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엘리아데: 성과 속
- 책 밑줄긋기/책 2012-22
- 2014. 7. 28.
성과 속 - M.엘리아데 지음, 이은봉 옮김/한길사 |
목차
001. 성과 속은 무엇인가· M. 엘리아데의『성과 속』
002. 서론
003. 성스러운 공간과 세계의 정화
004. 성스러운 시간과 신화
005. 자연의 신성과 우주적 종교
006. 인간의 실존과 성화된 생명
007. 연대기적 고찰
008. 엘리아데 연보
009. 참고문헌
010. 찾아보기
001. 성과 속은 무엇인가• M. 엘리아데의『성과 속』
21 성과 속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는 sacred와 profane이다. 그런데 성(sacred)은 sacrum을 어원으로 해서 나온 말인데, 이 말은 로마 시대에 신이나 신의 힘에 속해 있는 것을 뜻하였다. 그러나 신의 이름이 반드시 뚜렷이 나타나는 것은 아니고 가령 비밀 의례 같은 데서 막연하지만 강력하게 그 힘을 느끼는 것에서 성의 실재를 인식하는 것이다. 한편 속(profane)의 어원은 profanum인데, 그것은 '성전 경내 앞'을 뜻하는 라틴어에서 나온 말로 경내(fanum)에서 희생 제물을 바치는 관례와 어원상 관계가 있다. 그러므로 초기부터 속이라는 말은 장소를 나타내는 말과 관련되어 있었고, 성(sacrum)이라는 말도 일종의 종교적 행위를 하는 장소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었으므로 sacrum과 profanum은 둘 다 특별한 의미의 장소를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원시인들에게는 일찍부터 공간이 항상 균질적인 것이 아니라 접근하기 어려운 성스러운 공간이 따로 있었음을 알 수 있다.
39 그러나 여기서 오해를 하면 안되는 사실이 있다. '이 세계가 본래부터 성현이었다'고 하는 말을 '이 세계 그 자체가 성이다'라는 말과는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후자의 말로 받아들인다면 범신론적인 것이 되고 말 것이다. 범성적인 입장과 범신적인 입장은 구분해야 한다. 엘리아데는 이 세계는 성이 드러나는 그 무엇이지 이 세계 자체가 성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엘리아데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즉 세계에 있는 자연물 자체를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연물을 통해 현현하는 성을 숭배한다는 것이다.
44 우리는 엘리아데의 성과 속의 이론에서 성(혹은 신이라 부를 수도 있으리라)과 세계와 인간이 함께 결합되어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않으면 안된다. 성 혹은 신이라는 것은 우리의 감각을 초월해 있는 존재요, 한편 그 성에 참여하고 있는 인간의 마음은 어쩌면 인식하는 나의 가장 내밀한 비밀 가운데 숨어 있는 나의 본질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인식하는 나는 그 성에 참여하고 있는 것과 동시에 그 성의 무한함을 모두 드러낼 수 없는 한계도 지니고 있다. 성을 인식하는 것은 인식의 주체가 자신의 뿌리에 있는 성에서 그 성을 길어올린 정도에 한정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인식하는 나는 감각을 초월해 있는 성 그 자체를 직접적으로는 알 수 없고 세계를 통해서만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성의 육화된 모습인 세계를 통해 성을 알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인식하는 주체인 인간에게는 세계도 또한 무한한 것으로 비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생각하면, 세계의 여러 국면을 통해 표현된 성의 현현(그것이 나무를 통해서 현현되었든 혹은 돌을 통해서 현현되었든)은 인식하는 주체가 성을 외화한 것에 불과하고, 동시에 이미 세계의 모습으로 육화되어 있는 성을 발견한 것에 불과함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성과 이신 주체인 인간 및 세계는 서로 뗄 수 없는 하나의 고리로 연결되어 있다. 원시적인 전통적 인간들도 그 표현이 소박하긴 하나 여러 국면의 성의 현현을 통해서 자신이 완벽한 인간 실존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고, 그런 측면에서 현대의 인간에 못지 않은 진지성을 가지고 있으며,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실존의 더 깊은 측면에 간여하고 있는 것이다.
