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무로 신이치: 러일전쟁의 세기


러일전쟁의 세기 - 10점
야마무로 신이치 지음, 정재정 옮김/소화


목차

시작하며 


제1장 근대 국제사회로의 참가 

제2장 동아시아 국제정세의 변화 

제3장 러일 개전으로 

제4장 20세기 최초의 세계전쟁 

제5장 세계와의 관계, 일본을 향한 시선 

제6장 주전론과 비전론의 세기 


주요 사료 및 참고문헌 

후기 

옮긴이 후기 

인명 찾아보기




야마무로 신이치: 러일전쟁의 세기

시작하며 

7 나는 이 책의 제목을 '러일전쟁의 세기'라고 했지만, 이 '세기'에는 이중의 의미가 있다. 하나는 러일전쟁을 중간점으로 걸쳐있는 전후 50년이라는 시간의 폭에서 러일전쟁이 왜 일어났는지를 살피고, 또한 러일전쟁 후에 그 영향이 어떻게 미쳤는지를 일본과 러시아, 서구와의 관계에서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러일 종전의 해, 1905년의 50년 전과 50년 후에는 각각 어떠한 사태가 일어났을까.

  50년 전인 1855년은 읿존에서는 안세이 원년에 해당하지만, 같은 해 2월 시모다에서 일본 측 전권 쓰쓰이 마사노리, 가와지 도시아키라, 러시아 특파대사 푸탸틴의 사이에서 러일화친조약이 체결되어 러일 국교가 열렸다.

  그리고 러일 종전으로부터 50년 후인 1955년 6월, 런던에서 제2차 세계대전 종결에 관한 소일교섭이 개시되고, 소련 측에서 평화조약안이 제시되지만 영토문제로 분규, 이듬해에 가까스로 소일국교 회복에 관한 공동선언이 나와 이에 힘입어 일본의 국제연합 연맹이 인정되었다. 


9 이책에서 말하는 '세기'의 두 번째 의미는 '전쟁과 혁명의 세기'라고 일컬어진 20세기, 그리고 아시아와의 교류와 단절의 20세기에 대해 그 출발점에 러일전쟁이 있었다는 시점에서 다시 살펴보는 것이다. 곧, 20세기의 '전쟁과 혁명', '전쟁과 평화' 그리고 아시아와 일본의 '교류'와 '단절'의 문제, 그 각각의 뒤얽힘을 러일전쟁이라는 시점으로부터 살피기 위해서라도 '러일전쟁으로 시작하는 1세기'의 시간 폭에서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9 근대 일본의 역사적 위상을 세계적인 시야 속에서 파악하기 위해서는 서구나 아시아, 더 나아가서는 미국 등과 일본이 실제로 어떻게 관계를 맺고 끊었는지를 확인하기 위한 시점이 불가결하다. 그것을 이 책에서는 '연쇄시점'으로 설정했다. 이에 대해서는 '모든 현상을 역사적 총체와의 연관 속에서 파악하고, 오히려 그로 인해 부분적이고 사소하게 생각되는 현상이 구조적 전체를 어떻게 규정해 갔는지를 생각하기 위한 방법적 시좌'라고 일단은 정의해 두고자 한다.



제1장 근대 국제사회로의 참가 

20 러일전쟁은 1904년 2월 8일, 일본의 연합함대가 뤼순항 밖의 러시아 함대를 공격한 것에서 시작되어, 다음해 9월 5일 미국 포츠담에서의 강화조약 체결까지 주로 중국 동북부 지방(이하 역사적 용어로 만주로 표기한다)과 동해를 무대로 벌어진 일본과 러시아의 전쟁이다.

 이 전쟁의 의의에 대해서는 크게 나누어 러시아의 대한제국으로의 진출이 일본에 미치는 것을 막는, 자존자위를 위한 예방전쟁이었다는 견해와 만주와 조선의 지배를 둘러싸고 벌어진 제국주의 국가 간의 전쟁이었다는 견해가 있다. 그중 어느 쪽인지는 이 책을 통해 생각해 보고 싶은 과제이지만, 지금은 그 결론을 서두르기 전에 왜 일본이 만주와 한국, 가라후토라는 땅에서 러시아와 싸우게 되었는가 하는 역사적 배경에 대해 이하 제3장에서 생각해 보고자 한다.

 그것은 우원한 방법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미국이나 러시아 등과 국교 개시 이후, 일본이 어떤 국체 체계 또는 국제 상황 속에 놓였고, 어떻게 서구 또는 아시아에 대처했기 때문에 청일전쟁을 거쳐 러일전쟁으로 나아갔는지 개관함으로써 비로소 세계사적인 시야 속에서 근대 일본의 역사적 위상과 러일전쟁이 가진 의미가 밝혀질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말하면 이 책의 과제는 러일전쟁의 군사사적 서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러일전쟁을 하나의 단서로 삼아 근대 일본이 세계사의 흐름과 어떻게 이어지고 있었는지 그리고 그를 통해 어떻게 서구 또는 아시아 사이에서 균열을 낳게 되었는지를 밝히는 것이기 때문이다.


