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 카뮈: 시지프 신화


시지프 신화 - 10점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책세상

1. 부조리의 추론

2. 부조리한 인간

3. 부조리한 창조

4. 시지프 신화

5. 해설

6. 카뮈 연보





15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의 근본문제에 답하는 것이다. 그밖에, 세계가 3차원으로 되어 있는가 어떤가, 이성의 범주가 아홉 가지인가 열두 가지인가 하는 문제는 그 다음의 일이다.


17 지금까지 자살은 오로지 하나의 사회적 현상으로만 취급되어 왔다. 그와는 달리, 여기서 우리는 먼저 개인이 품은 생각과 자살 사이의 관계를 문제삼고자 한다. 자살이라는 행위는 마치 위대한 작품이 만들어질 때처럼 마음속이 고요해진 가운데 준비되는 것이다.


17 벌레는 이미 사람의 마음속에 박혀 있다. 바로 거기서 벌레를 찾아야 하는 것이다. 삶이 무엇인지를 또렷하게 직시한 나머지 결국은 광명의 세계 밖으로 도피해버리게 되는 죽음의 유희, 바로 이것을 추적하여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18 물론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행위를 그만두지 않고 계속하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다. 그 중 첫째 가는 이유가 습관이다. 고의적으로 죽음을 택한다는 것은 이와 같은 습관의 가소로운 면, 살아야 할 심각한 이유의 결여, 법석을 떨어가며 살아가는 일상의 어처구니없는 성격, 그리고 고통의 무용성을 본능적으로나마 인정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19 이 시론의 주제는, 바로 이러한 부조리와 자살 사이의 관계를 밝히고 자신이 어느 만큼이나 부조리에 대한 해결이 될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해보려는 데 있다. 속임수를 쓰지 않는 사람이라면 자기가 진실이라고 믿는 바를 행동으로 실천해야 옳다는 것을 우리는 하나의 원칙으로 세워볼 수 있다. 따라서 삶의 부조리를 믿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그의 행동은 그 믿음에 따라야 한다.


22 모든 것을 걷어버리고 진정한 문제의 핵심으로 곧바로 나아가야 한다. 인생이 살 만한 보람이 없기 때문에 자살한다는 것, 그것은 필경 하나의 진리다. 그러나 너무나 자명한 이치이기에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진리다. 삶에 대한 이런 모욕, 삶을 수렁에 빠뜨리는 이런 부정은 과연 삶의 무의미에서 유래하는 것일까? 삶의 부조리는 과연 희망이라든지 자살 같은 길을 통해서 삶으로부터 벗어나기를 요구하는 것일까? 이것이야말로 모든 군더더기를 치워버리고서 밝히고 추적하고 해명해야 할 문제인 것이다. 


29 왜냐하면 모든 것은 의식에 의하여 시작되며, 의식에 의한 것이 아니면 그 무엇도 가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지적은 전혀 독창적일 것이 없다. 그렇지만 자명한 것이다. 부조리의 기원을 간략하게 인식해볼 수 있는 기회로서 당분간은 이것으로 충분하다.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리건대, 단순한 '관심'이 모든 것의 기원인 것이다.


30 우리는 갑자기 우리를 그토록 고독하게 만드는 것을 원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직 그때는 오지 않았다. 단 하나의 사실만 말해두자. 즉 세계의 두꺼움과 낯설음, 이것이 바로 부조리다.


53 문제는 어떻게 그 부조리에서 헤어날 수 있는가, 과연 부조리는 자살로 귀결되어야만 하는가를 알아보는 데 있다. 나의 탐구의 최초의 조건, 그리고 사실상 유일의 조건은 나를 밟아 뭉갤 듯이 짓누르고 있는 것 자체를 없애버리지 않고 보존하는 일, 따라서 그것 가운데 근본적으로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것을 회피하지 말고 존중하는 일이나. 나는 그것을 끊임없는 상호 대조와 휴식을 모르는 투쟁이라고 방금 정의한 바 있다.


80 이 세계와 나의 정신 사이의 갈등과 마찰의 근본을 이루는 것은 바로 그에 대한 나의 의식 자체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므로 만약 내가 그것을 견지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항상 새로워지고 항상 긴장을 유지하는 항구적인 의식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지금 당장 내가 인식해두어야 할 것은 바로 이 점이다.


