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 비극의 탄생
- 책 밑줄긋기/책 2012-22
- 2014. 3. 21.
비극의 탄생 -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박찬국 옮김/아카넷 |
역자 서문
자기비판의 시도
음악정신으로부터의 비극의 탄생
역자 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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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7
자기 비판의 시도
1
문제적인 이 책의 근저에 놓여 있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가장 중요하고 가장 매력적인 문제였음에 틀림없다. 그뿐만 아니라 그것은 필자의 개인적 관심사였기도 하다. 이 점은 이 책이 쓰인 시기가 입증한다. 이 책은 1870~1871년에 걸친 프로이센-프랑스(보불) 전쟁의 격동기 속에서, 격동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쓰여졌다. 뵈르트 전투의 포성이 유럽 전체를 휩쓸고 있는 동안 사색과 수수께끼를 좋아하는 이 책의 저자는 알프스 산속의 어느 모퉁이에 앉아서 사색과 수수께끼에 골몰하고 있었고, 이 때문에 전황에 대해서 매우 근심을 품기도 했지만 동시에 무관심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리스인들에 대한 자의 생각을 적어 나갔다. 이것이 이 뒤늦은 서문(또는 후기)이 덧붙여지는 기묘하면서도 이해하기 어려운 이 책의 핵심을 이루게 된다. 그 뒤 몇 주가 지나서 저자는 메츠의 성벽 아래에 있었지만, 그리스 인과 그리스 예술의 이른바 '명랑성'에 대해서 오랫동안 품었던 의문은 여전히 풀리지 않은 채 있었다. 베르사이유에서 평화협상이 열리던, 긴장이 극도에 달하던 그 달에 그는 {그러한 의문을 풀면서} 마침내 평화를 얻게 되고 전쟁터에서 얻은 병에서도 점차 회복되면서 '음악정신으로부터의 비극의 탄생'이란 사상을 최종적으로 정립하게 되었다. 음악으로부터? 음악과 비극? 그리스인들과 비극적 음악? 그리스인들과 염세주의의 예술작품? 이제까지의 인간들 중에서 가장 성공했으며 아름답고 가장 많은 부러움을 받았으며 우리를 삶으로 가장 강력하게 유혹하는 민족이 그리스인들인데- 뭐라고? 바로 이들이 비극을 필요로 했다고? 더 나아가 - 예술을 필요로 했다고? 무엇을 위한 것인가 - 그리스 예술은?
사람들은 이로써 삶의 가치에 대한 커다란 의문부호가 어디에 찍히게 되었는지 헤아릴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염세주의란 인도인들의 경우에서 보는 것처럼 그리고 아무리 살펴보아도 우리 '근대'인과 유럽인에서 보는 것처럼 반드시 몰락, 퇴폐, 실패, 지치고 약화된 본능의 표시인가? 강함의 염세주의는 존재하는가? 행복으로부터, 넘쳐나는 건강으로부터, 그리고 생의 충만함으로부터 비롯되는, 삶의 가혹함과 두려움 그리고 삶의 악함과 문제적인 것에 대한 지적인 욕구는 존재하는가? 우리의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것을 적으로 만나기를 원하는 도전적인 용기, 즉 자신의 힘을 시험해 볼 수 있는 호적수로서 만나기를 원하며 이 적에게서 '두려워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기를 원하는 가장 날카로운 눈초리를 가진 도전자의 용기는 존재하는가? 가장 훌륭하고 가장 강하며 용감했던 시대의 이 그리스인들에게 비극적 신화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리고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라는 무시무시한 현상은? 이 현상에서 탄생한 비극이란 또한 무엇을 의미하는가? 반면에, 비극을 사멸케 한 도덕에서의 소크라테스주의, 이론적 인간의 변증법과 자기만족과 명랑성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떤가? 바로 이 소크라테스주의야말로 몰락과 피곤, 병 그리고 무질서하게 해체되어 가는 본능의 징조이지 않을까? 그리고 후기 그리스 문화의 '그리스적 명랑성'이 단지 황혼에 불과하다면? 단지 고통받는 자의 조심성에 불과하다면? 그리고 학문 자제 우리의 학문 아니 모든 학문을 삶의 징후로서 볼 때 그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모든 학문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조금 더 심하게 말해서 모든 학문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어쩌면 학문은 염세주의에 대한 두려움이자 그것으로부터의 도피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진리에 대한 세련된 정당방위가 아닐까? 그리고 도덕적으로 말하자면 비겁이나 허위와 같은 것은 아닐까? 비도덕적으로 말하자면 교활함이 아닌가? 오오, 소크라테스여, 소크라테스여, 혹이 이것이 그대의 비밀이 아니었던가? 오오, 비밀에 찬 반어의 대가여, 그것은 혹시 그대의 아이러니가 이었는가?
