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인홀드 니버: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 책 밑줄긋기/책 2012-22
- 2013. 4. 22.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 라인홀드 니버 지음, 이한우 옮김/문예출판사 |
1. 인간과 사회:함께 살아가는 법
2. 사회생활을 위한 개인의 합리적 원천들
3. 사회생활을 위한 개인의 종교적 원천들
4. 여러 민족의 도덕성
5. 특권계급의 윤리적 태도
6. 프롤레타리아계급의 윤리적 태도
7. 혁명을 통한 정의
8. 정치적 힘에 의한 정의
9. 정치에서 도덕적 제 가치의 보존
10. 개인의 도덕과 사회의 도덕 사이의 갈등
서론
9 여기에서 다루게 될 주제는 다음과 같다. 첫째, 개인의 도덕적-사회적 행위는 사회집단 - 민족 집단이건 인종 집단이건 경제 집단이건 간에 - 의 도덕적-사회적 행위와 엄격하게 구별되어야 한다. 둘째, 이 구별은 순전히 개인적인 윤리로는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정치 영역들을 정당화시켜준다.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라는 제목은 조야하게나마 의도적인 구별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 구별은 앞으로 다루게 될 문제에 대한 훌륭한 지침을 제공해 준다.
10 모든 인간의 집단은 개인과 비교할 때 충동을 올바르게 인도하고 때에 따라 억제할 수 있는 이성과 자기 극복 능력,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욕구를 수용하는 능력이 훨씬 결여되어 있다. 게다가 집단을 구성하는 개인들이 개인적 관계에서 보여주는 것에 비해 훨씬 심한 이기주의가 모든 집단에서 나타난다.
집단의 도덕이 이처럼 개인의 도덕에 비해 열등한 이유는, 부분적으로는 자연적 충동들 - 사회는 이 자연적 충동들에 의해 응집력을 갖는다 - 에 버금갈 만한 합리적인 사회 세력을 형성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며, 이는 오직 개인들의 이기적인 충동으로 이루어진 집단이기주의(group egoism)의 표출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개인들의 이기적 충동은 개별적으로 나타날 때보다는 하나의 공통된 충동으로 결합되어 나타날 때 더욱 생생하게, 그리고 더욱 누적되어 표출되기 때문이다.
13 인간의 이성은 항상 어느 정도는 사회적 상황 내에서 이해관계의 노예이기 때문에, 사회 불의는 교육가와 사회과학자들이 일반적으로 믿고 있는 바와 같이 도덕적이고 합리적인 권고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다. 갈등은 불가피하다. 이러한 엄연한 사실을 대부분의 교육가들은 간과하고 있으며, 사회과학자들조차도 마지못해 인정할 뿐이다.
20 종교적이건 합리주의적이건 모든 도덕가들에 결여되어 있는 것은 인간의 집단 행동의 야수적 성격과 모든 집단적 관계들에서 이기심과 집단적 이기주의의 힘에 대한 이해이다. 그들이 필연적으로 비현실적이고 혼란된 정치 사상에 빠지게 되는 이유는 모든 도덕적인 사회 목표들에 대해서 집단의 이기주의가 얼마나 완강하게 저항하는지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1. 인간과 사회: 함께 살아가는 법
26 인간 사회는 인간 생활의 시작보다 역사에 더 깊게 뿌리를 두고 있지만, 인간들은 집단적 생활의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서 별다른 진전을 보지 못하였다. 매 세기마다 새로운 복잡한 문제들을 낳고, 또 새로운 세대마다 새로운 고통에 직면한다. 지금까지 겪어온 모든 세기 동안 사람들은 악에 물들지 않거나 서로 '이전투구'하는 일 없이 잘 어울려 사는 법을 익히지 못했다.
27 인간에게 해를 끼쳐온 자연의 독니를 뽑아버린 과학기술은 사회적 강제력을 크게 강화시킨 사회를, 그리고 힘의 불균등한 분배로 말미암아 정의의 실현이 더욱 어려운 사회를 새로이 만들어냈다. 자연의 부적합성을 제거하는 도구가 인간의 부접합성을 증가시키는 수단이 된다는 사실은 아마도 자연과 인간 사회 양자의 부적합성에 근원을 둔 병폐에서 오는 인간의 불행한 운명인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적어도 지금까지는 인간의 운명이었다. 인간의 역사에 내재된 불길한 경향이 완전한 비극으로 끝나야만 비로소 인간의 정신은 점점 더 견디기 어려운 사회적 불의의 질곡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모른다.
