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시스 영: 신경의 형성

 

신경의 형성 - 10점
프랜시스 영 지음, 강성윤.민경찬 옮김/비아

2판 서문
1판 서문
들어가며
1. 신경들의 형성
2. 한 분 하느님, 하늘과 땅의 창조주
3. 한 분 하느님 그리고 한 분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4. 성령과 거룩한 공교회
5. 성육신하신 하느님의 아들
6. 우리와 우리의 구원을 위해
결론과 성찰
참고문헌
프랜시스 영의 생애와 사상
프랜시스 영 저서 목록

 


1. 신경들의 형성

28 그리스도교는 유대인들의 신앙에서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종종 학자들이 말하듯 유대 신앙의 핵심은 '정통'이 아닌 '정행'orthopraxy, 즉 올바른 가르침이 아닌 올바른 행동입니다. 
31 우리는 4세기에 이르러 교회들의 공의회가 열렸고 이 공의회의 결정으로 '니케아 신경'이라고 부르는 신경을 채택했음을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결정 과정에서 일련의 정치적 압력을 포함해 여러 요인이 작용했지요. 우리는 이 결정이 나오기까지의 역사적 과정도 살펴보아야 합니다. 
31 당시 사람들이 교리와 관련된 질문, 혹은 도전을 받을 때 이에 대한 답변으로 주교에게 받은 '신앙'이라고 부르는 것을 제시하고 신경, 혹은 신경 형식의  요약문을 인용한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는 당시 교회에 세례와 입교와 관련된 일정한 훈련 과정이 있었음을 알려주는 분명한 증거라 할 수 있지요. 
32 325년 니케아에서 처음 합의한 신경에 성령과 관련해서 더 상세한 조항이 추가되었고 381년 공의회는 이를 공식 신경으로 택했습니다.  
33 이 신경들을 비교해 보면 여러 흥미로운 점이 있습니다. 이들 모두 성부 하느님, 성자 하느님, 그리고 성령이라는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33 신경은 성부, 성자, 성령이 서로 연관되어 있다고 암시하지만, 삼위일체라는 말은 쓰지 않으며 '하나 안에 셋'이라는 신론을 설명하지도 않습니다. 
33 신경은 복음의 압축판이자 경전들의 요약판이었습니다.
36 신경들은 일련의 상황에 대응하면서 이와 같은 모습을 갖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신경들의 세부사항은 교회 안팍의 도전과 관련이 있으며 
39 당시 교회는 예수는 참된 하느님, 영적인 그리스도이지만 인간으로 변장했을 뿐이며 탄생도 죽음도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다는, 이른바 '가현설'docetism이라는 이단의 주장과 마주하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40 바울은 이렇게 내려오는 전승들과 고백들을 인용하거나 각색한 것처럼 보입니다. 
42 확정된 신경 정식들이 정확히 어디서 유래했는지를 알려주는 증거는 없습니다. 하지만 신경에 담긴 표현들의 기원이 초기 교회의 정형화된 고백 언어들, 오랜 시간 입에서 입으로 내려온 전승들에 있다고 이야기할 만한 충분한 근거는 있습니다. 
42 그리스도교 저술가들은 '신앙의 규칙'regula fidei, '진리의 척도'canon of Truth를 언급했습니다.
47 '전수와 수락'traditio et redditio
49 신경은 다른 무언가가 되었습니다. 로마 제국의 정치적인 압력을 받은 공의회
50 공의회에서 결정한 내용을 시행할 때 제국의 힘을 빌릴 수 있었기 때문에 주교들이 좀 더 효과적으로 자신들의 권위를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일 것입니다. 