47-62
음악의 정신으로부터 비극의 탄생
1
예술의 발전은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이중성과 결부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은 생식이 지속적으로 투쟁하면서 단지 화합하는 남녀 양성에 의존하는 것과 유사하다. 우리가 이러한 사실을 논리적으로 통찰할 뿐 아니라 직접적으로 확실하게 직관하게 된다면 미학에 큰 소득이 될 것이다.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라는 위의 명칭들을 우리는 그리스인들에게 빌려왔다. 그리스인들은 자신들의 예술관의 심오하고 비밀스런 가르침을 기념을 통해서는 아니더라도 자신들이 신봉하는 신들의 세계에 대한 극히 명료한 형상들을 통해서 통찰력 있는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있다. 그리스 세계에서는 조형 예술가의 예술인 아폴론적인 예술과 디오니소스의 예술인 비조형적인 음악예술이 기원과 목적이란 점에서 크게 대립하고 있다는 우리의 의식은 그리스인들이 신봉했던 두 예술신인 아폴론과 디오니소스에 결부되어 있다. 서로 성격을 달리하는 이 두 종류의 충동들은 대체로 공공연히 대립하면서 서로가 항상 새롭고 보다 힘 있는 탄생물을 낳도록 자극하면서 평행성을 이루며 나아간다. 이러한 탄생물들 속에서 저 대립의 투쟁은 영원히 계속되며, '예술'이라는 공통의 단어가 이러한 대립을 단지 외견상으로만 연결시켜 줄 뿐이다. 그 두 충동들은 그리스적인 '의지'의 어떤 형이상학적인 기적을 통해서 결국에는 서로 짝을 맺게 되며, 이러한 결혼을 통해서 최종적으로 아폴론적이면서도 디오니소스적이기도 한 아티카 비극 작품이 산출되는 것이다.
그 두 충동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것들을 우선 꿈과 도취라는 서로 분리된 예술세계로서 생각해보자. 이 두 생리학적 현상들 사이에는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 사이의 대립과 같은 대립이 발견된다. 루크레티우스의 생각에 의하면, 인간의 영혼 앞에 신들의 장엄한 형상이 나타났던 것은 꿈속에서였다. 위대한 조형 예술가는 꿈 속에서 초인적인 존재들의 매혹적인 몸을 보았다. 그리고 그리스의 시인은 시적 창조의 비밀에 대한 질문을 받는다면 마찬가지로 꿈을 상기하면서, 한스 작스가 직장가수란 노래에서 읊고 있는 것과 유사한 가르침을 주었을 것이다.
친구여, 자신의 꿈을 해석하여 기록하는 것,
바로 그것이 시인의 일이다.
맹세코 말하지만, 인간의 가장 참된 환상은
꿈 속에서 나타난다.
모든 문학과 시는
참된 꿈의 해석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은 꿈의 세계를 산출한다는 점에서 완전한 예술가이다.
