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디어: 과학혁명


과학혁명 - 10점
피터 디어 지음, 정원 옮김/뿌리와이파리


도판 목록 

서문 

서 론 자연철학과 도구주의 


제1장 1500년경에는 무엇이 ‘알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었을까? 

제2장 인문주의와 고대의 지혜: 16세기에는 사물에 대해 어떻게 배우고 있었을까? 

제3장 연금술사, 장인, 그리고 학자 

제4장 수학, 철학에 도전하다: 갈릴레오, 케플러, 그리고 수학 분야 종사자들 

제5장 기계와 입자: 데카르트가 만들어낸 우주 

제6장 커리큘럼을 넘어선 활동들: 자연철학의 새로운 안식처 

제7장 실험: 17세기에 자연을 알아가던 방식 

제8장 데카르트주의자들과 뉴턴주의자들 


결 론 18세기에는 무엇이 ‘알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었을까? 

옮긴이의 말 

후주 

참고문헌과 더 읽을거리 

등장인물 

주요 용어 해설 

찾아보기





서론 자연철학과 도구주의 

13 과학은 역사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과학사의 중요한 목표는, 왜 과거의 특정한 인물들은 자신들이 자연에 대해 한 일들을 믿고 있었는지, 그리고 왜 그들은 바로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자연에 대한 탐구를 밀고 나갔는지를 이해하는 것이다. 역사가는 과거의 믿음이 옳은지 그른지를 판단하는 데에는 별 관심이 없다. 지주가 태양 주위를 움직일 것이라는 코페르니쿠스의 믿음에 대한 그 어떤 역사적 이해도 그의 믿음이 옳았다는 주장으로부터 얻어지지는 않는다. 코페르니쿠스는 자신이 한 작업을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믿었고, 그 이유들을 밝히는 것이 역사가의 임무다. 옳고 그름은 논쟁들에 의해 판명되는 것이고, 역사적으로 연구할 대상은 바로 그 논쟁들이다.


15 자연에 과한 지식을 추구했던 주된 분야는 '자연철학'(라틴어로 'philosophia naturalis' 또는 'scientia naturalis')이라 지칭되었다. 의학이나 수리과학 같은 다른 분야도 자연을 다루었다. 수리과학은 산수와 기하학 외에도, 자연의 다양한 정량적인 특성들에 관한 연구를 포괄하는 분야였다. 천문학, 음악이론, 기하광학 등의 분야가 이에 해당했다. 하지만 자연철학은 식물에서 행성에 이르는 자연세계의 모든 면에 의해 철학적인 설명을 제시하는 것을 주된 목표로 삼았다는 점에서, 다른 분야들에 비해 독보적인 지위를 점하고 있었다. 자연철학은 보통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관련저작들을 활용해 논의되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세계 전체를 지칭하는 데에 그리스어로 physics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그 영향으로 중세의 라틴어 단어인 physica('자연학')은 대개 '자연철학'과 동의어로 쓰였다.


16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설명을 목적으로 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실들' 자체보다는 자신이 '추론된 사실'이라 불렀던 것에 더 관심을 두었다. 이 말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왜 사물들이 지금의 방식으로 존재하는지를 알아냄으로써 사물에 관한 지식을 얻고자 했다는 뜻이다. 


19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자연철학은 경험에 기반을 둔다는 점 이외에, 과학(아리스토텔레스가 그리스어로 episteme라고 썼던 단어를 스콜라학자들은 라틴어로 scientia라고 썼다)이라는 점도 주장했다. 참된 과학은 그 결론을, 확실하다고 받아들여진 기본 원리 혹은 전제로부터 증명해내야 했다. 증명된 결론은 그 자체로 확실한 첫 출발점으로부터 올바르게 연역되는 한에는 확실할 것이다. 


20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미 보편화된 경험(바꾸어 말하면 이미 '상식'이 되어버린 경험)에 의존하고 있었고, 이는 자연철학이 다른 목표들보다는 설명에 가장 집착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설명은 이미 알려진 현상을 이해하는 것을 의도하고 있었다. 여기에는 스콜라주의 자연철학자가 새로운 발견을 행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여기도록 강요할 만한 의식은 전혀 없었다.