2. 한 분 하느님, 하늘과 땅의 창조주

58 신경의 첫 번째 조항에 명시된 교리는 매우 고단한 투쟁의 결과였습니다.
58 진정한 창조주인 한 분 하느님이 '무로부터' 세계를 창조하셨다고하는 특정 교리는 그리스도교 초창기에 만들어졌고, 그 배경에는 세계의 기원에 관한 고대의 다양한 이론과 신념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교리는 무엇보다도 교회 내부에서 일어난 논쟁의 산물이었습니다. 
59 당시 사람들에게 하느님이 유일한 분이시며 이 세상의 창조주이자 주권자라는 생각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만큼 분명하게 자리 잡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 때문에 최초로 교회 안에서 격렬한 투쟁이 일어났습니다. 바로 영지주의와의 투쟁이지요. 
64 (1) 창조신 데미우르고스와 궁극자인 '아버지'의 구별.
(2) 세계의 기원을 우주 이전의 '타락'으로 설명하고 물질 세계를 우연, 혹은 죄의 결과로 보는 관점.
(3) 영적 엘리트들은 물질 세계에 갇힌 불꽃이며 소수 집단이 제공하는 비밀 '지식'을 알게 되면 해방되어 신과 재결합할 수 있다는 가르침. '물질'은 구원받을 수 없으며 일반 교회 구성원들은 이류에 불과하다는 시각. 
64 이러한 관점들은 그리스도교가 유대교에서 물려받은 유산의 핵심, 참된 한 분 하느님이 세계를 창조했으며 세계가 그 분 보시기에 좋았다는 가르침, 그리고 우리는 바로 이 분에게 충성해야 한다는 가르침과는 정면으로 충돌하는 생각들이었습니다. 신성을 파편화하고 피조물과 물질세계를 폄하하기 때문이지요. 
65 악마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는 유대 종말론적 관념에서 악마가 창조자 혹은 '이 세상의 신'이라는 생각으로 나아가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지요. 
65 유대 묵시 문헌이 보여주는 상징 언어와 영지주의 문헌들이 보여주는 고도로 상징적이고 우의적인 언어 사이의 흥미로운 연관성은 이러한 설명에 힘을 실어 주었습니다. 
67 초자연적 그리스도가 쓴 가면에 지나지 않았다고 여겼습니다.
67 어떤 영지주의자들은 예수는 수난 전에 사라졌으며 십자가에서 죽은 사람은 예수가 아니라 키네레 사람 시몬이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수난 전에 육체를 벗어났다고 이야기하기도 했지요. 2세기 초 이그나티우스가 마주했던 것은 바로 이런 종류의 가현론이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당연히 몸의 부할이 아니게 됩니다. 
68 어떻게 다자가 궁극적인 일자와 연결될 수 있느냐, 즉 어떻게 모든 존재의 한 근거가 무수히 복잡한 생명체들을 만들어 낼 수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영지주의는 이에 대한 답변 중 하나였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은 궁극적인 무한자의 유출을 통해 영적 세계가 생성되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69 이레네우스는 더 영지주의자들의 위협을 경계했습니다. 하느님의 단일성을 깨뜨리기 때문이지요.
70 이레네우스는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일관성 있는 전체로 다루는 최초의 '조직신학'을 창조했습니다. 앞선 사상가들이 일궈놓은 관념들과 성서를 활용해 그는 '총괄갱신 이론'을 전개했습니다. 
72 그는 이야기했습니다. 참되며 한 분이신 하느님은 세계와 만물을 창조하셨고, 낙원에 피조물 중 으뜸인 아담을 두셨습니다. 그러나 아이처럼 순진하던 아담은 하느님이 주신 자유를 남용했고 그 분에게 불순종했습니다. 그 결과 하느님의 선한 피조 세계가 오염되었습니다. 물론 근본적으로 여전히 선하지만 말이지요. 
