한 것만 다루게 아니라 교육에 관한 내용이 굉장히 많다. 여기 음악의 효용에서 음악Musik은 오늘날로 치면 언어능력에 해당한다. 그리고 추론하는 능력, 사실은 Musik가 기본 교양이다. 음악의 효용. "교육, 놀이, 여가활동"라고 되어 있다.  여가 활동이라는 게 고상한 취미 활동인데 그게 scholar이다. 교육이라고 하는 것이 사실 놀이인데, 이 놀이라고 하는 것이 Spiel이다. 요한 하위징아의 《호모 루덴스》라는 책을 여러분들은 꼭 읽어봐야 된다. 루덴스ludens가 논다 라는 뜻으로, 그러니까 Spiel, 영어로는 play이다. Spiel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머릿속에서 서로 다른 영역에 있는 것들 사이에 일어나는 사유의 추동을 말한다. 

"교육, 정화, 여가시간(diagōgē), 휴식과 긴장완화, 이러한 것들의 목적은 카타르시스"인데, 지금 여기서는 이것의 목적이 카타르시스라고 할 때는 단순한 배출이 아니라, 카타르시스가 연민과 공포에서 비롯되는 게 아니라 순정한 기쁨이다. 순정한 그러니까 도덕적 의미의 순화, purificatio에 가깝다. 순수한 기쁨. 이것을 통해서 기쁨을 느끼는 게 학문의 기쁨인 것이다. 역사책을 읽어서 수없이 많은 역사적 사건들을 읽고 이런 일이 벌어졌구나 저런 일이 벌어졌구나 라는 것이 머릿속에 데이터가 쌓이는 것은 기쁘지 않다. 그냥 데이터가 쌓이는 것일 뿐이다. 그런데 형이상학 책을 읽으면서 세상사하고 아무 관계가 없는데 정교한 이론들이 서로 맞물리면서 이렇게 돌아가는 것을 읽고 있으면 내가 살고 있는 세계를 잊으면서 머릿속에서만 돌아가는 것이 있는데, 그런 것들을 Spiel이라고 말한다.  청교도puritan이라는 말이 purificatio에서 나왔다. 청교도는 사실 이 지상 사람이 아닌데, 사막에서 은거해서 수도하는 수도사들이 천교도의 원천이다. 청교도 혁명을 주도한 올리버 크롬웰 이런 사람들은 사실 본래적인 의미에서의 기독교도의 범주를 벗어난 사람들이다. 진짜 이단들이다. 원래 교회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그런데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루터는 탑에서 혼자 앉아서 그 깨달음을 얻었다.  말하자면 교회에서 내려온 관행을 벗어난 것이다. 이것을 극단적으로 밀고 가면 puritan이 된다. 즉 방구석에 혼자 있으면서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다. 그 정신을 이어받아서 puritan이 생긴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시대 희랍 사람들은 그런 것들은 교육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사람들을 광인manikos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여럿이 모여서 함께 공부하면서 집단적으로 Spiel을 하는 것을 교육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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