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4 - 아르놀트 하우저 지음, 백낙청 외 옮김/창비 |
목차
제1장 자연주의와 인상주의
1. 1830년대의 세대
2. 제2제정기의 문화
3. 영국과 러시아의 사회소설
4. 인상주의
제2장 영화의 시대
제1장 자연주의와 인상주의
1. 1830년대의 세대
16 이 시대의 가장 특징적 산물이며 19세기의 가장 중요한 예술형태인 자연주의 소설은 그 창시자들의 낭만주의적 취향, 이를테면 스땅달의 루쏘주의라든가 발자끄의 멜로드라마적 과장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세대의 비낭만적 정신을 표현한다. 계급투쟁이라는 범주에서의 정치적 사고와 더불어 경제적 합리주의는 소설가에게 사회적 현실과 사회심리학적 매커니즘의 연구를 불가피하게 했다.
17 18세기까지는 작가란 단지 자기 독자층의 대변인데 불과했다. 하인과 관리들이 그들의 물질적 재산을 관리하듯이 작가들은 독자의 정신적 재산을 관리했다.
17 18세기에 와서야 비로소 독자층은 서로 다른 두 진영으로 분리되고 예술은 서로 대립하는 두 경향으로 나누어진다. 이때부터 모든 예술가는 반대되는 두 질서인 보수적 귀족의 세계와 진보적 부르즈와의 세계 사이에서, 즉 이른바 절대적이라고 하는 낡은 전통적 가치를 고수하는 그룹과 바로 이런 가치조차도 시대적인 제약을 받으며 좀더 자기와 맞으면서 공공의 이익에 합치되는 다른 가치도 있다는 신념에 근거를 둔 그룹 사이에서 선택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26 문학과 일간신문의 결합은 어느 동시대인의 의견에 따르면 공업적 목적을 위한 증기의 사용처럼 혁명적인 효과를 가지며, 문학적 생산의 모든 성격을 바꾸어놓는다. 설령 이런 비유가 과장되었고 문학의 산업화가 다만 일반적인 정신적인 발전, 즉 그 시대의 예술창작 자체의 한 경향을 나타낸 데 불과하다 하더라도, 대단찮은 작가지만 창의적 사업가인 에밀 드 지라르댕이 그때까지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던 뒤따끄의 아이디어를 따서 1836년 [라 프레스]를 창간한 것은 하나의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27 엄청난 수요를 채우기 위하여 인기작가들은 이제 규격화된 작품을 만들어내는 데 대단히 귀중한 도움을 주는 대리필자들을 고용한다. 말하자면 문학공장이 설립되고 소설은 거의 기계적으로 생산되는 것이다. 어느 소송사건을 계기로, 뒤마가 밤낮없이 계속 일하더라도 쓸 수 없는 많은 작품이 그의 이름으로 발표된 것이 밝혀졌다.
35 아무리 정치적•도덕적 경향성을 띤 작품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모름지기 예술작품이라면 순수한 예술 즉 단순한 형식체로 파악될 수 있으며, 또한 모든 예술 창작은 작자가 아무런 실제적 목적을 갖지 않고 쓴 작품이더라도 사회적 인과관계의 표현이고 그 수단으로 간주될 수 있다. 단떼의 행동주의가 [신곡]의 순전히 미학적인 해석을 배제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플로베르의 형식주의 때문에 [보바리 부인]과 [감정교육]의 사회학적 설명이 부정되지는 않는다.
36 자연주의는 동일한 자연의 개념에 확고하게 근거를 둔 단일하고 명백한 예술관이 아니라, 수시로 변모하면서 그때마다 일정한 목적과 구체적 과제를 지향하는, 그때그때 특별한 현상에 초점을 두는 인생해석이다. 자연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이 나타나는 것은 그들이 자연주의적 표현방식이 양식주의적 방식보다 원래부터 더 예술적이라고 여겨서가 아니라, 그들이 더욱 강조하고 싶은 하나의 경향을, 그들을 촉진시키거나 혹은 반대로 투쟁하고 싶은 하나의 경향을, 그러한 특징을 현실에서 발견하기 때문이다.
37 1830년 세대의 사회의식, 자신들의 사회적 이해관계가 걸려 있는 현상에 대한 민감성, 사회변화와 가치전도에 대한 그들의 통찰이 이 작가들로 하여금 사회소설과 근대 자연주의를 창조하도록 만든 것이다.