21 17세기에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도전하며 등장한, 자연철학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이 그냥 단순히 더 효과적이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는 점을 지적해야겠다. 만약 그러한 새로운 접근법이 새로운 발견에만 강조점을 두고 있었다면, (적어도 많은 스콜라주의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에게는) 이 접근법이 이미 알려져 있는 현상도 더 잘 이해하게 해줄지는 그리 분명해 보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 시기에 심각하게 진행된 지적•문화적 전투 중 하나는 명료함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에 도전하고 그것을 교체하려는 노력에서 비롯되었다.


22 개념적인 면뿐만 아니라 실제 연구에서도 변화가 있었다. 알려진 현상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적인 강조가 새로움에 초점을 맞춘 강조로 대체되면서, 자연 지식을 구축하는 데에 사용되는 경험에 대한 이해도 함께 변화하게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경험'은 세상이 일상적으로 어떻게 돌아가는가에 대해 알려져 있는 사항을 의미했다면, 17세기에는 이전까지 한 번도 보지 못한 사항을 보여주는 정교하게 고안된 실험에 많이 의지하게 되었다. 실험적인 연구는, 자연이 일상적으로 스스로 무슨 일을 벌이는가 보다는 자연으로 하여금 어떤 일을 하게 할 수 있는가의 문제가 자연의 작동방식을 더 잘 드러낼 수 있다는 생각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23 결국 베이컨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자연철학에 대한 조롱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그 자연철학은 사용에 대해서는 입을 다문 채로 설명한 한다. 게다가 그 설명은 그다지 쓸모도 없다.

이 책의 주제는 간단히 말하자면 자연에 관한 사상들, 자연에 대한 지식 추구의 올바른 목표들, 그리고 지식을 획득하는 방법들에 대한 전반적이면서도 심오하게 재구성해보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지적•사회적 가치들을 이끌어내고 결국에는 '무엇인가를 이해했다'라는 말의 뜻을 새롭게 창조해낸 대규모의 문화적 변화는 근대 과학의 출현에 관한 이야기에서 단순한 흥미거리 겉치레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25 과학과 관련 지어 보자면 르네상스는 무엇보다도 수학을 포함한 고대의 철학적인 전통과 저술들을 중시했다. '르네상스'는 '재생'을 의미했고, 복원되어야 할 고대 세계는 아테네의 건축물, 오비디우스의 시,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 아르키메데스의 수학, 프롤레마이오스의 천문학이 있었던 세계였다. 이러한 면은, 모든 사람에게는 아니었을지라도 적어도 고대 저술가들의 업적을 복원하려고 시도했던 사람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관심사였다. 우리의 첫째 관심사 또한 바로 이 '과학적 르네상스'가 될 것이다. 우리는 이 변화를 15세기 말엽에서 17세기 초엽에 이르는 기간을 통해 살펴보게 될 것이다.

우리의 두 번째 단계에 대해서는 '과학혁명'이라 부르는 것이 적절하겠다. 왜냐하면 바로 17세기에는, 고대를 복원하는 방법을 통해 자연에 과한 지식을 증진하겠다는 꿈은, 새롭게 발전한 지식이 고대의 업적을 단순히 모방한 수준에서 벗어나 그것을 뛰어넘게 되었다는, 널리 공유된 인식으로 대체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제1장 1500년경에는 무엇이 ‘알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었을까? 

27 1500년경에는 대학이 유럽의 지적 세계를 지배하고 있었다. 대학의 구조는 대학이 처음 설립된 13세기에 마련된 전형을 그대로 따르고 있었으며, 그 안에서 제공되던 철학적 교육의 내용은 이미 설명한 바 있는 스콜라주의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대체로 따르고 있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주의는 설명을 제공하는 방식이라는 형식적 특징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 안에는 자연세계의 생김새에 대한 묘사가 강하게 뒤엉킨 채 포함되어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철학에서는 구형의 지구가 중심에 자리한 둥근 모양의 우주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감각 경험을 중시하며 여기에 기반을 두고 있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세계는 신과 같이 세계 전체를 외부에서 바라보는 초월적 존재가 아닌 관찰자인 인간의 시각에서 항상 서술되었다.


30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에게 경험적 지식이란 직접적으로 감각된 것들뿐만 아니라 경험에 의해 추론될 수 있는 문제들까지도 포함하고 있었다.