002. 서론
48 우리는 성스러운 것의 현상을 그 다양한 복잡성 안에서 해명하려고 하며, 단순히 비합리적인 측면에서만 국한시키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의 관심은 단지 종교가 지닌 비합리적인 요소와 합리적인 요소의 관계가 아니라 성스러운 것 그 전체이다. 성스러운 것의 정의는 우선 속된 것과 대조를 이룬다는 것이다. 이 글의 목적은 성과 속의 대조를 설명하고 정의하고자 하는 데 있다.
48 인간이 성스러움을 아는 것은 그것이 속된 것과는 전혀 다른 어떤 것으로서 스스로를 현현하고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 성스러운 것의 현현을 여기서는 성현(聖顯, hierophany, 그리스어 hieros = 신성한, phainomai = 나타나다의 합성어)이라는 말로 불러 본다. 이 말은 성현 이외의 어떤 것을 내포하지 않기 때문에 적절한 용어라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어원적인 내용 가운데 있는 말, 즉 어떤 성스러운 것이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 이외의 다른 것을 표현하고 있지 않다. 종교의 역사는 ― 가장 원시적인 것에서부터 고도로 발달한 것에 이르기까지 ― 많은 성현, 즉 성스러운 여러 실재의 현현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가장 원시적인 성현(예컨대 돌이나 나무와 같은 일상적 대상 속에 성스러운 것이 나타나는 것)에 높은 수준의 성현(그리스도교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느님이 수육되는 것)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연속성이 흐르고 있다. 어떤 경우에나 우리는 동일한 신비스러운 사건에 직면한다. 즉 전혀 다른, 이 세상 것이 아닌 하나의 실재, 하지만 이 자연적인 '속된' 세계에서 불가결한 요소를 이루는 여러 사물 가운데 나타나는 사건에 직면하게 된다.
근대 서양인은 성스러운 것의 여러 현현 양식에 직면하여 어떤 불안을 느낀다. 즉 어떤 인간에게는 성스러운 것이, 예컨대 돌이나 나무 가운데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우리는 곧 그것이 돌 자체의 숭배, 혹은 수목 그 자체의 숭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성스러운 돌, 성스러운 나무는 돌이나 나무로서 숭배되는 것이 아니고 ― 그것을 숭배하는 것은 그것이 성현이기 때문이며 돌이나 나무가 아니라 성스러운 것, 전혀 다른 어떤 것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53 우리의 일차적인 관심은 종교 체험의 특수한 차원을 제시하고, 그것이 세계에 대한 세속적인 체험과 어떻게 다른가 하는 차이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53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랑 생활을 하는 수렵민과 정주 생활을 하는 농경민 사이에는 그러한 차이보다도 한없이 중요한 하나의 유사성이 존재한다. 즉 양자는 성화된 우주에서 생활하며, 양자는 동물계와 식물계에서도 똑같이 현현하는 하나의 우주적 신성성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존재 상황을 성스러운 것을 잃어버린 우주에서 살고 있는 근대 사회의 인간들의 존재 상황과 비교해 보면 곧바로 이들을 분리시키는 모든 요소를 깨닫게 될 것이다. 동시에 여러 다른 문화에 속하는 종교적 사실을 비교하는 것의 타당성도 분명해질 것이다. 즉 이 모든 사실은 동일한 행동 유형, 즉 종교적 인간의 행동 유형에 기본을 두고 있는 것이다.
003. 성스러운 공간과 세계의 정화
56 종교적 인간에게 이 성스러운 공간의 발견 ― 즉 계시 ― 이 어느 정도의 실존적 가치를 지니는지는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선 앞으로의 방향성이 없으면 어떤 일도 시작할 수 없고 어떤 일도 행할 수 없다. 즉 방향성이 있다는 것은 하나의 고정점을 획득하고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종교적 인간은 항상 '세계의 중심'에 거주처를 정하려고 노력한다. 세계 안에서 살고자 한다면 세계를 창조해야만 한다 ― 속된 공간의 균질성과 상대성의 혼돈 가운데서는 어떤 세계도 탄생할 수 없는 것이다. 고정점(중심)을 발견하고 투사하는 것은 세계 창조에 대응한다. 우리는 다시 성스러운 공간의 구성과 그 의례적 방향성이 갖는 우주 창조적 의미를 명백하게 보여주는 몇몇 사례를 들고자 한다.
