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프 하인리히: 클로드 모네 | 베이식 아트 2.0

 

클로드 모네 | 베이식 아트 2.0  | 크리스토프 하인리히 클로드 모네 | 베이식 아트 2.0 | 크리스토프 하인리히 - 10점
크리스토프 하인리히 (지은이),김주원 (옮긴이)마로니에북스

16쪽 주제를 발견하다
24쪽 일요일 오후 같은 세상
34쪽 아르장퇴유의 다리
44쪽 베퇴유의 겨울
54쪽 집중과 반복, 연작의 시대
62쪽 다른 지역 그리고 다른 빛
72쪽 지베르니의 정원
92쪽 클로드 모네(1840-1926)
삶과 작품

 


7 클로드 모네가 초기에 그린 한 정물화(폭)는 화가 모네의 다작의 예술 생애를 압축해서 말해준다. 식물과 호수, 이국적인 새 등이 옛 태피스트리 방식으로 직조된 벽포를 배경으로 책상 위에는 붓과 화구 상자, 팔레트 등이 놓여 있고, 책과 무기가 함께 그려져 있다. 매끄럽게 빛나는 물감, 윤기 없는 벨벳 모자, 뺏뻣한 책표지, 그리고 총과 칼 등 세심하게 그려진 물건들은 젊은 모네에게 잠재되어 있는 예술적 재능을 증명한다. 또한 회색빛의 생활 용구와 녹음이 짙은 열대지방의 강변 풍경의 대비, 실내 장식품의 고풍스러운 점토질 색조와 화려한 벽포의 대비 역시 이 그림의 비범함을 느끼게 한다. 이 초기 작품에서 주목할만한 것은 매혹적인 광채이다. 팔레트 위에는 초록, 빨강, 검정 물감과 함께 촉촉한 흰색의 물감이 쌓여 있다. 흰색이 발산하는 빛은 그림 전체를 빛나게 한다. 신선한 흰빛은 공간 전체를 채우고, 나아가 화가의 예술 생애 전체에 솟구친다. 이 빛은 바로 화가의 선언이다. 

모네는 하늘과 눈과 물에 비친 구름의 화가이자 최초로 그림 전체를 모노크롬에 가까운 흰색으로 그린, 밝은 낮의 화가이다. 그는 만년의 장대한 '수련' 연작에 이르기까지 흰색과 순수 색채의 혼합을 계속하여, 이 초기 작품에서 보이는 실내의 따분하고 지루한 옅은 그늘을 떨쳐냈다. 모네는 바로 빛의 화가이다. 

개인 전시회가 아직은 일반적이지 않았을 당시, 파리 살롱은 프랑스 화가들이 작품을 발표하는 유일한 무대이자 시장이었다. 살롱에는 기성 화가와 그들의 열렬한 제자, 야망에 찬 모작(作) 화가, 그리고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예술가들의 최신 작품이 6주 동안 대중에게 공개되어 격찬과 비평을 마다하지 않았다. 관람자의 대부분이 귀족계급이었던 18세기의 살롱은 예술에 대한 전문지식을 가진 사람들만의 장소였으나, 그로부터 백 년이 지난 후에는 모든 이들의 일요일 기분 전환을 위한 취미의 장소가 되었다. 사회적 지배계급으로 등장한 부르주아 계급과 시민들은 1855년의 '파리 만국박람회' 이후 모자를 쓰고 지팡이를 든 채 바스락거리는 야회복을 입고 이 산업의 궁전을 느긋하게 거닐면서 사람들과 이야기 나누는 것을 즐겼다. 비평가들은 '주르날 뒤 리르(유머신문)'나 '르샤리바리' 같은 유명 신문에, 살롱에 전시된 작품을 소개하거나 비평을 하는 등 살롱에 관한 이야기로 페이지를 채웠고, 대중의 취향에 부응하기 위해 도취로 가득한 찬사 혹은 악의적인 캐리커처를 싣기도 했다. 사람들은 자신의 눈으로 실제 그림을 보기도 전에 환희나 폭소를 터트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살롱에서 전시할 수 있는 기회와 비평가들의 평가는 예술가들에게 참으로 중요했다. 비평가들은 예술가들을 인정하거나 난처한 상황에 빠지게 했고, 예술가의 생계를 어렵게 하고 나아가서는 극한 빈곤에 치닫게 했다. 

살롱이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이목을 끈 것은 사실이다. 화가들은 신화와 설화 속의 살인 이야기. 승리한 영웅 이야기를 애써 기억하려 했다. 그리고 벌거벗은 육체를 그리기 위한 구실을 찾았다. 그렇지만 그것이 용서받지 못할 나쁜 기호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살롱은 그림을 전시하고자 지루한 싸움을 계속했던 들라크루아와 쿠르베, 밀레, 코로, 그리고 마네의 작품을 전시했다. 화가들은 살롱에서 작지만 의미 있는 성공을 기뻐하거나 스캔들을 일으키면서 주목을 받았다. 운이 좋은 해에는 노련한 거장부터 전통에서 자유로운 바르비종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회화를 볼 수 있었다. 젊은 예술가들에게는 영감을 얻는 장소이기도 했다. 

