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담화冊談話 | ε. Gilson(17), God & Philosophy, Ch. 3

 

2024.06.09 ε. Gilson(17), God & Philosophy, Ch. 3


중세를 지나서 근대 형이상학으로 들어오면 근대 형이상학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신에 관한 논의에서는 굉장히 황폐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근대 형이상학에 관해서는, 스피노자는 다루지 않았는데, 데카르트, 칸트, 헤겔의 형이상학을 《철학 고전 강의》에서 다룬 게 있다. 《성찰》, 《철학의 원리》, 《방법서설》 이런 책들을 다루기 때문에 그 책에 있는 논의를 충분히 참조를 하면 되고, 《철학 고전 강의》를 쓰면서 원래 강의할 때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자연의 원리들》도 읽었다. 사실 에티엔 질송은 《자연의 원리들》을 거론하지 않고 《신학대전》만을 가지고 얘기하는데,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최고 존재, 즉 아리스토텔레스의 신을 어떻게 기독교의 신으로 변형했는가 하는 것을 자연신학적인, 자연에 관한 또는 자연을 증거로 하는 신존재 증명 이런 것을 할 때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이용해서 해보겠다 하면 《자연의 원리들》을 읽는 것이 훨씬 좋다. 질송에 대해서 불만이 있는 건 아니고 조금 아쉬운 점이 있었다. 제가 《철학 고전 강의》 책에 아퀴나스를 집어넣지 않은 건 《자연의 원리들》만 읽어서는 모자르고 《신학대전》도 읽어야 하는데, 저는 형이상학이라고 하는 것을 신학과는 구별되는 철학의 영역이라고 보기 때문에, 가서 닿을 듯 말 듯한 그런 경지에 있는 것이라고 본다. 신학은 일단 계시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계시에 다 나와 있는데 논쟁할 게 뭐 있어 라는 생각을 할 수 있을 정도이다. 형이상학은 밑에서 올라가는 것이고, 신학은 위에서 내려온 것을 증명해 보여주는 것이니까, 엄밀하게는 저는 질송의 입장과는 다르게 토마스 아퀴나스는 형이상학의 영역에다 넣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것은 포함을 시키지 않았는데, 근대철학은 분량도 많고 하지만 아마 질송의 입장에서는 분량이 많아야 될 것이다. 왜냐하면 신학에서 떨어져 나간, 말하자면 괘씸한 사람들이니까, 얘네들이 얼마나 괘씸한가를 자세하게 이야기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데카르트가 아무리 독실한 신자였다 라고 할지라도, 그랬는지 안 그랬는지는 그에게 물어보기 전에는 우리가 알 수 없다, 이미 근대로 들어오면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내면의 영역이기 때문에 데카르트도 굉장히 조심스러웠을 것이다. 그 당시에 예수회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지 않으려고 굉장히 노력을 했을 것이다. 프랑스에서 저작 활동하는 것이 좀 위험하다 라고 생각해서 네덜란드로 가지 않았을까 그리고 스웨덴으로 가고 그러지 않았을까 생각을 해본다. 

질송의 입장에서는 이들이 얼마나 신학으로부터 멀리 가버렸는가를 얘기해야 하기 때문에 분량은 많은데, 그 많은 분량에 비하면 형이상학적인 논의는 굉장히 황폐하다 라고 말할 수 있다. 데카르트를 다루고 있는 분량은 많은데 제가 정리한 건 딱 한 페이지이다. 일단 질송은 "근대철학은 성직자가 아닌 일반인에 의해, 신의 초자연적인 도성이 아닌 인간의 자연적 도시들을 목표로 창조되었"다고 말한다. 아주 자연스럽게 인간을 향한 형이상학이 시작된다. 데카르트 철학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기독교적 지혜에 관한 중세적 이상의 붕괴가 일어났다." 중세적 이상은 토마스 아퀴나스가 성취한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대 서로마 제국, 로마 말기 사람이니까 중세인이 아니다. 넓게는 헬레니즘 세계에 속하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헬레니즘 세계에 속하는 사람이고 학문적으로는 또는 사상사적으로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플라톤의 아카데미아를 폐쇄한 해가 사상사적으로는 헬레니즘의 끝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전 사람이니까 중세 사람은 아니다. 중세적 이상이다 라고 하면 그 중세적 이상을 성실하게 또는 꼼꼼하게 또는 온전하게 성취한 사람은 토마스 아퀴나스이다. 최고의 학문으로서의 신학이라고 하는 것을 정립하고 우주의 절대적 최고 원인인 신에 대해서 숙고하였으며, 지난 시간에 살펴본 것처럼 우주론적 신존재 증명, 그리고 목적론적 신존재 증명을 내놓았다.  

108 근대철학은 성직자가 아닌 일반인에 의해, 신의 초자연적인 도성이 아닌 인간의 자연적 도시들을 목표로 창조되었습니다. 

108 데카르트 철학에서 일어난 일은 그리스도교 지혜에 관한 중세 이상의 붕괴였습니다.

109 신학은 우주의 절대적인 최고 원인, 즉 신에 대해 숙고합니다.