72 그분을 통해 모든 피조물의 구원은 시작되었고 결국 완성될 것입니다. 그렇게 성찬에서 나누는 빵과 포도주는 물질이지만 영적인 것의 매개가 될 수 있다고 이레네우스는 말했습니다. 
73 이레네우스의 두 번째 접근법은 전통의 권위에 호소하는 것이었습니다.
78 '무로부터의 창조' 교리가 정확히 어떻게 생겼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교리 또한 영지주의와 벌인 투쟁의 영향을 직간접적으로 받은 듯합니다. 이 교리를 처음으로 이야기한 사람은 이레네우스보다 조금 앞선 시대의 인물인 안티오키아의 테오필루스입니다. 
79 그는 만물의 기원을 탐구한 그리스인들을 계승했습니다.
80 대다수 교양있는 그리스들은 우주, 혹은 우주의 근본 구성요소가 영원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던진 물음은 어떻게 사물들이 창조되었느냐가 아니라 왜 사물들이 지금의 상태로 있게 되었느냐, 그리고 그들이 어떻게 질서를 갖게 되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82 유스티누스는 여기에 새로운 생각들을 덧붙였습니다. 창조주 하느님, 그분이 사용한 질료, 질료에 질서를 부여하는 이데아는 모두 영원할지 모르지만, 창조는 '무시간적'인 것이 아니라고 그는 생각했습니다. 
83 만물이 '무로부터' 창조되었다는 말은 만물이 가짜, 비실재, 비실체라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묵살되곤 했습니다. 
85 무로부터의 창조는 최선의 대안이었습니다. 다른 모든 존재의 피조성과 대비를 이루는 하느님의 권능과 위대함을 드러내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지요. 
88 결과적으로 무로부터의 창조 이론은 고대 세계의 다른 모든 철학과 그리스도교를 구별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교인들이 자신들이 속한 사회의 문화적 규범을 받아들이지 않고 저항했던 수많은 사례 중 하나라 할 수 있습니다. 
88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를 통해 무로부터의 창조 교리는 중요한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88 그에 따르면 하느님은 인류에게 당신의 형상과 신적 로고스인 자신의 생명과 이성을 주기로 했습니다.
89 이러한 맥락에서 성육신은 재창조라 할 수 있습니다.
90 인간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된 피조물로 보는 급진적인 인간 이해를 바탕으로 논의를 새롭게 전개했지요.
90 윤리와 신적 섭리에 대한 철학의 관심은 새로운 차원으로 이동했습니다.
93 그리스도교인은 피조물을 숭배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 세계와 이 세계의 피조물들은 선하며 창조주와 관련된 무언가를 드러냄을 잊지 않습니다. 
93 영지주의를 제거하지 않았다면 그리스도교는 일종의 신비주의, 혹은 도피주의가 되었을 것이고 순전히 이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에만 골몰하는, 현실과 무관한 소종파들로 분열되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세계도, 그리스도교 문명도 없었겠지요. 영지주의의 도전이라는 맥락을 고려할 때 실재, 현실, 진리에 관한 그리스도교의 자기-정의는 불가피했스빈다. 이를 바탕으로 그리스도교인들은 다음 세계뿐 아니라 이 세계에도 관심을 갖고 헌신하게 되었습니다. 


