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히 아우어바흐: 미메시스

 

미메시스 - 10점
에리히 아우어바흐 지음, 김우창.유종호 옮김/민음사

『미매시스』재출간에 부쳐
역자 서문
머리에

오디세우스의 훙터
포르투나타
페트루스 발보메레스의 체포
시카리우스와 크람네신두스
롤랑 대 가늘롱
궁정 기사의 출정
아담과 이브
파리나타와 카발칸테
수사 알베르토
마담 뒤 샤스텔
팡타그뤼엘의 입 안의 세계
인간 조건
지쳐 빠진 왕자
마법에 빠진 둘시네아
가짜 독신자
중단된 만찬 1-계몽주의 시대의 리얼리즘
중단된 만찬 2-18세기 프랑스의 리얼리즘
음악가 밀러
라 몰 후작댁 1-스탕달의 비극적 리얼리즘
라 몰 후작댁 2-두 개의 리얼리즘
제르미니 라세르퇴 1-없는 사람들과 심미주의
제르미니 라세르퇴 2-졸라와 그의 동시대인들
갈색 스타킹-새로운 리얼리즘과 현대 사회

에필로그
찾아보기

 


55 똑같이 고대의 것이며 똑같은 서사시인 이들 두 개의 문체보다 더욱 대조적인 문체를 상상하기는 어렵다. 한쪽으로는 구체화되고 균등하게 조명되었으며 시간과 장소가 일정하게 명시되어 있으며 늘상 전경 속에서 아무런 틈서리도 없이 연결되어 있는 현상들이 있다. 생각과 감정은 완전히 표현되어 있으며 사건은 서스펜스 없이 느릿느릿 일어난다. 다른 한쪽에는 이야기의 목적을 위해서 필요한 현상만이 구체화되어 있고 다른 모든 것은 어둠 속에 묻혀 있다. 이야기의 결정적인 순간만이 강조되어 있고 그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나 진배없다. 시간과 장소는 명시되어 있지 않고 해석을 필요로 한다. 생각과 감정은 드러나 있지 않으며 침묵과 단편적인 대화에 의해서 암시되어 있을 뿐이다. 몹시 긴박한 서스펜스로 차 있고 단일한 목표(그리고 그러한 한에서는 훨씬 통일적인)를 지향하고 있는 전체는 불가사의하고 '배경을 내포하고' 있다. 

69 그럼에도 『구약 성서』와 비교해 본다면 호메로스는 스타일 분리의 법칙에 가까운 편이다. 호메로스 시에 나오는 위대하고 숭고한 사건은 의심할 바 없이 특출하게 지배 계급의 구성원 사이에서만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위신 면에서 보다 형편없이 타락할 수 있는 『구약 성서』의 인물들(가령 아담, 노아, 다윗, 욥을 생각해 보라.) 보다도 영웅적인 고양의 순간에도 그저 그전대로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호메로스에서는 일상생활의 묘사인 가정적 일상적 리얼리즘은 목가의 태평스러운 영역 속에 남아 있는 것이다. 한편 처음부터 『구약 성서』 이야기 속에는 숭고한 것, 비극적인 것, 문제가 있는 것은 바로 일상적이고 평범한 것 속에서 형성된다. 카인과 아벨 사이, 노아와 그의 아들들 사이, 아브라함, 사라, 하갈 사이, 리브가와 야곱 사이 등등에서 벌어지는 것 같은 장면은 호메로스의 문체에서는 생각할 수조차 없는 것이다. 

70 위에서 우리는 두 개의 원전을 비교하고 또 그들이 구현하고 있는 두 종류의 문체를 비교해 보았다. 그것은 유럽 문화에 있어서의 문학의 현실 묘사를 연구하기 위한 출발점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서로 상반되는 두 문체는 기본적인 유형을 나타내고 있다. 한편에서는 충분히 구체화된 묘사, 균등한 조명 중단 없는 연관, 거침없는 표현 모든 사건의 전경 배치, 의심의 여지없는 의미의 전시, 역사적인 발전과 심리적인 원근법의 결여 등이 특색이다. 다른 한편에서는 어떤 특정 부분을 강력히 조명하고 다른 것은 어둠 속에 버려 두는 수법, 갑작스러운 당돌함, 표현되어 있지 않은 것은 암시력, '배경'을 내포한 성질, 다양한 의미와 해석의 필요성, 보편적 만국사적 주장, 역사적 생성관의 발전, 문제가 있는 것에 대한 집념 등이 특색이 되어 있다. 