39 소설양식의 발전과정에서 18세기의 가장 중요한 문학형태인 교양소설(Bildungsroman)에서 내면화의 경향은 한층 강력하게 표현된다. 주인공의 발전사는 그리하여 한 세계의 형성사가 된다. 개인적 교양이 문화의 가장 중요한 원천이 되는 시대만이 이러한 소설형태를 낳을 수 있는데, 그것은 공동체 문화가 깊이 뿌리박지 못한 독일 같은 나라에서 생겨날 수밖에 없었다. 교양소설의 기원은 필딩의 [톰 존즈]와 스턴의 [트리스트램 샌디] 같은 주로 삐까레스끄적 성격의 소설들로 거슬러올라가지만, 엄격한 의미에서 최초의 교양소설은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라고 보아야 한다.
42 인물이 사회에 얼마나 뿌리박고 있느냐 하는 것은 그 인물의 리얼리티와 신뢰도에 대한 평가기준이 되며, 그의 존재가 사회적 문제성을 제기하는 데서 비로소 그 인물은 새로운 자연주의 소설의 대상이 된다. 이러한 사회학적 인간 개념이야말로 1830년 세대의 작가들이 소설을 위해서 발견했던 것이며, 맑스 같은 사상가가 발자끄의 작품에서 가장 흥미를 느꼈던 점이다.
43 스땅달의 여러 소설은 정치적 연대기들이다. [적과 흑](1830)은 왕정복고 기간중의 프랑스 사회의 역사이고, [빠르므 수도원](1839)은 신성동맹 체제하의 유럽상이며, [뤼씨앵 뢰뱅](1834)은 7월 왕정의 사회적 분석이다. 물론 역사적•정치적 색채를 띤 소설은 옛날부터 있어왔다. 그러나 스땅달 이전에는 아무도 바로 자기 시대의 정치체제를 소설의 본격적 대상으로 삼으려 하지 않았다. 그 이전에는 아무도 그렇게 역사적 순간을 의식하지 않았으며, 역사가 순전히 그러한 순간들로 구성되고 또 역사가 여러 세대에 걸친 하나의 연속적 연대기를 이루게 된다는 것을 그처럼 강하게 느끼지 않았다.
2. 제2제정기의 문화
81 예술적 스타일로서의 자연주의와 철학적 입장으로서의 리얼리즘의 개념은 각기 명료한 것이지만 예술에서 자연주의와 리얼리즘의 구별은 사태를 복잡하게 만들며 아무 내용 없는 문제를 야기시킨다. 뿐만 아니라 '리얼리즘'의 개념에는 낭만주의와의 대조가 지나치게 강조되어 있고, 우리가 여기서 다루고 있는 것이 실제로는 낭만주의적 태도의 직접적 발전이라는 사실이나 낭만주의에 대한 자연주의의 승리라기보다 낭만주의 정신과의 끊임없는 투쟁을 뜻한다는 사실이 등한시 될 위험이 있는 것이다.
81 자연주의란 실상 새로운 관습을 지닌 낭만주의이다. 진실감에 대한 자연주의의 가정이 새롭기는 하나, 이러한 가정이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언제나 자의적이게 마련이다. 낭만주의와 자연주의의 가장 중요한 차이는 후자는 과학주의, 즉 현실의 예술적 묘사에 정밀과학의 원칙을 적용한 데에 있다. 19세기 후반에 자연주의적 예술이 지배적 위치에 서게 된 것은 관념론과 전통주의의 정신에 대한 과학적 세계관 및 합리주의적•기술중심적 사고방식의 승리에 따른 한 징후일 따름이다.
82 자연주의 입장의 가장 중요한 근원은 1848년 세대의 정치적 경험이다. 혁명의 실패, 6월 봉기(1848년 6월 23일에서 26일까지 빠리의 노동자들이 국민 공장 해체 등 정부의 정책에 반대하여 일어난 사건으로 육군장관 까베냐끄 장군이 군대를 불러들여 진압함 - 옮긴이)의 진압, 나뽈레옹 3세의 집권 등, 이러한 사건들에 따른 일반적인 환멸감과 민주주의자들의 실망감은 객관적이고 사실적이고 주어진 경험에 대해 엄정중립적인 자연과학의 태도를 통해 가장 잘 표현된다. 모든 이상과 유토피아가 실패하고 난 후 이제 사람들은 사실에, 그리고 오로지 사실에만 집착하고자 한다.
83 자연주의는 프롤레타리아 예술가의 운동에서 시작한다. 그 첫 대가는 꾸르베인데, 그는 서민대중 출신이며 부르즈와적 범절에 대한 존중심이 전혀 없는 예술가이다. 왕년의 보헤미안 그룹이 흩어지고 그 멤버들은 낭만주의 기분을 내려는 부르즈와지의 총애물이 되어버린 후 이제 꾸르베의 주위에 새로운 써글, 말하자면 제2의 보헤미안파가 형성된다.