3. 한 분 하느님 그리고 한 분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95 "이 사람들이 다른 신을 예배하지 않고 한 신만을 숭배한다면 다른 사람들에 맞서 적절한 주장을 펼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최근 나타난 한 사람을 지나칠 정도로 숭배한다. 게다가 그들은 이 신의 종을 숭배하더라도 유일신론과 모순을 일으키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켈수스 반박 VIII. 12) 
96 그리스도교인들의 모습에 켈수스로 대표되는 교양층은 불쾌함을 느꼈습니다.
97 외부인들도 납득할 만한 논리적 답변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98 신약성서 저자들에게는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 모두에게 예배하는 것이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았음을 알려줍니다. 그러나 머지않아 이는 문젯거리가 되었습니다. 
98 고대 세계의 진지한 사상가들은 유일신론과 높은 수준의 윤리를 고수하는 유대인들을 존중했습니다.
98 그분이 요구하는 삶의 방식이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을 통해 완성되고 보편화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101 로고스 신학은 예수가 어떻게 이교신화에 나오는 신들의 자녀들과는 다른 하느님의 독특한 아들인지, 한 분 하느님과 하나이면서 동시에 구별되는지를 합리적으로 설명했습니다. 
103이는 유대인 철학자인 필론이 예비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초월자인 하느님의 내재성을 해명하기 위해서 로고스 개념을 발전시켰지요. 
103 이러한 흐름 가운데 요한복음서는 그리스도교 교리 형성 과정에 점점 더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지요.
103 로고스 교리는 초월자인 하느님과 그분의 내재적 활동을 연결했기 때문에 영감의 다른 원천이 존재할 여지를 거의 남겨두지 않았지요. 
104 당시 몇몇 그리스도교 사상가들은 영원의 차원에서 말씀과 성령을 갖고 계신 한 분 하느님이 창조와 섭리의 말씀을 낳고 성령을 내쉬면서 삼일체가 '되셨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이는 종종 경륜적 삼위일체Economic Trinitarianism라고 불리지요. 
104 훗날 이는 부적절한 이야기임이 밝혀졌고 하느님은 영원히 그리고 본질적으로 삼위일체여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지만, 이것이 교리로 확립되기까지는 더 많은 논의가 이루어져야 했습니다. 
105 2세기 말 빅토르가 교황이었을 때 구두 수선공 테오도투스가 로마에 나타났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그리스도가 그저한 인간이었다고 주장했고 빅토르는 이런 글을 파문했지요. 
105 이들은 예수가에 대한 그리스도교인들의 주장이 유일신론을 위협한다고 여긴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하느님의 양자가 될 정도로 완벽한 사람이었다고 제안했지요.(그래서 이들을 양자론자Adoptionist라고 부르며 교과서에서는 이 이단을 권능 중심의 군주론Dynamic Monarchianism이라고 부릅니다.) 
105 유일신론의 문제로 고민했던 신자들은 그들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기원후 200년경 스미르나의 노에투스는 그리스도는 성부 본인이었다고, 성부가 몸소 태어나고 고난받고 죽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107 완고한 유일신론을 내세우는 이들을 향한 가장 설득력 있는 비판은 이들이 사실상 성부수난설을 지지한다는 것이었습니다. 
109 이 사안에 대해 정확한 판단을 내리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109 분명 쟁점은 유일신론이었습니다. 
111 오리게네스가 전개한 로고스 신학은 4세기 초 황제의 군대가 그리스도교를 지지하기로 약속하고 대박해가 끝나면서 시작된 아리우스 논쟁의 배경이 된 것으로 보입니다. 
114 하느님의 로고스는 계시의 중재자였으며 계시의 절정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로고스의 성육신이었습니다.
114 물질 세계는 분명 하느님의 피조물이었습니다. 
115 이에 대한 전형적인 답은 일자와 다자 사이에 일자의 일자성과 다자의 다중성을 지닌 중재자, 일자-다자One-Many, 명확히 정의할 수 없으나 두 속성을 모두 지닌 존재, 복잡성을 지닌 통합체가 있다는 것이었지요. 
115 영적인 존재들, 천사들과 영혼들, 다자를 두셨습니다. 이때 한 분 하느님과 수많은 피조물이 있는 존재자가 바로 로고스입니다.  
115 로고스는 아버지의 영원한 아들이자, 아버지에게서 나온 아버지의 대리인, 아버지와 피조물 사이를 중재하는 도구입니다. 이렇게 오리게네스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설명하기 위해 존재의 위계를 제안했습니다.  
116 로고스는 아버지에게 종속된 '제2의 하느님'이 되기 쉬웠지요. 그리고 아리우스는 이 논리를 끝까지 밀고 나갔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내적 이성으로서의 로고스와 하느님의 대리인으로 창조된 가장 위대한 피조물인 로고스를 구별했습니다.  
117 서방 교회에서는 세 힘, 혹은 세 분리된 실체substances 혹은 위격hypostases이라는 개념을 비판했습니다. 
121 그는 전형적인 로고스 신학, 즉 그리스도의 신성이 하느님의 신성에 종속되며 그리스도가 하느님과 피조물을 중재하는 존재라는 제안에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124 아리우스는 유일신론자였습니다.
124 독생자는 다른 어떤 피조물과도 다른, 하느님의 완벽한 피조물이라고 아리우스는 고백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하느님은 오직 아버지일 뿐입니다. 아들은 최초의 피조물이자 가장 위대한 피조물이고 말이지요. 물론 그는 '신적'입니다. 
125 아리우스에게 '아들됨'은 모든 피조물이 얻을 수 있는 것이며, 유혹에 대한 하느님 아들의 승리는 모두가 따라야 할 본이었습니다. 
125 피조물 역시 죄를 정복할 수 있고 의로워질 수 있게 되지요. 바로 이 점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아리우스의 주장을 매력적인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바로 이 점 때문에 더 많은 사람이 그의 주장이 상당 부분 교회의 전통적인 가르침과 일치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거부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126 아타나시우스에 따르면 아리우스의 주장에서 로고스는 더는 중재자가 될 수 없습니다. 원리상 은총을 통해서가 아니면, 신성을 지닐 수 없기 때문입니다. 
127 본질상 하느님의 아들이 아니고 다만 하느님이 자신의 대리인으로 채택한 피조물에 불과한 것이지요. 그는 그 자체로 신적이지 않기 때문에 하느님과 교류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는 불가히파게 전체 위계를 붕괴시킵니다.
127 새로운 신학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했습니다. 