23 이 메이지 국가가 들어가게 된 '천하의 공법', '만국공법'의 세계란 주권국가 체계로서의 국제법 체제를 가리키지만, 이것은 베스트팔렌 체제라고 불리는 것처럼 유럽의 30년 전쟁을 종결시킨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 서구에서 형성된 것이다. 거기에서는 주권국가만이 국제정치의 행위 주체로 간주되어 국토•국력의 대소에 관계없이 평등한 권리를 가지게 된다. 그 주권국가의 국경 내부의 정치에는 간섭할 수 없고(내정불간섭), 주권국가의 상위에는 어떠한 정치적 권위(세계정부)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등을 원칙으로 성립한 것이었기 때문에 현실의 국제사회는 '무정부상태'이며, 국가 간 힘의 균형(세력균형)으로 질서유지를 도모하게 된다.

  이렇게 외교와 내정에서 최고의 권위를 부여받은 주권국가 간의 통합을 도모하기 위한 규범이 국제법이며, 그 형성과정에서도 명확한 것처럼 기독교 문명을 기반으로 한 규범체계였다. 그때문에 주권국가 간의 평등과 내정불간섭을 원칙으로 하면서도 그것이 서구 이외의 비기독교 지역에 적용되는 데 있어서는 이질적인 기준이 사용된다.


25 메이지 유신과 동시에 일본이 필사적으로 추구한 '문명개화' 역시 1871년 '우리의 정치와 풍속을 개량하고, 이로써 문명제국과 평등한 지위를 보전하기에 이르는' 것을 목적으로 이와쿠라 사절단을 서구로 파견했던 것도, 나아가서는 서양인이 원숭이 흉내라고 야유한 로쿠메이칸에서의 음악회나 무도회로 상징되는 서구화주의도 이 '문명표준'을 만족시키는 국가가 되기 위한 노력이기도 했다.


44 그렇다면 왜 일본과 국교를 열기 위해 '조선국은 자주 국가'임을 선언할 필요가 있었던 것일까. 말할 필요도 없이 그에 따라 조선이 중국과의 책봉•조공관계에서 이탈하여 주권국가 체계로 들어갔음을 중국에 보이기 위해서이다. '자주'란 어디까지나 중국의 종주권을 부정하고 일본이 지도하는 입장에 서기 위한 요건이기도 했던 것이다.


51 국제법과 식민지 통치의 관계야 어떻든 간에 실은 여기에서 그것 이상으로 주시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실은 한국 병합과 동시에 메이지 천황이 발표한 조서였다. 거기에서는 이렇게 선언된다. "짐은 천양무궁의 비기(큰 토대)를 넓히고 국가는 훌륭한 예수(신분에 따른 의식의 등급)를 갖추고자 하니 전 한황제를 책하여 왕으로 삼는다." 이것은 그야말로 동아시아의 새로운 책봉•조공 체제의 정점에 청의 황제를 대신하여 메이지 천황이 선다는 선언에 다름 아니다.

  이리하여 서구의 국제법을 준수하는 것을 내걸고 출발한 메이지 국가는 메이지 연간의 방황 끝에 그로부터 이탈했을 국제체계인 책봉•조공체제로 회귀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제2장 동아시아 국제정세의 변화 

54 구가 가쓰난은 청일전쟁 중인 1894년 11월, 동아시아의 국제 정세 변화를 회고하며 "메이지 24년(1891)은 실로 우리 동양 문제가 움직이기 시작한 시대가 아니랴"라고 쓰고 있다. 가쓰난은 도대체 1891년에 일어난 어떤 사태를 통해 동아시아 세계 변동의 징조를 읽어 냈던 것일까.

 구가 가쓰난이 상정했던 변화의 요인 중 한 가지로는 1891년에 러시아가 프랑스로부터 자금 도입에 성공하여 시베리아 철도(대 시베리아 간선) 공사에 착공한 것이 거론될 수 있다. 즉, 시베리아 철도가 완성되면 태평양 연안의 블로디보스토크에서 러시아의 모스크바를 거쳐 유럽까지 하나의 선로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세계적인 교통수단의 변화는 지구라는 공간을 보는 시점에 커다란 전환을 불러일으키지 않고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동시에 그것은 일본이라는 섬나라를 국제 정치 지도 속에서 어떻게 위치 지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와도 관계되어 동방협회 등의 조사단체나 정치결사의 결성을 재촉했다. 

 또한 교통수단의 변화는 경제와 사람의 흐름을 바꾸지만 그로인해 병사나 무기를 보낼 수 있기도 하며, 군사 균형에도 변동을 불러일으킨다. 즉, 시베리아 철도의 완성에 따라 세계 제일의 육군국인 러시아가 영국의 제해권에 저지되지 않고 모스크바에서 중앙아시아, 중국, 조선뿐 아니라 일본으로도 직접 군사작전을 전개해 갈 가능성이 생긴 것이다. 이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하는 교통수단의 출현은 단지 일본을 뒤흔들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더 나아가서는 세계 정치에도 커다란 변동과 충격을 가져오게 된다. 구가 가쓰난에 따르면 1891년에 일어난 이들 일련의 사태는 "모두 국민의 대외심을 고무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 충격을 일본은 어떻게 인식하고 그것에 대응하기 위해 동아시아 세계와 어떻게 관계를 맺어 갔을까.