31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자연철학에서는 세상에 포함된 사물들의 범주를 명확히 구분했으며, 그 사물들이 이해될 수 있는 방식을 빠짐없이 목록화 해두었다.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세계관 속에서 혁신적인 생각이나 발견이 그리 중요하게 대접받지 못했던 것은 자연세계 자체를 탐험해야 할 대상으로 진정으로 인식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 세계 안에서는 진짜로 심각하게 새롭다고 할만한 그 무엇인가가 존재하지도 않았다.


32 아주 정교하게 정의되어 있으며 안전하게 경계 지어진 공간을 자연철학에 제공하고 있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은 그가 인간이 하는 설명의 범주를 분석해내면서 분류했던 네 가지 원인에서 비롯되었다. 그의 기본적인 질문은 "우리는 어떻게 사물을 이해하는가?"였다. 그의 대답은 우리가 '원인들'이라고 인지하는 네 가지 모델을 통해 사물을 이해하거나 설명한다는 것이었다.


34 세상에 대한 지정한 철학적 지식은 모든 것을 제자리에 위치하게 하는 일과 다름 없었다. 이러한 철학적 견해의 목표는 왜 사물들이 그러한지, 그리고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를 가장 근본적인 수준에서 이해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원인에 대한 분류는, 분류라는 작업이 원래 그렇듯이, 자연현상에 대해 말할 수 있는 내용과 말할 수 없는 내용, 그리고 말할 만한 가치가 있는 내용을 결정해버렸다.


40 원칙적으로, 그리고 실제로도 자연철학과는 구분되어 있으면서 자연에 과한 지식을 다루었던 또 다른 중요한 분야는 수학이었다. 중세 대학에서 교육했던 가장 중요한 수리과학은 천문학, 그리고 이보다는 조금은 덜 중요하게 여겨졌던 음악이었다. 이 두 분야는 네 가지 수리과학 분야, 즉 산수•기하학•천문학•음악으로 구성되었던 중세 초의 4과에 속했다. 이러한 분야들을 한데 묶은 것은 다시 한번 아리스토텔레스의 기준을 따랐다는 점에서 이론적으로 정당화되었다. 4과 중에서 앞의 두 분야는 추상적인 크기를 타당한 논의의 대상 주제로 여기는 '순수'수학의 일부였다. 산수는 불연속적인 크기에 해당하는 수에 대한 학문이었던 반면, 기하학은 공간적으로 확장된다는 의미에서 연속적인 것이라고 판명된 크기를 다루는 학문이었다. 4과의 세 번째와 네 번째 분야는 나중에 '복합mixed' 수학이라 불리게 될 영역을 대표했다. 복합수학이라는 용어는 그 분야들의 타당한 관심사가 어떤 특정한 논의 대상과 결합된 크기라는 점을 암시했다. 그러므로 천문학은 하늘의 움직임들에 특별히 적용된 확장된 기하학이었으며, 음악은 소리에 특별히 적용된 확장된 산수였다.


46 대학 내 학문분야의 위계로 보자면 그러한 질문들은 그냥 무시해버려도 좋을 것들이었다. 원인들과 사물들의 본성을 다루는 자연철학은 천문 계산과 같은 훨씬 실제적인 기예에 비해 아주 고상한 분야로 여겨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대부분의 자연학자들은 천문학자들이 사용하는 개념들을 무시해버리는 쪽을 택했다. 식물학자들이 정원사의 실용적 지식을 무시하는 것처럼 말이다. 천문학자들이 역시 자연학과 천체 운동에 대한 수학이 공존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무시하는 쪽을 택했다. 심지어는 자연학자들보다 더 철저하게 말이다. 중세의 천문학적 논저들에서는 그 문제를 아예 제기하지도 않은 경우가 흔했다.



제2장 인문주의와 고대의 지혜: 16세기에는 사물에 대해 어떻게 배우고 있었을까? 