사실 여기서 한 가지 물어볼 수 있다. 도대체 왜 신존재를 증명해야 하는가. 우리는 그것을 증명할 필요 없다. 증명하지 않으려고 한다. 신은 믿으면 좋은 것이고 안 믿어도 그만이고 하는 것이 근대 이후의 생각이다. 다시 말해서 파스칼의 《팡세》 742절에서 얘기한다. "불. 아브라함의 신. 이삭의 신. 야곱의 신.", 구약성서의 신이고, "철학자와 학자들의 신이 아닌 확신, 확신 그리고 느낌, 기쁨, 평화, Jesus Christ의 신", 이것은 신앙으로서의 신인데, 종교적 숭배의 대상으로서의 신과 철학적 이해 가능성의 제1원리로서의 신은 거의 이신론으로 향해 가는 출발점이 데카르트에서도 마련이 되는데, 데카르트가 아무리 독실한 신자였는지 어쩐지는 우리는 알 수 없고, 이미 데카르트쯤으로 가면 또는 스피노자쯤 가면 이신론으로 향해 가는 길이 마련이 된다. 오늘날 우리는 신존재 증명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신존재 증명은 여러 종류가 있지만 크게 보면 두 종류가 있다. 존재론적 신존재 증명과 우주론적 신존재 증명, 우주론적 신존재 증명이라고 하는 것은 아퀴나스에서 보았듯이 우리 눈앞에 펼쳐지는 사태들이 모두 다, 현전하는 사물들이 신이다. 그리고 신이라고 하는 것은 당연하게도 실존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창조주로서의 신을 얘기한다. 존재론적 신존재 증명은 안셀름에서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개념이라고 하는 것을 계속 분석해서 신존재를 증명해내는 것이다. 그런데 현대철학 부분에서 질송이 처음에 칸트과 콩트 얘기를 하는데 칸트에서 완전히 논박이 되었다. 흔히 하는 말로 니체가 신은 죽었다 라고 얘기하는데, 죽었다 라고 말하는 것은 니체 이전에 신이 죽었다는 얘기다.  그러니까 니체가 죽인 것은 아니다. 철학적으로 보면 신을 온전하게 죽인 사람은 칸트이다. 칸트는 머릿속으로 어떤 지폐에 대해서 생각한다고 해서 그 지폐가 눈앞에 있는 건 아니지 않는가 라고 말한다. 굉장히 간단하게 존재론적 신존재 증명을 논박해버린다. 머릿속에서 무언가를 생각한다고 해서 그게 반드시 존재를 수반하는 것은 아니다. 그다음에 우주론적 신존재 증명은 우리 눈앞에 펼쳐진 사물들에 신의 질서가 들어가 있다 라고 말하고 신의 목적이 들어가 있다, 목적론적 신존재 증명이라고 얘기하는데, 그 질서라는 거는 우리가 이해를 하고 싶어서 통제적인 원리로서의 자연 목적론을 전제하고 있을 뿐이다. 이 얘기가 《판단력 비판》에서 제시된다. 칸트에 의해서 그렇게 논박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더 이상 오늘날 우리는 신존재 증명에 매달리지 않는다. 도대체 왜 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신존재 증명에 매달려 왔는지 갑자기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니라 해소되어 버렸다. 이후 헤겔이 등장하긴 했지만, 어떤 사람들은 헤겔이 신존재 증명을 회복하려고 했다, 복원시키려고 했다 라고 얘기하는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헤겔이 신존재 증명을 복원한 것이 아니라 그냥 인간이 신이 되는 것을 시도했다 라고 본다. 신존재를 증명한다는 것, 헤겔이 조금 시대착오적인 측면이 없지 않아 있지만 칸트의 그것을 읽지 않았을 리가 없고, 이것은 아주 속된 말로 빼도박도 못하는 증명이 나타났으니까 헤겔은 오히려 유한자인 인간이 무한자인 신이 되어가는 방식을 선택한 게 아닌가, 고대인들의 길을 따라간 것 같다. 증거가 없으니까 뭐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헤겔의 종교 철학을 면밀하게 읽어보면 그리스 정교회의 theōsis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나 하고 본다. 이런 것은 한번 기회가 있을 때 촘촘하게 《정신현상학》을 읽으면서 theōsis로서의 《정신현상학》을 한번 내놓으면 되지 않겠나 한다. 비잔틴 신학과 정신현상학, theōsis 부분, 유한자와 무한자의 통일, 무한자의 입장으로 올라선 유한자 이런 것들을 얘기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데카르트에서 헤겔로 가는 경로가 그렇다.  

《팡세》 742.
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철학자들이나 학자들의 하나님이 아니시다.
확신, 확신, 느낌, 기쁨, 평화.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Feu
Dieu d’Abraham, Dieu d’Isaac, Dieu de Jacob,
non des philosophes et des savants.
Certitude, certitude, sentiment, joie, paix.
Dieu de Jésus‑Christ.