83 인생이 과연 살 만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는지 어떤지가 문제였었다. 그만큼 더 훌륭히 살아 갈 수 있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어떤 경험, 어떤 운명을 산다는 것은 그것을 남김없이 다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83 반항은 한 순간 한 순간마다 세계를 재고할 대상으로 문제 삼는다. 위험이 인간에게 반항해야 할 유일무이한 기회를 제공하듯이, 형이상학적 반항은 경험 전반에 의식을 펼쳐놓는다. 반항은 인간이 자신에게 끊임없이 현존함을 뜻한다.


88 그러나 이와 동시에 부조리의 인간은 자신이 지금까지 자유롭다는 가정에 얽매인 채 그 환상을 먹으면서 살아왔다는 것을 깨닫는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이 그에게는 속박이었던 것이다. 자기 인생에 어떤 목표를 상정함으로써 그는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의 요청에 순응했고 그리하여 스스로 자유의 노예가 되었다. 


89 보다 분명하게 말하면, 나의 미래에 대하여 희망을 가짐으로써, 나 자신만의 진리가 존재하고 창조하는 방식에 깊은 관심을 기울임으로써, 그리고 끝으로 나의 삶에 질서를 부여하고 그리하여 삶에 의미가 있다는 것을 시인하고 입증함으로써, 나는 스스로에게 온갖 울타리를 만들어놓고 그 속에다가 나의 삶을 가두게 되는 것이다. 나는 내게 오로지 혐오감밖에는 아무것도 주는 것이 없는 저 숱한 정신과 마음의 관료들처럼 행동하고 잇다. 이제야 잘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들이 하는 일이라고는 오직 인간의 자유에만 심각하게 매달리는 것뿐이다.


90 어느 이른 새벽 감옥의 문이 열릴 때 그 문 앞으로 끌려나온 사형수가 맛보는 기막힌 자유로움, 삶의 순수한 불꽃 이외의 모든 것에 대한 엄청난 무관심, 죽음과 부조리야말로 단 하나 온당한 자유의 원리, 즉 인간의 가슴이 경험할 수 있고 체현할 수 있는 자유의 원리임을 우리는 분명히 느낄 수 있다. 


92 만약 내가 삶에 부조리의 모습 외의 다른 모습은 없다는 것을 믿는다면, 만약 이 삶의 균형이 송두리째 나의 의식적인 반항과 삶이 그 안에서 몸부림치는 어둠 사이의 끊임없는 대립에 달려 있다는 것을 실감한다면, 그리고 만약 나의 자유가 한정된 운명과의 관련하에서만 의미가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그때 나는, 중요한 것은 가장 잘 사는 것이 아니라 가장 많이 산다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94 자신의 삶, 반항, 자유를 느낀다는 것, 그것을 최대한 많이 느낀다는 것, 그것이 바로 사는 것이며 최대한 많이 사는 것이다. 


95 부조리와 부조리가 내포하는 덤으로서의 삶은 그러므로 인간의 의지에 달린 것이 아니라 그 의지의 반대인 죽음에 달려있다. 뜻을 잘 헤아리며 해야 할 말이지만, 이건 오로지 운의 문제인 것이다. 운을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 20년간의 삶과 경험이란 결코 그 무엇으로도 대치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96 이리하여 나는 부조리에서 세 가지 귀결을 이끌어낸다. 그것은 바로 나의 반항, 나의 자유, 그리고 나의 열정이다. 오직 의식의 활동만을 통해서 나는 죽음으로서의 초대였던 것을 삶의 법칙으로 바꾸어놓는다. 그래서 나는 자살을 거부한다. 살아가는 나날 동안 줄곧 끊이지 않고 따라다니며 둔탁하게 울리는 이 소리를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오직 하나, 이 소리는 꼭 필요한 것이라는 것뿐이다.