4. 성령과 거룩한 공교회

131 아리우스 논쟁의 공식 의제는 아들/로고스와 아버지/하느님이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암묵적인 의제는 구원의 문제였지요. 아리우스에 대한 아타나시우스의 비판 2장 끝에 소개한 사상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131 우리가 하느님이 될 수 있도록 그분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131 아타나시우스는 로고스가 우리의 '테오포이에시스'theopoiēsis 즉 신성화divinization, 혹은 신화神化, deification를 이루기 위해서 그가 하느님이어야만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132 말씀의 온전한 신성을 긍정하기 위한 투쟁은 성령의 온전한 신성을 긍정하기 위한 투쟁으로 곧장 이어졌습니다.
133 세례를 할 때도 마태오 복음서의 명령(28:19)을 따라 셋을 언급했습니다.
136 "수금"은 헬레니즘 시기 자주 쓰이던 심상이었습니다. 델피의 신탁과 무녀들은 신에게 "사로잡혀" 그의 말을 전했습니다. 황홀경, 무아지경, '신성한 광기'는 모두 이 과정과 연관이 있지요. 
140 아타나시우스는 성령은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영이며 따라서 성령의 신성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관계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140 아리우스파와 논쟁할 때처럼 이 주장은 구원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는 논쟁에 대한 응답이기도 했습니다. 
142 성령이 성자 및 성부와 동일본질이라고까지 하지는 않았습니다.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채택한 니케아 신경 중 성령에 관한 조항을 적용하지도 않았지요. 
142 카파도키아 교부들인 바실리우스와 그의 친구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 바실리우스의 동생이었던 니사의 그레고리우스였습니다. 
143 플라톤주의를 따르는 경향이 있던 카파도키아 교부들은 세 위격의 관계를 보편과 특수라는 범주로 설명했습니다.
143 바실리우스나 그레고리우스에게 세 위격의 단일성은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것이었습니다.
144 이레네우스, 테르툴리아누스의 '경륜적 삼위일체'와 대조되는 '내제적(본질적) 삼위일체'입니다.
147 아우구스티누스의 논의는 카파도키아 교부들의 논의와 매우 비슷한 것처럼 보입니다. 
147 아우구스티누스는 보편과 특수와 관계가 삼위일체를 다루는 적절한 방법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존재하고, 알고, 의지를 가지는 인간의 경험이 삼위일체를 더 잘 이해하게 해준다고 생각했습니다. 
147 인간 정신을 이루는 기억과 이해, 의지의 '내적' 삼위일체, 또는 정신 그 자체, 정신에 대한 앎, 그리고 정신에 대한 사랑의 삼위일체처럼 말이지요. 
152 세례, 부활, 영원한 삶과 더불어 하나이고 거룩하며 보편적이고 사도적인 교회가 나오지오. 이는 성령의 활동 영역을 표현합니다. 
152 성령이 활동하고 성화하는 이 공동체, 즉 교회의 본성은 무엇일까요? 이 또한 초기 그리스도교의 주요 논쟁거리였습니다. 
152 그리스도교인들은 자신을 '거룩한 선민'holy elect, 즉 정화되고 준비된 이들, 임박한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기다리는 이들로 여겼습니다. 
153 요한의 첫째 편지 저자는 아직 종말이 오지 않고 선민들은 아직 거룩하지 않다는 점을 분명하게 말해야 했습니다.
159 키프라아누스는 「교회의 일치」에서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5. 성육신하신 하느님의 아들