64 이 당시 세계의 제해권은 영국이 장악하고 있었고 특히 동대서양과 지중해, 인도양 등 유럽에서 아시아에 이르는 해상교통로는 영국 해군의 수중에 있었다. 그 때문에 유럽 여러 나라의 아시아 정책은 최종적으로 영국에 의해 좌우되었고, 이로 인해 팍스 브리타니카(영국 주도의 세계평화)가 유지되었던 것이기도 하다. 


65 이와 같이 시베리아 철도의 건설은 영국이 해군력으로 유지해 온 유럽 열강 간의 주도권을 흔들 뿐 아니라 인도의 영국 통치에 불안을 주고, 아프가니스탄에서 영러항쟁을 격화시켜 아시아의 기존 권익과 세력지도를 고쳐 쓴다는 의미에서도 국제 정치정세에 큰 충격을 준 것이다.


65 러일전쟁 당시의 시베리아 철도


66 다만 시베리아 철도가 완성되어도 실은 그로 인해 동아시아에서 러시아의 패권이 곧바로 확립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시베리아 철도의 종점인 군항 블라디보스토크가 겨울철에는 얼어붙어서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러일전쟁 때까지 러시아 함대는 나가사키항을 이용하고 있었다. 이 난제를 해결하려면 시베리아 철도의 연장선상에 겨울철에도 사용할 수 있는 부동항을 확보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주목된 것이 조선반도와 랴오둥 반도였다. 그러한 의미에서 시베리아 철도의 착공은 장래에 남하는 지선의 부설과 부동항의 확보를 필연적으로 예기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현실에서도 동청철도와 그 남하선(후에 남만주철도)를 부설하고 청일전쟁 후의 3국간섭에 따라 일본이 랴오둥반도를 환부하게 했으며, 더 나아가 러시아 자신이 그것을 조차한다는 과정을 취하게 되는 것이다.


70 야마가타 수상은 군사비가 예산의 30% 가까이를 차지하는 이유로 그것이 국가의 독립과 국권의 신장을 도모하기 위해 불가결하다는 것을 역설했다. 그중에서 주권국가는 다른나라의 침해를 허용하지 않는 국경으로서의 '주권선'을 지키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고, '이웃 나라와 접촉하는 세력, 우리 주권선의 안위와 긴밀하게 관련을 맺는 구역'으로서의 '이익선'을 보호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한다. 이 '이익선'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군사비가 필요하게 된다는 논리이다.

  그리고 이 '이익선'이란 무엇을 가리키는가에 대해 야마가타는 같은 해 3월에 나온 [외교정략론]에서 "우리 나라 이익선의 초점은 실로 조선에 있다"고 언명한 것이다.


72 러시아가 조선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것은 1884년이었는데, 같은 해 조선에서는 청이 베트남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프랑스와 교전 중인 틈을 타 일본의 다케조에 신이치로 공사의 지원을 받은 김옥균, 홍영식, 박영효 등이 쿠데타를 일으킨다(갑신정변).

  이 쿠데타에 이르는 경위는 복잡하다. 우선 1882년 일본에 가까운 정책을 취하고자 한 고종의 왕비인 민비파에 대해 대원군이 쿠데타를 일으킨다(임오군란). 그러나 이 실패 후 청의 내정간섭은 강해지고 민비파도 청에 의지하는 방침으로 전환했다. 이리하여 친청파의 압박을 받게 된 김옥균 등이 일본 주둔병의 힘을 빌려 청에 대한 조공폐지, 문벌폐지 등의 개혁강력을 내걸고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 갑신정변이다. 김옥균 등은 독립당, 개화파라고 불리고 이에 대립하는 민비파의 민영익 등은 사대당 내지 수구파라고 불린다. 그것은 민영익 등이 책봉•조공체제 하에서 권력의 확대를 도모한 것에 비해 김옥균 등은 일본의 국민국가 형성을 모방하여 주권국가 체계로 들어가는 것을 지향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이 쿠데타 자체는 청군 출병으로 인해 3일 만에 종결되고 홍영식등은 살해되며, 김옥균, 박영호 등은 일본으로 망명한다. 그리고 청일 간에는 장래 출병할 때 사전에 서로 통지할 것 등을 정한 톈진조약이 체결된다.


82 이러한 삼국간섭의 결과 동아시아에서 영국의 우위성을 뒤집고 자국의 세력 확장을 지향한다는 의미로 청일전쟁 이전부터 러시아•프랑스•독일 간에 성립하고 있던 '동아시아 삼국동맹'이라 불리는 일종의 반영(反英) 블록이 좀 더 명확한 형태를 취하게 되었다. 이에 대해 3국에 의한 중국 분할에 일본과 영국이 제휴하여 대항한다는 기운이 생겼고, 그것이 영일동맹에서 러일전쟁에 이르는 하나의 저류가 되어 간다.