61 스콜라주의적 전통에 대한 새롭고도 중요한 도전은 생각지 못했던 곳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중세 대학의 교양학부 교육에서 별로 강조되지 않았던 분야 중 하나는 중세 초에 '3학'이라 이름 붙여진 과목들이었다. 3학의 세 과목은 문법, 논리학, 수사학이었다. 이 세 과목은 소위 '4과' - 기하학, 산수, 천문학, 음악의 네 가지 수학적 과목들 - 와 합해져서 일곱 가지 교양학문을 구성했다. 이 과목들은 고대 이래로 고등교육의 기초로 여겨져 왔으며, 이 과목들이 3학4과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계속 거론되었다는 점은 이들이 중세 초 서양 라틴 세계에서 표준적 교육 체계에 포함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73 고대의 천문학적 연구로의 복귀를 부르짖으며 전문적인 작업을 추구하면서 코페르니쿠스는 당대에 대단히 학문적인 문화운동이었던 르네상스 인문주의에 동참하고 있었던 셈이다. 



제3장 연금술사, 장인, 그리고 학자 

102 16세기에는, 자연은 이해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제어되어야 하며 자연을 진정으로 아는 사람은 필히 그것을 다스릴 줄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 퍼져있었다. 


113 베이컨이 문제를 제기한 전략은 상당히 급진적이었다. 정통적인 자연철학에 도전장을 내밀면서 그는 자연철학을 추구하는 데에 사용되었던 일반적인 방법들에 대해 단순히 비판만 하고 있던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자연철학이론 개념 자체를 새롭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자연철학과 그 이외의 여러 대안에 대해, 잘못 구상된 것들이라고 공격했다. 그는 자연철학을 관조적인 작업으로 바라보는 생각을 완전히 거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대신, 그는 제대로 이해된 자연철학이란 오늘날의 우리가 기술적 진보라고 생각하는 바에 해당하는 인류 복지의 증진을 달성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117 아리스토텔레스와는 반대로 베이컨은 자연철학이란 작업 결과물, 즉 실제적 응용물을 생산적으로 만들어내는 행위라고 보았다. 그는 심지어 이 생산성을 적절한 자연철학 지식이 만들어낸 결과물로서만 바라보았던 것이 아니라, 그것이 진리에 해당하는지를 판단하는 기준으로까지 삼았다. 이점을 분명히 표현한 유명한 문구에서 그는 "진리와 유용성은 (이러한 면에서) 동일하다"고 썼다.



제4장 수학, 철학에 도전하다: 갈릴레오, 케플러, 그리고 수학 분야 종사자들 

135 무엇보다도 갈릴레오는 코페르니쿠스주의가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자연학자들을 공격하는 데에 유용하다는 점에서 그것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우선 첫째로 코페르니쿠스주의는 태양 중심의 우주를 받아들여야 함을 강조하고 있었고,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체계 전체가 기반을 두었던 자연에 대한 세계상을 산산조각 내놓을 터였다. 만약 이제 지구가 우주의 중심에 위치해 있지 않다면 무거운 물체의 낙하(그리고 가벼운 물체의 상승) 또한 우주의 중심이라 정의되었던 원래 목적지로 가려는 성향으로는 더는 설명될 수 없었다. 우주의 중심은 이제 더는 지구의 중심과 일치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둘째로, 코페르니쿠스주의를 옹호했던 주요 주장들은 우주론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천문학에 관한 것이었다. 즉, 그것들은 하늘의 본성과 그 운행을 설명하는 데에 급급했던 자연학자들의 주장이 아니라, 겉보기 운동을 간략하게 정리해 질서 있게 보이게 하는 데에 더 관심을 두었던 수학자들의 주장이었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코페르니쿠스와, 그의 주장을 따른 케플 같은 몇몇 추종자는 기본적으로 수학적인 새로운 천문학 체계로부터 감히 도출해낸 우주론적 추론을 수용하고 있었다.


138 갈릴레오의 주장은 다음의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만약 갑자기 생겨나서 결국에는 사라지는 까만 부분들에 의해 태양 표면에 흠집이 나 있다는 것이 확실해진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르침과는 정반대로 하늘에서도 생성과 소멸이 일어난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게 된다. 갈릴레오는 물체의 외부적인 특징들에 대한 '수학적'인 해설에서 시작해 하늘의 물질에 대한, 자연학적이라고 부르기에 적절한 결론으로 나아갔던 것이다.


137 물체의 명백해 보이는 (그리고 측정할 수 있는) 성질들은 밝혀질 수 있고, 그 지식은 더 나은 철학적 논의를 가능케 해줄 것이다. 바로 그러한 일을 수행하는 수학자의 작업이 자연학자의 작업을 인도할 수 있었다.