105 "보바리 부인은 바로 나다"라는 플로베르의 말은 이중의 의미에서 진실이다. 그는 젊은 시절의 낭만주의뿐 아니라 낭만주의에 대한 비판 그리고 자신이 맡은 문단의 심판자적 역할 역시 하나의 환상생활에 지나지 않는다는 느낌을 자주 가졌음에 틀림없다. 바로 이러한 환상생활의 문제점과 자기 성격 내부의 자기기만과 허위의 위기를 강렬하게 체험한 데서 [보바리 부인]의 예술적 진실성과 박진감이 나오는 것이다.
123 무미건조한 부르즈와 취미를 따르는 순응주의적 경향과 자연주의적 반항의 예술 틈에서 오페레타는 하나의 독자적인 세계를 ― 하나의 중간왕국을 형성한다. 그것은 동시대의 부르즈와 연극이나 인기소설보다 훨씬 더 매력이 있고 사회적으로는 자연주의보다 더 대표적이며, 또한 사회 각 계층에 광범위하게 호소하면서 동시에 일종의 예술적 가치를 지닌 대중적 작품이 생산된 유일한 장르이다.
123 오페레타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자 자연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가장 기이하게 느껴지는 점은 그 완전한 비현실성이요, 잇따라 지나가는 장면들의 가공적•환상적인 성격이다. 오페레타가 19세기에서 갖는 의미는 전원극이 18세기에서 가졌던 의미와 마찬가지이다. 그 내용의 허구성, 갈등과 결말의 상투성은 현실과 전혀 관련되지 않은 순수한 유희형태인 것이다.
126 오페레타의 성장은 음악에 대한 저널리즘(시사성)의 침투를 뜻한다. 소설, 연극, 미술에 뒤이어 이제 음악이 일상의 사건에 논평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오페레타의 시사성은 시사적인 노래가사와 만담가의 재치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장르 전체가 말하자면 상류사회의 스캔들 이야기로 채워진 가십란 같은 것이다.
128 오페레타는 1855년과 1867년의 두 세계박람회 사이의 기간에 성황을 누렸다. 1860년대 말의 정치적 불안 이후에는 그렇게 근심없는 혹은 근심없고 안전하다고 믿으려는 관중이 사라졌다. 제2제정기와 더불어 오페레타의 황금시대는 종말에 이른다. 그뒤의 세대들이 오페레타에서 얻은 즐거움은 그것이 현재를 직접 실감있게 표현한 장르여서가 아니라, 다른 어느 장르보다도 그들 마음속에서 '좋았던 옛시절'과 더 직접적으로 연관되었기 때문이다.
130 [뉘른베르크의 명가수들]과 [아이다]에 아직도 통용되며 아마도 초기 이딸리아 오페라의 그것보다 더 엄격한 인습을 지닌 '그랜드 오페라'의 권위는 프랑스 부르즈와지의 문화가 전 유럽에 걸쳐 모범이 되었고 어디에서나 사회적 조건에 근거를 둔 진정한 필요에 맞아 들어갔다는 사실에 기인했던 것이다.
132 19세기의 가장 민감했던 많은 사람들에게 그의 작품이 예술의 정수를, 즉 음악의 의미와 배후원리를 최초로 드러낸 범례를 뜻했던 것은 이유가 없지 않다. 그것은 분명히 낭만주의의 최후이자 아마 최대의 개화였고, 오늘날까지 살아있는 유일한 형태의 낭만주의인 것이다. 낭만주의가 동시대인들에게 얼마나 큰 황홀감을 불러일으켰으며, 또한 얼마나 모든 죽은 인습에 대한 반항으로, 이제까지 금지되었던 새롭고 복된 세계의 발견으로 느껴졌는가를 바그너의 작품처럼 우리에게 실감시켜주는 것은 없다.
