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상윤: 현상윤의 조선사상사


현상윤의 조선사상사 - 10점
현상윤 지음, 이형성 교주/심산


교주자 서문 5 

서문 9 


서론 _ 19 

제1편 상 고 

제1장 신도사상 _ 25 

제2장 화랑도 _ 33 

제3장 유학사상의 수입과 그 해득 _ 49 

제4장 불교사상의 전래와 그 홍포 _ 57 

제5장 삼국시대의 불법 경향과 명승 _ 63 

제6장 통일신라시대 이후의 불법과 명승 _ 88 

제7장 도교사상의 유입 _ 104 

제8장 상고시대의 제반 문화사상 _ 113 


제2편 중 고 

제1장 고려시대의 사상 생활과 불교 _ 123 

제2장 고려시대의 명승과 그 사상 _ 134 

제3장 고려불교의 말폐 _ 222 

제4장 고려시대의 유교사상 _ 245 

제5장 고려시대의 신도사상과 그 변천 _ 259 

제6장 고려시대의 도교사상과 그 추이 _ 265 

제7장 참위사상의 유행 _ 269 

제8장 고려시대의 제반 문화사상 _ 279 


제3편 근 세 

제15장 조선시대 불교의 총설 _ 287 

제16장 조선시대의 고승과 그 사상 _ 294 


부록 1. <조선사상사> 총목차 427 

부록 2. 현상윤의 연보 437 

참고 문헌 440 

인명 찾아보기 449





9 서문

사상사(思想史)를 쓰는 데 있어서 두 개의 사실을 발견할 수 있으니, 일(一)은 쓰는 그 역사가 주마등(走馬燈)처럼 시대사상이 오고 가는 사실을 적는 단순한 기사적 기록이 되는 일이요, 이(二)는 비록 사상이 변천할지라도 항상 사상의 주체가 되는 인민(人民)은 그 잔존물을 소화하고 섭취하여 새 근육과 새 골격을 만들어 무형무취(無形無臭)한 가운데서 어떤 개념이 생장발달(生長發達)하는 것을 적는 어떤 전통에 대한 기록이 되는 일이다. 그런데 나는 이 <조선사상사(朝鮮思想史)>를 쓸 때 단순히 전자만을 목표로 하지 아니하고 될 수 있는 대로 후자의 그 무엇을 발견하고 붙잡으려 하였다. 즉 신도사상(神道思想)이 쇠(衰)하자 불교가 들어오고 도교가 들어오며 유교가 행(行)하고 또 그것이 쇠하자 기독교가 들어왔다는 것을 번갈아 소개하고 기술하는 것만이 나의 목표가 아니요, 될 수 있는 대로는 이 여러 사상이 소개되고 유행하는 동안에 이것을 저작(詛嚼)하고 소화하며 흡수, 섭취하여 새 피와 새살을 만든 조선 사람의 전통적 개념을 발견하고 붙잡으려 하는 것이 나의 희망이었다.

그러나 조선에는 사상에 서로 관련이 없다. 그리하여 한 개의 사상에 대하여 서로 비평하고 반대하며 또 서로 지지하고 접응(接應)하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다만 '불(佛)'이면 '불'에 '유(儒)'면 '유'에 충실할 뿐이요, '불이 '유'에 관련하며 '유'가 '불'의 영향을 받아 서로 전후에 호응하며 피차에 교류하는 것이 없었다. 그리고 그뿐만 아니라 또 조선 사상가에게는 저서가 적다. 그리하여 비록 사상계를 지배하며 대표하는 인물이라 할지라도 그 사상에 대하여 무슨 저술이 드물다. 즉 다시 말하면 일부 유교 방면을 제하고는 어떤 사상에 대하여 조선 사람의 감상이나 의견을 발표한 것이 극히 적다. 또 다시 말하면 내 사상과 내 소리를 발표한 것이 적다. 그리하여 다만 그 사상가들은 한갓 남의 소리를 전하고 포고(布告)함에 충실하였을 뿐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기록은 오직 행장식(行狀式) 생장록(生長錄) 전기(傳記)가 될 뿐이요, 사상의 방식이나 본질에 무슨 보탬이 될 만한 문자는 전혀 찾아볼 도리가 없었다.

