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콜린스: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기독교 역사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기독교 역사 - 10점
마이클 콜린스 외 지음, 김승철 옮김/시공사

목차

기독교의 뿌리 

교회와 제국 

기독교 제국 

유럽의 개종 

십자군부터 르네상스까지 

종교개혁 

계몽주의와 신앙의 부흥 

선교와 혁명 

세계적 교회 




기독교의 뿌리 / 기원전 2000 ~ 기원후 64

기독교는 지나간 과거에 깊이 뿌리 내려 있다. 그래서 오늘날의 독자들이 기독교 신앙의 깊이와 넓이를 충실히 이해하려면 기독교가 지닌 유대교 근원을 살펴보지 않으면 안 된다. 기독교인들에게 큰 의미를 지니는 신조나 사상들은 구약성서나, 구약 성서에 등장하는 사건과 위대한 지도자들의 영향을 받아서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구약성서 이야기의 주 무대인 팔레스타인은 예수가 태어났을 당시 로마제국 변경에 있는 하나의 식민지에 불과하였다. 하지만 성장한 예수가 하느님의 평화와 구원에 대한 혁명적 메시지를 선포하기 시작하자 ― 예수의 선포활동은 그다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 그가 행한 기적과 가르침에 관한 소식들은 매우 빠른 속도로 퍼져 나갔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따르게 되었다. 관계 당국이나 종교 지도자들은 몹시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예수는 체포되어 재판에 넘겨졌으며 십자가에서 처형되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 이후 예수를 따르던 무리들은 그가 가르쳤던 복음의 소식을 전파하기 위해서 매를 맞는 아픔도 불사했고, 심지어는 목숨마저도 아낌없이 내놓았다.


교회와 제국  / 64 ~313

사도들의 가르침과 본보기에 용기를 얻은 초대 기독교인들은 주교와 장로, 그리고 집사를 세워서 공동체를 관장하게 함으로써 교회를 발전시키고자 하였다. 교회 지도자들은 또한 신자들에게 신앙을 가르치고 관장할 책임을 지고 있었다. 그 후 기독교인들은 국가로부터 공격을 받기에 이르렀다. 국가가 보기에 이 새로운 종교는 위협적인 세력이기 때문이다. 그러자 많은 기독교인들이 새로운 신앙을 버리기보다 순교의 길을 택했다.


박해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로마 제국과 그 너머로 신속하게 퍼져나갔다. 기독교 사상가나 저술가들도 등장하였다. 이들은, 기독교에 대해서 적대감을 감추지 않던 이방인들이나 유대교와 논쟁을 벌일 수 있는 인물이었다. 게다가 기독교 공동체 내부로부터도 도전 세력이 나타났다. 즉 사도들의 가르침과 다른 교리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등장한 것이다. 당시는 변화와 심판의 시기였다. 이에 대응해서 기독교인들은 당시는 변화와 심판의 시기였다. 이에 대응해서 기독교인들은 주교들의 가르침에 의지하였다. 그 가운데에서도 특히 독방과 서방의 가장 중요한 도시를 책임진 주교들은 중심 역할을 하였다.


기독교 제국 / 313~590

기독교인들은 로마 황제의 박해를 받아 온 지 거의 2세기 반이 지난 311년에 와서야 드디어 공식적으로 예배를 드려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냈다 첫번째 기독교 황제인 콘스탄티누스는 교회를 위한 관대한 후원자요 보호자였다. 이단 아리우스에 의해서 교회가 위협을 받자 콘스탄티누스는 주교들을 "공의회"에 소집하였다. 이것은 예루살렘 사도 회의 이래 처음 있는 공의회였다. 그 이후 신학적이고 목회적인 긴장이 있을 때마다 공의회가 개최되었고, 거기서 중요한 문제들이 해결되었다. 황제와 주교들은 서로 협력하였다. 기독교는 황제의 비호를 받으면서 점점 로마 제국을 닮아 갔다. 예술(건축, 조각, 모자이크, 음악)이 꽃을 피웠고, 로마, 콘스탄티노플, 예루살렘, 안티오크, 알렉산드리아 대주교들의 명성이 높아졌다. 신학은 동방의 바실리우스, 그레고리우스, 아타나시우스와, 서방의 암브로시우스, 아우그스티누스 등의 활약에 힘입어서 발전하였다. 이 시기는 또한 수도원이 발전된 시기였고, 선교사들의 노력으로 아일랜드, 인도, 에티오피아, 그리고 조지아와 같은 먼 곳까지 복음이 전파되었다.


유럽의 개종 / 590-1054

중세 유럽 세계는 영국으로부터 시작해서 러시아, 소칸디나비아, 헝가리에 이르기까지 점차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그리하여 11세기쯤에 기독교는 유럽 대륙 전체를 지배하게 되었고, 교회는 야만족들을 서서히 문명화시켜 나갔다. 서방에서는 황제 샤를마뉴 밑에서 새로운 기독교 제국이 성립되었다. 동방에서는 이슬람교도들이 쳐들어와서 기독교의 발상지라고 할 수 있는 북아프리카와 팔레스타인으로부터 기독교를 몰아냈다. 한편 동방의 황제들은 지상권(至上權) 문제로 교회와 다투고 있었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개독교로 개종했지만, 동방과 서방의 균열은 더 이상 봉합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1000년으로 진입하는 첫세기에 동•서의 교회는, 인류가 3000년을 향해서 달려가기 시작한 오늘날까지도 지속된 분열의 길로 접어들었던 것이다.


