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송: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
- 책 밑줄긋기/책 2012-22
- 2012. 5. 16.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 - 김진송 지음/현실문화 |
1. 책을 위한 변명
2. 우리에게 현대란 무엇인가
3. 현대를 바라보는 눈
4. 물질과 과학의 시대
5. 지식인, 룸펜과 데카당
6. 유행과 대중문화의 형성
7. 신식 여성의 등장
8. 도시의 꿈과 도시의 삶
9. 현대적 인간의 탄생
13 현대가 시작될 무렵의 상황을 상상하기 위해 간단하지만 널리 알려진 두 개념축을 마련할 수 있다. 그 하나는 '나(주체)'와 '나에게 다가오는 다른 것(타자)'이며, 다른 하나는 '새로운 좋은 것(현대, 서구)'과 낡은 나쁜 것(봉건, 전통)'이라는 개념이다. 그 두가지 각기 다른 줄기는 서로 교차하면서 여러가지의 가능한 패러다임을 형성한다. 예를 들면 '낡은 나'와 새로운 남'을 가정하면 이에 대응하는 '나쁜 나'와 '좋은 남'이라는 등식이 성립하며, 이런 공식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듯이 필연적인 정체성의 혼란을 가져온다.
현대로 막 진입하려는 언저리에서, 현대는 막연히 '억압과 야만의 미몽'에서 벗어나려는 조짐들로 나타났다. 그것은 불안하고 어수선한 세상에 다가온 '강력하고 위협적인 타자'에 대처하기 위한 스스로의 대응방법으로서 그리고 '낡은 주체'와 결별하기 위한 몸부림이었지만, 위협적인 타자의 음헙한 본성을 미처 파악하기도 전에, 그리고 낡은 주체에 정면으로 대응하기 위한 새로운 주체들을 기다릴 틈도 없이, '개화'와 '개량'과 '계몽'이란 패러다임에 보다 강력한 힘을 싫어야 할 무엇으로 변해갔다. 그 순간 우리는 서구의 현대가 개입되는 수간을 맞이하게 된다. 외형상 서구 계몽주의의 주요한 관념들, 이를테면 인간의 이성과 자연에 대한 과학적 지배, 물질적인 진보와 과학적 발전에 의한 사회의 번영과 같은 현대적 발상들이 순식간에 우리의 새로운 논리로 차용되었지만 그것은 전통 혹은 봉건과 여기에 묻어있던 주체와의 필연적인 갈등을 야기할 수 밖에 없었다.
43 현대가 눈앞에 다가왔을 때. 현대를 향한 태도는 점차 도시화, 산업화의 그늘 속에서 거추장스럽게 달라붙는 문명의 이기에 비롯된 당혹스러움이거나 물질에 대한 즐김 혹은 그것으로부터 소회되어 있는 불편과 불합리에서 오는 열등감이기 쉬웠다. 당연히 삶의 태도를 결정짓는 새로운 현상들에 대해서 이를 상징하는 물질과 현상을 곧바로 지칭하는 말들이 수없이 떠돌았다. 룸편, 인텔리겐차, 뿌르조아, 스피드, 빠, 딴스 등등 수많은 언어들은 낯선 모습으로 다가왔지만 곧 익숙한 일상으로 자리잡았다. 이렇듯 '모던' 이라는 말은 일본에서와 마찬가지로 '시대의 첨단'을 의하는 것으로 현대의 일상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한 말이었지만 그러나 아직 낯설다는 의미에서 유행으로 치부되는 현상을 가리키는 말로만 쓰였다.