데카르트는 어쨌든 세계를 철학적으로 이해할 가능성의 제1원리가 신이다 그리고 우리 인간은 모두 다 본유관념으로서 그것을 가지고 있다. 그것과 종교적 숭배의 대상으로서의 신을 구별해버린다. 그리고 나면 스피노자가 철학적 이해 가능성의 제1원리로서의 신 개념을 우주론적으로 펼쳐 보여서 범신론으로 가는 것이고. 라이프니츠도 그러하고, 그렇게 하니까 칸트는 뭐 굳이 그런 제1원리로서의 신 이야기를 할 필요 있는가 그냥 자연과학으로 탐구하면 되지 않겠나 해서 신존재 증명을 무참히 파괴시켜버린다. 신이 없는 세계, 인간만 남아있는 세계가 되었고, 바로 그 지점에서 이제 헤겔이 오만하게 인간이 신이 되면 되겠구나 하고 나아갔다고 볼 수 있다. 개인으로서의 데카르트는 신앙인이었는데, 그의 사적인 신앙은 기독교도, 그런데 기계론적으로 움직여가는 세계, 자연적 이성만으로 얻을 수 있는 또는 현세적 목적을 지향하는 그런 진리 인식을 추구한다. 제1원인에 의거한 진리 인식을 추구한다, 이것은 자연과학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철학자로서의 데카르트와 종교인으로서의 데카르트가 구별된다. 데카르트는 결코 신학자로서의 계기를 갖고 있지 않다. 어찌 보면 질송의 말처럼 이는 고대 헬라스적 자연학으로의 귀환이라는 결과가 되는데, 헬라스의 철학자들은 초월적 존재로서 인격신 개념을 갖고 있지는 않았기 때문에 그 귀환이라고 하는 것이 그들과 데카르트는 달랐다. 데카르트는 이성의 빛만 가지고 진리를 찾겠다 라고 얘기를 했지만 그 이성의 빛은, 데카르트는 기독교도이니까 부인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궁극적 원천이 기독교의 신이다. 그러니까 이 신이 어떤 것인가, 이 신을 변형을 시키는 것에 이른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신을 변형시켜서 기독교의 신으로 만들었던 것처럼 이제 데카르트는 그 역순을 밟아간다. 기독교의 신을 고대 그리스의 신이 아니라 우주의 제1원인, 그런데 그 원인이 목적도 가지지 않고 모든 사물을 발전시켜 나아가는 우주의 제1원인이라고 하는 신으로 변형시키는 것이다. 그게 바로 근대 자연신학이 거쳐가는 경로 일반이 된다.  근대 자연신학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눈앞에 놓여 있는 자연 세계의 제1원인을 파스칼이 말하는 것과 같은 아브라함의 신, 이삭의 신, 야곱의 신 그런 신이 아니라 철학자의 신, 학자의 신으로 변형시키는 것이다. 그게 바로 근대 자연신학이 거쳐가는 경로이다.  

109 철학자로서 그는 전혀 다른 지혜를 찾고 있었습니다. 즉, 자연적 이성만으로 얻을 수 있으며 실제적인 현세적 목적을 지향하는, 제1원인들에 의거한 진리 인식입니다. 

123 데카르트식 자연신학이 초래한 가장 직접적인 역사적 결과는 철학적 이해 가능성의 제1원리인 신으로부터 종교적 예배의 대상인 신을 다시 분리한 것입니다. 

 

근대 자연 신학이라고 하는 것과 아퀴나스의 신이라고 하는 것은 굉장히 반대의 경로이다. 아퀴나스의 자연신학은 신을 자연 속에다 집어넣는 자연신학이라면, 그렇게 해서 그 자연이 신에 의해서 창조도 되고 그 자연 안에 신의 목적이 들어가 있는 것인데, 근대의 자연신학이라고 하는 것은 자연 세계에서 궁극 목적으로서 신을 빼내는 것이 근대 자연신학이다. 기계론적인 작동의 제1원리, 작용인으로서만 있는 신, 그런 신을 근대 자연신학이 거쳐가는 경로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데카르트의 신은 이성적 순수성의 성격을 가지는 것이고, 그 신에 대한 관념은 모든 인간이 본유적으로 가지는 것이다. 그에따라 철학의 제1원리이자 기계론적 세계의 궁극 원인이 되는데, 이렇게 되면 물리학에서는 제일 원리를 얘기할 수 없다. 우리가 근대 물리학이라고 하는 학문에다가 제1원리인 신 하나를 덧붙여 놓은 것이 데카르트의 신 개념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적절한 비유가 될 수 있다. 물론 데카르트는 자연은 신 또는 신이 피조물에 설정해 놓은 질서와 배열이라고 말을 하지만 이 질서와 배열은 얼마든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성의 힘을 가지고 탐구해 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데카르트에 이어지는 말브랑슈라든가 스피노자라든가 이런 사람들 모두 다 결국에는 근대 형이상학에 있어서의 신이라고 하는 것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역순을 밟아가는 것인데, 그렇다고 해서 그런 인격 신을 알지 못했던 고대 헬라스 세계로 되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그것까지 이해를 하면 데카르트 철학에 있어 신 개념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이어서 근대 철학은 내용이 많지만 간단하게 정리될 수 있으리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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