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원: 열하일기 3


열하일기 3 - 10점
박지원 지음, 김혈조 옮김/돌베개



요술놀이 이야기―환희기幻戱記 

피서산장에서 쓴 시화―피서록避暑錄 

장성 밖에서 들은 신기한 이야기―구외이문口外異聞 

옥갑에서의 밤 이야기―옥갑야화玉匣夜話 

북경의 이곳저곳―황도기략黃圖紀略 

공자 사당을 참배하고―알성퇴술謁聖退述 

적바림 모음―앙엽기?葉記 

동란재에서 쓰다―동란섭필銅蘭涉筆 

의약 처방 기록―금료소초金蓼小抄




182 서장장도 와서 내게,

"아까 나약국의 국서를 보셨습니까? 세상일이 아주 겁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라고 하기에 내가,

"천하일에 대한 걱정은 그만 그쯤 해 두시게. 아마도 천하에 본시 나약국이라는 나라는 없을 것입니다. 제가 일찍이 이십 년 전에도 이와 유사한 문건을 별단에서 본 적이 있는데, 역시 황극달자라고 칭하는 이의 오만한 글이었습니다. 선배들이 빙 둘러 앉아서 한 번 읽어보고는 북방을 매우 우려하였으며, 어떤 분은 청나라를 대신할 사람은 황극달자라고 하는 분까지 있었답니다. 지금 이 문건을 읽어 보니, 하나도 가감 없이 그대로인 것 같습니다.

대체 중국의 서반배라는 것들은 모두 강남의 가난뱅이 출신으로 객지 생활에 무뢰배가 되어, 이 따위 망령된 말들을 만들어내서 우리 역관들을 속이고 비싼 값에 팔아서 공금 은화를 빼먹으려고 수작을 부립니다. 별단에는 비록 보고 들은 내용을 기록해도 된다고 허락하고 있지만, 모두가 길바닥에서 주워들은 믿을 수 없는 이야기들입니다. 어찌하여 해마다 이런 황당한 이야기를 돈 주고 사고, 매번 사행마다 거짓으로 위조된 문건을 임금께 아뢰는 막중한 자료로 삼는단 말입니까? 저의 생각에는 별단 안에는 응당 넣고 뺄 내용을 잘 헤아려서 해야 할 것입니다."

라고 하니, 서장관은 그렇다고 수긍을 하는데 조 역관은 자못 변명을 하고 하소연을 한다. 내가 조 역관에게

"그대는 아직 나이가 젊어서 일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네. 우리나라 사대부들 중에도 아무 턱도 없이 건성으로 춘추대의를 이야기하고, 존주양이를 부질없이 이야기한 지 백여 년이 넘었는데, 중국의 인사 중에서 이런 마음을 가진 자가 어찌 없겠는가? 그러므로 강희 시대의 총독을 지낸 연갱요, 옹정 시대에 벼슬을 한 사사정과 중정 같은 무리들은 상서로운 조짐을 가리켜서 재앙이라 하고, 정치가 잘된 공적을 쭉정이 정치라고 속여서 사해를 선동하고 문자에 올려서 전과시켜, 마치 나라가 위급하고 망하려는 현상이 아침 저녁에 들이닥칠 것처럼 꾸몄네.

그런데도 우리 역관들은 그 황당한 말을 즐거워하여 제 스스로 바보 놀음을 하였다네. 사신 세분이야 숙소의 깊은 곳에 오랫동안 박혀 있다가, 답답하여 시간을 보낼 마땅한 거리가 없던 차에 문득 자네들을 불러서 '뭐 새로운 소식을 들은 게 없는가?하고 물으면 자네들은 길에서 주워들은 이야기를 엮어서 그들의 억눌린 가슴을 후련하게 뚫리게 해 주었지.

그러면서 사실은 온전히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수염을 쓰다듬고 부채를 펴서 '오랑캐 운수라는 게 백 년 가는 법이 없지'하고는 비분강개해서, 마음속으로 중국 땅을 깨끗이 청소하지 않고는 살아서 돌아가지 않을 각오를 하고 있었으니, 참으로 허망하기 짝이 없는 노릇 아닌가? 하물며 먼저 보내는 군관들은 밤낮으로 빠르게 달려 반 이상을 말 위에서 잠을 자니, 만약에라도 저들 영토 안에서 별단의 문건을 떨어뜨리기라도 한다면 장차 닥칠 환란과 화를 어찌 감당할 것인가?"

하니, 서관장이 크게 웃고 또 크게 놀라며 조 역관에게 뭐라 뭐라 주의를 준다.

그 뒤에 과연 별단을 어떻게 처리했는지 모르겠다.


239 허생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밤은 짧은 데 말이 너무 길어서 듣기에 아주 지루하구먼. 그래, 너는 지금 무슨 벼슬을 하느냐?"

"어영청 대장입니다."

"그렇다면 너는 바로 나라에서 신임 받는 신하가 아니더냐? 내가 응당 재야에 숨어 있는 와룡선생을 천거할 터이니, 네가 임금께 아뢰어 그에게 삼고초려 할 수 있게 하겠는가?"

이 대장은 머리를 숙여 골똘히 생각하더니 한참 만에 대답했다.

"어렵겠습니다. 그 다음의 것을 듣고자 합니다."

"나는 '그 다음'이란 말은 아직 배우지 못했도다."

이 대장이 그래도 굳이 묻자, 허생은 말했다.