그리고 이러한 꿈의 세계의 아름다운 가상이야말로 모든 조형예술의 전제이며, 우리가 나중에 보게 될 것처럼 시문학의 중요한 절반을 차지하는 것{서사시}의 전제조건이기도 하다. {꿈 속에서} 우리는 형상을 직접적으로 이해하면서 즐기며 모든 형태들이 우리에게 말을 걸어온다. 거기에는 중요하지 않는 것과 필요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이러한 꿈의 현실에서 나타나는 최고의 삶에서도 우리는 그것이 가상이라고 어렴풋하게 느낀다. 적어도 내 경험은 그렇다. 이러한 경험이 자주 일어난다는 것, 아니 그것이 정상이라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서 나는 많은 증거와 시인들의 말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는 철학적인 인간은 우리가 그 안에서 살아가고 존재하는 이 현실의 이면에는 또 하나의 완전히 다른 제2의 현실이 숨겨져 있으며, 따라서 우리가 그 속에서 살고 있는 이 현실조차도 하나의 가상이라는 예감을 갖고 있다. 그리고 쇼펜하우어는 때때로 인간과 사물들을 한갓 환영이나 꿈 속의 형상으로 볼 수 있는 재능을 철학적 능력의 특징으로 간주하고 있다. 예술적으로 예민한 감각을 갖는 사람은 철학자가 실제의 현실을 대하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꿈의 현실을 대한다. 그는 꿈의 현실을 면민하게 그리고 즐거운 마음으로 주시한다. 왜냐하면 그는 {꿈속의} 이러한 형상들로부터 삶을 해석하고, {꿈 속의} 이러한 사건들에 의거해서 삶의 훈련을 하기 때문이다. 그가 완전한 분별력을 지니고 자신의 꿈속에서 경험하는 것은 결코 유쾌하고 즐거운 형상들은 아니다. 심각한 것, 음울한 것, 암단한 것, 뜻밖의 장애, 우연의 조롱, 불한한 기대, 간단히 말해서 삶의 '신곡' 전체가 지옥편과 함께 그의 곁을 스쳐 지나가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그림자극처럼 스쳐 지나가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가 이러한 장면들 속에서 함께 살고 함께 괴로워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가상이라는 어렴풋한 느낌이 존재한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나처럼 꿈 속에서 위험이나 공포에 직면했을 때 용기를 내어 '이것은 꿈이다! 이 꿈을 더 꾸어 보자!'라고 외치면서 위험과 공포를 이겨낸 적이 있음을 기억할 것이다. 나는 사흘 밤 동안, 아니 그 이상 동안 하나의 꿈을 그 줄거리를 계속 이어 가면서 꿈꿀 수 있었던 사람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우리의 가장 깊은 본질, 우리 모두의 공통된 기반이 꿈을 꿀 때 필연적으로 깊은 쾌감과 기쁨을 느낀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꿈의 경험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기쁨을 그리스인들도 아폴론 신이라는 형상 속에 표현했다. 모든 조형력의 신인 아폴론은 예언의 신이기도 하다. 어원에 따르면 '빛나는 자', 빛의 신을 의미하는 그는 내면의 환상세계의 아름다운 가상까지도 지배한다. 대낮의 현실이 불완전하게만 이해되는 것에 반해 내면의 환상세계는 보다 높은 진리와 완전성을 갖는다. {내면의 환상세계가 갖는} 이러한 진리와 완전성 그리고 잠과 꿈을 통해 치유하고 도와주는 자연의 깊은 의식은 예언의 능력에 대한 상징적 유사물(das symbolische Analogon)이자 삶을 가능하게 하고 가치 있게 만드는 예술에 대한 상징적 유사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꿈 속의 형상이 병적으로 나타나지 않기 위해서는 넘어서는 안 되는 저 섬세하고 미묘한 선도 아폴론의 형상에 결여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고 꿈 속의 형상이 저 섬세한 선을 넘을 경우에 가상은 조야한 현실로 나타나면서 우리를 실망시킬 것이다. 저 절도 있는 한정, 광포한 격정으로부터의 자유, 조형의 신의 저 지혜에 넘치는 평정이 아폴론의 형상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의 눈은 자신의 기원에 걸맞게 '태양과 같아야만 한다'. 아폴론이 성난 눈으로 불쾌하게 바라볼 경우에도 신성한 아름다운 가상이 그에게 서리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쇼펜하우어가 마야의 베일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은 약간 벗어난 의미에서이기는 하지만 아폴론에 대해서도 타당할 것이다. "태산 같은 파도를 올렸다 내리면서 사방으로 끝없이 펼쳐진 채 포효하는 광란의 바다 위에 뱃사람 하나가 자신이 탄 보잘것없는 조각배를 믿고 의지하면서 그것 안에 앉아 있는 것처럼, 고통의 세계 한가운데에 인간 개개인은 개별화의 원리를 믿고 의지하면서 고요히 앉아 있다. 그 원리에 사로잡혀 있는 자가 그것을 굳건히 신뢰하면서 고요히 앉아 있는 자세가 아폴론의 형상에 가장 숭고하게 표현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들은 아폴론을 개별화의 원리를 상징하는 정려한 신상이라고까지 불러도 좋을 것이다. '가상'의 쾌감과 지혜 전체가 그것의 아름다움과 함께 그의 태도와 시선을 통해 우리에게 말을 거는 것이다.