171 니케아 신경 이전의 신학은 대체로 로고스를 초월자인 한 분 하느님과 다양한 피조물을 중재하는 존재로 보는 경향이 강했지요. 그러나 로고스가 성부 하느님과 동일본질이라고 합의가 이루어지자 로고스를 눈에 보이고 물질적이며, 변화하고, 정념으로 가득 찬 세계와 연결하기가 어려워졌습니다. 
186 마리아를 '테오토코스'Theotokos, 즉 하느님의 어머니로 불러야 하는지, 아니면 '안트로포토코스'Anthropotokos, 즉 인간을 어머니로 불러야 하는지를 두고 논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186 아마 외부의 간섭이 없었다면 이렇게 해서 이야기가 잘 마무리되었을 것입니다.
188 키릴루스는 네스토리우스에게 평화를 위해 성모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불러야 한다고 요구했습니다.
195 새로운 공의회, 451년 칼케돈 공의회에서는 오느날까지 모든 서방 교회(로마 가톨릭과 개신교)와 동방 정교회에서 권위를 인정받는 하나의 그리스도론 정식을 만들어냈습니다. 
196 동방 교회 안에서의 갈등은 회복되지 못했고 약 1세기 이후에는 칼케돈파 교회와 비칼케돈파 교회로 분열되었지요.
196 어떤 학자들은 칼케돈 정식을 경계선으로 보기도 합니다. 이 경계를 넘어서면 잘못될 위험이 있기 때문에 이 경계선 안쪽에서만 그리스도론을 탐구해야 한다고 말하지요. 한편, 이 정식을 일종의 정치적 타협물로 보는 이들도 있습니다.
197 이렇게 보는 이들은 이제 칼케돈 정식을 넘어서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197 공의회의 첫째 목표는 첫째는 교회의 일치와 평화였습니다. 
200 이전 세기에 주교들이 '동일본질'과 '유사본질' 사이 이오타i 하나를 두고 싸웠듯 전치사인 '안에'en와 '로부터'ek를 놓고 싸운다고 비웃을지도 모르겠습니다. 
201 우선 이 모든 논쟁의 바탕에는어떻게 하나가 동시에 둘이 될 수 있느냐는 물음이 깔려 있습니다. 어떤 용어로 표현하든 간에,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 받아들인다면 이 질문은 자연스럽게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202 그리스도교의 전통은 언제나 예수 안에서 드러나고 그를 통해 활동하신 분은 진실로 하느님이라고, 또한 예수는 진실로 인간이었기에 우리와 관계를 맺고 궁극적으로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다고 말해 왔지요. 
203 인간이라는 피조물의 입장에서 신성을 이해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한다는 점입니다.