154 자연 지식에 대한 수학적이거나 조작적인 사상에 동조하던 사람들에게는 두 가지, 서로 다르지만 한번 추구해볼 만한 대안들이 앞에 놓여 있었다. 그 하나는 베이컨처럼 실용적인 태도를 견지하며 실제로 효과가 있는 것에만 만족하고 나머지는 쓸데없는 질문으로 치부해버리는 방식이었다. 다른 하나는, 자연세계는 다른 어떤 종류의 지식이 아닌 오로지 수학적-조작적인 형태의 지식에 의해서만 설명될 수 있는 구성요소들로 만들어져 있다는 견해를 선택하는 방식이었다. 이 두 번째 방식을 선택했던 이들 중에, 가장 성공적이었고 동시에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했으며 자연에 대한 자신의 수학적 이상에 걸맞은 우주를 만들어내려 했던 인물은 프랑스인인 르네 데카르트였다.



제5장 기계와 입자: 데카르트가 만들어낸 우주 

160 그가 <방법서설>에서 처음으로 제시한 해법은, 우주가 수학적 크기로만 묘사될 수 있는 것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관찰된 모든 현상에 대한 인과적 설명은 이러한 우주에 가장 잘 들어맞는 기계론적 원리에 의해서만 제공될 수 있다는 점을 독자들에게 설득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바탕 위에서 데카르트는 조작주의적으로 정의된 자연에 관한 철학이야말로 전혀 미진한 부분이 없는 완전한 자연철학이 되리라고 예상했다.


182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에서는 모든 것이 그 고유의 제자리를 가지고 있었다. 사물들의 자연스러운 운동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다양한 장소 혹은 자리들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다. 중심을 향한 것, 중심에서 벌어지는 것, 중심을 회전하는 것으로 운동을 분류했다는 점에서, 둥그렇게 생긴 우주의 중심은 그 자체로 매우 특별한 장소였다. 우주의 중심에서 일어나는 일은 실제로 물리적으로 설명되어야 할 문제였다. 이와는 반대로, 데카르트의 우주는 수학적인 우주를 토대로 고안되었으며, 그러한 점에서 유클리드 기하학에 의해 정의된 공간에 바로 대응할 수 있는 대상이었다. 그러한 데카르트식의 기하학적 공간은 그가 스스로 고안한, 정말로 대단하고 오랫동안 영향력을 행사할 수학적 혁신에 의해 정의되었다. 그것은 (나중에) '해석기하학'이라 불리게 될 새로운 수학이었다.



제7장 실험: 17세기에 자연을 알아가던 방식 

241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지식이 경험에 그 기원을 둔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그의 주장은 스콜라주의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에 의해 계승•반복되었으며, '감각으로 감지할 수 없는 것은 마음속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경구는 중세 말에 표준적인 철학의 근본 규칙이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많은 17세기의 비아리스토텔레스주의 철학자들은 스콜라학자들이 전파했던, 자연에 관한 지식을 습득하는 접근법이 감각의 교훈을 무시한다며 비판하기 시작했다. 


243 아리스토텔레스의 세계는 발견될 수많은 새로운 사실들이 존재하는 세계가 아니었다. 그 대신에 그 세계는, 대부분 이미 발견되었으나 아직 그에 대한 설명이 부족한 수많은 사실이 존재하는 세계였다. 아리스토텔레스 자신 역시 이러한 견해가 그다지 잘못되었다고 생각지 않았다. 중세와 근대 초 유럽의 스콜라주의 추종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 안에서 바로 이러한 면을 가장 흥미롭고 가장 가르칠 만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248 17세기 유럽인들이 연구하던 고전적인 수리과학들은 그 분야의 성격상 인공적으로 만들어낸 경험, 즉 일상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경험의 확인에 관련된 문제들을 기본적으로 포함하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설명되어야 할 현상 자체는 처음부터 주어져 있다고 받아들였던 아리스토텔레스주의적 과학의 이상은 이러한 경우들에는 적용될 수 없었다.


266 보일은 실험을 하나의 역사적인 사건으로 이야기했지만, 홉스는 수학의 증명과 같이 필연성에 기반을 두고 결론을 증명하는 실험을 요구했다. 