같은 곳에서 쇼펜하우어는 근거율이 자신의 여러 형성물들중 어느 하나에게 어쩔 수 없이 예외를 허용해야 하는 것처럼 보여서 사람들이 갑자기 현상의 인식 형식에 대한 신뢰를 상실할 때 그들을 엄습하게 되는 엄청난 전율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개별화의 원리가 이런 식으로 부서지면, 인간의, 아니 자연의 가장 깊은 근저로부터 환희에 찬 황홀감이 용솟음친다. 앞에서 언급한 전율에 이러한 황홀감을 덧붙일 경우에 우리는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본질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본질은 도취라는 현상을 실마리로 하여 가장 쉽게 설명될 수 있다. 모든 원시인이나 원시 민족이 자신들의 찬가에서 말하는 마취성 음료의 작용을 통해서 혹은 자연 전체를 환희로 채우면서 스며드는 강력한 봄기운을 통해서 저 디오니소스적인 흥분을 일깨운다. 이 흥분이 고조되면서 주체적인 것은 완전한 자기망각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중세 시대의 독일에서도 동일한 디오니소스적인 강력한 힘에 사로잡혀서 갈수록 늘어나는 군중들이 노래하고 춤추면서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휩쓸려 다녔다. 성 요한제나 성 파이트제의 난무하는 이 군중에서 우리는 그리스인의 바쿠스제 합창단의 옛 모습을 엿볼 수 있지만, 이것은 소아시아에 전사를 갖고 있으며 바빌론과 광란 상태에 빠졌던 사카이엔 족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경험의 결여나 둔감 때문에 자신은 건강하다고 생각하면서 그러한 현상들을 '민중들의 병'으로 치부하고 조소하고 경멸하면서 그것들을 외면하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이 불쌍한 사람들은 디오니소스적인 열광자들의 벌겋게 불타는 생명이 그들 곁을 요란하게 지나갈 때 자신들이 자랑하는 '건강성'이 얼마나 시체처럼 보이고 유령처럼 보이는지를 느끼지 못한다.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마력 아래서는 인간과 인간의 결합만이 다시 회복되는 것이 아니다. 소외되고 적대시되어 왔거나 억압되어 온 자연도 자신의 잃어버린 탕아인 인간과 다시 화해의 축제를 벌이게 된다. 대지는 자신의 선물들을 보내고 암벽과 사막의 맹수들은 온순하게 다가온다. 디오니소스의 수레는 꽃과 화환으로 뒤덮이고 그 멍에를 지고 표범과 호랑이가 걸어간다. 베토벤의 '환희'의 송가를 한 폭의 그림으로 바꾸어 보라. 수백만의 사람들이 전율하면서 먼지 속에 엎드릴 때 위축되지 말고 자신의 상상력을 펼쳐보라. 그러면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본질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노예는 자유민이다. 