86 중국에서 열강의 세력권과 러일 대립의 구도


87 청은 독일과 러시아에 대처하기 위해 영국과 일본의 지원을 구하지만, 영국도 조차를 요구하기로 했다. 또한 일본도 조선 문제로 러시아와 협조를 꾀할 필요가 있어서 청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때문에 청은 1898년 3월 러시아와의 사이에서 랴오둥반도 조차조약을 맺지 않을 수 없었다. 이로 인해 러시아는 중국으로 하여금 뤼순•다롄 등을 25년 동안 조차하는 것과 뤼순에 군항과 요새를 건설하는 것, 외국 무역을 위한 다롄의 개항 그리고 다롄만으로의 동청철도 지선 부설을 인정하게 했다. 러시아는 숙원이었던 부동항 확보에 성공한 것이다.


89 동청철도 부설권을 얻은 러시아는 나아가 1898년 랴오둥반도 조차조약에 따라 하얼빈에서 다롄에 이르는 동청철도 지선(남만주철도) 부설권을 획득했다.

  동청철도는 1901년에 완성되었고, 일부 지역에서 배편을 이용하면 대서양과 태평양이 2주 정도로 연결됐다. 일본이 러일 개전을 서두른 이유 중 하나는 시베리아 철도가 완전 개통하면 이제는 승산이 없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1904년 2월 러일 개전 때에 바이칼호 연안의 환선은 미완성이었지만, 같은해 9월에는 이 부분도 개통된다. 이로써 착공된지 13년 4개월 만에 동청철도를 경유하는 시베리아 철도가 완전히 개통되어 일본군의 작전 전개를 크게 위협하게 된다.

  이리하여 청일전쟁 후의 동아시아는 일본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그 개전 의도와는 반대로 오히려 조선이나 중국에 대한 러시아의 침투를 비롯하여 열강의 진출을 불러들이는 사태를 야기했다. 그러나 그로 인해 곧 러일전쟁이 불가피해진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러시아의 북청사변 출병이라는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제3장 러일 개전으로 

106 하나의 전쟁의 종결은 거기에서 획득한 것을 지켜 가기 위해, 혹은 거기에서 획득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달성되지 못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다음 전쟁을 향해 내딛는 새로운 출발점이 되는 경우가 있다.

 청일전쟁도 대만과 펑후제도 등의 식민지를 획득했다고 할 수는 있어도 조선 지배라는 원래의 목적을 달성할 수는 없었다. 또한 랴오둥반도라고 하는 획득되어야 할 할양지를 반환한 일은 전과를 힘으로 빼앗겼다고 하는 굴욕감을 수반하여 그 실지 회복을 위한 군비확장을 지지하고 무거운 재정 부담도 참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기운을 조장해 갔다. 그것은 또한 국제사회가 약육강식의 권력외교(power politics)에 따라 지배되는 세계이고, 거기에서 일본이 살아남는 일의 어려움을 국민에게 들이댄 것이기도 했다.

 그때 중국을 대신해서 일본의 존립을 위협하는 불구대천의 적, 즉 함께 이 세상에서는 살 수 없는, 목숨을 걸어서라도 보복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적대자로서 선전된 것이 러시아였다. 곧, 조선 문제의 해결을 위해 싸운 청일전쟁은 중국의 분할경쟁을 초래함으로써 중국 문제를 표면에 드러나게 했을 뿐 아니라 조선 문제해결에 있어서 더 커다란 장애로서의 러시아 문제를 가져오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러시아의 어떤 행동이 일본에게 장애이고, 그것을 물리치지 않는 동아시아 세계의 위협이 된다고 생각한 것일까? 더 나아가 또한 러일전쟁은 과연 필연적이고 불가피한 것이었을까? 아니, 무릇 도대체 왜 양국은 그 누구의 영토도 아닌 한국이나 만주를 전장으로 삼아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일까.


114 주권선의 유지라는 방위적인 시점에서 이익선을 가능한 한 넓혀 간다는 팽창주의로의 전환이 있다. 거기에서 이익선으로 상정되고 있는 것은 조선을 넘어 가고 있는 셈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것은 만주로 설정되고, 러시아가 가상적국으로 간주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청을 무너뜨린 후에 러시아와 패권을 다투는 것은, 그럼으로써 '동양의 맹주'가 되는 것이라고 의식되고 있던 것이다.


125 이토는 1901년 말 직접 러시아를 방문하여 러일교섭에 임할 것이라고 했지만, 청러밀약의 보도에 위기감을 가진 외무성은 이미 영일동맹의 체결교섭에 들어갔고, 러일교섭이 타결되는 것을 우려한 영국이 영일동맹을 단행했기 때문에 러일협약 교섭은 중단되었다. 그러나 반대로 보면 1902년 1월까지는 영일과 러일의 협조를 찾는 시도가 병행되어 일어나고 있고, 러일전쟁으로 들어갈 필연성은 없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128 1902년 1월 영일동맹이 성립한다. 이에 따라 영국은 청에, 일본은 만주를 포함한 청과 한국에 대해 특수권익을 가지는 것을 서로 승인하고, 한 나라가 교전했을 경우에는 다른 한 나라는 중립을 지키며 타국의 참전 방지에 힘쓸 것, 또한 만약 제3국이 참전했을 경우에는 조약국은 참전하여 동맹국을 원조하기로 했다. 이것은 러일이 교전했을 경우에도 러불동맹을 맺고 있는 프랑스의 참전을 막는 효과를 지녔고 또한 전쟁비용 조달을 위한 외채모집이 영국을 통해 가능해졌음을 의미한다.