따라서 조선사상에 있어서 후자의 목표, 즉 전통적 개념을 포착하고 추구하는 것은 극히 곤란한 일이 된다. 그리하여 저절로 이것을 쓴 사람은 전자의 목표, 즉 기사적 기록에 모종(某種)의 만족을 강요 당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나는 최초의 나의 기도(企圖)도 그만 실패하였다는 것을 여기서 솔직하게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느낌을 가지고 이 졸저(拙著)를 보아주면 독자는 전후(前後)의 두 사실을 그 냄새만이라도 맡을 수 있을 것이니, 과히 낭패(狼狽)되는 일은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단기 4282년 12월 12일

著者 識


21

3. 조선사상과 그 발달의 개관

조선사상의 발달을 역사적으로 개관해보자. 상고시대부터 오늘날까지 오는 동안에 사상 생활의 방식이나 내용을 대략 한마디로 평하면, 종교적 단계에서 철학적 단계를 거쳐 종교적•철학적•과학적 병립단계로 발전하였다고 볼 수 있다. 즉 고대에는 민지(民智)가 미개하고 사상이 단순하므로 인민 각자가 모두 다 자기의 부족, 자기의 불완전, 자기의 무력 등을 알며, 또 자아 가치의 과소함을 알았다. 그러므로 반드시 절대자를 찾아 의빙(依憑)하고 절대자의 보호와 지도를 구하려는 요구가 강렬하여, 모든 사상 활동을 이 절대자의 발견과 존숭과 신앙에 대한 체험 봉사에 집중하였다. 그리하여 이 시대에 인민들의 정신적 요구는 주로 감정을 만족시키는 데 있었다. 그러나 시대가 진전됨에 따라 민지가 점차로 열리고 사유 능력이 또 발달하여, 인민은 자아 가치를 점점 높이 평가하며, 자아의 능력을 어느 정도로 인정하고 또 신뢰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존재와 가치에 대하여 정당한 인식을 발견하려 하며, 인생살이의 의의를 깨닫고 선의 실현을 구하려는 요구가 절실해졌다. 점차 인민은 이성적 만족을 구하게 되었고, 모든 사상 활동은 점차 철학적 사유로 변하게 되었다. 이제 실례를 들어 이것을 설명하면, 신도(神道)나 불교 사상은 전자 즉 종교적 단계에서 조선사상을 대표한 것이고, 유교 특히 성리학 사상은 후자 즉 철학적 단계에서 조선상을 대표한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사상 생활의 활동과 교섭이 세계적으로 확대되었다. 이에 따라 인생살이에서의 정신생활은 어느 일부분만의 활동으로 만족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그 정신의 전적인 활동이 있어야 비로소 만족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조선 사람들은 정신생활에서 한편으로는 종교적 신앙을 구하는 동시에 철학적 활동과 과학적 활동을 아울러 요구하게 되었다. 이것이 오늘날 조선 사람들의 사상생활의 전반적 실정이다.

 

49 조선 상고시대에 중국 한나라(漢土)의 유학을 수입하게 된 데는 몇 가지 유래와 이유가 있다.

첫째, 상고시대에는 여러 개의 부락적 소국이 합하여 지역적 대국이 되었다. 그런데 시대가 진전됨에 따라 사회가 점차 복잡해지고 인지 또한 개발되어, 단순히 신벌(神罰)의 공포나 신도의 계명만으로는 인심의 안정과 질서를 유지하기 곤란해졌다. 반드시 체계가 있고 조리가 있는 합리적 이론에 따라 사회질서의 인위적 조정을 가르치는 새로운 도덕이 필요해졌다. 이에 따라 사람들은 인의를 가지고 서로 대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으니, 우선 부모에게는 효도하고 인군에게는 충성하며, 장유는 차서가 있으며 부부는 유별하며 붕우는 신의를 지켜야 한다고 하는 유학의 오륜사상이 가장 먼저 시대적 요구에 응하여 만인의 환영을 받게 된 것이다.

둘째, 시대의 발전에 따라 조선 고대의 각 국가에도 나날이 국가의 형태가 정돈되고 정치의 체제와 내용이 충실해지기를 바라고 도모하려는 기운이 농후하였다. 이때에 이웃나라의 선진제도와 전장문물을 참고하여 또 수입하려 할 것은 그 사리와 형세가 진실로 그러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당시 중국에서 한나라와 당나라에 걸쳐 실시되던 유학 중심의 제반 제도를 수입할 필요성이 가장 절실했던 것이다. 