이제 곤궁과 자의 혹은 '뻔뻔스런 작태'를 인간들 사이에 심어놓은 완강하고 적대적인 모든 제한이 파괴된다. 세계의 조화라는 복음 속에서 사람들은 이제 이웃과 결합하고 화해하며 융합하고 있다고 느낄 뿐 아니라, 마야의 베일이 갈기갈기 찢어져 신비로운 근원적 일자 앞에 펄럭이고 있는 것처럼 이웃과 하나가 되고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노래하고 춤추면서 인간은 자신이 보다 높은 공동체의 일원임을 표명한다. 그는 걷는 것도 말하는 것도 잊어버리고 춤을 추면서 허공으로 날아오르려 한다. 그가 마법에 걸려 있음이 몸짓에서 나타난다. 이제 동물들도 말을 하고 대지에는 젖과 꿀이 흐르는 것처럼 인간에게도 초자연적인 것이 울려 퍼진다. 인간은 자신을 신으로 느끼며, 그가 꿈 속에서 신들이 거니는 것을 본 것처럼 이제는 그 자신이 황홀해지고 고양되어 거니는 것이다. 인간은 더 이상 예술가가 아니며 그는 예술작품이 되어 버린다. 근원적 일자가 환희에 찬 최고의 만족을 누리기 위해서 자연 전체의 예술적 힘이 도취의 전율 속에서 자신을 계시한다. 가장 귀한 점토이자 가장 값진 대리석인 인간이 이제 반죽되고 조각된다. 그리고 디오니소스적 세계 예술가의 끌 소리에 맞추어 엘레우시스의 비밀 종교의식의 외침이 울려 퍼진다. "그대들은 무릎을 꿇는가? 세계여, 그대는 창조주를 예감하는가?"
85
지금까지 나는 이 논문의 서두에서 말했던 것을 더욱 상세하게 서술했다. 정리해 보자면, 디오니소스적인 것과 아폴론적인 것은 항상 새롭게 잇달아 탄생하면서 서로를 고양시켜 가면서 그리스 본질을 지배해 왔다. 거인들의 전쟁과 가혹한 민간철학이 풍미했던 '청동' 시대로부터 아폴론적인 미의 충동에 의해 지배되면서 호메로스적 세계가 생겨났다. 이러한 '소박한' 장려함은 도도히 침입해 오는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물결에 다시 삼켜져 버린다.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힘에 대항하여 아폴론적인 것이 대두하여 부동의 존엄성을 갖는 도리스 예술과 세계관으로 자신을 고양하게 된다. 이런 식으로 그리스의 역사는 저 적대적인 두 원리의 투쟁 속에서 네 개의 커다란 예술적 단계로 구분되지만, 우리가 위에서 말한 마지막 단계, 즉 도리스 예술의 단계를 저 예술충동들의 정점이자 목적으로 간주하지 않을 경우 우리는 계속해서 이러한 생성과 활동의 최후의 계획이 무엇인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리하여 여기에서 아폴론과 디오니소스라는 두 예술충동의 공통의 목표로서 아티카 비극과 극 형식의 주신찬가의 높이 기려지고 숭고한 예술작품이 우리들의 시야에 등장하게 된다. 이전의 오랜 투쟁 끝에 성취되는 두 충동의 신비로운 결혼은 이러한 자식의 모습으로 나타나면서 영광으로 장식되었다. 그러한 자식은 안티고네이면서 동시에 카산드라이기도 하다.