43 사회는 사회 생활에서의 강제적 요인들(이는 인간의 지성과 상상력의 한계들 때문에 불가피하다)의 평화를 이룩하는 과정에서 불의를 만들어낸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한 사회 집단 내에서 불안정한 평화를 유지시키는 데 기여하는 요인들이 동시에 집단들 상호간의 갈등을 격화시키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에 의해서 영속적으로 고통을 받고 있다.
48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는 분명 삶과 도덕적•합리적 조정에 도움을 주는 요인들을 확대시킴으로써 강제력을 축소시키는 문제와 아직까지는 필요한 강제력을 사회 전체의 책임 아래 두는 문제, 사회적으로 책임질 수 없는 강제력을 파괴하는 문제(예를 들면 경제적 소유권의 힘), 그리고 사회적 통제하에 결코 완전히 둘 수 없는 유형의 강제력을 도덕적으로 자제할 수 있는 힘을 키우는 문제 등이다.
50 앞으로 다가올 세기에 대한 인간 집단의 근본 관심은 강제가 없이 완전한 평화와 정의로 충만된 이상적 사회의 건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충분한 정의는 있되 그의 공동 작업이 전적으로 재앙에 빠지지 않도록 강제력이 충분히 비폭력적인 그런 사회의 건설에 있다. 그러한 목표에 의해 낭만주의자들은 불만을 터뜨릴 것이다.
2. 사회생활을 위한 개인의 합리적 원천들
51 사회적 갈등과 불의의 궁극적 원천은 인간의 무지와 이기심에 있기 때문에, 인간의 지성과 자애심을 증대시켜 정의를 세우려는 바람이 영원히 지속되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하다. 종교적 이상주의자들은 보통 사회 불의의 뿌리로서 무지보다는 이기심을 강조했기 때문에, 보다 순수한 종교는 자애심을 증대시키고 인간의 이기주의를 억제해야 한다고 희망해왔다. 이에 비해 합리주의자들은 인간의 지성을 확대함으로써 불의는 극복될 수 있다고 믿는 경향이 있었다.
56 우리가 다른 사람의 욕구를 생생하게 이해하는 정도, 우리가 자신의 동기와 충동의 성격을 의식하는 범위, 우리 자신의 생활과 사회 속에서 서로 갈등하는 충동을 조화시킬 수 있는 능력, 그리고 사회로부터 인정받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을 선택하는 방법, 이 모든 것을 규정하는 것은 다름 아닌 우리의 합리성의 정도이다. 이들 각 경우에서 이성의 발전은 도덕적 능력을 증대시킬 것이다.
74 정신은 '자아(ego)'를 광대한 세계 속에 있는 하나의 보잘것없는 점으로 인식한다. 모든 살아 있는 자기 의식에는 이러한 유한성에 대항하려는 표지가 있다. 자기 의식은 종교적 차원에서는 무한성에 흡수되려는 욕구로 나타나고, 세속적 차원에서는 인간 자신을 보편화하여 자신의 삶에 자기 초월적인 의미를 부여하려는 인간의 노력으로 표현된다. 따라서 제국주의의 근원은 모든 자기 의식에서 찾아져야 한다.
3. 사회생활을 위한 개인의 종교적 원천들
84 만일 이기심에 대한 인식이 그 힘을 완화시키거나 사회에서 이기심의 반사회적 영향을 감소시키는 전제 조건이라면, 종교는 인간의 사회화에 중요한 영향을 줄 것이다. 왜냐하면 종교는 회개하는 정신을 높이 평가하고 전파하기 때문이다.
91 이성적 윤리가 정의를 목표로 하는 데 반해, 종교적 윤리는 사랑을 그 이상으로 한다. 이성적 윤리는 다른 사람들의 요구를 자신의 요구와 동등하게 보려 한다. 이에 반해 종교적 윤리, 특히 기독교 윤리는 상대적인 요구에 대한 치밀한 검토없이 이웃의 요구가 충족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109 예수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만일 당신들이 당신들을 사랑하는 자들만을 사랑한다면 무슨 보답이 있겠는가?" 기독교의 모든 사회적 함축성은 바로 이 말의 논리에서 드러난다.