호기심에 찬 눈으로 살롱을 찾은 젊은 예술가 중 한 사람이 클로드 오스카 모네이다. 그는 1840년 파리의 중하층 계급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모네의 아버지는 잡화상점이 실패하자 가족을 이끌고 항구도시 르아브르로 이사해서, 자형인 자크 르카드르의 도매업에 참여했다. 세례명인 오스카로 불렸던 모네는 당시 여섯 살이었다. 그는 이곳 프랑스 북부의 해안에서 소년시절을 보냈다. 밝은 햇빛과 끝없이 출렁이는 바다. 바람과 변덕스러운 날씨, 또한 도빌과 트루빌, 옹플뢰르 같은 화려한 해수욕장이 도시 서민의 마음을 끄는 매력적인 곳이었다. 그의 가족은 생타드레스에 있는 소피 아주머니의 아름다운 별장에서 여름을 보내고, 겨울에는 항구 르아브르에서 지냈다. 모네는 학교보다 근처 해변으로 나가 바위 절벽, 모래언덕 등을 하루 종일 돌아다니는 것을 즐겼다.  

90 모네의 건초더미 연작이나 루앙 대성당 연작이 전시되었을 때 비평가와 친구들은 연작이 전체로서 하나의 작품임을 강조하고, 그것이 전 세계로 뿔뿔이 흩어지는 데 대해 상당히 유감스러워했다. 그래서 클레망소는 1900년 이전부터 루앙 대성당 연작을 국가가 일괄하여 매입하도록 노력했으나 정부의 구매위원회의 승인을 얻을 수가 없었다. 1918년, 모네가 휴전을 기념하여 대형 수련 두 점을 국가에 기증하겠다는 뜻을 밝히자, 클레망소와 제프루아는 지금이야말로 대연작 수련 장식화 프로젝트를 수행해야 한다고 모네를 설득했다. 

꽤 오래전부터 모네는 방 하나를 수련 작품으로 장식하여, 끝없는 통일체라는 환상을 창출함으로써 보는 사람이 편안한 상태로 명상에 잠기게 하겠다는 생각을 해왔다. 그래서 모네는 전용 건물을 짓고, 자신의 생각대로 전시한다는 조건으로 국가에 상당수의 작품을 기증하는 데 동의했다. 그에 적합한 장소로 호텔 비몽의 정원이 선정되었다. 오늘날 조각가 로댕의 미술관이 서 있는 곳이다. 건축가가 이 부지의 한쪽에 파빌리온을 세우고, 그다지 크지 않은 원형 방을 만들어 패널을 걸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공공건축물 심의회에서, 자신의 그림만 걸리는 건축물을 짓게 되면 화가가 너무 우쭐해할 것이라는 우려를 한 탓인지 그 안을 승인하지 않았다. 그래서 모네는 국가에 기증하겠다는 제안을 철회하려고 했다. 이미 연작 전체를 일괄 구입해서 자국의 미술관에 전시하려는 사람들이 일본과 미국에서 몰려오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모네가 루브르 부속인 오랑주리 미술관에 작품을 걸겠다는 데 동의하게 된 것은, 처음부터 그 일을 '자신의 프로젝트'라고 여겼던 클레망소의 덕택이었다. 그러나 수련 장식화가 마침내 오랑주리의 두 개의 타원형 공간에 전시된 것은 모네 사후의 일이다. 

오늘날에는 많은 이들이 오랑주리를 방문하고 있고, 파리를 여행하는 사람들의 목적지가 되었다. 하지만 그곳은 여러 해 동안 방치되었고, 방문하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샘 프랜시스 같은 화가가 수련을 다시 발견한 것은 1950년대의 일이다. 만년의 모네의 작품은 추상표현주의 세대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진정 이해되고 가치를 평가받게 되었다. 모네의 예술 생애의 마지막 몇 년은 다작을 생산한 시기였다. 그는 노후를 긴 인생의 예술적 열매를 위해 조용히 작업에 몰두했다.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도 자신에게 엄격했다. 변변치 못한 작품이 세상에 나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그는 많은 작품을 파기하고 불태웠다. 마네가 죽은 후, 화상들이 그의 작품을 모두 거두어가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에 좋지 않은 스케치나 습작이 시장에 나가지 못하게 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1908년부터 시력이 약해지기 시작했던 모네는. 그 후 양쪽 눈이 백내장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오랫동안 주저하다가 마침내 두 번의 수술을 받았고, 시력은 어느정도 회복되었다. 1919년에 오랜 친구인 르누아르가 세상을 떠났다. 늙은 화가는 연못가에 홀로 남았다. 

모네는 종교적인 인간이 아니었다. 오히려 철저하게 실증주의적인 입장이었다. 그는 빛의 유물론자였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비평가들은 모네의 만년 작품이 나오기 훨씬 이전에, 단테의 신곡 지옥편을 인용하며 일본풍 다리를 지옥의 불길 속에 집어던졌을 것이다. 모네의 만년을 지배한 것은 그가 사랑해왔고 죽어서 수장되고 싶었던 차가운 물이 아니라, 바로 불이다. 그의 연못은 불꽃에 휩싸여 있었다. 화가로서 생의 마지막에 그린 엄청난 에너지로 가득한 그림들, 불굴의 고갈되지 않는 생명력을 가진 이 그림들을 통해, 아카데미의 경직된 모방주의에서 예술을 해방하는 일에 기여하고, 예술가와 대중에게 '보는' 법을 가르친 모네, 외광파의 불꽃으로 근대 예술의 불을 댕긴 프로메테우스 모네는 근대를 자신의 손으로 완결하겠다고 말하고 있다. 모네가 생애와 예술을 통해 지켜온 힘은 작열하며 고고하게 타오르다가 홀연히 사라졌다. 그는 1926년 12월 5일에 8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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