99
주체가 예술가인 한 그는 이미 자신의 개인적 의지로부터 해방되어 있으며, 진실로 존재하는 주체{세계영혼}가 가상 속에 자신을 구원하는 것을 자축하는 것을 돕는 매체가 된다. 예술이라는 희극 전체는 우리를 위해서, 즉 우리들의 향상이나 고양을 위해서 상연되는 것이 결코 아니며 우리가 저 예술세계의 진정한 창조자가 아니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굴욕이 되면서도 우리를 우쭐하게 하는 것이지만,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그 사실을 분명히 명심해야 한다. 이미 형상이고 예술적인 투영이며 예술작품이 갖는 의의 속에서 우리의 최고의 품위를 갖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여도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삶과 세계는 미적 현상으로서만 정당화되기 때문이다 - 그렇지만 물론 우리가 갖는 이러한 중요성에 대한 우리의 의식은 화폭 위에 그려진 군인이 그림 속의 전투에 대해서 갖는 의식과 거의 다를 바가 없다. 따라서 예술에 관한 우리의 지식 모두는 근본적으로 완전히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식하는 자로서의 우리는 저 예술이라는 희극의 유일한 창조자이자 관객으로서의 영원한 즐거움을 누리는 저 존재{세계영혼}와 일체도 아니고 동일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다만 천재가 예술적 창조행위를 통해서 세계의 저 근원적 예술가와 융합되는 한에서만 그는 예술의 영원한 본질에 대해서 약간이라도 아는 바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저 융합된 상태에서 천재는 기묘한 방식으로, 즉 옛날이야기 속의 섬뜩한 인물과 유사하게 눈알을 돌려서 자신을 관조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이제 그는 주체인 동시에 대상이고, 또 동시에 시인이자 배우이며 관객이기도 한 것이다.
124
마법에 걸리는 것이 모든 극예술의 전제이다. 이렇게 마법에 걸린 상태에서 디오니소스적 열광자는 자신을 사티로스로 보고 사티로스로서 그는 다시 신을 바라본다. 즉 그는 사티로스로 변신한 가운데 자신의 상태의 아폴론적 완성으로서 새로운 환영을 자기 밖에서 보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환영에 의해서 연극은 완성되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에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 비극을, 아폴론적 형상 세계 속에 항상 새롭게 거듭해서 자신을 방출하는 디오니소스적 합창으로 이해해야만 한다. 따라서 비극이 철저하게 연관되어 있는 저 합창단이 이른바 전체 대화, 즉 무대세계 전체, 연극 자체의 모태인 것이다. 차례로 이어지는 여러 번의 방출 속에서 비극의 이러한 근원적 근거는 연극의 저 환영을 방사한다. 이러한 환영은 전적으로 꿈의 현상이며, 따라서 서사적 성격을 갖는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디오니소스적 상태의 객관화로서, 가상 속에서의 아폴론적인 구원이 아니라 정반대로 개체의 파괴와 개체의 근원적 존재와의 합일을 표현한다. 연극은 디오니소스적 인식과 활동의 아폴론적 구체화이며, 이 때문에 서사시와는 거대한 계곡을 통해서 분리되는 것이다.
그리스 비극의 합창단은 디오니소스적으로 흥분된 대중 전체의 상징이다. 이렇게 파악함으로써 우리는 합창단을 완전히 설명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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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성된 연극과 그것의 음악 사이에서 작용하는 예정조화에 의하여 연극은 언어연극이 보통은 도달하기 어려운 최고의 가시성에 도달하게 된다. 무대 위의 생생한 모든 인물들은 자율적으로 움직이는 한 줄기 선율이 되어서 우리 앞에서 하나의 선명한 곡선으로 단순화된다. 이렇게 하여 만들어진 여러 선들은 서로 얽혀서, 사건의 진행과 미묘하게 공명하면서 교체되는 화음으로 우리들에게 들려온다. 이러한 화음의 교체를 통해서 사물들의 관계가 우리에게 추상적인 방식으로가 아니라 감각적으로 지각 가능한 방식으로 직접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우리는 또한 이러한 관계 속에서 등장인물의 본질과 한 줄기 선율의 본질이 순수하게 드러난다는 사실을 화음의 교체를 통해서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음악이 우리가 보통 때보다 더 많이 그리고 더 내면적으로 보게 하고 무대 위의 사건을 섬세한 직물처럼 우리 앞에 펼쳐지게 하는 동안에, 내면을 들여다보는 우리의 정신화된 눈에게 무대의 세계는 무한히 확대되는 동시에 내면으로 비추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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