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퍼 셀렌차: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지적 세계
- 책 밑줄긋기/책 2023-26
- 2026. 9.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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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지적 세계 | 역사도서관 31 | 크리스토퍼 셀렌차 - ![]() 크리스토퍼 셀렌차 (지은이),곽차섭 (옮긴이)길(도서출판) |
옮긴이 서문 7
서문 31
감사의 글 37
약어 목록 39
1. 시작 43
2. 단테, 페트라르카, 보카초 67
3. 이탈리아 르네상스, 피렌체에 뿌리를 내리다 109
4. 피렌체 휴머니즘, 번역, 새로운(옛) 철학 149
5. 대화, 제도, 사회적 교환 183
6. 누가 문화를 소유하는가? 고전주의, 제도, 속어 221
7. 포초 브라촐리니 247
8. 로렌초 발라 275
9. 라틴어의 성격: 포초 대(對) 발라 307
10. 발라, 라틴어, 그리스도교, 문화 339
11. 변화하는 환경 381
12. 피렌체: 마르실리오 피치노 1 401
13. 피치노 2 435
14. 15세기 후반 피렌체 문화의 목소리 469
15. “거의 숨도 못 쉴 지경이다”: 폴리치아노, 피코, 피치노, 피렌체 르네상스 종말의 시작 505
16. 콘텍스트 안에서 본 안젤로 폴리치아노의 『라미아』 541
17. 결말, 그리고 새로운 시작: 언어 논쟁 593
에필로그 635
참고문헌 641
찾아보기 681
31 이 책은 세 개의 궤적으로부터 발전되었다. 첫째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지적 활동, 특히 라틴어와 연관된 다양한 모습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관계가 있다.
32 "속어 고전주의"란 명칭에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 문화를 동일시하는 사고 세계가 이탈리아 속어로 확산하는 양상에 관한 연구가 포함될 수 있다. 하지만 라틴어적 경향과 속어적 경향이 지닌 질적 차이점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그리고 사실상 양자가 서로 연관해 있었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두 경향을 하나로 합쳐 보려는 시도는 아직 별로 없다. 끝으로 세 번째 궤적은 "철학"이란 말이 르네상스 시기에 가졌던 넓은 의미와 관련이 있다. 이탈리아의 장기 15세기가 왜 전통적으로 서구 철학사에서 그토록 협소한 공간밖에 차지하지 못했는지는 사학사적으로 여러 이유가 있다. 그러나 15세기 사상가들을 "철학" 대 "문학", "라틴어" 대 "속어"라는 틀에 억지로 맞추기보다는 르네상스 사상가들을 자신의 전근대 방식으로 말하게 하는 것이 이 책의 목표임을 밝히는 것으로 충분할 듯하다.
32 자료를 참조하고 독해 전략을 채택하며, 결론에 이르는 모든 과정이 대개 말과 편지를 통한 대화의 결과였다. 또한 그런 대화는 식별 가능한 어떤 세대 집단의 일부인 지식인 사이에서만 통용되었다.
33 문제의 시간은 내가 "장기 15세기"라 부르려 하는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문제의 시기가 대략 1350년경에서 1525년경까지를 아우른다는 것─그래서 "장기" 15세기가 된다─정도로 이해하면 충분하겠다. 이 시기의 이탈리아는 우리가 오늘날 생각하는 방식의 한 나라가 아니었다. 그것은 소규모이지만 그래도 도시보다는 더 큰 정치 단위인 도시국가의 집합체였고, 독립과 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강력한 인식이 있었다.
34 "르네상스"란 용어는 훨씬 덜 복잡하다. 고대 세계에 대한─고대 로마의, 다음으로는 고대 그리스의 언어, 예술, 문화에 대한─새롭고도 집중적인 관심이 이탈리아 사회의 어떤 부분을 사로잡았다. 이런 경향은 장기 15세기보다 훨씬 더 이른 시기에 시작되었으며, 심지어는 일찍이 13세기에 북부 이탈리아 도시 파도바에서도 나타났다는 기록이 있다. 비록 그 용어 자체는 복잡하지 않다고 해도, 지난 30\~40년간 이를 둘러싼 의문들은 계속 증폭되어 왔다.
43 이 책에서 만나는 지식인 대부분이 문화적 이상을 찾기 위해 먼 과거, 즉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대를 바라본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 모두는 많은 측면에서 근본적으로 자기 시대의 사회적·물질적 조건과 연관되어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주위에 보이는 문화, 스스로 몸담은 문화와 구별 짓고자 했던 중세인이었다. 어떤 시점에서든 시작은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는 14세기에서 시작하려고 한다. 지적인 삶에 관한 한, 르네상스를 전개하도록 한 발전들이 많은 측면에서 14세기에 일어났기 때문이다.