보일은 일반적으로 인정될 만한 자연에 관한 지식을 생산하는 최고의 방법은 바로 실험이라고 강조했다. 모든 사람은 결론적으로 주장된 바가 진짜로 참인지를 직접 확인해볼 수 있게 될 것이었다. 홉스는 이러한 실험이 제공하는 지식은 자연현상에 대한 설명이 되지 못한다고 반박했다. 보일의 방법으로는 아무리 잘해봤자 자연의 실제 작용을 모든 사람이 인정할 만한 수준으로 소개할 수 있을 뿐이지, 실험을 통해 그러한 자연의 작용이 일어나는 원인이 무엇인지를 밝혀낼 수는 없다. 


272 뉴턴의 작업은 과거의 스콜라주의적 모델과는 상당히 차이가 나는 과학적 경험에 대한 생각들을 보여주었다.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철학자에게 '경험'은 자연에서 늘 일어나는 일들에 관한 지식을 획득하기에 적절한 원천이었다. 뉴턴과 그의 추종자들에게 실험철학은 자연을 추궁하여 본질적 지식이 아닌 조작적 지식을 얻어내는 수단이었다. 조작적 지식은 사물 자체와 관련해 진짜로 참인 것이 무엇인가 보다는 어떻게 사물을 작동하게 하는가를 말해주는 지식이었다. 왕립학회가 이해하고 뉴턴이 개선했던 실험작업은 자연현상들에 대한 기록을 축척하여 지식을 만들어내는 하나의 접근법이 되었다. 그리고 이 경우에, 실험가 집단을 벗어난 외부 세계의 실험적 작업에 대한 신뢰는 제도적 권위, 또는 적절한 목격자의 증언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제8장 데카르트주의자들과 뉴턴주의자들 

273 17세기 말에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자연철학의 계승자라는 패권을 놓고 두 개의 프로그램이 경쟁하고 있었다. 그 둘 중 먼저 확고하게 자리 잡은 것은 르네 데카르트의 저술에 바탕을 둔 데카르트주의(Cartesianism라는 영어 표현은 1650년대부터 사용되었다)였으며, 모든 자연현상을 불활성 물질의 입자들 사이의 기계적 상호작용으로 설명하는 데카르트의 접근법을 옹호했다. 다른 하나는 뉴턴주의였다. 뉴턴주의는 17세기 말 데카르트주의에 반기를 들면서 발전해나갔고, 힘force에 대한 수학적 논의와 실험주의를 통해 자신을 정당화했다.


293 데카르트의 <철학의 원리>와 비교해보았을 때 뉴턴의 <프린키피아>에서 가장 두드러져 보이는 특징은 물체들 사이에서 어떠한 작용이 전달되는 것을 분석하면서 물체들끼리의 직접적인 접촉을 반드시 가정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뉴턴은 이전까지는 일반적으로 불연속적인 충격으로 이해되고 있었던 '힘들'에 대해, 속도를 변화(운동의 속력이나 방향의 변화, 혹은 두 가지 모두의 변화를 말한다)시키기 위해 물체에 가해지는 작용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 힘이 전달되는 메커니즘을 설명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어떤 경우에도 이 힘의 원천을 규명할 생각이 없었다.


294 1660년 대 중반 뉴턴은 달에 작용해 균형을 이루는 원심력과 중력에 대해 고찰할 때 중력을 분명히 인력으로 취급했다. 뉴턴의 정성적 자연철학은 여러 지면을 통해 제시된바 있지만, 그 중에서도 그의 후기 저술인 <광학Optics>의 한 부분에서 가장 특별한 방식으로, 그리고 공개적으로 그 내용이 제시되었다. 여기서 그는 자신이 중력의 인력에 대해 정확히 한 물체가 다른 물체에 작용하는, 즉 당겨진 물체는 당기는 물체에 의해 끌려가는 상호 간 인력으로 가정하고 있음을 확실히 했다. 이는 데카르트나 하위헌스가 중력을 이해했던 것과는 상반된다. 그들은 무거운 물체가 그 물체보다 중심으로부터 훨씬 더 멀리 떨어져 있는 다른 물질의 작용에 의해 밀려서 중심 쪽으로 이동하는 것으로 설명했다.


