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만조, 정순우, 김종석 외: 도산서원과 지식의 탄생


도산서원과 지식의 탄생 - 10점
정만조 외 지음, 한국국학진흥원 국학연구실/글항아리


책 머리에 


여는 글 서원, 조선 지식의 힘 

도산서원과 영남의 지식문화 정만조(국민대 명예교수) 


제1장 심학과 이기, 정학을 둘러싼 논쟁들 

제2장 스승과 제자가 함께 지식을 빚어내다 

제3장 책으로 헤게모니의 중심에 서다 

제4장 도산서원은 어떻게 책을 만들었는가 

제5장 엄격한 서책 관리와 도서관 역할 


주註



강유원 선생님 블로그: http://frostpathway.wordpress.com/2013/03/02/도산서원과-지식의-탄생


책머리에

5 조선시대 도산서원에서 이뤄진 지식 생산과 지적 탐구의 모습은 어떤 것이며 그것이 영남 지역의 문화 형성에는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6 전통사회에서 여론을 형성하고 문화를 이끌어가는 것은 유학적 지식인이었고, 그러한 지식인을 위한 강학講學과 장수藏修의 공간은 서원이었기 때문이다.

 서원의 권위는 정치권력이 아니라 성리학적 지식과 그 실천에서 나왔다. 규율과 타성에 길들여진 관학 체제에 대한 비판 위에서 등장한 서원은, 향풍을 교화하고 관권을 견제하는 등 어떤 식으로든 지역문화의 중심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은 지식과 지식인이 지역사회에 끼치는 영향은 오늘날에도 중요한 관심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여는글

41 서원이 아무리 강학하는 기구라고 해도 학파의 특색을 드러내는 상징적인 존재로 그 학파의 개조開祖를 내세워 현향해야 했다. 현양은 선사를 제향하는 사묘를 성원 경내에 부설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이에 이르러 강학처로서의 서원과 제향처로서의 사당 또는 사묘로서 별개의 것으로 여겨지곤 했던 것이 통합되어 강학 공간(강당, 동•서재), 제향 공간(사묘)으로 구성되는 세원 제도가 확립되었다.


59 선조 33년 도산서원에서 [퇴계집]을 간행한 것은 도산서원이 지식 생산을 위한 출판문화의 기능을 수행하게 되었음을 말해주지만, 한편으로는 그동안 선생의 학통 계승이란 면에서 병렬관계에 있던 도산과 이산•여강서원 사이에서 도산이 우위에 서는 효과를 가져왔다. 그것은 또한 퇴계 사후 점차 깊어진 적통 계승을 둘러싼 보이지 않는 경쟁에서 도산의 건립과 운영을 주도해왔던 월천계의 입장을 크게 강화시켜주기도 했다.


60 학문적 내용이 아닌 현실적 목적을 둘러싼 적통 분쟁은 결과적으로 서원 자체의 품격을 떨어뜨리는 일이었다.


64 죽은 신하에게 임금이 내려주는 제사를 치제(致祭)라고 한다. 고위 관료나 특별한 공이 있는 신하의 부음을 접하면 조정의 건의에 따라 부의와 함께 제사를 내리는 것이 보통이었다.


65 “나라의 상징인 임금이 제사를 지내주는 의미를 지니므로 고인과 그 후손에게는 무한한 영광이며 집안의 사회적인 격을 높여주는 은전恩典이었다. 그중에서도 학자에게 내려지는 치제는 그의 유현적 위상에 대해 국가가 공인했다는 의미를 지님으로써, 후손에게는 물론이고 그의 문도와 학통을 이은 학파의 정통성과 권위를 뒷받침해주는 결정적인 요소가 되었다.


71 18세기의 영조 이후 높아진 도산서원의 위상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는 정조 16년의 치제(致祭)였다.  (...) 그러나 이때는 단순한 치제로 그치지 않았다. 영남의 선비들에게 도산에서 과거를 보게 한 것이다. 


71 서원에 과장[科場]을 설치하는 것은 본래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더구나 이 때의 과거 실행은 정조 임금의 계산된 정치 행위의 일환이었다.