101 "나의 영역은 시간이다."라고 괴테는 말했다. 이것이야말로 부조리한 발언이다. 부조리한 인간이란 실제로 어떤 인간인가? 영원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영원을 위해 전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인간. 그가 영원에 대한 향수를 조금도 느끼지 않아서가 아니다. 그러나 그는 향수보다는 자신의 용기와 이성 쪽을 택한다. 용기는 그에게 구원을 호소하지 않은 채 살아가고 자신이 소유한 것만으로써 자족하는 것을 가르쳐주며, 이성은 그의 한계를 가르쳐준다.


120 부조리의 인간은 희망이 끝나는 곳에서부터, 정신이 남의 연기를 감상하기를 멈추고 그 속으로 직접 들어가려고 하는 곳에서부터 시작된다. 그 모든 삶 속으로 파고 들어가서 삶의 다양함을 골고루 경험하는 것, 이것이 바로 그 삶들을 연기하는 것이다. 


120 그러기에 배우는 무수한 영광, 스스로를 바치고 스스로 체험하는 영광을 선택했다. 모든 것은 언젠가 죽게 마련이라는 사실에서 최선의 결론을 끌어낸 것은 바로 배우다. 배우는 성공하든가 아니면 성공하지 못하든가 할 뿐이다. 작가는 설사 인정을 못 받는다 하더라도 희망을 잃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어떤 존재였는가를 작품이 증언해주리라고 믿는다. 배우는 기껏해야 우리들에게 한 장의 사진을 남겨놓을 뿐, 그의 모습, 동작과 침묵, 짧은 숨결 혹은 사랑의 숨소리는 전혀 우리들에게까지 전달되지 않을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알려지지 않는다는 것은 곧 연기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연기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그가 생명을 부여하여 새로이 살아나게 하고자 했던 그 모든 존재들과 더불어 무수히 죽는다는 것이다.


131 내가 개인을 이토록 소중히 여기는 것은 오로지 개인이란 보잘것없고 비천한 존재로 보이기 때문이다. 승리로 끝날 대의들이란 존재하지 않음을 알기에 나는 패배로 끝날 대의들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다. 그것들은 일시적인 승리건 패배건 상관없이 영혼을 송두리째 다 바칠 것을 요구한다. 이 세계의 운명과의 연대를 느끼는 사람에게는 여러 가지 문명들의 충격은 고통스럽기 짝이 없는 그 무엇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나는 이 고통을 나의 것으로 삼는 동시에 그 안에서 나의 몫을 맡고자 했다. 나는 확실한 것들을 사랑하기에 역사와 영원 두 가지 중에서 역사 쪽을 선택했다. 역사에 대해서라면 적어도 나는 확신할 수 있다. 나를 짓누르고 있는 이 힘의 존재를 어찌 부정할 수 있겠는가.


133 나는 오직 육체로 살 수 있을 뿐이다. 피조물의 세계가 나의 조국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 부조리하고 보람 없는 노력을 선택한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는 투쟁의 편에 선 것이다. 


146 창조한다는 것은 두 번 사는 것이다.


148 예술작품은 그 자체가 부조리의 한 현상이다. 중요한 것은 그 현상을 묘사하는 일이다. 그것이 정신의 병에 어떤 해결책을 제공하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한 인간의 사고 전체에 반향되고 있는 그 병의 한 징후인 것이다.


152 결국, 이런 풍토하에서 위대한 예술가란 무엇보다 먼저 잘 살 줄 아는 사람이다. 물론 여기서 산다는 것은 깊이 생각하는 것 못지 않게 느낀다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따라서 작품은 지성의 드라마를 구체적으로 육화하여 보여준다고 하겠다. 부조리한 작품은 사고가 그것 본래의 특권을 포기하고서 한낱 지성의 자격으로 오직 외관만을 만들어 보이며 존재 이유가 없는 것에 이미지를 부여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만약 세계가 확실 명료한 것이었다면 예술은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183 신들은 시지프(시시포스의 불어명 - 옮긴이 주)에게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끊임없이 굴려 올리는 형벌을 내렸었다. 그런데 이 바위는 그 자체의 무게 때문에 산꼭대기에서 다시 굴러 떨어지곤 했다. 무용하고 희망 없는 노동보다 더 끔찍한 형벌은 없다고 그들이 생각한 것은 일리 있는 일이었다.