6. 우리와 우리의 구원을 위해

207 신경이 된 교리들을 만들어 낸 논쟁들은 구원의 복음을 보존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일어났습니다.
208 최근 연구는 이러한 관점을 되찾았으며 이 책에서 제시한 설명 또한 이 과점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영지주의 논쟁이 그랬듯, 아리우스 논쟁, 네스토리우스 논쟁도 결국은 구원에 대한 관점들끼리 부딪힌 논쟁이라 할 수 있습니다. 
208 성사들을 통해 "불멸의 약"을 얻는다는 고대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믿음 
208 그들에게 성사는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육체와 동화할 수 있게 해주는, 그리하여 신화가 이루어지게 해 주는 길이었기 때문이지요. 
209 전례, 영성, 윤리, 생활방식 등을 포함하는 삶과 교리 사이에는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209 과거학자들은 초기 교회가 구원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탐구할 때 소급 적용을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209 주님께서는 수난을 통해 죽음을 파괴하셨고, 오류에 종지부를 찍으셨으며, 부패를 없애셨고, 무지를 몰아내셨고, 생명을 드러내셨고, 진리를 선포하셨고, 썩지 않을 것을 주셨습니다. (이단 논박 Ⅱ, 20. 2)
210 당시 초기 교회가 그리스도의 구원과 관련해 다루었던 다양한 주제들을 포괄하고 있습니다. 
211 로고스 신학은 이런 주장들을 포괄하는 탁월한 '이론'이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로고스를 우주의 질서를 구성하는 합리성이자 선, 생명의 원리로 여겼기 때문이지요. 
212 인간이 로고스와 연합하고 그분의 양자됨을 받아들임으로써 하느님의 아들이 될 수 있도록 로고스는 인간이 되셨습니다. (이단논박 Ⅲ. 19) 
212 이레네우스는 창조의 선함을 부인하는 영지주의자들과 싸우고 있었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은 구원이 이 물질세계에서 탈출해 신성이라는 불꽃의 파편들이 본래 속한 영적 세계로 돌아가는 것으로 보았지요.
213 육체의 부활이라는 신경의 진술은 인간의 도덕적, 영적 차원과 더울어 육체적 차원도 치유되고 회복되어야 함을 확언합니다. 
213 과거라는 잿더미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유대 종말론적 희망이 흐르고 있습니다.
216 오리게네스를 포함한 초기 그리스도교 저술가들이 그리스도의 이름, 호칭을 우리의 구원과 관련지어 해석했다는 점,
217 오리게네스가 쓴 저술들을 관통하는 핵심 개념은 하느님의 단일성과 피조 세계의 다중성이 구세주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는 점이었습니다. 
218 오리게네스 사상의 핵심이 중보자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과 피조 세계가 연합해 만물이 다시 통합되고 본래 완전함을 회복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219 그리스도를 존재의 위계에서 중재자 위치에 놓는 생각은 아리우스 논쟁 시 처음에는 지지를 받았으나 나중에는 거부되었습니다. 
222 아타나시우스에게 구원은 신화, 혹은 자녀됨이었습니다.
224 초기 그리스도교 신학자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두가지 방식으로 이해했습니다. 하나는 그의 죽음이 하느님의 분노를 가라앉히기 위한 희생이었다는 것입니다. 
224 본래 뇌물의 성격을 띤 희생 제물을 바쳐 신들을 진정시킨다는 이교도의 가정에 뿌리를 두고 있지요.
224 그리스도의 죽음이 악마와 악의 세력을 정복하는 수단이라는 것이었습니다. 
230 비록 사상가마다, 시대마다 차이가 있지만, 대부분은 구원을 지상과 천상, 물질과 영, 하느님과 인간의 결합으로 이해했습니다. 
235 마니교는 대다수 영지주의 체계보다 더 철저한, 궁극적인 이원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246 참된 사랑은 타자가 존재하는 것을 허용하고, 그 타자를 놓아주고, 탕자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듯 타자가 돌아오기를 기다림을, 그러면서 상한 마음을 싸매어 주고 잘못된 세상을 치유해나감을 자신의 신학 사상에 충분히 반영하지는 못했습니다. 
246 그리스도교 신학이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은총과 자유의지 사이의 긴장, 신앙의 명령과 선한 행위의 명령 사이의 긴장, 하느님의 주도권과 인간의 책임 사이의 긴장, 그리고 둘의 끊임없는 창조적 투쟁이 필요합니다.
246 창조론은 완전함과 일원론을, 구원론는 불완전함과 이원론을 내포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교 신학은 둘 중 하나를 배제하고 하나만 선택할 수 없습니다. 