십자군부터 르네상스까지 / 1054~1517

11세기 이후의 중세 후기는 서방과 동방을 막론하고 기독교의 영향력이 극대화된 시기였다. 성직자들은 자선 단체와 교육 기관을 건립했고, 기독교 교리는 신학뿐만 아니라 철학과 법률에도 영향을 미쳤다. 개인의 신앙도 크게 변하였다. 신앙과 도덕이 몰락하면서 이름만 기독교인이었던 사람들에게 보다 깊은 신앙을 체험하도록 하는 운동들이 일어났던 것이다.


선교사들의 활동은 적대지간인 이슬람교도들에게 남쪽과 동쪽으로 막혀 있었다. 이슬람교도들을 개종시키려는 시도가 있기는 했지만, 스페인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실패하였다. 다만 북쪽에서는 선교가 잘 진행되어서 발틱 해 주변에서는 유럽의 마지막 이방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였다.


유럽이 전쟁과 침공의 세기를 벗어나면서 기독교 예술과 교육도 발전되었다. 곧 르네상스로 가는 길을 준비하게 된 셈이다.


종교개혁 / 1517~1648

르네상스의 영광은 모호한 구실을 붙여서 사람들에게 팔던 면죄부같은 것 때문에 빛이 바랬다. 서방 교회는 일촉즉발의 상황에 몰려 있었다. 독일의 신학자 마르틴 루터는 이러한 일들을 공개적으로 논박함으로써 종교 개혁의 불을 붙였다. 다른 종교 개혁자들도 이에 고무되어서 그를 따라 개혁에 동참하였다. 가톨릭 교회가 이들의 제안을 모두 거절하자 기독교 세계는 삐걱거리게 되었다. 종교 개혁은 곧 단순한 개인적 양식의 문제를 뛰어넘어 확산되었다. 정치나 영토를 좌지우지하던 교회를 타파하는 것이 자신들에게 유리하다는 사실을 간파한 정치가들은 재빨리 종교 개혁자들의 편을 들었다.


가톨릭 교회의 대응은 너무 늦었다. 그 결과 17세기 중반에 이르러 유럽의 종교 지도는 완전히 다시 그려지게 되었다. 기독교의 분열은 가톨릭 국가와 프로테스탄트 국가 사이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으로 이어졌다. 반면 가톨릭 선교사들은 남아메리카와 아프리카, 인도, 중국, 일본 등 낯선 이국에까지 가서 복음의 뿌리를 심었다.


계몽주의와 신앙의 부흥 / 1648~1776

종교 개혁 기간 동안 일어났던 피비린내 나는 종교 전쟁은 기독교에 대한 강한 반작용을 불러 왔다. 교회의 권위를 탈중심화했던 종교 개혁자들은 17~18세기의 철학자, 과학자로 하여금 세상과 인간의 일들을 순수하게 세속적인 개념으로 설명하도록 길을 예비해 준 셈이다.


그러나 이 기간에는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철저한 부흥 운동도 있었다. 한편에는 계몽주의의 두 기둥인 볼테르와 루소가 있었고 다른 한편에는 부흥 운동의 두 거두인 웨슬리와 하이트필드가 있었던 것이다. 자주 인용되는 찰스 디킨스의 말처럼, 이 시기는 정말 "신앙의 시기이자 의심의 시기"였다. 그래서 교회로서는 "이 시기가 최고의 시간인 동시에 최악의 시기였다." 이처럼 서방 세계가 거대한 투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있는 동안 이국에 대한 선교의 열정은 쇠퇴하고 있었다.


선교와 혁명 / 1776~1914

종교개혁자들과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종교와 사회에 미쳤던 영향은 18세기 말과 19세기에도 계속되었다. 종교 개혁이 불을 지핀 대중 운동은 이 후 두 세기 내내 폭발했고, 미국의 애국자들이 영국을 겨냥해서 일으킨 피비린내 나는 혁명과, 그보다 더 살벌한 프랑스 혁명으로 절정에 도달하였다. 정부는 비틀거렸으며 교회의 권위도 ― 불과 몇 세대 전만 해도 아무런 도전 없이 우선권을 누리던 나라들에서 조차 ― 땅에 떨어졌다. 자유주의 신학자나 기회주의적인 정치 선동가들도 교회의 근본 교리와 확신을 비판하면서 공격에 가담하였다.

 

그러나 교회의 경계는 모든 차원에서 확장되었다. 윌리엄 케어리 같은 선교사들은 복음을 알지 못하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했으며, 찰스 피니나 찰스 스퍼전 같은 설교자들은 엄청난 부흥의 힘으로 기독교의 생명력을 강화시켰다. 그리고 윌리엄 부스 같은 사회개혁자들은 도덕적 권위를 가지고 노예 제도나 노동자 착취 같은 불의에 강력하게 대항하였다.


세계적 교회 /1914~99

20세기에 교회는 크게 변화하였다.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의 신생교회들은 선교사들로부터 독립해서 자치교회를 세웠으며, 성장 속도가 매우 빨라서 수적으로나 역동적인 측면에서 유럽의 교회를 앞질렀다. 사실 유럽 기독교는 쇠퇴하고 있었다. 카리스마 운동이나 복음 전도 운동과 같은 중요한 운동들은 국제적인 규모에서 일어났다. 미국 교회는 광범위하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지만 여러 종파로 나뉘어 있었고, 특히 개신교가 그러하였다.


두 차례의 세계 대전과 대량 학살, 혁명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사회의 변화를 수용하고 여러 교파의 요구들을 받아들였다. 제3천년기가 밝아 오는 지금, 지상의 교회는 인간을 지지하고 돌보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을 여전히 따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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