45 속어(어린이가 집에서 배우는 모국어)는 원래 불안정한 것으로 보였다. 이탈리아의 경우, 토스카나 방언은 나폴리 방언과 상당히 달랐고, 나폴리 방언은 밀라노 방언과 아주 달랐다는 식으로 지역 차가 컸다. 시기와 지역에 따라 사람들의 "모국어"가 그렇게 변화무쌍하다 보니, 이들 언어는 진지한 글쓰기에 적절치 않은 것으로 생각되었다. 반면에 라틴어는 그렇지 않았다.
77 당신이 시인이 되겠다고 마음먹었는데, 우뚝 솟은 이 유산이 백미러에 비치고 있다고 생각해 보라. 페트라르카가 성년이 되었을 때 처한 상황이 바로 이런 것이었다.
90 단테와의 비교는 제쳐두고라도 페트라르카가 성취한 것은 더 있었다. 결국 이러한 성취와 함께 그는 역사를 다른 새로운 관점으로 보게 되었다. 현대인에게는 놀랍게 들리겠지만, 그 모든 것은 학문 덕분에 날개를 달았다. 이 학문이라는 것은 두 가지로 바라볼 수 있을 텐데, 즉 그것은 사회 환경의 소산이자 개인적 능력의 결과라는 것이다.
104 페트라르카는 키케로의 연설 『아르키아스 변론』(Pro Archia)을 발견한 후(1333년 리에주에서)─이 작품은 키케로가 아르키아스를 변호한 것으로, 이는 정확히 그가 시인이라는 이유에서였다─누군가가 이 연설문의 사본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그것은 의미심장한 순간이었다. 키케로는 시인 아르키아스를 변호하는 중, 청중에게 시가 중요한 기능을 한다면서 그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즉 "인간성에 관련된 모든 기예에는 어떤 공통적 연관이 있는데, 시는 마치 그 기예들을 서로 함께 묶어 놓은 것과 같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연설 약간 뒤로 가면 키케로가 자신이 법정에서 통상 하는 관습과는 다른 방식으로 말하는 데 대해 변명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여기서 그는 "인문학"에 해당하는 "스투디아 후마니타티스 아크 리테라룸studia humanitatis ac litterarum"이란 표현을 사용하면서 "인문학 연구에 관해 좀 더 자유롭게 말하겠다"고 한다.
109 페트라르카가 세상을 떠날 때쯤에는 유럽 곳곳에 그의 추종자들이 있었다. 그가 쓴 이탈리아어 시는 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렸고, 그의 학문적 성격─고대인이라면 당연히 지니고 있었다고 생각한 덕에 초점을 맞춘 라틴어 작품과 깊은 그리스도교 신앙─은 수많은 지식인의 이상이 되었다. 그는 또한 후일 피렌체의 "트레 코로네Tre Corone", 즉 "삼관"으로 알려지게 되는 세 작가 중 하나인 핵심적 인물이기도 했는데, 다른 두 명은 단테와 보카초였다. 달리 말해 15세기 말에는 단테, 페트라르카, 보카초가 피렌체의 문화적 자긍심의 원천이 되었다. 이러한 기억이 언제나 그렇듯이, 이는 새로운 문화적 작업을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도 하지만 동시에 그것이 지닌 많은 측면을 생략해 버리는 그런 유의 "문화적 기억"이었다.
111 살루타티의 삶과 저작을 훑어보기 전에, 휴머니스트 운동 그 자체와 함께 피렌체를 새로운 지적 활동에 최적의 장소로 만든 다양한 조건을 먼저 생각해 보는 것이 좋겠다.
113 왜 피렌체인가? 세 가지 이유를 생각할 수 있다. 첫째는 다름 아닌 부와 관련이 있다. 재정적 자원이 부족하면 문화도 지탱될 수 없다. 피렌체라는 도시는 매우 부유했다. 돈을 벌어들인 것은 주로 은행가와 직물 상인이었는데, 그들은 적어도 두 세기 동안 이 두 직종에서 매우 활기차게 일했다. 두 번째 이유는 첫 번째와 연결되어 있다. 은행가와 상인은 여행을 한다. 예컨대, 메디치 상사는 당연히 이탈리아의 다른 도시에도 여러 지점이 있었지만, 마침내 브뤼헤, 제네바, 런던(이탈리아 도시가 아닌 세 군데만 들자면)에도 지점을 세웠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모든 것을 고려할 때 피렌체에는 여행에 능하고 어떤 코스모폴리탄적 세계관을 가진 지도적 계급이 있었다는 것이다.