59 초기 문화 단계에서는 이 초월의 가능성이 다양한 출구의 형태로 표현되었다. 여기 성역 안에서 신들과 교류할 수 있다면 거기에는 신들이 지상으로 강림하고 또 인간이 상징적으로 천상으로 올라갈 수 있는 통로로서 천상계로 올라갈 수 있는 문이 있어야 한다. 많은 종교에서 이와 같은 것이 있음을 곧 보게 될 것이다. 정확히 말해서 사원은 위를 향한 출구가 되고 신들의 세계와의 교류를 보증한다.
66 그들은 서로 관련되어 하나의 체계를 형성하는데, 그것을 전통 사회의 '세계 체계'라고 부를 수 있다. 즉 ①성스러운 장소는 공간의 균질성의 단절을 가져온다. ②이 단절은 (천상에서 지상으로, 지상에서 하계로) 하나의 우주 영역에서 다른 우주 영역으로 이행할 수 있게 하는 출구로 상징된다. ③천상과의 교류는 기둥(우주의 기둥 universalis columna), 사다리(야곱의 사다리), 산, 나무, 넝쿨 등 여러 형상으로 상징되는데, 그것은 모두 우주축과 관계한다. ④이 우주축의 주위에 '세계'(=우리의 세계)가 놓여 있다. 따라서 이 축은 '중앙에', 즉 '대지의 배꼽'에 있으며 그것은 세계의 중심이다.
75 용은 바다의 괴물, 태초의 뱀의 모범적 형상이며, 우주적인 물, 어둠, 밤, 죽음 등과 같은 상징, 간단히 말해서 무형태적인 잠재자, 아직 '형태'를 획득하지 못한 모든 것을 상징한다. 코스모스가 출현하기 위해서는 신들이 용을 정복하여 갈기갈기 토막내지 않으면 안된다. 바다의 괴물 티아마트(Tiamat)의 육체로부터 마르두크(Marduk)는 세계를 만들어 냈다. 야훼는 태초의 괴물 라합(Rahab)을 정복한 후에 우주를 창조하였다. 그러나 뒤에서 보게 되는 바와 같이 용에 대한 이 신의 승리는 매년 상징적으로 반복되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세계는 해마다 새롭게 창조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어떤 도시가 침략자를 물리치고 승리를 얻는 것도 어둠, 죽음, 카오스에 대한 신의 승리를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82 만약 사원이 세계의 모상을 구성한다면 이것은 세계가 신들의 작품으로서 성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원의 우주론적인 구조는 하나의 새로운 종교적 평가의 여지를 허용한다. 신들의 집으로서, 다른 모든 것 위에 있는 성스러운 장소로서 사원은 항상 세계를 재성화한다. 왜냐하면 사원은 세계를 대표하고 동시에 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끝까지 분석해 보면, 세계가 모든 부분에서 재성화하는 것은 사원의 힘에 의해서이다. 세계가 아무리 부정하게 된다 할지라도 그것은 끊임없이 성전의 신성성에 의하여 정화된다.
85 성스러운 것이 공간 가운데 현현하는 곳에 실재가 그 모습을 드러내고 세계가 출현한다. 그러나 성스러운 것의 출현은 하나의 속된 공간의 무형태적인 유동성에 고정점을 투사하고, 카오스 속에 하나의 중심을 투사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지평의 돌파를 가져오고, 그에 따라 우주적 지평 사이 (지상과 천상 사이)의 교류를 수립하고, 하나의 존재 양식에서 다른 존재 양식으로의 존재론적인 이행을 가능하게 한다.