131 영일동맹은 확실히 일본의 국제적 지위 향상을 보여 준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우치무라가 염려한 것처럼 일본이 영국이 취한 세계정책의 일단을 맡고, 아시아나 아프리카의 식민지 사람들을 억압하는 측에 서는 것, 그리고 일본 자신이 식민지 확대를 진행하기 위한 원조자를 얻어 군사적 결착을 도모하는 길로 걸음을 내딛어 결국은 비경에 빠질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국내로 눈을 돌리면 러일협약 노선이 후퇴함으로써 중의원 제1당인 정우회 총재 이토 히로부미의 정치적 위신은 저하되고, 이 후 대러강경 노선을 채택한 가쓰라 다로 수상과 고무라 주타로 외상의 주도 하에 정국은 개전으로 옮겨 간다.


135 1904년 1월 일본 측 최종안은 한국 및 그 연안은 러시아의 귄익범위 밖으로 할 것, 또한 일본은 만주에서 러시아의 특수권익을 인정하기로 하고 러시아 측에 회답 기한을 조회하지만, 러시아는 이에 대한 답변을 명시하지 않았다. 그리고 1월 12일 어전회의에서는 교섭은 계속하지만 러시아로부터 만족할만한 회답을 얻을 수 없을 경우 개전에 돌입할 것을 결정했다.

  이 교섭과정을 봐도 명백한 것처럼 만주의 주권자인 청이나 영토를 군사 사용하게 된 한국의 의향 등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국제법상 어떤 개입도 할 권한이 없는 국가에 의해 만주나 한국의 운명을 결정하고자 한 것이 러일전쟁에 이르는 외교교섭의 본질이었던 것이다.


140 전쟁에 발을 들여놓은 때의, 스스로는 바라지도 않는데 제어할 수 없이 흘러가서 돌이킬 수 없게 된다고 하는 심리과정이 나타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이와 같이 자신이 결단했다는 명확한 작가도 없이 전쟁이 어느덧 다가와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는 생각 속에서 많은 일본인은 러일전쟁을 맞이했고, 나아가 그 후에도 마찬가지의 분위기 속에서 '흘러가듯' 몇 개의 사변과 전쟁으로 돌입하게 된다.



제4장 20세기 최초의 세계전쟁 

144 20세기는 '전쟁과 혁명의 세기'라고 일컬어지는 것처럼 세계 각지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정치의 민주화나 민족독립을 요구하여 혁명과 전쟁이 반발한 세기였다.

 게다가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이 상징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의 전쟁에 참가한 국가나 민족의 수적 크기와 공간적인 넓이에서 공전의 규모에 달하고, 전장의 병사뿐만 아니라 여성이나 노인, 아이들까지도 군수생산 등으로 전쟁에 동원되는 총력전으로 전환, 변기도 기관총에서 시작하여 원자폭탄이 사용되는 등, 전쟁의 형태나 질에서 인류사상 최초의 사태가 잇달아 나타난 세기이기도 했다. 그리고 전쟁으로의 대량 동원이 국민의 권리의식을 높여 혁명으로 이어져 간 것처럼 전쟁과 혁명이 긴밀한 관련성을 가지고 전개되어 간 세기, 20세기의 전쟁을 특징짓는 발단이 되었던 것이 다름 아닌 러일전쟁이었던 것이다.

 또한 혁명의 세기를 상징한 것이 소비에트(소련)였다고 한다면, 그것과 대치한 것이 미국이었다. 미국이 종래의 외교원칙이었던 서구 양대륙의 상호불간섭을 주장하는 먼로주의에서 탈각하고, 국제정치 무대에 등장한 것이 러일전쟁을 계기로 해서였다. 그것은 미서전쟁에서 패한 스페인이나 빅토리아 여왕 사후 대영제국의 그늘 속에서 유럽에 의한 세계지배를 대신하여 등장한 새로운 미국의 시대를 인상짓는 것이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러일전쟁은 '미국의 세기', 나아가 1905년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이 직접 '태평양의 세기가 될 것'이라고 예언한 20세기의 첫걸음을 그린 사건이기도 했다.

 또한 러일전쟁은 단순히 군사력뿐만 아니라 정보조작이나 신문을 이용한 여론조작을 기반한 국제 여론의 지지와 그에 따른 군사자금・군수물자의 획득으로 전쟁의 승패가 결정된다는 의미에서 선전전이 된 점에서도 전쟁의 모습을 전화시킨 것이기도 했다.

 게다가 러일전쟁 자체는 전장을 한정한 국지전쟁으로 싸웠지만, 그 배후에 영국이나 프랑스가 동맹국으로 있던 것, 또한 그것이 백색 인종과 황색인종의 전쟁으로 간주되어 거기에 아시아뿐만 아니라 동유럽이나 이슬람권 또는 유대 민족이 관심을 기울였다는 의미에서 인종전쟁으로서의 세계전쟁이라는 성격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간과할 수 없는 것은 러일전쟁이 동아시아 세계에서 지닌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하는 문제이다.