종교의 초월적 전망은 모든 사람들을 형제로 보도록 하고, 자연, 기후, 지리, 역사의 기복이 인간의 가족을 갈라놓은 구별들을 무시한다. 종교적 이상주의자들은 바로 이러한 통찰에 입각해서 국가적•민족적•계급적 차별을 초월한다.
116 오늘날의 종교적 공동체들과 교회는 그 조직체 내에 경제적•사회적 불평등을 초월할 능력을 갖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들 자신들의 종교적•도덕적 이상과 대립되는 보다 큰 사회의 불평등에 대해 격렬하게 맞서지 않는다.
종교의 이 같은 패배주의는 지나치게 완고한 신과 세속, 영혼과 육체의 이원론에서 나온 것이다.
122 인간의 도덕적 자질은 그 승리를 보장하기에 충분치 못하다. 감상적인 세대는 그리스도의 환상 속에 있는 이 묵시록적인 색채를 없애버렸다. 이들은 하느님의 은총에 의해서만 하느님의 나라가 실현될 수 있다고 생각했던 데 반해, 그 하느님의 나라가 한구석에 있다고 생각한다.
사회 재건이라는 급박한 문제에 직면한 시대는 종교적 삶의 이러한 측면, 즉 영혼이 역사의 가능성을 초월하는 측면을 거의 이해하지 못한다. 이를 이해할 수 있기 위해서는 새롭고 정의로운 사회가 건설되어야만 한다. 우리 인간은 자신의 공동체 생활에서 개인적인 이상들을 실현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회란 인간의 위대한 업적인 동시에 인간에게 있어 거대한 좌절의 표징임을 알게 될 것이다.
4. 여러 민족의 도덕성
123 개인 사이의 관계와는 달리, 집단 간에는 윤리적 관계가 성립될 수 없다고 믿는 사람들은 수차에 걸쳐 개인의 태도와 집단의 태도에서 나타나는 차이를 지적해왔다. 특히 사회 정의의 문제를 다룰 때에는 여러 국가들 사이에서 성립되는 관계보다는 한 국가 내부의 경제적 계급들 간의 관계가 더욱 중요시된다. 그러나 집단 행동의 윤리 문제를 분석하려는 입장에서는 국가의 윤리적 태도를 우선적으로 살펴보는 것도 큰 도움이 된다. 그 까닭은 근대 이후의 국가들은 사회적으로 강한 결집력과 강력한 국가적 권위를 갖고 있을뿐더러 그 구성원들의 성격도 각기 뚜렷한 특징을 지닌 집단이기 때문이다.
129 국제 관계에 대한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관심이 확산되고 심화되어 각국의 외교 정책에 영향을 주는 일이 생겨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일은 그리 흔하지 않다. 바꾸어 말하면, 개인 생활에서의 충동을 억제하는 정신은 국가에서는 지극히 불완전한 형태로 존재할 뿐이다. 그 이유는 정부란 국가의 의지를 대변하는데, 이 의지는 일반 민중의 맹목적 정서와 경제적 지배 계급의 교묘한 이기심 추구에 의해 좌우된다. 물론 이론상으로는 현명한 유권자들이 선거를 통하여 대중의 충동과 특권 계급의 은밀한 이익 추구를 민족 정신의 통제하에 둘 수도 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정치적 이슈들에 대한 합리적인 이해는 지극히 미미한 것이어서, 국민의 행동 통일은 기껏해야 정부를 장악하고 있는 지배 집단의 이기심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대부분이고, 때때로 전국을 휘몰아치는 대중의 맹목적 감정과 열병에 의해 성취될 수 있을 뿐이다.
131 국가의 이기심 이외에 두 가지 중요한 문제가 있다. 하나는 국가 공동체의 통일성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폭력의 사용이 필연적이란 점이고, 또 하나는 강제적 수단을 장악하고 있는 집단은 자신의 이기적 목적을 위해 그 목적을 사용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점이다.
