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메이엔도르프: 비잔틴 신학
- 책 밑줄긋기/책 2023-25
- 2024. 12. 9.
비잔틴 신학 - 존 메이엔도르프 지음, 박노양 옮김/정교회출판사 |
한국어판 서문
서론/비잔틴 신학의 특징과 뿌리
1부 비잔틴 신학의 역사
1장 칼케돈 공의회 이후의 비잔틴 신학
2장 그리스도론을 둘러싼 문제
3장 이콘파괴론 위기
4장 수도사들과 인문주의자들
5장 수도원의 신학
6장 교회론: 교회법의 원천들
7장 동방과 서방의 분열
8장 서방과의 만남
9장 기도의 법
2부 비잔틴 신학의 주요 교리
10장 창조
11장 인간
12장 예수 그리스도
13장 성령
14장 삼위의 하느님
15장 성사 신학: 삶의 주기
16장 감사의 성만찬 성사
17장 세상 속의 교회
결론 모순들
참고문헌
23 비잔틴 사람들은 또한 모든 그리스도인이, 특별하게는 성인들이 교회에서 진리를 알아보고 그것을 경험할 수 있는 특권과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인정함으로써, 서방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계시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비잔티움에서 ‘신학'은, 카파도키아 교부들과 마찬가지로, '관상'과 분리될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서방의 태도와는 달리 신학은 '계시된' 전제들, 즉 성서나 교회 교도권으로터 나온 선언들에 대한 단순한 이성적 추론일 수 없었다. 신학은 성인들에 의해 경험된 하나의 '비전'이었고, 그것의 진정성은 물론 성서와 전통에 의해 검증되어야 했다. 이성적 추론의 과정이 신학사상에서 통째로 배제된 것은 물론 아니다. 하지만 비잔틴 사람들은 그것을 가장 수준이 낮고 확실성이 덜한 신학으로 간주했다. 참된 신학자는 자기 신학의 내용을 '보고' 체험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 경험은 비록 지성을 배제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지성을 통한 것으로 결코 국한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지성, 감정, 감각 등 존재 전체를 통하여 인간을 하느님의 현존과 만나게 해주는 '영의 눈'을 통한 것이다. 14세기 (1337-1340) 대대적인 신학적 논쟁을 야기했던 최초의 논쟁, 즉 그레고리오스 팔라마스와 칼라브리아의 발람 사이에 벌어진 논쟁의 주제가 바로 이에 관한 것이었다.
25 계시의 이러한 '경험적' 성격은 '교리의 발전'이라는 관념에 직접적인 결과들을 초래했다. 비잔틴 신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새로운 계시들이 사도들의 유일한 증언에 첨가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진리에 대한 그들의 이해가 개념적이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신약성서가 진리를 언어적으로 개념적으로 완전하게 표현하고 있다거나 교부들이나 성인들의 경험이 사도적 신앙의 내용을 더 풍부하게 만든다고 생각하는 것을 허용할 수 없었다. 그리스도와 구원에 대해 우리는 사도들이 "생명의 말씀에 관해서 듣고 눈으로 보고 실제로 목격하고 손으로 만져본 것"(1 요한 1:1) 이상의 그 어떤 것도 새롭게 배울 수 없다. 성인들의 경험은 사도들의 경험과 근본적으로 동일한 것일 수밖에 없다. '발전', '성장'과 같은 관념들은 하느님 진리에 대한 인간의 지적 성취, 교리의 개념적 정식화, 이단들에 대한 반박 등에나 적용되는 것이지 진리 그 자체에 적용될 말은 아니다.
26 인간존재의 복잡성 그 자체, 신학을 인간의 하나의 지적 소유물로 환원시키는 것에 대한 비잔틴 사람들의 완강한 거부, 신약성서 내용이 본질적으로 추상적인 진리를 말하고 있지 않고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인격과 관련된 것이라는 고백, 결코 오류를 범할 수 없으며 영구적인 진리 기준이 없다는 점 등, 이 모든 요소들은 그리스도교를 하나의 살아있는 경험으로 이해하게 하는데 공헌하였으며, 그 경험의 순결성과 정통성은 의심의 여지없이 교회의 성사적 구조에 담보되는 것이긴 해도, 그 경험의 살아있는 내용은 교회 공동체 전체에 의해 대대로 이어진다.