 그것은 바로 본서가 제1장에서 문제시해 온 일본에서 '조선 문제', 곧 청일전쟁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과제로 남은 한국의 배타적 지배라고 하는 문제의 결착이었다. 러일전쟁은 확실히 일본과 러시아의 전쟁이고, 결과적으로 만주에 대한 일본의 진출을 촉진해버렸지만, 그속에서 진행되어 간 더욱 중요한 사태, 그것은 일본에 의한 한국의 보호국화였다.


148 러일전쟁 관계도


155 와신상담이라는 슬로건으로 대러 보복전쟁을 준비해 온 일본국민과는 달리, 러시아 국민에게 일본은 관심대상도 아니었고, 알지도 못하는 태평양의 작은 섬나라에 불과했다. 게다가 러일전쟁은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아득히 8,000킬로미터 이상이나 멀리 떨어진 시베리아의, 더욱 저편에 있는 황야를 둘러싼 전쟁으로 러시아 국민에게는 관심을 불러일으키지도 않았고 가장 인기없는 전쟁이었다. 또한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을 위한 준비를 주안으로 삼고 있던 러시아군에게는 동아시아에서의 작전계획은 없었고, 전쟁준비에서도 국운을 걸고 싸울 체제를 갖추고 있던 일본과는 완전히 달랐다.


156 이러한 국내상황 속에서 당초부터 전쟁에 반대하던 사회주의자의 영향력은 강해지고, 레닌 등은 전쟁을 혁명으로 전화시키는 운동을 추진한다. 뤼순함락에 즈음하면 레닌이 말한 것처럼 이 전쟁은 어디까지나 전제 러시아 황제의 전쟁이기 때문에 패전도 황제의 패전이고 국민과는 무관하며, "전쟁이 연속하면 그만큼 러시아 인민 가운데 동요와 격분은 끝없이 확대되고, 새로운 위대한 전쟁, 전제에 대한 인민의 전쟁, 자유를 위한 노동자의 전쟁이 일어나는 시기는 가까워지는" 상황이 되었다.


160 이 문호개방정책(open door policy)는 식민주의를 반대하면서 실질적으로는 미국의 세력권 확대를 지향했기 때문에 러일전쟁의 조정 역시 그 정책의 일환으로 행해진 것으로 루스벨트가 선의의 중재자였던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러일전쟁 후 만주에서의 철도이권 확보 등을 시야에 넣은 것이다. 즉, 루스벨트는 미국이 만주로부터 중국의 모든 영토로 진출할 호기로서 조정역을 생각했던 것인데, 이로 인해 미국은 태평양에서 유럽 대륙에 걸친 국제정치의 무대에 중요한 역할을 가지고 등장하게 된다.


160 일본은 미국의 문호개방 통지를 부정하지 않았지만 러일전쟁 후에는 만주에서 특수권익을 주장하며 러시아와 공동으로 배타적인 정책을 취했기 때문에 미국과 일본은 대립하게 되었고 이민배척 문제등과 뒤얽혀서 관계가 악화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러일전쟁의 승리가 미일분쟁의 새로운 시작이 된 것이다.


164 이 일련의 과정, 곧 일본이 한국 보호국화의 권리를 획득하기 위해 미국과는 필리핀, 영국과는 인도 등의 식민지 지배를 그 대상국의 의지와는 전혀 무관하게 교환조건으로 결정한 과정에 바로 러일전쟁의 역사적 의미가 나타나고 있다. 또한 포츠머스조약에서도 랴오둥반도의 조차권 등을 이 또한 분명히 주권을 가지고 있는 청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러시아가 양도하게 했는데, 청이 중립을 선언하게 한 것도 이 강화 조건에 관여할 수 없게 하기 위함이었다.


165 어느 사상의 본질이 결과에 따라서 명확해진다고 한다면 이 열강과의 거래를 통해 한국의 보호권 획득 그리고 남만주에서의 이권 이양이라는 결과에 바로 러일전쟁의 본질이 잘 나타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


181 다카하시에 따르면 러일 전쟁을 승리로 이끈 것은 군사력보다도 시프의 원조였다고할 정도로 결정적인 사채였던 것이다.

  다카하시는 시프가 왜 일본을 원조하는 것인지 처음에는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나중에 유대인이 러시아에서 받는 제압이나 학대에 도움의 손을 내밀고 싶다는 취지를 고백했다고 자서전에 기록하고 있다. 시프는 유대인을 박해하는 제정 러시아를 '인류의 적'으로 부르며 격렬한 반발감을 품고 있었고, 일본이 러시아에 승리함으로써 유대인의 고난을 경감하고 러시아가 입헌국가로 이행하는 것을 바랐던 것이다.


192 러일전쟁 종결과 동시에 정부에게 문제가 되었던 것은 이와 같이 전시 중에 급속하게 부수를 신장한 신문이나 잡지 등을 어떻게 지도•통제해 가는가 하는 것이다. 그 문제를 가장 날카롭게 부각시킨 것이 1905년 9월 강화조약에 반대하는 히비야화공사건이었다. 전쟁에 국민을 동원하고 전비를 부담시키기 위해서 미디어는 불가피했지만, 전후에는 높아진 정치의식이 정부에 비판으로 향하리라는 것이 명확해졌기 때문이다.