185 경련하는 얼굴, 바위에 밀착한 뺨, 진흙에 덮인 돌덩어리를 떠받치는 어깨와 그것을 고여 버티는 한쪽 다리, 돌을 되받아 안은 팔 끝, 흙투성이가 된 두 손 등 온통 인간적인 확신이 보인다. 하늘 없는 공간과 깊이 없는 시간으로나 헤아릴 수 있는 이 기나긴 노력 끝에 목표는 달성된다. 그때 시지프는 돌이 순식간에 저 아래 세계로 굴러 떨어지는 것을 바라본다. 그 아래로부터 정점을 행해 이제 다시 돌을 끌어올려야만 하는 것이다. 그는 또다시 들판을 내려간다.

바로 저 정상에서 되돌아 내려오는 걸음, 잠시 동안의 휴식 때문에 특히 시지프는 나의 관심을 끄는 것이다. 그토록이나 돌덩이에 바싹 닿은 채로 고통스러워하는 얼굴은 이미 그 자체가 돌이다! 나는 이 사람이 무겁지만 한결같은 걸음걸이로, 아무리 해도 끝장을 볼 수 없을 고통을 향하여 다시 걸어 내려오는 것을 본다. 마치 내쉬는 숨과도 같은 이 시간, 또한 불행처럼 어김없이 되찾아오는 이 시간은 곧 의식의 시간이다. 그가 산꼭대기를 떠나 제신의 소굴을 향하여 조금씩 더 깊숙이 내려가는 시지프는 자신의 운명보다 더 우월하다. 그는 그의 바위보다 더 강하다.

이 신화가 비극적인 것은 주인공의 의식이 깨어 있기 때문이다. 만약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성공의 희망이 그를 떠받쳐준다면 무엇 때문에 그가 고통스러워하겠는가? 오늘날의 노동자는 그 생애의 그날 그날을 똑같은 일에 종사하며 산다. 그 운명도 시지프에 못지않게 부조리하다. 그러나 운명은 오직 의식이 깨어 있는 드문 순간들에 있어야만 비극적이다. 신들 중에서도 프롤레타리아요 무력하고도 반항적인 시지프는 그의 비참한 조건의 전모를 알고 있다. 그가 산에서 내려올 때 생각하는 것은 바로 이 조건이다. 아마도 그에게 고뇌를 안겨주는 통찰이 동시에 그의 승리를 완성시킬 것이다. 멸시로 응수하여 극복되지 않는 운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188 개인적인 운명은 있어도 초월적인 운명이란 없다. 혹 있다면 오직 숙명적이기에 경멸해야 할 것으로 판단되는 단 한 가지 운명이 있을 뿐이다. 그 외의 것에 관한 한, 인간은 스스로 자신이 살아가는 날들의 주인이라는 것을 안다. 인간의 그의 생활로 되돌아가는 이 미묘한 순간에 시지프는 자기의 바위를 향하여 돌아가면서 서로 아무런 연관도 없는 이 행위들의 연속을 응시한다. 이 행위들의 연속은 곧 자신에 의해 창조되고 자신의 기억의 시선 속에서 통일되고 머지않아 죽음에 의해 봉인될 그의 운명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적인 모든 것은 완전히 인간적인 근원을 가지고 있음을 확신하면서, 보고자 원하되 밤은 끝이 없다는 것을 아는 장님인 시지프는 지금도 여전히 걸어가고 있다. 바위는 또 다시 굴러떨어진다.

이제 나는 시지프를 산기슭에 남겨둔다! 우리는 항상 그의 짐의 무게를 다시 발견한다. 그러나 시지프는 신들을 부정하며 바위를 들어올리는 한 차원 높은 성실성을 가르친다. 그 역시 만사가 다 잘되었다고 판단한다. 이제부터는 주인이 따로 없는 이 우주가 그에게는 불모의 것으로도, 하찮은 것으로도 보이지 않는다. 그에게서는 이 돌의 부스러기 하나하나, 어둠 가득한 이 산의 광물적 광채 하나 하나가 그것만으로도 하나의 세계를 형성한다. 산정을 향한 투쟁 그 자체가 인간의 마음을 가득 채우기에 충분하다. 행복한 시지프를 마음 속에 그려보지 않으면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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