133 신랄하고 예리한 분석을 거부하는 애국심에는 윤리적 역설(ethical paradox)이 내재되어 있다. 왜냐하면 애국심은 개인의 희생적인 이타심을 국가의 이기심으로 전화시켜버리기 때문이다.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저열한 충성심이나 지역에 한정된 충성심(향토심)에 비교해 보면, 그것은 고차적인 형태의 이타주의(altruism)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국가에 대한 충성심은 여타의 모든 이타적 충동의 원천임과 동시에 국가에 대한 개인의 비판적 태도를 완전히 말살해버리는 열정의 형태로 드러나는 일이 자주 있다.
158 국가들 간의 '현상 유지(status quo)'를 기반으로 평화를 유지한다 하더라도 정의롭지 못한 평화가 평화적 방법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으리란 증거는 전혀 없다. 국제 사회는, 전쟁에서 패배한 사람들이 그들의 억울함을 바로잡기 위한 새로운 전쟁에 의존하지 않고서도 정의를 획득할 수 있게 될 때에야 비로소 그 자체의 존재 이유를 보여줄 수 있다.
159 현대 산업 국가에서의 계급 대립의 악화는 국가의 통일성과 국제 관계의 안정성을 끊임없이 위협하고 있다. 산업 문명에서 경제적 불평등과 사회적 부정이 심화되어가면 결국에는 국가를 파탄으로 몰게 될 파국적인 투쟁이 야기될 것이다.
5. 특권계급의 윤리적 태도
160 한 국가 내부의 사회 경제적 계급들은 그 국가의 권위, 내적 결속력 등을 독점하고 있지 못하며, 지금까지 그랬던 적도 없다. 따라서 계급의 태도와 행동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는 것은 어려운 일임과 동시에 그리 정확한 일도 아니다. 과거에 각 계급들의 중대한 행동은 개인들의 태도에 의해서 결정되어 왔다. 개인들은 자신이 속한 계급에 대한 충성심에 입각해서 행동하기보다는 자신의 개인적인 이해 관계에 따라 행동하며, 서로 간의 비슷한 이해 관계를 지키지 위하여 노력한다.
계급은 일반적으로 공동의 기능을 기초로 형성되지만, 이 기능이 특권으로 전환되기 전에는 그리 명확하게 구별되지 않는다.
163 경제적 척도가 중심인 현대의 계급은 중세 시대의 사회적 계급(즉 신분)에 비해 훨씬 뚜렷한 자기 의식을 지닌 반면, 그 경계선은 상당히 모호한 편이다. 또한 각 계급들이 자기들끼리 결속하여 자기 주장을 하는 원천이자 수단이라 할 수 있는 기술중심주의 문명의 힘은 계급의 구별을 산출해내는 경제적 생활 양식의 무한히 다양한 기능과 이에 상응하는 정치적•사회적 특권과의 차이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혼동하는 경향이 있다.
165 특권적인 지배 계급의 도덕적 태도는 전반적인 자기 기만과 위선이라는 특징을 지닌다. 자신의 특수 이익을 일반 이익 및 보편적 가치와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동일시하는 것은 이미 국가의 태도를 고찰할 때 살펴본 것이지만 계급의 태도에는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165 특권 계급들 사이에서 가장 널리 통용되고 있는 위선의 형태는,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특권은 자신들의 특수한 역할에 대한 사회의 정당한 보답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태도이다.
170 교육은 억압 계급에서 자신의 이해 관계를 보호할 수 있는 체계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을 가르쳐준다는 점엥서 강력한 잠재적 힘이긴 하지만, 지배 계급은 교육을 통해 순종을 가르칠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 보통 교육의 실시를 인정한 것이다.
175 자본의 이윤은 사회의 생산적 자본 축적을 위하여 현재의 소비욕을 억제한 자본가들이 받는 사회의 정당한 보답이라는 사상은 생산적인 기업이 정상적인 수입으로 저축한 자본을 가지고 시작되었던 초기 자본주의 시대에는 나름대로 타당성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특권과 권력이 점차 집중화됨으로써 산업에 투자한 자본가들의 호사스런 생활 수준이 계속 높아갔기 때문에, 현 특권의 불균등을 도덕적으로 정당화하려는 사상은 부정직한 것이 되었다.