72 지금까지 도산서원은 퇴계의 체취가 가장 많이 남아 있는, 주로 제사 지내는 서원으로만 알려져왔다. 그렇지만 도산에서는 퇴계가 생전에 수행해왔던 대로 스승과 제자 사이에 의리변석 義理辯析을 위한 강론이 펼쳐지고 강회가 열려 영남 각 지역의 유교문화 파급을 이끌었다. 또 국가로부터 내려오거나 문중과 개인에게서 기증받은 서적 관리가 체계적으로 이루어져 지적 수요를 감당하고 생상하는 역할을 해냈다. 특히 도산서원을 짓고 퇴계집을 간행한 뒤 적지 않은 서적이 침자되어 필요한 곳에 보급됨으로써 유교문화의 지적 확산에 기여했다. 이처럼 도산서원은 영남 지식문화의 산실로서 새롭게 조명될 필요가 있다.


제3장

253 도산서원은 지식을 구축하고 이를 특정 경로를 통해 확산시키는 기초 단위였다. 말하자면 서원은 이 공동체들이 작업하는 미시 공간이었던 것이다. 도산서원의 서적 간행은 지식을 다른 곳으로 전달하고 퍼뜨리는 역할을 맡았고, 지식 사이의 교환이 일어나도록 도왔다.  또한 서로의 인적 연망관계도 다양하게 했다. 이처럼 도산서원은 지식을 발견하고 저장해서 정교하게 만드는 장소가 되었다. 서점이나 책을 유통시키는 시장이 극히 드물었던 조선사회에서 지방의 지배 엘리트들은 이렇게 자신들이 선호하고 널리 알리고 싶어했던 지식을 퍼뜨렸고, 그 과정에서 서로 정보와 생각을 공유하는 담론 공간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242 도산서원에서 퇴계선생문집을 간행할 때도 인근 지역 유림들과 지방관 등이 협조해왔다.  1817년 [퇴계선생문집개간시일기]에는 이 책을 간행하는 데 쌀 22석 10말, 금전 512냥이 들었다고 나온다. 1843년의 [퇴계선생문집중간시일기]는 11질 찍어내는 데만 3682냥이 들었다. 이렇게 거금이 투입될 정도로 특히 퇴계선생문집 간행은 중요한 작업이었다. 이는 "선생의 도는 후학들이 사서四書 다음으로 믿고 존중하여 사대부 집안은 거의 소장하고 있다"라는 말로도 확인된다.

  또한 완성된 문집이 누구로부터 공인되는가와 어떤 이들에게 돌아가는가는 지역사회에서 힘의 역학관계를 나타냈다. 곧 힘이 없으면 완성할 수도 없으며, 완성했다 하더라도 공인을 받지 못해 지극히 사적인 기록물로 머물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퇴계선생문집 발간은 도사서원의 내적 결속을 강화하는 동시에 대외적으로 사회•경제적 지위를 증명하는 중요한 지표이기도 했다. 다른 서원이나 문중들과 문집을 공유한다는 것은 전통적인 관계망을 강화하는 것일뿐만 아니라 그 사상과 철학과 학문을 나누며, 나아가 문화공동체임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후대의 영남만인소와 같은 지식인들의 집단행동은 이러한 문화적 정체성에 함께 기반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었을 터다.


256 서원등 지방의 학교가 늘어나면서 관직을 얻으려는 이들이 늘어나는 한편 관료소로서 봉사한다는 전통적인 이상이 더 이상 유지되기 어려워지자 지역 양반들은 어떻게 하면 관직에 오르지 않고도 사회•정치적 엘리트로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유지할 것인가, 즉 현실의 정치권력과 권위 없이 어떻게 사회•정치적 책임을 다하고 지역사회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했다. 이러한 요구에 잘 부응한 것이 성리학을 통한 지식의 보급이었다. 성리학은 지역 양반들에게 정통을 지켜나갈 수 있는 문화를 제공했고, 더 좋은 학자가 되기 위한 길은 무엇이며 개인으로서 훈련하는 것이 가능할 뿐더러 왜 필요한지를 설명하면서 중앙 정부와 무관한 지역 엘리트로서의 독립성을 유지할 수 있는 학문을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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