"명나라 장국과 병사들은 조선이 예전에 입은 은혜가 있다고 여겨서 그 자손들이 되놈의 나라에서 몸을 빼어 우리나라로 많이 건너왔으나, 이리저리 떠돌며 홀몸으로 외롭게 지내고 있는 이가 많다. 네가 임금께 아뢰어 종실의 여자들을 뽑아서 두루 시집을 보내고, 훈적과 귄귀들의 집을 몰수하여 그들의 살림집으로 내어 줄 수 있게 하겠느냐?"

이 대장이 고개를 숙이고 한참 있다가 대답하였다.

"그것도 어렵겠습니다."

"아니, 이것도 어렵다, 저것도 어렵다 한다면 대관절 무슨 일이 가능하겠느냐? 아주 쉬운 일이 있으니, 네가 능히 할 수 있겠느냐?"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대저 천하에 대의를 외치려면 먼저 천하의 호걸들과 사귀어 결탁하지 않고는 되지 않는 법이고, 남의 나라를 정벌하려면 먼저 첩자를 쓰지 않으면 성공을 거둘 수 없는 법이다. 지금 만주족이 갑자기 천하의 주인이 되었으나, 아직 중국을 완전히 손아귀에 넣어 친하게 지내지 못하는 형편이니, 이때 조선이 다른 나라보다 먼저 솔선하여 복종한다면 저들에게 신뢰를 받을 것이다. 만약 당나라, 원나라 때의 예전 일처럼 우리 자제들을 청나라에 파견하여 학교에 입학하고 벼슬도 할 수 있게 하고, 장사치들의 출입도 금하지 말도록 저들에게 간청한다면, 저들도 자기네에게 친근하고자 하는 우리를 보고 반드시 기뻐하여 이를 허락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나라의 자제들을 엄선하여 머를 깎여 변발을 하게 하고 오랑캐 복장을 입히고 선비들은 빈공과에 응시하고, 일반 사람들은 멀리 강남까지 장사를 하게 만들어서 그들의 허실을 엿보고 한족의 호걸들과 결탁한다면, 천하를 도모할 수 있을 것이며 나라의 치욕도 씻을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명나라 황족의 후손을 찾지 못하면, 천하의 제후들을 인솔해서 하늘에 임금이 될만한 사람을 천거하여, 잘만 되면 대국의 스승이 될 것이며, 못 되어도 성씨가 다른 제후국가 중에서는 제일 큰 나라로서의 지위는 잃지 않을 것이다."

이 대장이 낙심하고 허탈해서 말했다.

"사대부들이 모두 예법을 삼가 지키고 있거늘, 누가 기꺼이 머리를 깎고 오랑캐 옷을 입으려고 하겠습니까?"

허생이 대갈일성하며,

"도대체 사대부라는 게 뭐 하는 것들이냐? 오랑캐 땅에서 태어난 주제에 자칭 사대부라고 뽐내고 앉았으니, 이렇게 어리석을 데가 있느냐? 입는 옷이란 모두 흰 옷이니 이는 상복이고, 머리는 송곳처럼 뾰족하게 묶었으니 이는 남쪽 오랑캐의 방망이 상투이거늘, 무슨 놈의 예법이란 말인가?

번오기는 원한을 갚기 위해 자신의 머리를 아끼지 않고 내주었고, 무령왕은 자기 나라를 강하게 만들기 위해 오랑캐 복장을 입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지금 명나라를 위해서 복수를 하려고 하면서도 그까짓 상투 하나를 아까워한단 말이냐. 장차 말을 달려 칼로 치고 창으로 찌르며, 활을 당기고 돌을 던져야 하는 판에 그 따위 너풀거리는 소매를 바꾸지 않고서, 그걸 자기 딴에 예법이라고 한단 말이냐?

내가 처음에 너에게 세 가지 계책을 일러 주었거늘, 도대체 너는 한 가지도 가능한 일이 없다고 하니, 그러면서도 신임을 받는 신하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 그래, 신임받는 신하라는 게 고작 이런 것이냐? 이런 자는 목을 잘라야 옳을 것이니라."

하고 좌우를 둘러보며 칼을 찾아서 찌르려고 하였다. 이 대장은 깜짝 놀라서 일어나 뒷문으로 뛰쳐나가 재빠르게 달아났다.

이튿날 다시 찾아갔더니 집은 이미 텅 비어 있고, 허생은 간 곳이 없었다.


456 청나라가 처음 일어났을 때는 한족을 포로로 잡으면 잡는 대로 반드시 머리를 깎았다. 그러나 정축년의 회맹에 따라 우리나라 사람들의 머리는 깎지 않기로 하였다. 여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세상에 전하는 말로 청나라 사람들 중 청 태종 칸에게 조선 사람의 머리를 깎으라고 권한 사람이 많았는데, 칸은 묵묵히 듣고만 있다가 이에 응하지 않았다. 그리고 은밀히 여러 폐륵에게 말하기를,

"저 조선은 본시 예의의 나라라고 불리니, 그들은 머리칼을 아끼는 것을 자신의 목을 아끼는 것보다 더 심하게 한다. 지금 만약 그들의 사정을 무시하고 강제로 깎게 한다면 우리 군대가 철수한 뒤에 반드시 본래의 상태로 되돌릴 것이니, 차라리 그 풍속을 따르도록 해서 예의에 속박시켜 버리는 것만 못할 것이다. 저들이 만약 우리의 풍속을 배운다면 말을 타고 활을 쏘는 데 편리해질 것이니, 그건 우리에게 이로운 게 아니다."

하고는 드디어 논의를 중지시켰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처지에서 논해 본다면 그보다 더 큰 다행이 없을 터이고, 저들의 계산을 따져 본다면 다만 우리나라를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아주 문약하게 길들이려는 속셈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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