셋째, 당시 조선은 중국과 영토를 접할 뿐만 아니라 위만조나 한사군의 영향으로 일용사물과 일상생활에 부지불식간에 고구려 초기부터 한자를 문자로 사용하게 되었다. 이 한자의 매개로 한나라에서 널리 유행하던 유학사상이 부지불식간에 저절로 유입된 것이다.


61 조선은 이 같이 국내에서 불교를 신봉할 뿐만 아니라, 또 멀리 외국에서까지 그 교법을 전하여, 당시 삼국은 다투어 일본에 불경과 불상과 승려를 보내어 교리를 가르쳐주었으니, 이것이 곧 일본 불교의 시작이 되는 것이다.

이 같이 불교가 조선사상계에서 성행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또 유교는 불교보다도 먼저 전래되었음에도, 불교에게 우위를 내준 것은 무슨 까닭인가?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는 듯한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유교사상은 그 교리가 주로 이지적이어서 윤리도덕을 많이 말하는 데 비하여 불교사상은 주로 감정적이어서 생명과 심령을 많이 말하며, 또 그 교도의 방법이 유교는 계급적 귀족적인 데 비하여 불교는 무차별적 평민적이다.

둘째, 당시 삼국은 해마다 상호 간에 또 이웃나라인 수나라•당나라와 침략과 전쟁을 계속하여, 생사유전이 점점 심하여 생명•재산과 사회 인심에 불안한 변화가 많았으므로, 불교의 설법이 다른 사상에 비하여 한층 많은 위안과 동정을 줄 수 있었던 것이 그 중요한 이유인 듯하다.


88 통일신라시대는 바로 중국의 성당시대에 해당하는데, 중국의 불교는 당나라 시대가 그 전성기였다. 원래 불교가 중국 동한 시절에 처음으로 중국에 전래하였을 때에는, 불교에 대한 민중의 이해가 부족하여, 무엇이 무엇인지 그 교리를 잘 알지 못하였다. 그리하다가 남북조 시대에 구라마집이 서역에서 중국으로 와서 장경의 번역을 시행한 후부터는, 중국의 민중이 비로소 불교를 연구하고 이해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는 중에 당나라 초기에 이르러 현장이 서역에서 돌아와 또 다시 다수의 장경을 번역하니, 중국의 민중은 신구의 양역(兩譯)으로 인하여 불교를 연구하고 학득하는데 대단히 편의를 얻게 되었다. 당나라 시대는 바로 이 역경 시대를 경과한 이후로, 마치 막혔던 문이 열리듯이 명승과 고승이 곳곳에서 배출되었다. 그들 가운데는 여러 경전의 심오한 뜻과 수도의 방법을 연구하는 자가 많아서, 불교 전래 이후에 법계(法界:불교)가 가장 융성하였다.

그러나 연구가 있으면 반드시 비판과 비교가 따르게 마련이므로, 당시 불법을 연구하던 명승들 가운데는 여러 경전의 종지를 비교하고 선택하여, 다시 그 선택된 종지에 따라 수도의 방법을 다르게 주장하는 자가 적지 않았다. 이것이 곧 종파(宗派)의 구별이 생기게 된 유래다. 그리하여 당나라 시대에는 불교도들 사이에 여러 종파가 생겨 각자의 신조와 전통을 내세우게 되었다. 원래 불교의 교파를 크게 구별하면 대승과 소승의 두 파가 있다. 소승은 이기(利己)를 주장하고 대승은 이타(利他)를 주장하기 때문에 소승은 대승에 비하여 민중의 환영을 받지 못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소승은 옛날 인도에서 성행했을 뿐이요, 중국이나 조선에서 널리 성행한 것은 오직 대승의 교파뿐이었다.


104 도가 사상과 도교 사상은 그 본질이 서로 다른 것이다. 본래 도가 사상은 노자가 주창한 사상인데, 무위자연을 이상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일종의 허무주의 사상이다. 이제 그 학설을 살펴보면

    큰 도가 없어지자 인과 의가 있고, 지혜가 나오자 큰 거짓이 있고, 육친(六親)이 불화하자 효도와 자애가 있고 국가가 혼란하자 충신이 있다.