38 5, 6세기에 거대한 문화적 용광로요 제국의 수도였던 '새 로마' 콘스탄티노플은 진정 특출한 신학자를 내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신학적 대논쟁들이 이곳에서 벌어졌는데, 논쟁의 결론은 종종 황제의 인가를 얻어야 했기에 그렇기도 했다. 주교 들, 수도사들, 주석가들, 철학자들이 호의와 지지를 얻기 위해 수도로 몰려들었다. 그로부터 관습상 정부의 신학적 자문 역할을 맡았던 수도의 주교좌 주위로 모든 사상들이 흘러 넘쳤고 또 혼합적이고 타협적으로 논쟁이 해결되는 경향이 점차 강화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콘스탄티노플의 주교들과 그 측근들이 황제의 의지에 반하여 분명한 신학적 확신을 방어할 능력이 없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아나스타시오스가 중언하듯이, 총대주교 에메미오스(489-495)와 마케도니오스(495- 511)가 단일본론파를 지지하는 황제 치하에서 칼케돈 교리를 지지하는 태도를 견지한 것이 그 한 예이다. 그러므로 이전에 이집트와 시리아를 중심으로 발전되었던 동방의 사상적 흐름들과 구별되는, 고유한 의미에서의 '비잔틴' 신학은 바로 이 시기에 형성되기 시작한다. 이 비잔틴 신학은 유스니아노스 황제(527-565) 치하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되었고 고백자 성 막시모스(680년)에 의해 하나의 조화로운 종합으로 발전되었다.
185 실제로 분열도, 일치를 위한 시도들의 실패도, 단지 사회 정치적인 혹은 문화적인 요인들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만약 동방과 서방을 대립하게 했던 신학적, 교회법적, 전례적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게 해줄 공동의 교회론적 척도만 있었어도, 역사의 풍랑이 만들어낸 어려움들은 충분히 극복될 수 있었을 것이다. 중세에 와서 더욱 발전된, 신앙의 최종적인 판단 준거로서의 로마 교회의 수위권 교리는 분명 교회에 대한 동방의 개념과 모순되는 것이었다.
186 일반적으로 비잔틴 사람들은 서방이 필리오케를 채택하기에 이른 복잡한 역사적 정황을 알지 못했다. 6세기 스페인에서 아리오스주의에 대한 투쟁을 강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이 표현이 신조에 도입되었고, 이렇게 수정된 신조가 프랑크 왕국에 보급되었으며, 샤를마뉴는 그리스와의 논쟁에서 이 삽입 신조를 원용했고, 비록 아우구스티누스 자신은 단 한 번도 이를 언급한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프랑크 신학자들은 이 수정의 정당화 근거를 사후적으로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에 관하여』에서 찾고자 했으며, 마지막으로 아마도 1014년 경 로마 교회가 결국은 이 필리오케를 채택하게 되었다는 것, 이것이 필리오케의 복잡하고도 기나긴 역사적 과정의 개략이다.
285 반복하자면, 인간은 하느님의 형상이라는 이유 때문에 진정으로 인간이며, 하느님의 형상이라는 이 신적인 요소는 오리게네스의 생각처럼 인간의 영적인 차원에만 관련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전체, 즉 영혼과 몸 모두와 관련된다.
308 성육화의 우주적 차원은 451년 칼케돈 세계 공의회 정의 안에도 함축되어 있다. 비잔틴 신학은 언제나 이 정의에 충실했다. 그리스도는 "그 인성으로는 우리와 하나의 동일한 본질이시다. 그분은 죄를 빼고는 모든 점에서 우리와 같으시다. 그분은 하느님이시고 인간이시다." (신성과 인성) 두 본성의 구별은 이 연합 안에서 조금도 제거되지 않고 반대로 인성과 신성 각각의 고유한 특징들은 보존된다." 분명히 선언의 마지막 구절들은 피조 세계의 역할, 우주에 개입하고 지배하는 인간의 역할을 다룬다.