3. 영국과 러시아의 사회소설
134 경제적 자유는 정치적 자유주의와 동일한 역사적 기원을 가졌다. 둘 다 계몽주의 성과로 나타났으며 논리적으로 상호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개인적 자유주의와 개인주의라는 입장을 택하는 즉시 또한 자유경쟁의 타당성을 인권의 불가결한 요소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민계급의 해방은 봉건주의의 해체에 필요한 하나의 단계인 동시에 경제활동이 중세적 속박과 제한에서 벗어날 것을 미리 전제로 삼는 것이다. 시민계급과 귀족계급의 동등권은 자본주의 이전의 경제형태가 점차 극복•해소되어가는 발전의 결과로서만 설명될 수 있는 것이며, 경제활동이 완전한 자율의 단계에 이르고 시민계급이 봉건적 계급체제의 엄격한 제약들을 타파하고 난 뒤에야 비로소 자유경쟁의 무질서상태에서 사회를 해방한다는 데에 생각이 미칠 수 있었다.
135 산업주의의 경제적 원리를 대변한 공리주의자들은 아담 스미스의 제자들로, 그들은 저절로 움직이도록 방임해두는 경제가 자유주의의 정신에 일치될 뿐만 아니라 일반대중의 이익에도 가장 잘 합치된다는 이론을 주창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이상주의자들에게 가장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킨 것은 정말 변호되기 힘든 이 이론의 결함들이라기보다 오히려 이기적 본능을 인간행위의 궁극적 원리라고 설명하는 숙명론과, 인간의 이기주의라는 사실에서 경제와 사회생활의 여러 법칙을 수학적 필연성에 의해 도출할 수 있다고 믿는 태도였다. 이처럼 인간을 '호모 에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 경제적 인간)로 환원하는 데 대한 이상주의자들의 항의는, 직접적 체험현실에서 추상된 사고와 합리주의에 대해 낭만주의적 '생의 철학'(Lebensphilosophie), 즉 삶이란 논리적으로 다 파헤쳐지거나 이론의 틀에 종속될 수 없다는 신앙이 언제나 제기하는 항의였다.
137 부르즈와지에 대한 증오가 엄격•냉혹한 자연주의로 표현된 프랑스에서와 달리, 17세기 이후 아무런 혁명도 겪지 않았으며 프랑스의 정치적 경험과 실패도 당해본 바 없는 영국에서는 그리하여 앞에서 얘기한 제2의 낭만주의 운동이 성립된다. 프랑스에서는 19세기 중엽에 운동으로서의 낭만주의는 해소되며, 그것과의 씨름은 정도의 차는 있겠으나 어쨌든 사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영국의 상황은 이와 다르게 전개되는데, 여기서는 합리주의적 경향과 비합리주의적 경향 사이의 적대관계가 예컨대 플로베르의 경우에서처럼 결코 하나의 내적 투쟁으로 제한되지 않고 디즈레일리의 '두개의 국가'(디즈레일리는 당시의 영국이 사실상 빈•부 두 국가로 갈라져 있다고 말했음 - 옮긴이)보다 실제로 훨씬 더 이질적인 성격을 지닌 두 진영으로 갈라진다.
151 디킨즈는 모든 시대를 통해서 가장 성공적인 문필가의 한 사람이며, 아마도 근대의 위대한 작가들 중 가장 인기있는 작가일 것이다. 어쨋든 그는 자기 시대에 대한 저항이나 환경과의 긴장된 관계에서 작품이 생겨나지 않는, 독자대중의 요구와 완전한 일치를 이룬, 낭만주의 이래 유일한 참다운 작가이다.
153 영화가 우리 시대의 '동시대적 예술'인 것과 마찬가지로 그의 소설은 생생한 당대적 문학이었으며, 그 예술적 결함을 완전히 의식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그것은 살아 있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예술이라는 탁월한 가치를 지닌 것이다.
155 플로베르, 모빠상 및 공꾸르 형제가 그들의 보수주의에도 불구하고 고개 숙일 줄 모르는 방항아임에 반하여, 디킨즈는 정치적 진보성과 기존 상황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적 지배체제의 전제들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일개 온순한 시민이었던 것이다. 그는 다만 소시민의 부담과 불평을 알고 있었고, 부르즈와 사회의 기초를 뒤흔들지 않고 고칠 수 있는 악에 대해서만 싸웠을 따름이다.
158 오늘날의 상황에서 매우 특징적인 현상, 즉 교양있는 비판적 독서층과 함께 가벼운 일시적 오락 이외의 어떠한 것도 문학에서 찾지 않는 똑같이 규칙적인 일단의 독자들이 존재하는 현상은 빅토리아 시대 이전에는 찾아볼 수 없었다. 문학적 오락에만 관심이 있는 계층은 아직 대체로 어쩌다가 책을 읽는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었고, 반면에 정규적인 독서층은 교양인들로 제한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디킨즈의 시대에는 오늘나로가 마찬가지로 문예작품에 흥미를 가진 가진 두 그룹이 존재하게 되었다.