114 가장 유용한 지식을 보존하는 데 생산적이고 효과적인 중심지가 대학이었고 지금도 그렇기는 하지만, 새로운 형태의 지식을 창조해야 할 때는 그것이 항상 "얼리어댑터early adopters"가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휴머니즘은 새로운 것이었다. 휴머니스트 운동을 단지 그것이
116 살루타티를 비롯해 이러한 방식의 편지를 쓰는 사람들은 예외 없이 공증인 교육을 받았는데, 이 직업 범주는 아주 중요하기 때문에 그 함의를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공증인은 중세 성기와 르네상스에 북부와 중부 이탈리아 도시국가의 정치적·문화적 삶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19 살루타티는 무엇보다도 공적인 인물로, 일하는 시간 대부분을 통치 업무 및 피렌체 외교와 유럽에서 가장 부유하고 바쁜 한 도시에서 시민으로서의 짐과 즐거움을 함께 누리는 데 할애했다. 물론, 이는 살루타티가 공공연히 천명한 적은 없지만, 그의 관심사가 세속적인 쪽으로 더 기울어져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그는 페트라르카나 다른 휴머니스트들처럼 고전 세계와 고전 라틴어를 애호했지만, 페트라르카와는 달리 고전과 그리스도교의 융합을 우선하지 않았다.
130 살루타티는 단테의 뛰어난 속어 사용을 강조했다. 많은 휴머니스트의 공식 "노선"은 항상 같았겠지만(고전적 라틴어가 최상이며, 다른 것은 모두 야만적이라는 것), 사실 15세기 동안 속어 취향은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휴머니스트들─그들 중에는 살루타티의 젊은 학생들도 있었는데─은 때때로 자신들이 쓴 라틴어 작품을 이탈리아어로 번역했다. 그 이유는 15세기에 오늘날 우리가 "속어 고전주의"라 부를 만한 현상이 증대했기 때문이다.
133 페트라르카는 자신의 연구를 모두 내부 지향적으로 바꿈으로써, 즉 자신이 읽은 것을 스스로 그리스도교 신앙에 맞추는 데 이용하고, 그리하여 크게는 휴머니스트 운동을 그리스도교의 테두리 안에 잡아 둠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했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을 지속하기는 어려웠다.
221 알베르티는 새로운 세대에 속했다. 1404년에 태어난 그는, 라포의 짤막한 개요가 보여주듯이, 1430년대에 이르러 현란하고 새로운 재능을 가진 인물로 나타나게 된다. 또한 알베르티는 또 한 명의 "국외자"를 대변하고 있었다. 그의 경우, 이는 문학적 경향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었다.
283 둘 사이의 갈등은 일련의 격렬한 논쟁으로 폭발했다. 발라는 포초의 서간집에 대해 자신이 볼 때 적절한 라틴어가 아니라고 비판했다. 포초는 발라를 공격하는 "연설"을 써서 발라의 작품들을 비판했다.
470 풀치의 「모르간테」(Morgante)는 우리가 "반서사시"라고도 부를 만한 것, 즉 서사시 전통의 일부를 반영하면서도 그것을 중세 로망스의 등장인물 및 플롯 장치와 뒤섞고 거기다가 진짜로 독특한 어떤 것을 보여 주는 저속한 풍자─그중 많은 부분은 15세기 피렌체의 거리에서 회자하던 야한 구비 시가에서 끌어온 것이다─를 듬뿍 가미한 시였다.
470 외면상 피치노와 풀치 두 사람은 당시 존재하던 몇몇 문화적 경향 가운데 두 가지를 대변하고 있었다. 그 하나는 엄격하고 학문적 연구와 플라톤적 지혜를 지향하며, 사적인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매우 속어적이고, 저속하며, 우스꽝스럽고, 아주 대중적이었다.
478 로렌초 자신부터가 속어 시인으로서 피렌체 문화의 속어 문학에서 스스로 역할을 담당했으며, 르네상스의 가장 상징적인 시적 노래 가운데 하나인 "바코(바쿠스)의 노래"를 남겼다. 이는 카니발─모든 전통적 관습이 온통 뒤죽박죽되는 전 사순절 기간으로, 곧 이어지는 참회의 40일간을 준비하는 축제─을 배경으로 한 합창곡이다.