301 라이프니츠는 중력이라는 인력의 존재가 뉴턴에 의해 명백하게 증명되었다고 인정했지만, 그의 관심사는 하위헌스와 마찬가지로 중력을 설명해내는 것이었다. 그는 끌어당기는 물체로부터 나와 소용돌이치는 유체를 통해 전달되어 외부로 향하는 '자극의 선들lines of impulse'을 통해 중력을 설명하고자 했다. 이 외부로 향하는 원심적 경향은 그에 상응하는 경향, 즉 '지상의 물체'가 중심 쪽인 내부를 향하는 경향을 발생하게 했다.



결 론 18세기에는 무엇이 ‘알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었을까? 

307 뉴턴이 사망했을 때, 자연세계에 대한 유럽 지성계의 관점은 1500년과는 너무나도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자연철학에 대한 새로운 생각은 실용적이고 실제적인 능력과는, 유일하게는 아닐지라도 매우 굳건히 연관되어 있었다. 17세기 말의 위대한 자연학적 수학자들인 하위헌스와 뉴턴은 실용적이고 사색적이지 않은 문제들에 큰 관심을 두었다.


308 이 책에서 다룬 두 세기 동안의 주요한 변화들은 자연에 대한 통제와 지배를 추구하는 방향의 새로운 '자연철학'이 중요해지는 과정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1500년경 자연에 대한 유럽의 지식은 추상적이고 사색적인 이해를 가장 중요시했던 대학 같은 정규적•공식적 장소에서 자리잡고 있었다. 물론 이러한 종류의 이해를 강조한 것이 어떠한 사회적인 영향력도 없었다는 것은 아니지만, 사회적 영향력은 자연세계 자체에 대한 통제력을 증가시키는 데에는 별 관심이 없었던 권력기관들(특히 교회)만이 행사할 뿐이다. 하지만 16세기와 17세기를 거치면서 유럽의 국가들은 역사상 유래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자신들의 힘을 세계의 다른 지역에 퍼트려나가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유럽을 넘어선 세계에 대한 정보를 유럽 내로 들여올 수 있는 종류의 지식이나, 물질적으로 또는 문화적으로 세계의 다른 지역을 지배하기 위해 그곳에 더 효과적으로 도달하게 해줄 수 있는 종류의 지식이 점차 지지를 받게 되었다.


309 16세기에는 인문주의와 고대의 문명을 복원하겠다는 분명한 목표 의식이 지식 추구를 주도했다면, 이에 이어진 17세기에는 데카르트와 베이컨의 사례에서 보이는 자칭 새로운 학문적 프로그램을 급속히 진전하려는 신선한 야망이 출현했다. 고대의 위업을 인정하는 수사적 표현들은 많은 이에게 여전히 중요하게 작용했지만, 이제 그러한 견해는 과거의 고전 대신, '방법'의 논의를 통해 자연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을 정당화하던 참신한 주장과 경쟁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309 '자연철학'이라고 알려진 범주의 활동은 이 기간에 발생한 모든 변화를 겪으면서도 몇 가지 근본적인 특징은 계속 유지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자연철학은, 그것이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우주를 창조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중세적 신이었든지, 아니면 뉴턴주의자들의 신이었든지 간에, 원하는 일을 할 수 있고 모든 (절대적)공간에 편재하기 때문에 늘 섭리적으로 세상의 모든 일을 알 수 있는 신을 가정했다. 자연철학은 16세기와 17세기에는 진정한 의미의 무신론자를 거의 만들어내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18세기에는 달라지겠지만 말이다.'


310 적어도 자연세계를 이해하는 데에서 유럽의 지식인 문화는 당시 인문주의자들에게 친숙했던 라틴어 표현을 사용하자면 '관조적인 삶vita contemplativa'에서 '실천적인 삶vita activa'으로 무게중심이 이동하는 것을 경험했다. '어떻게의 문제를 이해하는 것'은 이제 '왜의 문제를 이해하는 것'만큼 중요해졌다. 시간이 지나고 유럽인들이 자연과 그 안에 사는 사람들에 대해 점점 더 많은 것을 알게 되고 자연을 더욱 지배하게 되면서 이 두 가지 목표는 점점 하나가 되어갈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근대 세계는 프랜시스 베이컨이 상상했던 세계와 상당히 유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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