162 사회소설이 기본적으로 아직 부르즈와지와 결합해 있던 교양계층의 문학형식이었듯이, 심리소설은 부르즈와지로부터 해방되는 과정에 있는 교양계층으로서의 지식인의 문학적 장르이다. 빅토리아조 중기가 시작되면서 비로소 지식인은 속박되지 않고 '유동적'(freischweben)이요 '초계급적'(klassenjenseitig)이며 여러 다른 계급 사이를 '중개하는'(vermittelnd) 하나의 집단으로서 영국에 등장한다.
165 중세의 수도사와 반대로 근대의 지식인은 재산 정도와 직업이 각기 다른 여러 계층의 출신자들로 성립되고, 따라서 서로 다른 계층의 때로는 적대적인 계층들의 이해와 관점을 대변한다. 이러한 이질성은 자기들이 계급적 대립을 초월해 있으며 사회의 살아있는 양심을 대표한다는 느낌을 강화시킨다. 출신의 혼합성으로 인하여 그들은 여러 다른 이데올로기와 문화의 한계를 초기의 교양계층보다 더 강력하게 느끼고, 일찍이 시민계급의 맹우로서도 벌써 자기들의 사명이라 여겼던 사회비판의 어조를 더욱 날카롭게 한다.
165 부르즈와지와 아직 일체이던 교양계층은 개혁의 선봉자였으나, 부르즈와지로부터 떨어져나온 지식인은 반항과 분해작용의 요소가 된다. 1848년경까지 지식인은 아직 부르즈와지의 정신적 전위이나, 1848년 이후 그들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노동계급의 챔피언이 되는 것이다. 자신의 존재가 불안전해진 결과 그들은 프롤레타리아트와 어느정도 공동운명체임을 느끼는데, 이 연대감은 때가 되면 부르즈와지를 모반하여 반자본주의적 혁명의 준비에 가담할 결의를 북돋워준다.
166 영국에서는 시민계급과의 결합이 아직도 매우 밀접하기 때문에, 지식인은 광범위한 대중과 협력하기보다 차라리 '귀족주의적 도덕사상가'의 위치로 도피하는 쪽을 택했다. 죠지 엘리어트조차도 실제로는 사회학적으로만 대답할 수 있는 문제들에의 해답을 심리학에서 찾았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녀는 러시아 소설이 이제 밟게될, 그리하여 그것을 완성으로 인도하게될 길을 버리는 것이다.
166 근대 러시아는 본질적으로 러시아 지식인의 산물인데, 이들은 제정 러시아의 기성체제와 결별한 정신적 엘리뜨들로서 문학은 무엇보다도 사회비판으로, 그리고 소설은 '사회소설'로 이해한다. 러시아에서는 사회적 의의 또는 효용성을 내세우지 않는 단순한 오락문학이나 순수한 심리분석으로서의 소설은 1880년대에 이르기까지 알려지지 않은 장르이다.
174 사회소설은 발자끄에서, 교양소설(Bildungsroman)은 플로베르에서, 빠까레스끄 소설은 디킨즈에서 각기 그 완성을 보듯이 심리소설은 도스또예프스끼와 똘스또이에 이르러 완전한 성숙기에 들어간다. 이 두 소설가는 한편으로 루쏘, 리처드슨 및 괴테의 감상소설에서, 다른 한편으로 마리보, 꽁스땅 및 스땅달의 분석소설에서 시작한 발전과정의 최종단계를 대표하는 것이다.
180 도스또예프스끼는 당대의 사회문제들 ― 무엇보다도 사회구성원의 미립자화와 계급간에 점점 깊어가는 심연 ― 을 지식인의 관점에서 보고, 그 해결책을 교육받은 사람들이 원래 그들이 스스로를 소외시켜버렸던 소박하고 신앙심 깊은 민중과 다시 하나가 되는 길에서 찾았다. 똘스똘이는 같은 문제들을 귀족의 관점에서 보고 사회의 재건에 대한 희망을 지주와 농민들 간의 상호이해에서 기대했다. 그의 사상은 아직도 가부장적•봉건적 개념과 결부되어 있는바 그의 사상을 실현하는 데 가장 근접하는 인민에게 은혜를 베푸는 사람일 뿐이다.
