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아퀴나스: 진리론

 

진리론 | 고전의 세계 리커버  | 토마스 아퀴나스 진리론 | 고전의 세계 리커버 | 토마스 아퀴나스 - 10점
토마스 아퀴나스 (지은이),이명곤 (옮긴이)책세상

들어가는 말|이명곤

양심에 관하여
제1장 양심은 능력인가 습성인가?
제2장 양심이 죄를 지을 수 있는가?
제3장 양심이 소멸할 수도 있는가?

의식에 관하여
제1장 의식은 능력인가, 습성인가 혹은 행위인가?
제2장 의식은 오류를 범할 수 있는가?
제3장 인간 행위의 업적들은 의식에 구속되는가?
제4장 오류의 의식은 우리를 강제하는가?
제5장 중립적인 행위에 있어서 오류의 의식은 고위 성직자의 계율보다 더 강제적인가?

해제 - 절대적인 진리, 최후의 진리를 향한 중단 없는 추구 이명곤


더 읽어야 할 자료들
옮긴이에 대하여

 


31 답변: 위의 두 대립되는 견해에 대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견해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다는 것을 말해야만 할 것이다. 어떤 이들에게 있어서 양심은 분명히 하나의 능력인데, 이 능력은 이성과는 구분되며 이성보다 상위의 능력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있어서는12 양심은 하나의 능력임이 분명하지만, 사실상 이성과 동일한 것이다. 물론 언젠가는 달라진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가령 이성으로서의 이성에 대한 관점이 있다. 즉 논리적 사유와 추론을 통해서 가지게 되는 것으로서의 이성을 말하는데, 이는 사람들이 이성적인 능력들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본성으로서의 이성이 있다. 즉 이 이성은 어떤 자연적인 앎들을 가진 것으로서의 이성을 말하는데, 이를 사람들은 양심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 밖에 다른 사람들은13 양심을 어떤 자연적인 습성을 지닌 이성적인 능력 그 자체라고 말하고 있다. 바로 이 능력에서 사람들은 진리의 가장 큰 부분을 발견하는 것이다. 아래에서 우리는 이를 알게 될 것이다. 

데니스는 이에 대해 《신성한 이름들》의 7장에서 "신성한 지혜가 시작하는 것들에 있어서 계속되는 것들을 이전의 끝부분들에 결합시킨다"라고 진술했다. 사실상 하위적인 것이 그의 가장 높은 부분을 통해서 상위적인 것의 가장 낮은 부분과 접촉하는 연속된 육체들과 동일한 질서 안에서, 그 어떤 것들은 다른 어떤 것들과 관계하게 된다. 이러한 국면에서 보자면 하위적인 본성은 하나의 불완전한 참여의 방식으로, 그의 최상위적인 부분을 통해서 보다 상위적인 것을 형성하고 있는 고유한 본성과 접촉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자연적인 앎의 형태에서 고려하자면, 인간의 영혼은 천사적인 본성에 대해 하위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천사의 본성에 고유한 자연적인 앎의 형태는 탐구나 앎의 과정 없이 즉 직관적으로) 진리를 아는 것이다. 반면 인간 영혼의 고유함은 하나의 하위적인 앎에서 다른 것에로 나아가는 탐구의 과정을 통해서 진리에 대한 앎에 도달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관점으로부터 인간의 영혼은 자신에게서 정점에 달하는 그것을 통하여 천사적인 본성의 고유함과 접촉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천사적인 본성의 고유함이란 어떤 것을 탐구의 과정 없이 단박에 알게 된다는 것인데, 이 경우 역시 인간의 영혼은 감각들의 도움 없이는 진리를 알 수 없다는 사실에 있어서 여전히 천사적인 본성보다 하위적인 것으로 발견되는 것이다. 