004. 성스러운 시간과 신화
89 이 두 종류의 시간 사이의 본질적인 차이는 우리에게 즉각적으로 다가온다. 성스러운 시간은 다음과 같은 의미에서 본질적으로 가역적이다. 좀더 정확히 말해서, 그것은 원초적인 신화적 시간을 나타낸다. 종교적인 축제나 전례의 시간은 모두 신화적 과거인 '태초에' 생겨난 성스러운 사건의 재현을 의미한다. 종교적으로 축제에 참여하는 것은 일상적인 시간 지속에서 탈출하여 그 축제에서 재현하는 신화적인 시간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스러운 시간은 무한히 회복될 수 있고 반복 가능하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지나가는' 것이 아니고, 또 결코 불가역적인 지속을 나타내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90 비종교적인 인간과 관련하여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것은 그도 역시 어떤 종류의 시간의 비연속성과 이질성을 체험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에게도 노동하는 비교적 단조로운 시간이 있는 한편 오락과 위안의 시간, 즉 '축제의 시간'이 있다. 그는 또한 여러 시간 리듬 안에 살고 있으면서도 농도를 달리하는 시간을 알고 있다. 좋아하는 음악을 들을 때, 사랑에 빠져 있을 때, 애인을 기다릴 때나 혹은 만날 때, 그는 분명히 일하거나 피곤에 지쳐 있을 때 체험하는 것과는 다른 시간 리듬을 체험한다.
94 고대 문화의 종교적 인가에게 있어서 세계는 매년 갱신된다. 다른 말로 하면, 세계는 새로운 해가 될 때마다 원초의 신성성을 회복한다. 즉 창조주의 손에서 나왔을 때의 신성성을 갖는 것이다. 이 상징은 성전의 건축 기술적 구조에서 명료하게 표현되었다. 사원은 가장 뛰어난 성소이자 세계의 모상이므로 우주 전체를 성화하고 동시에 우주의 생명을 성화한다. 이 우주적 생명은 원형 궤도의 형태로 상상되고 해(year)와 동일시되었다. 해는 닫혀진 원이었다. 그것은 처음과 끝을 가지고 있지만 새로운 해의 형태로 다시 태어날 수 있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신년이 올 때마다 하나의 '새로운', '순수한', '신성한' ― 아직 소모되지 않았기 때문에 ― 시간이 존재하게 되었다.
111 종교적 인간이 목표로 하는 모델은 처음부터 초인간적 지평, 신화에 의해 계시된 지평에 두고 있다. 인간은 다만 신화의 가르침에 순응함으로써, 즉 신들을 모방함으로써만 진정한 인간이 된다.
118 고대 및 고대 동방의 여러 종교와 인도 및 그리스에서 형성된 영원 회귀의 신화적•철학적 개념에 대하여 근본적 혁신을 가져온 것은 유대교이다. 유대교에서 시간은 처음과 끝을 가지고 있다. 순환하는 시간이란 관념은 폐기되었다. 야훼도 이제 (다른 종교의 신들과 같이) 우주적 시간 안에서 현현하지 않고 불가역적인 역사적 시간 가운데서 현현한다.
119 그리스도교는 역사적 시간의 평가에서 이보다 더 전진한다. 신이 육화되어, 즉 역사적으로 제약된 인간 실존을 받아들인 이래 역사는 성화될 가능성을 획득하기에 이르렀다. 복음서가 환기시킨 그때는 특정한 역사적 시간, 즉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이 된 시대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현존으로 성화되었다. 현대의 그리스도교가 의례적 시간에 참여할 때 그리스도가 살았고, 수난받고, 부활한 그때로 돌아간다. 그러나 그것은 신화적 시간이 아니고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를 다스렸을 때의 시간이다. 또한 그리스도교에게 성스러운 달력은 그리스도의 생애와 동일한 사건을 무한히 재현한다.
120 헤겔은 유대-그리스도교적 이념을 이어받아 그것을 총체로서의 우주적 역사에 적용하고 있다. 즉 세계 정신은 부단히 역사적 사건 가운데서 현현하고 오로지 역사적 사건에서만 자신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역사는 그 전체가 신현이 된다. 역사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세계 정신이 그렇게 하기를 욕구하기 때문에 그것이 행한 그대로 일어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게 하여 20세기에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 역사 철학에의 길을 열어놓았다.