178 귀족 계급은 예술과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한가함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자신의 특권을 정당화함에 있어 유요한 수단을 갖게 된다. 이러한 예술과 문화의 향유는 세련된 형태의 막대한 낭비이며, 생계가 보장된 사람들의 권태로움에 의해 더욱 촉진되고 심화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불평등은 문화사의 성립에 있어서 대단히 기본적인 역할을 수행해왔기 때문에, 클라이브 벨은 높은 문화 수준의 전제 조건으로 귀족적인 사회 조직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179 아무리 복잡한 사회일지라도 일정한 종류의 특권의 불균등이 없을 수는 없다. 이러한 불균등 중 일부는 사회적 기능의 원활한 수행을 위해서 불가피한 것이며, 또 다른 일부는 (그렇게 확실치는 않지만) 사회에서의 중요한 기능의 수행에 있어 정력과 근면을 촉진하는 데 필요한 것이다.
182 노동쟁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폭력 행위에 대해 자본주의 사회의 신문들이 보여주는 한결같은 반응은 폭력적 방법을 사용한 것에 대한 유감스러운 혐오와 격렬한 노동자들을 진압하기 위한 군대의 출동 요청이다. 특권층은 권가의 경찰력을 거리낌없이 자기방어와 공격 기관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신문의 그 같은 논조는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
6. 프롤레타리아계급의 윤리적 태도
근대 노동 계급의 도덕적 태도를 특징짓는 도덕적 냉소주의(moral cynicism), 평등적 이상주의(equalitarian idealism), 반항적 영웅주의(rebellious heroism), 반민족주의(anti-natinationalism), 국제주의(internationalism) 및 가장 충성해야 할 공동체로서 자신들의 계급을 찬양하는 행위 등은 모두 산업시대, 즉 자본주의 시대의 산물이다. 물론 이것들 중의 일부는 정치적 투쟁을 통해 얻어진 자유민주주의 운동의 성과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귀족 계급에 대항하여 자본가 계급이 벌였던 이 운동은 비록 노동자들을 주요한 혜택에서 배제시키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소한의 교육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독자적으로 정치적•경제적 현실을 볼 수 있는 능력과 시야를 넓혀주었다. 사실 이런 능력과 시야는 과거의 피지배 계급에서는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이는 주로 근대 자본주의와 산업주의가 가져다 준 성과였다.
210 계급적 충성을 이타주의의 최고 형태로 찬양하는 것은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 좌절을 겪게 되면 생겨나는 자연적인 산물이다. 무산 노동자는 사회주의이건 공산주의이건 관계없이 일단은 갖가지 충성의 의무들 중에서 계급에 대한 충성을 최고의 의무로 생각한다.
213 내가 생각할 때, 마르크스주의도 또 다른 종류의 노예 반란이다. 마르크스주의는 피억압 계급의 덕을 향상시키는 것이 아니라 지위를 향상시킨다. 이 현대판 노예들도 모든 가치의 전도에 헌신한다. 지상에서의 구원을 약속 받은 사람은 마음이 온유한 사람이 아니라 약한 사람이다. 궁핍한 기독교인이 성령의 힘을 통해 궁극적으로 온유함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다면, 이 현대판 노예들은 역사적•'물질적' 힘이 역사 법칙에 의해 자동적으로 강한 자들로부터 힘을 빼앗아 자신들에게 줄 것이라 믿고 있다.
228 오직 프롤레타리아만이 현대 사회에서 가속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권력과 특권의 집중화 현상이 양심에 위배될뿐더러 사회의 현실적인 토대를 붕괴시킨다는 사실을 고통스런 체험을 통해 몸소 알고 있다. 또한 프롤레타리아는 각국에서 저질러지는 사회적 불의가 어떻게 해서 다른 나라들의 관계에 의해 적대적으로 작용하게 되는지를 알고 있다. 왜냐하면 한 국가는 자신의 국민들이 소비할 수도 없는 물건을 생산해 이익을 얻기 위하여 다른 나라들에게는 시장을 허용치 않고 독점하여 하기 때문이다.