44 따라서 이 시기에 사용했던 '모던' 이라는 말은 분명 당시에 쓰였던 유행어 이상의 1930년대의 도시문화적 현상을 지칭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즉, 과거에 '개조'와 '문화'가 지식인 사회를 지배했던 현대화의 계몽적 패러다임으로 작용했던 반면, '모던' 이라는 용어는 사회의 일면에서 반영된 현대화의 현상 그 자체를 지시하는 것이서따. 그것은 거꾸로 1930년대가 '서구화'와 '모던'이 등가를 이루며 일상까지 깊이 침투하던 때라는 것을 알려준다. 이는 1910년대와 20년대를 거쳐 이른바 현대주의가 일상화되는 현상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계몽적 프로젝트로서 부르짖었던 현대성은 식민현실에서 좌절되었지만 삶과 의식속에서 진행되어온 현대의 과정은 모던을 하나의 조류로서 유행처럼 등장시킨 것이다. 그것은 한편으로 일제 식민지에 대한 거부감과 함께 일본 것을 능가하는 서구 것에 대한 막연한 추종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116 현대문화의 논리속에는 늘 이율배반적인 두 측면이 동시에 존재하게 되었다. 즉, 현대를 추구하는 신지식인들에게는 그것이 민족적 실력양성론이었든지 친일적 실력양성론이었든지 교육과 계몽을 통한 민족적 힘의 고양이라는 민족주의자로서의 지식인적 자부심이 있었지만, 한편으로 식민지화를 합리화시키는 사회진화론에 근거하여 제국주의를 받아들이고 서구문화를 수용하지 않으면 안되는 민족적 열등감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지식인의 가치관뿐 아니라 삶의 태로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221 1920년대 기생들이 돌출적인 행동과 발언을 통해서 낡은 사회적 의식을 뚫고 지나갔다면 1930년대부터는 보다 대중적이고 보편적인 문화현상에 대한 주목과 이에 대한 대응이 사회적으로 두드러졌다. 그 중 하나로 우리는 1937년 삼천리호에 실린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는 제목의 탄원서 형식의 글을 주목할 수 있다. 댄스홀을 허가해 달라는 저의가 어디에 있었던 간에 그 제도적 자유를 향한 논거가 서구의 현대화된 사회 혹은 이에 추종하는 일본의 현대화된 사회의 피상적 현상에 기대고 있다는 사실은 식민지적 현대화의 현실이었다. 따라서 어쩌면 이 글보다 식민지 조선의 현대화 과정을 적확하게 표상하고 있는 것은 없을 것이다. 1930년대의 모던을 말한다면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모더니티의 형성이라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이 글은 일상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이 맞출려 있는 현대화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과정에 중대한 몇가지 시사를 던쳐주고 있다. 첫째는 기생과 다방 마당 등을 포함한 새로운 인간군들이 지녔던 첨예한 현대적 의식과 행동을 알 수 있으며, 둘째는 현대화를 향한 투쟁의 대상이 봉건왕족이나 보수적 권력이 아닌 식민통치였다는 비참한 현실을 읽을 수 있으며, 세쟤는 현대화의 준거가 분명히 서구(혹은 일본)에 있었다는 점이다.
295 서구적인 삶의 양식이 조선사회에 틈입되자 성과 육체에 대한 상이한 패러다임의 충돌은 예상할 수 있는 것이었다. 192,30년대 전통적인 육체관과 서구적인 육체관이 팽팽한 균형을 이루며 서로 대척되었을 때, 당시는 당현하게 이런 상황을 '과도기'라고 불렀다. '과도기적 조선 현실의 혼란한 성적 난무'라는 표현은 당시의 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표현이며, 그것은 아마 1990년대까지도 가장 많이 보아야 할 상투적인 문구일 것이다.
308 1920년대 말 서울거리에는 갑자기 낯선 인간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양복에 양장을 하고 여자는 단발을 하였으며 반짝이는 백구두나 뾰족구두를 신고 다니는 이들을 길가는 사람들은 '모던 뽀이', '모던 껄'이라고 불렀다. 현대가 일상을 재조직하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새롭게 인식하기 시작한다. 삶의 조건과 질의 변화에 걸맞는 자신의 모습은 기존의 인습과 습과 그리고 태도의 변화를 요구하지만 그것은 용기의 결여, 때로 천박스러울 정도로 과감한 시도를 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혼란을 겪는다. 현대적 인간의 전형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지만 그것은 형성해가야 할 중요한 정체성 찾기 중의 하나임에 틀림없었다.
309 모던 보이와 보던 걸의 모습을 바라보는 시각은 표면적으로 매우 비판적이었다 그러나 그 비판의 행간을 살펴보면 그들의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아름다운에 대해 숨길 수 없는 찬탄의 분위기를 읽어낼 수 있다.
311 유행으로 몰고온 모던 바람은 모던 보이와 모던 걸로 하여금 시대의 첨단에 서도록 했지만 단순히 거리의 패션을 뒤바꾼 것만은 아니었다. 모던 걸과 모던 보이의 등장은 퇴폐적인 문화로 불리는 감각적인 요소를 일상 속에 틈입시켰다. 이른바 '에로, 그로'의 유행이다. 이들의 감수성과 특질을 성적이고 괴기하다는 의미에서 에로티시즘과 그로테스크를 줄여 만든 이 말에는 가장 민감하게 변화하는 현대적 생활의 지침이 함축되어 있다. 그것은 바로 육체에 대한 발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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