005. 자연의 신성과 우주적 종교
121 종교적 인간에게 자연은 결코 단순히 '자연'이 아니다. 그것은 항상 종교적 의미로 충만해 있다. 이 사실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주는 신의 창조물이고, 세계는 신들의 손으로 완성된 것이어서 성스러움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이는 예를 들면, 신의 현존에 의해서 정화된 장소나 사물에 머무르는 경우와 같이 직접 신들과 교류하는 신성성만의 것은 아니다. 신들은 그보다 더 많은 것을 행했다. 그들은 세계와 우주의 현상의 구조 그 자체 안에서 다양한 성의 양태를 현현한다.
127 이러한 원시 종교들이 있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하늘의 최고 존재자는 종교적 통용성을 상실해 버린다. 즉 인간이 숭배하는 대상에서 사라져 버리고 신화에서도 차츰차츰 인간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결국에는 감추어진 신(deus otiosus)이 되어버린다. 그래도 인간은 그를 잊지 않고 다른 신들과 여신, 선조들과 혼령들에 대한 염원이 모두 공허하게 끝났을 때 마지막 간청의 대상으로 그를 부른다.
006. 인간의 실존과 성화된 생명
153 종교사의 궁극적인 목표는 종교적 인간의 행동과 정신 세계를 이해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이해시키는 일이다. 그것은 반드시 용이한 일은 아니다. 근대 세계에서 삶의 형태와 세계관으로서의 종교는 그리스도교가 대표하고 있다. 서양의 지식인들은 상당히 노력을 지불해야만 고전적 고대의 종교적 비전이나 특정한 위대한 동양 종교들 ― 예컨대 힌두교나 유교 ―에 가까워 질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종교적 지평을 넓히려는 이 같은 노력은 비록 칭찬받을 일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도달하는 범위는 그렇게 넓지 못하다. 왜냐하면 그리스, 인도, 중국은 그 방대한 성전이 지닌 복합적이고 고도로 발달한 종교의 영역을 벗어나서 서구의 지식인을 데려갈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164 현대의 주거지가 그 우주론적 가치를 상실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의 신체도 종교적 혹은 정신적 의미를 잃어버렸다. 이것을 요약하면, 현대의 비종교적 인간에게 우주는 불투명하고 둔하고 말 못하는 존재가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주는 어떤 메시지도 전해 주지 않으며, 어떤 암호도 갖고 있지 않다. 자연의 신성함이라는 의식은 오늘날 유럽의 경우 주로 농경 주민들 사이에 남아 있다. 왜냐하면 그들 사이에는 아직도 우주적 제의로 체득한 그리스도교가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164 우주적 제의, 자연의 그리스도론적인 드라마에 참여하는 신비에 대하여는 현대 도시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교는 더 이상 접근할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의 종교 체험은 더 이상 우주를 향해 열려 있지 않다. 결국 그것은 전적으로 개인적 체험이 되어버렸으니, 즉 구원은 인간과 그의 신에 관한 문제가 되었다. 기껏해야 인간은 신에게뿐만 아니라 역사에 대해서도 책임을 느끼고 있음을 인정할 뿐이다. 그러나 이 같은 인간 - 신 - 역사의 관계망 속에는 우주가 끼어들 자리가 없다. 이렇게 되면 심지어 진정한 그리스도교라도 더 이상 세계를 신의 창조물이라고 느끼지 않을 것 같아 보인다.
166 위를 향한 출구는 하늘과의 교류, 초월을 향한 욕구를 나타내고 있다. 문지방은 안과 밖의 경계선을 구체화하고 있을 뿐 아니라 하나의 지대에서 다른 지대로의 이행의 가능성을 구현하고 있다. 그러나 위험한 통과의 관념을 나타내며, 이 때문에 가입 및 장례 의례와 신화에 자주 등장하는 것은 특히 다리와 좁은 문의 형상이다. 가입식, 죽음, 신비적인 엑스터시, 절대적 인식, 유대-그리스도교에서의 '신앙', 이 모든 것들은 하나의 존재 양식에서 다른 존재 양식으로의 이행에 해당하며, 참된 존재론적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다.