34 결국 양심이라는 것은 원리들의 습성과 유사한 자연적인 습성이거나, 이러한 습성을 지니고 있는 이성의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이 둘 중 어떤 것을 선택하든지 그것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결정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단지 '명목상의 의미nomonis significationem'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양심을, 자연적으로 알게 되는 '이성적인 능력 그 자체'라고 부른다 해도 이는 결국 어떤 습성 없이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이성에게 있어서 자연적으로 알게 되는 것은 오직 어떤 특정한 자연적인 습성의 덕분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원리들의 지성의 경우에서 분명하게 보았기 때문이다. 

45 답변: 위의 두 대립되는 견해에 대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견해
모든 것에 있어서 자연의 작품들은 선한 의도를 지니고 있다고 말해야 하며, (자연은) 자연적인 작용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모든 것을 보전하려고 한다고 말해야 한다. 바로 이 때문에 그들의 모든 작품들 안에서 원리들은 항상 지속적이고 불변하는 것이며, 그들의 교정(자연정화)을 유지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원리들은 영원히 불변한다"고 《자연학》에서 말하고 있지 않는가. 사실상 원리들이 우선적으로 확실하게 정립되지 않는다면, 이 원리들로부터 발생하는 그 어떤 것도 안정되거나 확립되지도 않을 것이다. 이로부터 우리는 모든 변화하는 것은 불변하는 제일원리를 가정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모든 사변적인 앎은 모든 오류가 배제된 절대적으로 확실한 하나의 앎의 유형으로부터 파생된다고 말할 수 있다. 앎은 보편적인 제일원리들에 대한 앎이며, 이 원리들의 빛을 통해서 모든 다른 앎들이 조정이 되며, 이 원리들 덕분에 모든 진리들이 알려지며 모든 오류들이 제거되는 것이다. 이후의 모든 앎 안에서 모든 확실성들이 이 빛 안에서 보존되며 어떠한 오류도 발생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인간 행위의 영역에서 어떤 견고함이 있다고 말하고자 한다면, 여기에는 필연적으로 견고한 올바름으로부터 존재하는 지속적인 원리가 있어야만 한다. 이 견고함을 통해서 다른 모든 인간적인 행위들이 검토될 수 있으며, 그 결과 이 동일한 지속적인 원리를 가지고 모든 악에는 저항하고 모든 선에는 '예'라고 말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원리가 양심인데, 양심의 역할은 모든 악에 저항하며 선을 부추기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양심은 죄를 지을 수 없음을 지지할 수 있는 것이다. 

88 답변: 위의 두 대립되는 견해에 대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견해
의심의 여지없이 의식은 (우리의 행위를) 강제한다. 그러나 의식이 어떻게 이렇게 하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동여매기(강제하기)'라는 개념에 대해서 알아보아야 한다. 이를 위해 정신적인 영역에 대한 육체적인 영역의 은유는 구속하는 행위에) 요청되는 하나의 필연성을 보여주고 있다. 구속된 사람에게 있어서 구속이 유효하기 위해서는) 그가 구속된 장소에 고정되어 남아 있을 필연성이 요청되며, 그에게 그 장소를 벗어날 능력을 박탈해야만 하는 필연성이 있다. 여기서 우리는 '동여매기ligatio'라는 내적인 필연성이 요청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불꽃은 필연적으로 위를 향해 상승하지만, 우리는 불이 위를 향해 솟아나도록 강제된다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필연적인 것들 중에서 오직 타자로부터 필연성이 부과되는 곳에서만 '동여매기'가 개입된다. 

그런데 두 종류의 필연성이 낯선 어떤 동인에 의해서 부과될 수 있다. 하나는 강제력의 필연성, 즉 우연적인 행위를 (강압적으로) 규정해야만 하는 절대적인 필연성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는 오히려 독려하는 것이지 강제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다른 하나는 조건이 부여된 하나의 필연성, 즉 하나의 목적에 종속되는 필연성인데 이는 그것을 하지 않으면 보상이 주어지지 않게 되는 것으로서 어떤 사람에게 이것을 하도록 부과하는 것이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