81 현대 문학의 현실 묘사 기법은 인간 유형 사회 신분에 관계없이 어떠한 인물도 심각하고 문제적이며 비극적으로 제시할 수 있고 또 사건의 경우에도 전설적이든, 넓은 정치적 폭을 가진 것이든 좁게 가정 내에 한정된 것이든 그것은 심각하고 문제적이고 비극적으로 제시할 수 있다. 또 그와 같이 해 왔던 것이다. 고대에 할 수 없었던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전원시나 연애시에 과도적인 형태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대체로 본 연구의 1장에서 언급한 스타일 분리의 규칙은 그대로 준수되었다. 일상적으로 사실적인 것, 일상생활에 속하는 일체의 것은 희극의 수준 이외의 다른 문체 수준에서 다루어져서는 안 되었고 이것은 문제적인 것의 천착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했다. 따라서 리얼리즘의 경계는 매우 좁은 것이었다. 리얼리즘이란 말을 조금 더 엄격하게 쓴다면, 일상적인 직업과 사회 계급(상인, 공인, 농민, 노예), 일상적인 장면과 장소(가정, 가게, 밭, 창고), 일상적 관습과 제도(결혼, 아이들, 일, 밥벌이), 간단히 말해 서민과 그들의 생활을 문학적으로 심각하게 다룬다는 것은 고대의 리얼리즘이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이라고 결론 지을 수밖에 없다. 

188 삶의 현실과 대결했을 때 이러한 문체는 그 넓이와 깊이를 다룰 수도 없고 다루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시간, 장소, 사회 환경 어느 것에 있어서나 한정되어 있다. 그것은 양식화하고 이상화함으로써 과거의 사건들을 단순화한다. 그것이 청중들에게 환기시키려고 하는 감정은 멀리 동떨어져 있는 세계에 대한 탄복이요 경탄이다. 이 세계의 본능과 이상이 청중 자신의 것으로 남아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들은 현실 생활의 마찰이나 저항과 비교해 볼 때 청중의 실제 생활이 도저히 도달할 수 없으리만큼 완강하고 순수하고 자유롭게 전개된다.  

227 기독교의 전파가 성서와 기독교 문헌 일반을 고도의 교육을 받은 이교도들의 심미적 비판에 노출시켰을 때 양식의 문제가 날카롭게 대두되었다. 이들 교육받은 이교도들은 자기네 안목으로는 말할 수 없이 조야한 언어로 양식상의 범주에 전혀 무지한 채 쓰인 굴 속에 가장 높은 진실이 담겨 있다는 주장에 대경실색하였다. 이러한 비판은 어느 정도 수용되어서 교부들은 대체로 초기의 기독교 문헌보다는 고전 양식의 전통적인 기준에 한결 더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바로 이 같은 비판은 성서의 특징이 되어 있는 참다운 위대함에 그들의 눈을 뜨게 하였다. 즉 성서가 일상적인 것과 격이 낮은 것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포용함으로써 전혀 새로운 종류의 숭고성을 창조하여 내용이나 문체에 있어 가장 격이 높은 것과 가장 격이 낮은 것을 직접 연결시켰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264 단테의 언어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풍부성, 실감, 힘, 유연성을 가지고 있다. 그는 비교할 수 없이 많은 어형을 사용하고, 다양하기 짝이 없는 사상과 내용을 비교할 수 없이 확실한 힘으로 파악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 사람이야말로 그의 언어를 통하여 세계를 새로 발견했다는 생각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267 독자들이 알고 있듯이 단테는 일상적이고 기괴하고 불쾌한 것을 직접적으로 자세하게 묘사함에 어떤 한계를 두지 아니한다. 고대적 의미에서 숭고한 것으로 간주될 수 없었던 것이, 단테의 손에 의하여 숭고한 것이 된다. 단테에 있어서의 스타일의 혼합은 이미 주목을 받은 바 있다. 

