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세노폰: 헬레니카
- 책 밑줄긋기/책 2012-22
- 2014. 6. 24.
헬레니카 - 크세노폰 지음, 최자영 옮김/아카넷 |
옮긴이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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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권
제7권
내용 요약
크세노폰의 생애
크세노폰의 성격, 가치관, 작품
크세노폰의 저서『헬레니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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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I.7.11
한편, 페이시아낙스의 아들 에우립톨레모스와 몇몇 사람들은 칼릭세노스가 불법으로 표결을 제안했다고 비난했다. 일부 민중들은 이 말에 박수를 쳤으나, 많은 사람들이 민중이 원하는 대로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옳지 않은 처사라며 고함을 질렀다. 이런 상황에서 리키스코스가, 이의를 철회하지 않는다면, 이 문제도 장군들에 대한 판결과 같은 투표로 결정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군중이 다시 소동을 부리는 바람에 이들의 이의는 묵살되었다. 그런데 일부 ‘대표 행정위원’들이 이런 불법적 표결을 용납하지 않겠다고 하자, 칼릭세노스는 다시 연단으로 올라가 장군들을 비난하는 발언을 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찬성하지 않는 사람들을 고소하라고 고함을 질렀다. 소프로니스코스의 아들 소크라테스를 뺀 나머지 대표 행정위원들은 모두 겁에 질려 표결에 찬성했다. 소크라테스는 합법적이 아닌 일에는 동참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때 에우립톨레모스는 연단으로 나와 장군들을 위해 이렇게 말했다…
47 I.7.34
에우립톨레모스는 이렇게 말하면서 칸노노스 법에 따라 개인별로 표결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의회는 모두 일괄 표결로 처리하자는 반대 의견을 냈다. 처음에 표결을 했을 때는 에우립톨레모스의 제안이 가결되었다. 그러나 다음에 메네클레스가 맹서를 한 후 다시 표결했을 때는 의회의 제안이 채택되었다. 그 후 해전에 참가했던 여덟 장군은 유죄판결을 받았고, 그 자리에 있던 여섯 명이 처형되었다.
오래 지나지 않아 아테나이 인들은 후회를 하고, 민중을 현혹한 사람들을 고소하기로 하고, 재판을 받을 때까지 그들에게 보증인을 세우게 했다. 그중에는 칼릭세노스도 있었고, 또 다른 네 명도 보증인과 함께 구속되었다. 그런데 얼마 후에 모종의 소요가 일어나 클레오폰이 죽고, 나머지는 재판을 받기전에 달아났다. 그 후 페이라이에우스에 있던 사람들이 다시 (아테나이) 시내로 왔을 때 칼릭세노스도 돌아왔으나 모두의 미움을 받아 굶어 죽었다.
63 II.3.11
아테나이에서는 30명이 선출되자 곧 (아테나이와 페이라이에우스를 잇는) 장벽과 페이라이에우스 주변의 방벽을 허물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들은 통치의 기반으로 삼을 법을 기초하기 위해서 선출되었으나 자꾸만 법의 기록과 공포를 늦추었다. 그 대신 자신들을 따를 것 같은 사람들로 의회를 구성하고 다른 관리들을 임명했다. 그런 다음 민주정치 시절에 ‘험담(sykophantia)’을 일삼고 ‘훌륭한 사람(kaloi kagathoi)’들을 괴롭혔다고 생각되는 자들을 체포하여 처형했다. 의회는 기꺼이 그들에게 유죄를 선고했고, 그 밖에 자신이 거기에 속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아무 걱정을 하지 않았다…
66 II.3.23
그때 30인 일당은 테라메네스가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하는 데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를 음해하면서, 의원들 개개인에게 각기 정부를 해치는 사람으로 그를 매도했다. 그리고 가장 대담해 보이는 청년들을 동원하여 단검을 소매에 숨긴 채 의사당에 모이도록 했다. 테라메네스가 들어오자 크리티아스가 일어서서 말했다. “의원 여러분, 만일 여러분 가운데 상황에 준하는 것보다 더 많은 사람이 죽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정치체제가 변하는 곳에서는 언제나 그 같은 일이 일어난다는 점을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특히 이곳에는 정부를 과두정 체제로 바꾸는 사람들의 적이 많게 마련입니다. 이 도시에는 헬라스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살고 있으며 또 이곳 민중은 가장 오랫동안 자유로운 체제에서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와 여러분 같은 사람들에게는 민주정이 아주 나쁜 것이라고 알고 있으며, 또 민중은 우리를 구해준 라케다이몬 인들의 친구가 절대로 될 수 없으나 고귀한 사람(beltistoi)들은 언제나 그들에게 신실합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그런 (과두정) 체제를 세우게 되었습니다. 만일 과두정에 반대하는 자가 있다고 생각되면 무슨 수를 쓰든 그를 제거해야 합니다…”
74 II.4.1
테라메네스는 이렇게 죽었다. 30인은 이제 거리낌 없이 권력을 휘두를 수 있다는 생각에, (3,000인) 명단에 없는 사람들은 시내(asty)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했을 뿐만 아니라, 시골에서도 쫒아내고는 자신과 그 친구들이 그 농토를 장악했다. 페이라이에우스로 간 사람들은 거기서도 쫒겨났다. 그래서 메가라와 테바이에는 아테나이에서 온 망명객들로 가득했다. 이윽고 트라시불로스가 테바이에서 출발하여 70명 정도의 남자들과 함께 요새인 필레를 장악했다…
79 II.4.20
비의(秘儀)의 전령관으로 목소리가 좋은 클레오크리토스가 조용히 말했다. “… 30인의 말을 귀담아 듣지 마십시오. 그들은 사리(私利)를 위하여 여덟 달 동안에 펠로폰네소스 인이 10년 동안 싸우면서 죽인 것보다 더 많은 아테나이 인을 죽였습니다. 우리는 평화로운 체제에서 살 수 있었는데도, 30인은 신과 사람 앞에서 가장 수치스럽고 가장 저질이며 가장 불경스럽고 가장 가증스러운 상잔의 내란을 불러왔습니다. 그러나 잘 아시듯이, 지금 우리가 죽인 사람들 중 몇몇에 대해서는 여러분뿐만 아니라 우리도 진심으로 슬퍼했습니다.”