364 아리오스파와의 논쟁을 거치면서 4세기 카파도키아 교부들에 의례 정식화되었고, 비잔틴 시대 내내 보존되어 온 아 삼위일체 신학의 바탕은 구원론이다. 즉 교부들은 사변이 아니라 인간의 구원에 관심을 가졌다. "동일본질"에 관한 니케아 세계 공의회의 교리는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완전한 고백"으로 이해되었고, "성육화는 본질적으로 그리스도의 구속 행위였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만약 "성령이 완전한 하느님이 아니라면 성령은 성화를 재공할 수 없다." 카파도키아 교부들의 삼위일체 교리의 목표가 이미 앞의 두 장에서 발전시켰던 그리스도론과 성령론의 주장들을 보존하는데 있다는 것을 잊어버린다면, 그 교리는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못할 것이다. 육화하신 말씀과 성령은 우리의 경험 속에서 먼저 "구원을 위한 신적 중재자들"로 나타나지만 말씀과 성령은 본질적으로 단 하나의 하느님이시다.
366 특별히 아우구스티누스 이래로, 서방에서의 접근 방식은 무엇보다도 하느님 존재의 단일성이 삼위일체 신학의 출발점이었다. 분명 이 두 신학 사상 진영들은 대화와 상호 이해에 열려 있었으며, 상호 보완적인 방식으로 발전될 수도 있었다. 불행하게도, "필리오케" 문제로 야기된 논쟁들은 이 두 진영으로 하여금 자신의 입장을 더욱 경직되게 만들었으며, 그 결과 분열의 주된 요인들 중의 하나가 되어 버렸다. 이신론의 현대적 위기, 하느님의 존재를 정당화하고 그것을 철학적으로 정의할 수 있는 어떤 전체로 설명함에 있어서 현대 신학자들이 직면하고 있는 점증하는 어려움은, 동방과 서방의 중세 논쟁을 해결하고 보다 정통적인 삼위일체 신학을 부활시키는데 매우 좋은 기회로 작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435 서방에서 교회는 강력한 권능을 가진 제도로 발전된 반면, 동방에서 교회는 무엇보다도 "신적인 것"에 대해 책임을 지며 오직 제한된 형태로만 제도적 구조를 가지는 "성사적" (혹은 "신비적") 유기체로 인식되었다. 주교, 사재, 보제로 이어지는 각 지역 교회의 삼중 성직체계를 제외한 나머지 제도적 구조, 총대주교, 대주교 등은 그 자체가 제국을 본 딴 것이고 따라서 신적인 기원을 갖는 것으로 생각되지 않았다.
450 궁극적 완성온 "최후의 심판"이 될 것이다. 콘스탄티노플 5차 세계 공의회(553)가 오리게네스주의를 정죄한 것은, 피조 세계와 인류 전체가 궁극적으로 최초의 복된 상태로 회복될 것이라는 그의 "만유회복설" 교리를 아주 분명하게 거부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분명히 "아포카타스타시스"가 인간의 궁극적 운명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개념과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된 근본적인 이유는, 그것이 인간의 자유에 대한 근본적인 제한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백자 성 막시모스가 "자유 혹은 자기 결정"이야말로 인간 안에 있는 하느님의 형상의 징표라고 규정한 것이 정당하다면, 이 자유는 근본적인 것이며 따라서 인간은 결코 하느님의 "선"이라는 철학적 필연성 때문에 강제로 하느님과의 연합에 끌려들어갈 수는 없다. 마지막 날, 말씀과 궁극적으로 만나는 날까지도 인간은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지옥"으로 갈 가능성과 자유를 가지고 있다.
450 육체적 죽음도 인간의 자유를 파괴할 수 없으며, 이로부터 계속적인 변화와 상호 중보의 가능성이 나온다. 하지만 이 자유는 또한 책임성을 의미하며, 따라서 최후 심판의 마지막 시험에서 전 우주가 최종적으로 변모할 때조차, 인간만은 여전히 하느님께 '예'나 '아니오'라고 답하여 그 결과를 받아들일 특권을 가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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