378 라블레에게 미적 기준은 없다. 모든 것이 모든 것과 어울린다. 일상적 현실이 전혀 있음직하지 않은 환상 속에 놓여 있고 가장 조야한 우스개 농담이 박식으로 가득 차 있으며 도덕적 철학적인 교화가 음란한 표현과 음담패설 속에서 흘러나온다. 이 모든 것은 고대보다는 훨씬 더 중세 후기의 특징이다. 적어도 고대에서 '웃으며 진실 말하기'는 이렇듯 양 극단으로 폭넓은 추의 진동을 보여주지는 않았다. 그것을 위해서는 중세 후기의 문체 혼합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419 우리가 분석한 텍스트는, 몽테뉴적 기획, 임의적 자신의 삶의 전체를 기술하는 일의 내용과 관점을 최대한으로 의식하게 만드는 데에 좋은 출발점이 된다. 그는 인간 존재의 보편적 조건을 밝히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완전히 진지하게 드러내 보여준다 그는 임의적이고 우연적인 삶의 상황에 박혀 있는 자신을 보여준다. 그리고 변화하는, 선택의 여지없이 붙잡혀 있는 의식의 움직임을 다룬다. 바로 이 임의성과 무선택성에 그의 방법이 있다. 

431 셰익스피어는 숭고한 것과 저속한 것, 비극적인 것과 희극적인 것을 무한히 풍부한 비율로 혼합한다. 이따금 비극적인 것의 음향이 섞여 있는 동화적이고 환상적인 희극을 상기하면 그의 세계는 더욱 풍부해진다. 단일한 수준의 스타일이 처음부터 끝까지 유지되고 있는 비극은 하나도 없다. 

446 그는 평범한 일상적 현실을 진지하게 다루지도 않고 비극적으로 다루지도 않는다. 그는 오직 귀족 왕족과 왕 정치가, 장군 그리고 고대의 영웅들만을 비극적으로 다룬다. 일반 평민이나 병정들 혹은 중류 계급이나 하층 계급이 등장하는 것은 언제나 비속한 스타일 속에서이며 그가 잘 다루는 희극적인 것의 변주 속에서이다. 이렇게 계급에 따라서 스타일을 분리하는 것은 중세의 예술 작품이나 문학 작품, 특히 기독교의 영향을 각별히 받은 작품 속에서보다 셰익스피어의 경우에 더욱 시종일관해서 나타난다. 그리고 그것이 고대의 비극관을 반영하는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644 한편으로, 일상적 현실을 심각하게 다룬다는 것, 사회적으로 낮은 지위의 넓은 인간 집단이 문제성과 실존적 진실 속에서 보이는 현실 재현의 대상이 된 것, 또다른 한편으로 아무렇게나 골라잡은 인물과 사건을 당대 역사의 일반적인 흐름, 유동적인 역사적 배경 속에 자리하게 하는 것, 이 두가지가 내 생각으로는 현대 리얼리즘의 초석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포괄적이고 유연한 소설 형식이 많은 요소들로 이루어지는 현실 묘사의 대표적 형식으로 부각된 것은 당연하다. 

723 그런데, 이 기법을 혼돈과 무능력의 징후, 또는 망해 가는 우리 세계의 반영만으로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물론 그렇게만 본다고 해도 크게 잘못된 평가는 아니다. 왜냐하면 이런 부류의 작품은 한결같이, 어떤 숙명적인 분위기에 지배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율리시스」 같은 작품을 보면 유럽 전통에 대한 애증이 엇갈린 상반되는 생각과 느낌의 풍자적이고 혼란스런 묘사, 뻔뻔스러울 만큼 노골적이고 고통스러운 냉소주의, 그리고 해석 불가능의 상징주의, 이런 것들의 무질서한 혼합임이 분명하며, 아무리 공을 들여 분석해 본다 해도 모티프들의 다양하고 복잡한 전개 및 배합 외에는 별다른 아무것도 찾아낼 수 없다. 

723 물론 지구 위에 인간들의 완전히 평등한 생존이 실현되기까지는 요원하기 한이 없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적어도 인간이 도달할 그 목적지가 우리의 눈에 보이기 시작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현재 여러 다른 인간들의 우연적인 순간의 내면과 외부를 편견이 없이 정확하게 묘사하는 작가들의 그 태도에 가장 구체적으로 그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이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