7. 혁명을 통한 정의
233 1차 세계대전이 승전국과 패전국 모두에게 안겨준 환멸적이고 참담한 결과, 그 전쟁으로 빚어진 재정과 국방의 부담, 미래의 전쟁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하여 고안된 국제 평화 기구의 좌절, 전 세계적인 공황과 이에 따른 수백만 노동자들의 비참과 불안정, 그리고 끝으로 러시아 혁명의 극적인 성공 등이 이 모든 요소들로 인하여 반항적인 천민들의 수모 받던 정치철학은 서방 세계의 정치 생활의 가장 큰 약속임과 동시에 가장 큰 위험이 되었다.
250 현대 문명의 모든 사회적•정치적 세력들이 가장 첨예하게 발전해 있는 독일의 경우를 척도로 삼아서 고려해 볼 때, 생산 수단의 소유권을 갖고 있지 않은 중간 계급 중의 그 어느 누구도 스스로를 정치적으로 프롤레타리아에 속한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오히려 역으로 그들은 파시즘 쪽으로 기울어진다. 파시즘은 곤궁한 중간층 사람들에게 보다 나은 사회가 도래하리라는 희망을 갖게 하기 위하여 급진주의(radicalism)를 반공 및 민족주의라는 정치적 전략과 결합시켰다. 파시즘은 이 전략을 통해 급속도로 부상하는 노동 계급에 대해 두려움을 갖고 있던 경제적 지배 계급의 지지를 얻어 냈다.
251 중간층은 (설사 경제적 차원에서는 프롤레타리아에 속할지 모르지만) 프롤레타리아와는 달리 민족 문화의 외부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철두철미하게 그 속에 들어 있다.
경제적 압력이 가중됨에 따라 중간층의 교육 수혜 기회가 제한되어 중간층이 프롤레타리아의 지위로 전락해버릴 것인지의 여부는 지금으로서는 확실한 답을 내릴 수 없는 어려운 문제이다.
268 부하린은 인민 대중에게 해롭고 파멸적인 사회 정책은 공산주의 사회에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은 보다 상세한 예언, 즉 '교육 독점의 지양(abolition of the educational monopoly)'을 통해 모든 시민들은 사회에서 자신들의 이권을 스스로 옹호할 수 있을 만큼 지식을 널리 공유하게 되리라는 예언에 의해 보완된다.
271 공산주의자가 사용하는 절망적인 방법, 즉 혁명이 자신이 만들게 될 전혀 다른 이상 사회에 의해 정당화되어야 한다면, 이러한 정당화는 낭만적인 공산주의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쉽게 수긍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8. 정치적 힘에 의한 정의
273 노동 계급을 숙련노동자 및 미숙련노동자와 동일시되는 혜택 받은 집단과 그렇지 못한 집단으로 나누는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위에서 살펴본 바 있다. 사회 공동의 부에서 자신에게 돌아올 정당한 몫을 탈취당했다고 느끼면서도 어느 정도의 안정된 생활을 누릴 수 있음으로 해서 완전한 소외감을 느끼지 않는 집단은 보다 완화된 마르크스주의를 통해 자신들의 정치적 의식과 입장을 표출한다. 이 집단은 혁명적인 마르크스주의와 더불어 집단주의적 목표를 함께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혁명적인 방법을 버리고 사회주의적•진화적 방법을 채택한다.
274 현대 국가들에서 지배계급은 노동자 계급을 억압하기 위하여 정치 권력과 경제 권력을 연결시키고 있으므로, 이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정치 권력과 경제 권력을 함께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286 의회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나라들에 있어서 오랜 역사에 걸친 정치 권력의 점진적인 평등화 과정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듯이, 평화적인 경제적 변화에 대한 확고한 기초가 될 수 있는 하나의 비유가 아니다. 왜냐하면 경제력이 정치 권력보다 더 근본적이며, 또한 경제력은 정치적 평등주의(political equalitarianism)의 형태와 원리마저도 자신의 필요와 목적에 따라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런 비유는 잘못이기 때문이다.