80 II.4.23
… 이튿날, 낙심천만한 데다 고립된 30인이 의사당에 모여 회의를 했다. 한편 3,000인은 어디에 있었든지 간이 서로 입장이 달랐다. 나쁜 짓을 많이 한 사람들은 두려워하며 페이라이에우스에 있는 사람들에게 밀려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반면 아무런 나쁜 짓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런 곤혹스러움에 처해 있을 필요가 없으며, 30인의 말에 넘어가 도시를 파멸시킬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런 입장을 전했다. 이들은 마침내 30인을 축출하고 다른 사람들을 뽑기로 했다…
84 II.4.37
(라케다이몬의) 장관(에포로스)들과 집회에 모인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열다섯 명을 아테나이로 파견하여 파우사니아스를 도와 양측의 화해를 도모하도록 했다. 양측은 평화를 유지하고, 30인과 11인, 그리고 페이라이에우스의 10인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위치로 돌아가는 데 동의했다. (아테나이) 도시 내 일부 사람들은 두려워하여 엘레우시스로 옮겨가기로 했다.
일이 성사되자 파우사니아스는 군대를 해산했고, 페이라이에우스에 있던 사람들은 무장한 채로 아크로폴리스로 올라가 아테나 여신에에 제물을 드렸다. 그들이 내려오자 트라시불로스가 아테나이 인을 향해 말했다.
“(아테나이) 시내에 있는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여러분 자신을 잘 파악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지배하려고 한 여러분의 무모함을 잘 반성해본다면, 자신을 더 잘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두 편 중에서 어느 쪽이 더 정당할까요? 민중은 여러분보다 더 가난하지만 지금까지 돈 때문에 부정한 짓을 한 적이 없으나, 여러분은 다른 어떤 이보다 부유하면서도 이를 도모하기 위해 염치없는 짓을 많이 저질렀습니다. 정의감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는 여러분이므로, 그것말고 혹 욕기의 덕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까? 그래서 우리끼리 서로 싸우지 않으면 달리 그 용기를 증명할 방법이 있었겠습니까? 혹 우리보다 유복하다고 말씀하시렵니까? 그래서 성벽, 무기, 돈, 펠로폰네소스 인 동맹국을 가지고도 그런 것을 갖지 않은 사람들에 의해 포위, 체포되는 상황을 초래했습니까? 아니면, 혹 라케다이몬 인 덕에 잘난 체한 것입니까? 그런데 어떻게 그 라케다이몬 인들이, 무는 개의 목에 차꼬를 채워서 남에게 넘겨주듯이, 여러분을 성난 민중의 손에 넘겨버리고 가게 된 것입니까? 그러나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여러분, 나는 여러분이 이 서약을 어기지 말고, 모든 일에 선의로 임하여 맹서를 지키고 신들을 경외하기를 바랍니다.”
트라시불로스는 이와 같이 말하고, 또 어떤 혼란도 있어서는 안 되며 전통의 법을 지켜달라고 당부한 다음 민회를 해산했다.
그런 다음 장관들을 뽑고 질서를 회복시켰다. 후에 엘레우시스에서 이방인 용병을 고용한다는 소문이 들리자, 온 민중이 궐기하여 원정에 나서 그 장군들을 협의하기 위해 왔을 때 그들을 잡아 죽였다. 한편, 다른 이들에게는 친구와 친지들을 보내 화합하도록 설득했다. 그리고 다시는 과거사를 들추지 않겠다는 서약을 하고는 양측이 오늘날까지 함께 살고 있으며, 민중은 서약을 신실하게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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