 

결론과 성찰

249 모든 집단은 자신과 다른 집단이 구별되는 독특한 특징이 무엇인지를 규정함으로써 자기를 정의하려고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공동체는 배타적입니다. 
249 민족종교로서 유대교는 할례, 민족 구성원끼리의 결혼, 율법준수 등을 통해 구성원을 구별합니다. 이와달리 그리스도교는 민족, 인종과 같은 범주로 자기 구성원을 구별하지 않습니다.
249 그리스도교는 믿음의 문제를 가지고 경계와 표지를 설정합니다.
250 그리스도교는 언제나 특정 종교, 종족이 아닌 정통 교리를 가지고 구성원을 구별했습니다.
250 왜 신경이나 교리를 받아들이는 여부가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요소가 된 것일까요?
251 각 분파와 학파는 서로를 '이단'이라 불렀지만, 이때 이단은 선택을 뜻했습니다.
252 그 결과는 그리스도교 세계의 전체주의였지요. 
252 아우구스티누스 사상은 이 역설을 잘 보여 줍니다. 그는 당대 그리스도교 사상가 중 하느님이 사랑이심을 머리와 가슴으로 가장 깊이 받아들였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제국이 도나투스파를 탄압하게 한 사람, 완고하고 비타협적인 예정성을 가르친 사람도 아우구스티누스였습니다. 
258 초기 그리스도교가 가장 관심을 기울인 문제는 하느님은 초월적이시지만 세계, 온 우주, 물질적인 것과 영적인 것, 육체와 영으로 이루어진 모든 인류와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깊은 차원에서 창조 교리는 교부신학이 발전할 수 있도록 추동하는 동력, 그리고 그 바탕이었습니다. 창조 교리는 하느님의 존재, 본성, 활동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세계가 우연성을 지니고 있음을, 성육신한 말씀의 존재와 본성, 속죄 활동을 통한 하느님과의 연합이 필요함을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이때 제기된 문제들은 신학의 근본 문제들로 남아 답변을 기다리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258 이제 마지막으로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과정을 통해 나온 결과물, 즉 신경들을 오늘날에도 믿음의 시금석으로 보아야 할까요? 이 질문은 하나의 도전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오늘날에도 신경을 신앙의 척도로 보아야 하느냐는 문제를 충분히 논의하는 것은 이 입문서를 넘어서기에 더 이야기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안목 있는 독자라면 저의 관점을 충분히 감지하셨을 것입니다. 이렇게만 말해두지요. 교리를 정립하려는 시도는 어떻게든 분열을 초래할 수밖에 없습다. 또한, 제한된 인간 정신, 언어와 개념이 결합해 나온 명제들이 하느님의 신비를 포괄할 수 있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면도 있지요. 하지만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언제나 진리와 정체성을 두고 고민했으며 이는 개인이 홀로 자유롭게 생각해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닙니다. 문화가 바뀌고 언어가 바뀜에 따라 그리스도교가 전하는 진리는 해석과 재해석을 거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통적인 신경 형태와 교리에 담긴 흐름을 거부하거나 대체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259 그리스도교 신학은 화석이 아니라 살아있는 실체입니다. 하지만 매 순간 완전히 새롭게 만들 수는 없지요. 많은 그리스도교인이 그리스도교의 역사를 알지 못해 옛 이단들이 다시 출몰하고 옛 문제가 다시금 논의되는 광경을 보노라면 마음이 쓰립니다. 가장 호전적인 정통주의자들이 고전 그리스도교 신학의 정신에 가장 충실하지 못한 모습을 보일 때도 있습니다. 현대라는 맥락에서 그리스도교 교리에 대해 체계적으로 고민하기 위해서는 우선 과거 교리 논쟁의 과정을 이해하고, 신앙의 선배들이 무엇을 문제시했는지, 이를 어떻게 표현했는지, 어떠한 의를 했는지를 충분한 공감을 가지고 살펴야 합니다. 이는 자신을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여기고 성육신하신 말씀에 충성을 다짐한 이라면 누구나 해야 할 일입니다. 하느님의 로고스는 자신에 대한 사랑에서 일어나는 순종 뿐만 아니라 합리성, 신실함, 진리에 대한 갈망을 머금은 영성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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