188 여러가지 극단적인 대조에도 불구하고 도스또예프스끼와 똘스또이는 개인주의와 자유의 문제에 관한 그들의 태도에서 근본적인 공통점이 이다. 두 사람 다 사회로부터의 개인의 해방과 그의 고독 내지 고립을 최대의 악이라고 본다. 두 사람 다 그들이 지닌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사회로부터 소외된 개인에게 들이닥치려고 하는 혼돈을 막아보려고 한다. 특히 도스또예프스끼에 있어서는 모든 것이 '자유'의 문제를 중심으로 돌고 있으며 그의 위대한 소설들은 근본적으로 이 개념의 분석과 해석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4. 인상주의
201 기술의 진보와 관련하여 가장 눈에 띄는 현상은 문화의 중심이 현대적 의미의 대도시로 발전해가는 일로서, 이 대도시는 새로운 예술이 뿌리내리는 토양을 형성하게 된다. 인상주의는 유례없이 도시적인 예술인데, 그것은 다만 인상주의가 풍경으로서의 도시를 발견하고 그림을 시골에서 도시로 옮겨왔기 때문만이 아니라 세상을 도시인의 눈으로 보고 현대적 기술인의 극도로 긴장된 신경으로 외부 세계의 인상들에 반응하기 때문이다.
202 중세 후기의 경제에서 고도 자본주의에 이르는 발전경로와 비교될 수 있는 하나의 연속적인 흐름이 고딕 예술에서 인상주의까지를 잇고 있는데, 자기의 생존 전체를 투쟁이요 경쟁이라 파악하고 모든 존재를 운동과 변화로 보며 세계의 체험이 점점 더 시간의 체험으로 되어가는 근대인은 이 두 개의 양면적인, 그러나 근본적으로 통일된 발전의 산물인 것이다.
202 인상주의를 가장 단순하게 정식화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지속과 존속에 대한 순간의 우위, 모든 현상은 어쩌다가 일시적으로 그렇게 놓여 있을 뿐이라는 느낌, 두번 다시 발디딜 수 없는 시간의 강물 위로 사라져가는 하나의 물결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인상주의적 방법은 모든 예술적 수단과 기교를 동원하여 무엇보다 이러한 헤라끌레이또스적 세계관을 표현하려고 하며 현실이란 존재가 아니라 생성이요, 결정된 상태가 아니라 움직이는 과정임을 강조하려 한다.
203 스타일면에서 인상주의는 대단히 복합적인 현상이다. 어떤 맥락에서 보면 그것은 단지 자연주의의 일관된 발전형태에 불과하다. 말하자면 일반적인 것에서 특수한 것으로, 전형적인 것에서 개별적인 것으로, 추상적인 관념에서 시간적•공간적으로 규정된 구체적 체험으로 나아감을 자연주의라고 한다면 인상주의의 현실묘사는 순간적•일회적인 것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자연주의의 중요한 성과에 포함될 수 있다.
204 인상주의는 작품에 묘사된 것이 곧 현실 자체와 같다는 착각을 자연주의보다 덜 불러일으킨다. 대상의 그러한 환영 대신에 인상주의는 대상의 요소들을 보여주며, 경험의 전체상이 아니라 경험을 이루는 구성의 재료들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전의 예술은 대상을 기호에 의하여 재현했으나, 이제 인상주의는 대상의 구성요소에 의하여, 대상을 이루고 있는 물질의 부분들에 의하여 표현한다.
207 17,8세기의 문학의 우월적 위치, 낭만주의 시대의 음악의 주도적 역할에 뒤이어 19세기 중엽에는 회화에 유리한 하나의 전환이 일어나는 것이다. 미술 비평가 아쏠리노는 이미 1840년에 회화가 문학의 왕좌를 빼앗았음을 지적했으며, 한 세대 후에 공꾸르 형제는 이미 "문필가라는 직업에 비하여 화가라는 직업은 얼마나 행복한 것인가!"라고 격양된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회화는 당대의 가장 진보적인 예술로서 다른 모든 장르를 압도할 뿐만 아니라, 작품의 성과에서도 동시대의 문학이나 음악을 질적으로 능가한다.
219 심미주의는 인상주의 시대에 와서 발전의 절정에 달한다. 그 특징적 성격들, 즉 인생에 대한 수동적이요 순전히 관조적인 태도, 체험의 덧없음과 불확실성 및 쾌락주의적인 감각주의는 이제 예술 일반의 평가기준이 된다. 예술작품은 단지 목적 자체로 간주될 뿐 아니라 오로지 심미적인 것 이외의 어떠한 이질적 목표를 설정하더라도 그 매력이 손상되는 하나의 자기 충족적 유희로, 그것을 감상하기 위해서는 거기에 완전히 몰두해야만 할 삶의 가장 아름다운 선물로 간주될 뿐 아니라, 또한 그 자족성으로 말미암아, 그리고 자기 영역 바깥에 있는 일체의 것에 대한 철저한 무관심으로 말미암아 삶의 모범, 좀더 정확히 말해 딜레땅뜨 인생의 모범이 되는바, 이 딜레땅뜨의 존재가 시인과 작가의 평가에 의해 과거의 정신적 영웅들을 대신하기 시작하여 '세기말'의 이상을 대표하게 되는 것이다.
