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그리스인 조르바 - 10점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열린책들


그리스인 조르바 

20세기의 오디세우스 

개역판에 부치는 말 

니코스 카잔차키스 연보






그리스인 조르바 

23 바다, 가을의 따사로움, 빛에 씻긴 섬, 영원한 나신(裸身) 그리스 위에 투명한 너울처럼 내리는 상쾌한 비. 나는 생각했다. 죽기 전에 에게 해를 여행할 행운을 누리는 사람에게 복이 있다고.


49 내가 물었지요. 〈아니, 할아버지 아몬드나무를 심고 계시잖아요?〉 그랬더니 허리가 꼬부라진 이 할아버지가 고개를 돌리며, 〈오냐, 나는 죽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란다.〉 내가 대꾸했죠. 〈저는 제가 금방이라도 죽을 것처럼 살고 있군요.〉 자, 누가 맞을까요, 두목?」


86 「…만일에… 만일에 말이지요….」

「만일이라니, 뭐요? 들어 봅시다!」

「…만의 하나, 그 사람들이 눈을 떴을 때, 당신이 지금의 암흑 세계보다 더 나은 세계를 보여 줄 수 있다면…. 보여 줄 수 있어요?」

나는 알지 못했다. 나는 타파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폐허에 무엇을 세워야 하는지, 그것을 나는 알지 못했다. 나는 생각했다. …확실하게 알고 있는 사람은 없다. 낡은 세계는 확실하고 구체적이다. 우리는 그 세계를 살며 순간순간 그 세계와 싸운다…. 그 세계는 존재한다. 미래의 세계는 아직 오지 않았다. 환상적이고 유동적이며 꿈이 짜낸 빛의 천이다. 보랏빛 바람(사랑, 증오, 상상력, 행운, 하느님)에 둘러싸인 구름…. 이 땅의 아무리 위대한 선지자라도 이제는 암호 이상의 예언을 들려줄 수 없다. 암호가 모호할수록 선지자는 위대한 것이다.


87 하늘의 별은 수를 불려 나갔다. 별들은 인간에게 냉혹하고, 잔혹하고, 냉소적이며 무자비했다.


188 나는 다시 시집을 열고 읽어 보았다. 이런 시들이 어째서 그토록 오랫동안 나를 사로잡았던 것일까! 순수시! 인생은 한 방울의 피도 방해할 수 없는 밝고 투명한 놀음이 되어 있었다. 인간 본질은 야만스럽고, 거칠며 불순한 것이다. 인간의 본질은 사랑과 육체와 불만의 호소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것을 추상적인 관념으로 승화시켜 보라. 정신의 도가니 속에서 연금술의 과정을 좇아 순화시키고 증발시켜 보라.

전에는 그토록 나를 매혹하던 시편들이 그날 아침에는 느닷없이 지적인 광대놀음, 세련된 사기극으로 보이는 것이 아닌가! 문명의 사양(斜陽)은 그렇게 되게 마련인 것이다. 인간의 고뇌는 정교하게 짠 속임수(순수시, 순수 음악, 순수 사고) 속에서 그렇게 끝나게 마련인 것이다. 최후의 인간(모든 믿음에서 모든 환상에서 해방된, 그래서 기대할 것도 두려워할 것도 없어진)은 자신의 원료가 되어 정신을 산출한 진흙이며, 이 정신이 뿌리내리고 수액을 빨아올릴 토양은 아무 데도 없다는 것을 깨닫는 인간이다. 최후의 인간은 자신을 비운 인간이다. 그 몸에는 씨앗도 똥도 피도 없다. 모든 것은 언어가 되고, 언어의 집합은 음악이 되어도 최후의 인간은 거기에서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그는 절대의 고독 속에서 음악을 침묵으로, 수학적인 방정식으로 환원시킨다.


373 우리는 둘 다 지쳐 있었지만 잠자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우리는 몇 시간 동안 일어난 쓰디쓴 일들을 놓쳐 버리고 싶지 않았다. 잠을 잔다는 것은 위급한 시각에 도망치는 것만큼이나 창피한 노릇이었다. 우리는 잔다는 게 부끄러웠다.

우리는 바다 곁에 앉았다. 조르바는 새장을 무릎 사이에 놓고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 뒤의 하늘에서 섬뜩한 별자리, 수많은 눈과 나선형 꼬리가 달린 괴물이 나타났다. 이따금 별은 자리를 이탈하여 떨어져 내렸다.


377 저항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필연을 극복하여 외부적 법칙을 영혼의 내부적 법칙으로 환치시키고 존재하는 것을 깡그리 부정하고 자기 정신의 법칙에 따른 새 세계를 창조하려는 인간의 긍지에 찬 돈키호테적 반동이 아닐까! 이것은 결국 자연의 비인간적인 법칙을 반대하고 지금 존재하는 것보다 더 순수하고 우수하고 도덕적인 새 세계를 창조하려는 행위가 아닐까?


20세기의 오디세우스 

446 카잔차키스의 이름을 세계적인 작가의 반열에 올려 놓은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인생과 작품의 핵심에 위치하는 노른자위 개념이자 그가 지향하던 궁극적인 가치의 하나인 〈메토이소노(聖化)〉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메토이소노〉는 〈거룩하게 되기〉이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육체와 영혼, 물질과 정신의 임계 상태 저 너머에서 일어나는 변화, 이것이 〈메토이소노〉다. 물리적, 화학적 변화 너머에 존재하는 변화, 〈거

룩하게 되기〉가 바로 이것이다. 포도가 포도즙이 되는 것은 물리적인 변화다. 포도즙이 마침내 포도주가 되는 것은 화학적인 변화다. 포도주가 사랑이 되고, 〈성체(聖體)〉가 되는 것, 이것이 바로 〈메토이소노〉다.



니코스 카잔차키스 연보

1957년 74세

10월 26일 사망. 시신이 아테네로 운구됨. 그리스 정교회는 카잔차키스의 시신을 공중(公衆)에 안치하기를 거부함. 시신은 크레타로 운구되어 안치됨. 엄청난 인파가 몰려 그의 죽음을 애도함. 뒷날, 묘비에는 카잔차키스가 생전에 준비해 두었던 비명이 새겨짐. Den elpízo típota. Den fovúmai típota. Eímai eléftheros(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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