제5장 세계와의 관계, 일본을 향한 시선 

200 20세기가 '전쟁과 혁명의 세기'였다고 하는 것은 단지 전쟁과 혁명이 끊임없이 일어났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과 혁명이 서로 강한 연계를 가지고 전개해 갔다는 점에서야말로 역사적 의의가 있다. 1905년 제1차 러시아혁명이 그랬던 것처럼 전쟁 속에서 혁명이 태어나고, 그 혁명을 둘러싸고 사회주의 연쇄 속에서 세계의 여러 지역이 연계를 갖고 움직여 간다. 이러한 연계 속에서야말로 연쇄시점에서 본 20세기의 특징을 발견해 낼 수 있는 것이다.

 그 의미에서 러일전쟁은 전쟁과 혁명이 긴밀한 연관성을 가지고 움직이며 세계적인 확대 속에서 사상연쇄의 시차(time lag)가 급속히 축소되어 갔다고 하는 점에서 틀림없이 20세기의 개막을 고하는 새벽종이 되었다.

 그리고 러일전쟁에 대해서는 전쟁 중에서야말로 일본 스스로가 필사적으로 그것이 인종전쟁임을 부인했지만, 전쟁 후에는 인종 전쟁에서 유색인종이 거둔 승리로 자타 모두 공인하게 되었다. 그것이 서구의 식민지 지배하에서 고통받고 있던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었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다른 한편 그와 동시에 러일전쟁에 대해서는 전제국가 러시아와 입헌국가 일본과의 전쟁이라고 일본이 호소하기도 했고 그 전쟁에서의 승리는 서양문명을 받아들인 입헌제의 승리라고 간주되었다.

 이로써 백인종에게 승리하고 유색인종을 대표하여 서구와 대결하는 '황색인종의 투사'라고 하는 일본과, 아시아에 있으면서 서양문명의 섭취에 성공하여 서구를 뒤쫓아 가는 일본이라는, 상반되는 두 개의 일본 이미지가 병존하게 되었다. 그것은 비서구세계 사람들에게 서구가 문명의 스승이자 동시에 군사력을 통해 식민지 지배를 강요하는 침략자라는 두 개의 상반되기까지한 면모를 드러내 온 과정을 일본도 걷기 시작했음을 의미하고 있다.

 결국 일본이 아시아 중에서 가장 빨리 국민국가 형성에 착수하여 청일전쟁, 러일전쟁에 승리했음은 서구현 국가체제가 군사적으로 우월성을 가진다는 것 그리고 일본은 서구문명을 스스로의 전통, 결국은 아시아 문명에 적합하게 수용했음을 증명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인식하에서 중국에서는 서구의 학술이나 법제 등을 일본이 달성한 성과를 통해 섭취하려는 움직임이 본격화되어 간다. 그것은 또한 그때까지 동아시아 세계에서 문명의 중심으로 보여졌던 중국이 일본을 모범국으로 삼고 국민국가 형성으로 전환했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중국과 책봉관계에 있던 동아시아 세계의 사람들에게도 자극을 주게 된다. 나아가 일본에 대한 관심은 동아시아에만 그치지 않고 지리적・종교적으로 러시아에 대항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슬람이나 동구세계의 사람들에게도 확산된다.

 이렇게 러일전쟁은 일본이 그야말로 서구와 아시아를 묶는 '지(知)의 결절 고리'로 나타나는 계기가 된 것이다. 그리고 아시아에서 온 유학생이나 일본으로부터 파견된 교사를 통해, 또한 일본 책의 번역 등을 통해 사람이나 학자의 환류가 진행했기 때문에 아시아라는 공간에 자신들이 함께 살며 똑같은 운명에 있다고 공속감각을 갖게 된다.

 그렇지만 러일전쟁을 계기로 일본에 대해 모였던 기대와 관심은 일본이 러일전쟁 후에 취한 아시아 정책으로 인해 실망으로 바뀌고 나아가서는 아시아에 적대하는 것으로까지 보이게끔 되는 것이다.


219 6 27일에 발표된 톨스토이의 논고를 사카이 등이 번역·간행하기까지 1개월 반도 요하지 않았던 것처럼 러시아로부터 영국 그리고 일본으로의 사상연쇄는 동시성을 지니기 시작했다. 이와 같이 러일전쟁 중에 생긴 사태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사회주의 사상과 혁명운동의 사상연쇄가 태어나 그 연쇄에 필요한 시간이 단축되었다고 하는 것이며, 그것은 [평민신문]의 지면에서 현저히 나타났다.

 

220 서구까지 포함하면서 일본과 러시아의 사회주의자가 단기간에 의견을 교환하고, 또한 전시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각국의 사회주의 문헌이나 팸플릿 등이 러시아 사회민주당이나 사회혁명당으로부터 평민사에 기증되는 등의 사상연쇄가 일어났던 것이다.