219 그것은 낭만주의보다 한술을 더 떠서 예술을 위해 인생을 버릴 뿐 아니라 예술 자체 속에서 인생의 정당화를 찾는다. 그것은 예술의 세계를 인생의 환멸에 대한 단 하나의 진실된 보상으로, 원래 불완전하고 불명료하게 마련인 인간존재의 참다운 실현이요 완성으로 여기는 것이다.
224 1880년 대에는 사람들이 당대의 심미적 쾌락주의를 '데까당스'(decadence)라고 즐겨 불렀다. 셈세한 향락자 데제쌩뜨는 동시에 버릇없는 '데까당'(decadent)의 원형이다. 그러한 데까당스의 개념은 심미주의의 개념에 반드시 포함되어 있지 않은 특징들, 그러니까 무엇보다도 문화의 몰락과 위기라는 느낌, 즉 흥망성쇠라는 한 생명과정의 종말에 서 있으며 한 문명의 해체에 직면해 있다는 의식을 포함한다. 극도로 세련되고 쇠진한 과거의 여러 문화, 즉 헬레니즘, 로마제국 말기, 로꼬꼬 및 위대한 대가들의 난숙한 '인상주의적' 양식에의 공감은 데까당스 감정의 본질에 속하는 것이다.
229 보헤미안이란 원래 단지 부르즈와적 생활방식에 반대하는 하나의 시위를 뜻했었다. 그들은 대부분 부유한 집 자식인 젊은 예술가와 학생들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그들에게 기성사회에 대한 반대란 대체로 젊은이다운 호기와 심술에 지나지 않았다.
230 다음 세대의 보헤미안, 거리의 맥주집에 본부를 둔 전투적 자연주의의 보헤미안, 즉 샹플뢰리•꾸르베•나다르, 뮈르제 등이 속해 있던 세대는 이와 달리 진정한 보헤미안, 즉 완전히 불안정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예술 프롤레타리아트, 부르즈와 사회의 한계선 바깥에 서서 호기에 찬 유희로서가 아니라 절박한 필연성으로 부르즈와지에 대항해 싸우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예술 프롤레타리아트였다. 그들의 비부르즈와적 생활방식은 그들의 확실치 못한 생존에 가장 적합한 형태이며 이미 단순한 가장이 결코 아니었다.
234 그러나 비합리주의적•정신주의적 입장이라는 점에서 상징주의는 또한 자연주의적•유물론적 인상주의에 대한 날카로운 반동을 뜻한다. 인상주의에서는 감각적 경험이 다른 무엇으로 환원될 수 없는 최종적인 것임에 반하여, 상징주의에서는 일체의 경험적 현실은 단지 관념세계의 비유일 뿐이다.
234 상징주의에서 시란, 그 자체로서 독립된 언어가 구체적인 것과 추상적인 것, 물질적인 것과 개념적인 것, 그리고 감각의 여러 다른 영역들 사이에서 창조해내는 관계들과 일치된 표현 바로 그것이다.
235 알레고리의 경우 관념은 여전히 비유적 표현에서 어느정도 독립되어 있으며, 다른 형태로도 표현될 수 있다. 반면에 상징은 관념과 이미지에 불가분의 통일성을 가져오며 따라서 이미지의 변화는 동시에 관념의 변형을 뜻하게 된다. 요컨대 상징의 내용은 다른 형태로 번역될 수 없으나 상징 그것은 여러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데, 해석의 이러한 다양성, 상징의 이러한 얼핏 무수한 듯한 의미는 바로 그것의 본질적 특징이다. 상징과 비교하면 알레고리는 항상 관념의 단순명백하고 어느정도는 쓸데없는 전사(轉寫)로서, 이 경우 관념이 한 영역에서 다른 영역으로 옮겨진다 해서 그 관념에 무엇이 보태지는 것은 아니다. 알레고리는 누구나 뻔히 풀 수 있는 일종의 수수께끼인데 반하여, 상징은 해석할 수 있을 따름이지 풀 수는 없는 것이다.