293 어떤 계급을 지배하고 있는 사회적 지성과 이상주의의 정도가 높아질수록 사회 생활의 전체적인 성격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고, 정치 권력과 경제력의 일정한 균형 상태 아래서 발전하는 경제적•정치적 제 관계의 건전함과 정직성을 증대시킬 것이며, 폭력의 사용 없이 이해 관계의 상충을 조절할 수 있는 가능성이 더욱 높아지리라는 데 대해 어느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급진 세력이 기존의 정치 상황 속에 뛰어들지 않는다면, 사회적 이상주의와 지성이 아무리 고차원적이더라도, 이 같은 충돌과 갈등을 완전히 새로운 차원에서 조정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300 프롤레타리아의 소박한 신앙은 곧 행동하는 사람의 신앙이다. 이에 반해 합리성은 냉철한 관찰자의 속성이다. 물론 여타의 모든 신앙과 마찬가지로, 프롤레타리아의 신앙에도 환상이라는 요소가 개재되어 있다. 하지만 이때의 환상은 진리를 볼 수 있도록 해주는, 꼭 필요하고 투명한 환상이다.
9. 정치에서 도덕적 제 가치의 보존
탐욕, 권력에 대한 의지, 그 밖의 갖가지 이기적 욕구 등과 같은 자연적인 충동은 이성에 의해 결코 완벽하게 제어되거나 승화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정치철학은 필연적으로 자연의 충동에 맞설 수 있는 또 다른 자연의 힘을 이용함으로써 인간의 역사에 의해 자연을 제어하려고 시도하는 정치적 전략들을 보완해야 한다. 만일 강제력, 이기적 욕구, 갈등 등이 사회를 구원하기 위해서 불가피한 수단으로 허용되어야 한다면, 영구적인 분쟁과 영원한 독재를 어떻게 피할 수 있겠는가? 오늘은 구원의 수단인 것이 내일은 예속의 쇠사슬이 되지 않는다고 누가 보장할 수 있는가?
316 올바른 정치적 도덕성은 인간 사회에서 강제력을 완전히 없애기 보다는 최소화함으로써, 인간 사회에 있는 합리적•도덕적 요소들에 가장 잘 부합될 수 있는 유형의 강제력을 사용하도록 권고함으로써, 그리고 강제력이 사용되는 목적과 목표의 차이를 밝혀줌으로써 쓸데없는 갈등의 악순환에 빠져 있는 사회를 구원하고자 할 것이다.
아마도 합리적인 사회라면 강제력과 갈등의 제거보다는 강제력이 사용되는 목적의 정당성 여부에 더 큰 강조점을 둘 것이다. 강제력의 사용이 누가 보아도 합리적으로 수긍할 수 있는 사회적 목적에 기여한다면, 그 사회는 강제력을 정당화할 것이고, 만일 그렇지 못하고 일시적인 열정에만 기여한다면, 폭력의 사용은 지탄을 받을 것이다.
318 폭력적인 분쟁이 자유와 평등을 획득하는 최선의 방법이 아닌 것은 사실이지만, 이 문제는 일단 유보해둘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평등이 평화보다 더 높은 사회적 목표라는 사실이다. 물론 완전한 평등은 불가능하겠지만, 그것은 정의로운 평화의 이상에 대한 하나의 상징이다. 이러한 이상에 비추어 볼 때, 현대의 모든 평화는 기존 권력의 불균형 속에서 임시로 이루어진 휴전 상태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그 이상은 곧 현대의 평화적인 상황 속에 얼어 붙은 권력과 특권의 불균형을 근본적으로 제거해야 한다는 요구를 나타내는 것이다.
319 한 사회 집단이 기만에 의해 자신의 권리를 빼앗기는 곳에서, 자신의 권리를 되찾기 위한 주장에 특별한 도덕성을 부여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이는 사실상 일정한 평등을 이룩한 인간 사회의 한 부분에 의해 불변적으로, 그리고 본능적으로 행해지는 것이다. 예를 들면 터키에 항거하는 아르메니아인, 영국인에 저항하는 인도인, 미국에 항거하는 필리핀인, 에스파냐에 저항하는 쿠바인, 그리고 일본에 저항하는 한국인 등은 언제나 중립적인 사회들로부터 특별한 공감과 도덕적 인정을 받았다.