고 하여, 인과 의나 효자충신은 무위자연의 이상에 위반하는 인위적 수단에 불과한 것이라고 말한다. [...] 그러나 이 도가 사상은 후일에 와서 도교 사상으로 발전하였다. 도교 사상은 도가 사상과 본질을 달리하는 것으로 변하였다. 즉 도교는 불교가 해동에 전래한 후에 불교의 자극과 영향을 받아, 하나의 종교를 형성한 것이다. 도가는 허무를 주로 하여 생사를 초월하는 데 반하여, 도교는 장생불로를 목적으로 하여 복식•금주와 비법•방술을 수단으로 삼았다. 그리고 질병과 재액을 금주로 제불하며, 양생과 양기를 신약과 방술로 기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노자를 본존으로 알아 도교를 신앙하고 존승하는 것은 도가 시대와 다름이 없다.


247 고려시대 유학계의 학풍은 두 종류로 구별할 수 있다. 첫째는 한당류(漢唐流)의 학풍이요, 둘째는 송학류(宋學流)의 학풍이다. 즉 고려시대 초중엽에는 한당류의 학풍이 유행했고, 그 말엽에는 송학류의 학풍이 유행한 것이다.

그리하여 먼저 고려시대의 초중엽에는 유학자들이 힘쓰는 바가 또한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훈고(訓誥)를 중심으로 한 '경학(經學)에 통달하고 역사에 밝은(通經明史)' 학문이요, 둘째는 시문(詩文)을 연마(硏磨)의 주안으로 하는 '문장'의 학문이었다. 즉 전자의 학문은 성현의 교훈과 치란의 역사를 알아 치국안민에 힘쓰고자 하는 것이며, 후자의 학문은 시문을 해독•감사하며 또 좋은 시문을 지어 예술의 취미를 맛보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그 학문의 목적이 주로 남을 위하는 데 있었으니 그 유용의 가치가 남에게 있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국가와 인민에게 잘 소용되고 쓸모 있는 인사가 되기를 힘쓰는 학문이니, 이른바 '위인지학(爲人之學)'이 이것이다. 그러기에 그네들의 태도는 내구적(內求的)이 아니요 외구적(外求的)이며 목적을 위한 것이 아니요 수단을 위한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 고려시대 말엽에는 앞에서 기술한 것과 같이 송학류의 학풍이 유행하였으나 그 유행한 정도는 심이 그 심도가 얇고 그 경향이 희미하여 극히 대체의 윤곽만을 보인 것에 불과하다. 즉 이 시대의 유학자들은 성리학에 힘써 한편으로 수기정심(修己正心)하는 공부를 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 격물치지(格物致知)의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니 그들의 학문 목표를 내가 나를 위하는 이른바 '위기지학(爲己之學)'을 하는데 두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재삼 말하거니와 이때의 새 학풍은 극히 그 색채가 희박하여 진정한 의미의 '위기지학'이라 할 수 없고, 대다수 학자들은 의연하게 문장에 힘쓰고 '경학에 통달하고 역사에 밝은 것'에 힘써 유능유용한 관리가 되고 문장가가 되는데 힘썼던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의미의 송학류의 학풍은 후일 이조 중엽에 와서야 비로소 유행하게 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252 정몽주

그런데 그가 취한 정책 가운데 일대 실책이라 할 것은, 그가 정부에 원나라의 교제를 끊고 명나라에 신사(臣事)하도록 건의한 일이다. 당시 원나라가 쇠약해진 기회를 타서 원나라의 교제를 단절케 한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어떠한 침략도 해온 일이 없었음에도 독립자존의 정책을 취하지 못하고 자진하여 명나라의 정삭(正朔)을 받들어 뒤에 도래할 이조의 비굴한 대명외교의 길을 열게한 것은 그의 모화사상(慕華思想)에 기인한 실책으로서 천고에 한이 남는 일이 아닐 수 없다.


254 정도전

고려시대에 벼슬하여 관직이 정당문학과 대사성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성계를 익찬(翊贊)하여 고려를 찬탈케 하니, 이조에는 공신이 되나 고려에 대하여는 불충불의(不忠不義)의 변절신(變節臣)이 된다. 


283 기생의 유래

고려에는 양수치라고 하는 종족이 있었다. 이들은 왕 태조가 백제를 칠 때 힘들여서 사로잡은 포로의 유종이었다. 이 사람들은 일정한 호적과 부역도 없이 수초(水草)를 따라다니면서 옮겨 다니기에 떳떳함이 없었는데 오직 전렵과 유기편조를 직업으로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의 자녀 가운데 조금 자색이 있는 여인을 뽑아서 기생을 만드니 이것이 기생의 유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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