480 로렌초가 쓴 서문의 어조는 자신에 차 있으며, 피렌체 속어에 대한 평가가 그의 시대에 이르러 새로운 성숙기에 도달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이를 명백히 이론화하는 데는 또 다른 세대가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로렌초의 시대에는 고대 라틴어가 한때 토착 언어였으나 이제는 더 이상 살아 있는 언어가 아니라는 것, 토스카나어는 고급한 문화적 의미를 담은 문학에도 사용할 수 있고 또 사용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토스카나어의 잠재력을 최대한 인식하게 하는 적절한 방법은 무엇이 라틴어를 그토록 성공하게 했는지─포초와 알베르티가 각각 나름의 방식으로 결정적 기여를 한─이해하는 것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480 로렌초 시대의 피렌체 문화에는 많은 구성 요소가 있었다고 말하는 학자도 있다. 그 한 요소가 피렌체 대학이었다. 중세에 대학으로 유명한 유럽 도시(우선 볼로냐, 나폴리, 파리, 옥스퍼드가 머리에 떠오를 것이다)에 간다면 각 도시에서 대학의 풍부한 유산인 "대학 구역"을 만나게 된다. 피렌체에 간다면 "비아 델로 스투디오via dello Studio", 즉 "대학로"를 만날 것이다. 이는 작고 별로 인상적이지도 않은 거리였는데, 이런 협소함은 전통적으로 피렌체에서 대학이 지니고 있던 위치를 말해 준다. 이처럼 상대적으로 대학의 위상이 빈약했다는 사실은 피렌체에서 르네상스 휴머니즘을 받아들인 시기가 콜루초 살루타티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이유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 즉 피렌체의 지적·문화적 엘리트는 당당하고 생래적으로 보수적인 지적 전통(종종 대학에서 볼 수 있었던 것 같은)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 전통이 있던 곳에 비해 오히려 새로운 문화적 가능성을 포용하기가 더 쉬웠다는 것이다.
490 이탈리아반도를 관통하는 정치 "스타일"(더 나은 말이 없어서 씀) 역시 변하고 있었다. 이전까지 이탈리아에서 군사 지도자는 언제나 "콘도티에레condottiere"─도시가 전쟁을 위해 고용한 군사 전문가─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종종 그들이 고용한 사람들의 목표를 이루는 만큼이나 통치도 잘 수행할 수 있었다. 어쨌든 콘도티에레는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고, 그래서 무력을 효과적으로 독점했기 때문이다.
490 로렌초가 성년이 될 즈음, 피렌체에서 감지되는 두려움은 메디치가가 바로 그런 방향으로 갈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506 보통 피코로 알려진 미란돌라 백작 조반니 피코(1463\~94)는 북부 이탈리아 모데나 인근의 작은 독립 도시 미란돌라를 통치하는 귀족 가문의 자손이었다. 진짜 영재였던 그는 10세 때에 이미 그리스어와 라틴어에 대해 광범위한 경험을 쌓았다. 그는 13세가 되자 이탈리아에서 선도적인 법학 학교인 볼로냐 대학으로 갔다. 앞서 많은 휴머니스트가 그랬듯이, 부모의 구속이 느슨해지자(이 경우는 어머니의 죽음 때문에) 그는 법학을 떠나 자유로이 휴머니즘의 주제에 매진했는데, 많은 재산 덕분에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었다. 철학에 열정을 가진 그는 다시금 페라라 대학으로 갔다. 그는 공부 범위를 넓히고 싶은 욕심으로 1470년대에 잠깐 피렌체에 머물렀는데, 여기서 피렌체의 많은 지식인 중 특히 폴리치아노를 만나게 된다.
그 후 피코는 스콜라 철학의 온상인 파도바 대학에서 공부했다. 그는 또한 관례적인 라틴어와 그리스어 문헌에서 히브리어와 아랍어를 비롯한 다른 언어로 쓰인 문헌으로 범위를 확대하기 시작했다.
522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피코의 생애에서 미간행으로 남아 있던 작품이 그를 가장 유명하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피코는 이 작품에 단지 『연설』(Oratio)이라는 이름을 붙였을 뿐이지만, 오늘날 이는 『인간 존엄성에 대한 연설』로 알려져 있다.
526 피코는 이 시기에 몇몇 중요한 작품을 썼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이 『존재자와 일자』(De ente et uno)이다. 이 작품이 다루는 문제─"일자"가 "존재자"보다 상위에 있는가─는 오늘날에 볼 때 생각보다 별로 중요하지 않게 보인다. 하지만 피코와 그의 지지자들에게 그것은 신의 본성은 물론, 이차적으로는 우주의 구조에 대한 견해들을 성찰하는 중요한 관심사였다. 피코의 『존재자와 일자』는 본질적으로 외견상 조화롭지 못한 여러 철학적 입장─특히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서로 조화시키려는 시도를 보여 준다.