 

236 서구인을 향해 기사도가 기독교 정신과의 유사성으로 설파된 무사도는 메이지에 이르러 충효나 충군애국을 골자로 만들어 낸 것이고, 본래의 무사도와는 완전히 다른 성질의 것은 아니었을까. 무릇 전투가 일상적이었던 시대에 살아남는 것이 과제였던 전투자의 윤리인 무사도와, 실제로 전투를 하지 않게된 겐나엔부 이후, 죽음이 비일상적인 것으로 관념화되는 가운데 윤리로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주군에 대한 충의의 징표를 할복에서 구하지 않을 수 없었던 무사도는 서로 비슷하지만 다른 것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무사계급의 윤리가 '신국'으로서의 전통 때문에 국민성으로 뿌리내리고 있었다는 논의 자체가 창출된 허구에 불과한 것이었다.

 

240 국민국가는 국민이 국가를 담당하는 주체라고 상정하기 때문에 그 국가를 지키기 위해서는 국민개병제를 취한다. 그리고 자신의 국토를 지킨다는 의식을 내면화한 국민을 징병제를 통해 동원할 수 있는 국민국가는 확실히 전제국가에 비해 대외전쟁에서는 위력을 발휘했다. 량치차오나 추진 등이 선망의 대상으로 바라본 러일전쟁 때의 메이지 국가는 그야말로 국민이 일체화하여 죽음마저 불사하는 전쟁 기계로 작동했으며, 그 기계를 구동시키는 가솔린이나 윤활유가 된 것이 무사도론과 야마토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일단 군사국가가 된 메이지 국가는 그 기능을 유지하기 위해 군비강화를 계속해야만 했다. 그것은 국민에게 한층 더 부담 증가를 요구해 간다. 그 변화를 계속 지켜본 량치차오는 일본을 이렇게 평가하기에 이른다. '부국강병'을 지향하여 출발했을 터인 메이지 일본은 전승의 결과 '빈국강병'으로 전환되었다고.

  

 

제6장 주전론과 비전론의 세기

252 일본이 이와 같이 통치 공간의 확장을 만족하지 않고 계속했던 시대에 세계적으로는 이미 브레이크를 걸 수 없게 된 식민지 획득을 위한 전쟁, 혹은 자위나 평화를 위한다며 싸우는 전쟁의 폐절을 요구하는 비전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전쟁의 참화를 감소시키기 위한 국제적 대처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물론 그 목소리는 내셔널리즘의 앙양 앞에 사라지는 경향이 잦았고, 국제적인 법체계나 기구의 정비는 현실적 유효성에서 한계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전쟁의 세기' 20세기는 그러했기 때문에 전쟁을 규제하여 평화를 희구하는 '비전론의 세기'로도 존재했던 것이다.

 

258 러일전쟁에서 얻은 전훈으로서 아무리 군비의 확장을 도모한다고 해도 일본의 국력으로는 소모전에 견디지 못하는 이상 이것을 정신력으로 보완할 수밖에 없다고 하는 방침이 채택된다.

 

258 이 정신교육이 1882 [군인칙론]에서 강조되었던 "죽음은 홍모(기러기의 깃털, 매우 가벼운 것의 비유)보다 가볍다고 각오하라"고 하는 천황의 명령과 부합하여, 병사의 목숨의 가치는 '일전 오리'의 엽서요금과도 같아지고, 소집영장으로 얼마든지 소집할 수 있어 쓰고 나면 버린다는 사상이 된다.

 

259 1909년에 개정된 [보병조전]의 운용에서는 "공격정신을 기초로 하여, 백병주의를 채용하고 보병은 언제나 우수한 사격으로 적에게 접근하여 백병으로 마지막 결정을 지어야 하는 것이다"라고 하여, 장비의 충실보다도 병사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돌관전법에 기대는 정신주의가 주입된다.

 

288 조민은 제국주의 논의가 '신선한 이론'으로서 일본인을 사로잡게 되었을 때, 새삼 개인의 권리를 존중하는 민권론을 주장하여 '세계의 풍조에 맞지 않고, 유행이 지난 진부한 이론'이라고 하는 비판을 받는다. 그에 대해 조민은 다음과 같이 반문했다.

 

  이론인 채로 소멸되었기 때문에 언사로는 극히 진부해도, 실행으로는 신선하다. , 그 실행으로는 신선한 것이 이론으로 진부한 것은 과연 누구의 죄인가

 

그래서 이 논고에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표제를 붙인 것이다. 조민은 일본인을 '잊어버리길 잘 하는 국민', '생각하기를 싫어하는 국민'으로 보고, '때문에 천하의 가장 명백한 도리로서 이것을 흘려 지나쳐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고 비판했지만, 그러니까 바로 죽음을 직전에 둔 병상에서 이렇게 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조민은 또한 스스로의 일생을 돌아보고, '멍청하게까지 이상을 지킨 것, 이 소생이 자랑하는 바입니다'라는 말을 남겼지만, '언사로서는 진부, 실행으로서는 신선한 비전'이라고 하는 이상을 멍청하게까지 지키며 실행할지 아닐지는 21세기에 주어진 선택으로서 지금 우리들 앞에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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