342 종교적 상상력이 정치 생활에 대해 기여할 수 있는 것 중에서 비폭력적 저항을 발전시키는 것만큼 큰 것은 없다. 적에게도 우리와 같은 인간적 취약점이 있다는 사실의 자각과 모든 인간 생활은 초월적 가치를 갖는다는 통찰은 사회적 투쟁을 넘어서 그 잔인성을 완화시키는 경향을 낳는다. 종교는 인간의 공통된 근원을 일깨우고, 또 인간의 악이나 덕은 같은 성격의 것임을 설파함으로써 모든 인간을 하나로 묶으려 한다.
10. 개인의 도덕과 사회의 도덕 사이의 갈등
345 인간 사회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제반 문제를 현실주의적 관점에서 분석해보면, 사회의 요구와 양심의 요청 사이에는 여간 해서 화합되기 힘든 지속적인 모순과 갈등이 발견된다. 간단히 정치와 윤리의 갈등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 모순과 갈등은 도덕 생활의 이중적 성격으로 인해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것인데, 그 하나는 개인의 내면적 생활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 생활의 요구이다.
347 다른 한편으로 사회는 이타심보다는 정의를 최고의 도덕적 이상으로 삼는다. 사회의 목적은 모든 사람들에게 기회 균등을 부여하는 것이다. 만일 이런 평등과 정의가 이기심의 상호 투쟁에 의해 달성되어야 하는 것이라면, 그리고 이웃의 권익을 침해하는 사람들의 이기심을 억제함으로써만 달성될 수 있는 것이라면 사회는 이기심에 대한 제재를 승인할 수 밖에 없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사회는 사회적 갈등과 폭력까지도 승인하지 않을 수 없다.
356 도덕적 삶의 패러독스는, 진정한 상호 이해는 의식적인 사랑의 결실로서 상호 이해를 추구하지 않는 곳에서 이루어진다는 데 있다. 왜냐하면 사랑은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을 때 가장 순수할 수 있고, 가장 순수할 때 가장 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상호 관계를 맺고 있는 양쪽에 모두 이익을 주는 완전한 상호 이해는 의도적이지 않을 때, 즉 보답을 생각하지 않고 사랑을 베풀 때 완전하게 실현된다. 이는 사회를 초월한 이상을 추구하는 종교적 도덕의 광기가 어떻게 해서 건전한 사회의 결과를 가져다 주는 지헤가 될 수 있는가를 단적으로 드러내주는 말이다. 바로 같은 이유로 해서 아주 분별력 있는 도덕은 최선의 결과보다는 차선의 결과에 만족하게 되는 것이다.
369 우리는 지금 인격적•도덕적 이상주의가 위선이라는 혐의를 받고. 때로는 비난을 받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 시대는 정직성이 냉소주의의 끝에도 못 미치는 그런 시대이다. 이 얼마나 비극적인가! 왜냐하면 개인적 양심이 자연 세계와 인간의 정신을 자연에 묶어두는 집단적 관계를 넘어설 때 갖게 되는 벅찬 감정은 결코 사치가 아니라 인간 영혼의 필연적 현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의 비극에는 아름다움도 있다. 적어도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환상적인 요소들을 어느 정도 제거했다. 이제 우리는 사회적 불의를 대가로 지불하고서 개인 생활의 만족을 추구하는 것이 어려운 세상에 살고 있다. 우리는 개인의 구원만을 위해 천국에 이르는 사다리를 세울 수 없으며, 인간사의 방탕과 부패를 그대로 방치해 둘 수 없다.
이런 일을 하는데 가장 적당한 사람들은 낡은 환상들을 새로운 환상들로 바꾼 이들일 것이다. 이 환상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의 집단 생활이 완전히 정의롭게 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이는 현재 매우 가치 있는 환상이다. 왜냐하면 이런 환상이 사람들의 영혼을 부추겨 숭고한 광기를 불러일으키지 않는 한, 정의란 결코 달성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광기를 갖지 않고서는 그 어느 누구도 사악한 권력 또는 '높은 지위에 있는 정신적 사악'에 대항하여 싸울 수 없을 것이다. 환상이 위험한 것은 맹렬한 환상중의를 자극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를 철저하게 이성의 통제하에 두어야 한다. 우리는 다만 환상이 그 긍정적인 역할을 하기에 앞서 그것을 파괴해버리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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