536 피코가 작품에서 "모범과 역사와 우화와 시인들의 증언을 사용하고 있다"는 첫 번째 비난을 보자. "모범"에 대해 바르바로의 철학자가 쓴 말은 "엑셈플라exempla"("모범")이다. 이 용어와 그 연계어가 오늘날에는 상대적으로 익숙지 않겠지만, "모범"이란 말의 사용은 고대 세계에서부터 르네상스를 훨씬 지난 시기에 이르기까지 삶의 과정과 그것을 향상시키는 방법에 대해 사유하는 핵심적 방식을 나타내고 있다.
537 모범, 역사. 문제는 이러했다. 이러한 것이 철학의 일부인가? 파도바 대학에 있던 바르바로의 동료에게 그 대답은 단호히 "아니"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피코를 비롯해 그와 같은 많은 사람에게 이에 대한 대답은 훨씬 더 복잡했다. 제한적이고 기술적인 어떤 의미에서는 "철학"이란 전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를 가르치는 대학 교수들이 구축하는 분야였다. 그러나 사상가 대부분에게 그것은 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게 하는 광범위한 노력이었다.
546 하지만 그 자신의 탁월성과 함께, 자신과(그리고 그의 시대와) 스타티우스의 세계 간에 그가 느끼는 유사한 측면에 대한 폴리치아노의 감정은 설명을 요한다. 퀸틸리아누스와 마찬가지로 스타티우스 역시 학자들이 전통적으로 라틴 문학의 은銀시대라고 부르는 시기에 작품을 썼다. 황금시대는 1세기에 이미 고전이 된 더 이전의 작가들에 속했다. 키케로와 베르길리우스가 이 시대의 전면에 서 있었다.
570 폴리치아노가 반反철학적인 장광설을 펼치고 있지는 않은가 의심이 들 무렵,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철학이란 아무 필요도 없거나 이익이 되지도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그러나 철학적으로 살 필요가 없다는 것은 영혼의 덕에 따라 살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영혼의 도움으로 살고 영혼의 덕으로 잘 삽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눈을 통해 보고 눈의 덕으로 잘 봅니다. 그러므로 잘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은 철학적으로 살지 않아도 될 것이고, 저열하게 살고 싶은 사람은 철학을 따르지 않아도 됩니다.
590 휴머니스트 대부분이 중세 말 대학과 상당히 관련되어 있다는 점은 역설적이다. 그들 거의 모두가 대학에서 공부했고, 폴리치아노를 비롯한 많은 휴머니스트 역시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쳤다.
590 다른 한편으로 이런 외부자 입장을 지닌 사람은 그들이 과거의 휴머니스트든 혹은 고등 교육의 상대적 보수성과 관료 조직에 혁신을 맡기는 것을 비판하는 당대인이든, 많은 것을 놓치게 된다. 그들은 학생들에게 유익한 과목을 훈련하는 방식을 놓친다. 그들은 배우고 가르치는 많은 과목이 전통을 통해 긴 안목에서 계발되어야 한다는 긍정적 측면을 놓친다. 대학을 다니는 학생 대부분은 지금도 그렇지만 르네상스에도 전문학자나 전위적 지식인이 되고자 하지는 않았다. 대학 교육은 학생들에게 기술과 배경과 사회자본을 부여하며, 이 모든 것 덕분에 그들은 사회에서 어떤 기능을 담당할 수 있는 것이다.
607 라틴어는 많은 공적 용도로 사용되었다. 예컨대, 당신이 유럽에서 가장 국제적인 장소 가운데 하나인 교황궁에 있다고 한다면, 장례 연설을 하거나 혹은 궁을 방문한 사절단에 대한 환영 연설을 할 수도 있다.
610 이는 결국 이탈리아 지식인들이 토스카나어를 문학적 이탈리아어의 기초로 널리 받아들임으로써 그 정점에 이르렀다. 이런 입장을 굳히는 데 크게 기여한 인물은 베네치아 출신─이탈리아의 강한 지역주의를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지만─피에트로 벰보(1470\~1547)이다.
640 우리가 이탈리아 장기 15세기와, 때로는 감추어져 있는 지적인 삶에 대한 그것의 기여를 완전히 이해하게 된다면, 얼마나 더 많은 근대 초 사상가들을 조금은 더 잘, 조금은 더 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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