169 '통과 의례'가 종교적 인간의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는 사실은 오래전부터 관찰되어 왔다. 물론 두드러진 통과 의례는 하나의 집단에서 다른 집단으로 (어린이 혹은 소년 시대에서 청년으로) 이행하는 사춘기의 가입식이다. 그러나 탄생, 결혼, 죽음의 때에도 역시 통과 의례가 존재하며, 이들도 각각 언제나 가입식의 본질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도 모두 존재론적 및 사회적 상태의 기본적인 변화를 동반하기 때문이다. 아기는 태어났을 때에는 물리적 생존을 가지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즉 그는 아직 가족에게도 공동체에게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분만 직후의 의례를 수행해야 신생하는 비로소 참된 '산 사람'의 지위를 얻게 되는 것이다. 이 의례를 통해 비로소 아기는 산 사람의 공동체에 편입되는 것이다.
183 근대의 비종교적 인간은 새로운 실존적 상황을 상정한다. 즉 그는 그 자신을 오로지 역사의 주체 및 동인으로만 간주하며, 초월적인 것을 모두 거부한다. 달리 말하면, 그는 다양한 역사적 상황에서 인식되는 인간의 상태 이외에는 어떤 종류의 인간성도 인정하지 않는다. 인간은 스스로 자신을 만든다. 그리고 오로지 자기 자신과 세계를 탈신성화시키는 것은 그가 자유를 획득하는 데 최대의 장애물이다. 그는 완전히 신비성을 잃어버릴 때에만 그 자신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최후의 신이 살해되기 전까지는 진정으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189 즉 근대 사회의 비종교적 인간은 아직도 그의 무의식의 활동으로부터 영양분과 원조를 받고 있지만 세계에 대한 본래의 종교적 체험과 비전을 보여주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무의식은 그에게 그 자신의 삶의 어려움에 대한 해결을 제공하며, 이런 방식으로 종교의 역할을 수행한다. 왜냐하면 하나의 실존을 가치의 창조자로 만들기 전에 종교는 그 완전성을 보증하기 때문이다. 어떤 관점에서 보면, 비종교적이라고 주장하는 근대인들에게 있어 종교와 신화는 그들의 무의식의 어둠 속에 '은폐'되어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그것은 또한 이러한 인간이 내면의 깊이 안에 생의 종교적 비전을 회복할 가능성을 감추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혹은 그리스도교적 관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비종교성은 인간의 새로운 '타락'에 해당한다는 것, 달리 말하면 종교적 인간은 의식된 종교 체험, 따라서 종교를 이해하고 그것을 받아들일 능력을 상실하였지만 그의 가장 깊은 존재 밑바닥에는 아직도 그 기억을 보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최초의 '타락' 이후에 그의 선조인 원초적 인간이 세계 안에서 신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을 만큼의 충분한 인식력을 가지고 있다는 표현과도 같다. 최초의 '타락' 이후 종교적 감각은 '분열된 의식'의 차원으로까지 내려와 버렸다. 두번째 타락 이후 그것은 더욱 내려와, 무의식의 심연 속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지금 그것은 '망각되고' 말핬다.
종교학자의 고찰은 여기에서 끝난다. 이제부터는 철학자, 심리학자, 신학자들에게 고유한 문제의 영역이 시작된다.
007. 연대기적 고찰
191 상이한 종교들에 공통된 요소를 분석하고 그것들의 발전법칙을 해명하며, 특히 종교의 기원과 최초의 형태를 탐구하고 규정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종교학은 독립된 학과로서는 극히 새로운 학문이다. 그것은 19세기부터 시작되어 언어학과 거의 동시에 시작되었다.
203 오늘날의 종교학자는 두 개의 서로 배치되는, 그러나 상호 보완적인 방법론적 지향으로 나누어진다. 한 그룹은 주로 종교 현상의 특수 구조에 주안점을 두는 데 비하여, 또 한 그룹은 무엇보다도 그들 현상의 역사적 연관에 관심을 갖는다. 전자는 종교의 본질을 이해하려 하며, 후자는 종교의 역사를 해명하고 서술하고자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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