제2장 영화의 시대
286 1930년대의 역사는 사회비판의 시대, 사실주의와 행동주의의 시대의 역사다. 모든 정치적 입장이 극단화된 시대이며, 오직 극단적인 해결만이 도움이 될 수 있다는, 다시 말해서 모든 온건주의자들의 역할은 끝났다는 신념이 널리 퍼신 시대다. 그중에서도 부르즈와 생활질서의 위기를 가장 절실히 느끼고 부르즈와 시대의 종언을 가장 많이 이야기한 것은 부르즈와지 자체 내에서이다.
289 20세기의 거대한 반동의 물결은 예술분야에서 인상주의의 부정으로 나타난다. 어떤 점에서는 이 전환이야말로 르네쌍스 이래 다른 어느 스타일 변화보다도 더 심각한 예술사상의 단절을 가져왔다. 이제까지의 변화에서는 자연주의 예술적 전통을 근본적으로는 건드리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형식주의와 반형식주의 사이에서 항상 진동이 있어왔지만, 예술의 과제가 자연에 충실하고 삶을 있는 그대로 표현한다는 데에는 중세의 종말 이래로 아무런 원칙적인 반대가 없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인상파 예술은 400년 이상 계속되어온 발전과정의 정점이자 종착점이었다.
290 인습적 표현양식에 대한 체계적 투쟁과 이에 따른 19세기 예술전통의 해체는 1916년의 다다이즘과 더불어 시작한다. 다다(Dada)는 하나의 전시(戰時)현상으로서의 전쟁으로 달음질친 문화에 대한 항의였다. 즉 일종의 패배주의였던 것이다.
297 20세기는 심각한 대립으로 가득 차 있고 통일된 세계관은 심히 위협받고 있다. 따라서 극단적으로 대립되는 것의 통일과 가장 모순되는 것들의 종합이 20세기 예술의 주요 주제, 아니 때로는 유일한 주제가 된다. 앙드레 브르똥이 지적하듯이 초현실주의는 주로 언어의 문제 즉 시적 표현의 문제에 집중되었고, 뽈라의 말을 빌린다면 의사소통 수단 없이 의사소통을 하려 했던 것인데, 이러한 초현실주의는 모든 형식의 역설적 성격과 모든 인간존재의 부조리성을 그 세계관의 기초로 삼는 예술로 발전하였다.
302 연극은 여러가지 면에서 가장 영화와 닮은 장르이다. 특시 시간적 형식과 공간적 형식을 종합하고 있다는 점에서 영화와 비교할 수 있는 유일한 장르다. 그러나 무대 위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일부는 공간적이고 일부는 시간적일 따름이다. 대개는 시간적인 것과 공간적인 것이 나란히 병존할 뿐이지 영화에서처럼 양자가 내적으로 결합되어 있지는 않다. 영화와 다른 예술 간의 가장 근본적인 차이는 시간과 공간의 경계가 유동적이라는 점이다. 즉 영화서는 공간이 시간 비슷한 성격을 띠고, 시간은 또 어느정도 공간적인 성격을 갖는 것이다.
306 현대인은 갖가지 사물 및 사건과의 끊임없는 접촉과 상호작용에서 현대도시의 거대함과 현대 기술문명의 기적을, 그리고 그 사상체계의 복잡성과 그 심리의 애매성을 체험하고 있다. '동시적인 것'의 매력 ― 한편으로는 같은 사람이 같은 시각에 상이하고 상호 무관하고 모순된 것을 수없이 많이 체험하는가 하면 한편으로 서로 다른 곳에 있는 수많은 다른 사람들이 동일한 것을 체험하고 있다는 사실의 발견, 그리고 지구상에 서로 격리된 여러 곳에서 같은 일이 같은 시각에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의 발견, 이러한 매혹적 발견과 그에 따른 세계주의를 현대의 기술문명은 현대인에게 의식시켜주었는데 이러한 세계주의야말로 새로운 시간 개념의 근원이며 현대예술이 삶을 경련적으로 그리는 원인일 것이다.
312 이러한 영화관람객의무리들은 엄격한 의미에서의 '관중'이라 부르기 어렵다. 어떤 예술분야에서 작품생산의 연속성을 어느정도 보장할 수 있는 얼마만큼 고정된 고객집단만을 '관중' 혹은 '청중'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관중을 이루는 집단은 항상적인 상호 소통 가능성에 기반하여 성립된다. 반드시 의견이 일치하지 않더라도 의견대립이 같은 평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이 중요한다. 그러나 사전에 아무런 공통된 지적 형성과정을 겪지 않고 단지 영화관에 함께 와있을 뿐인 군중들 사이에서 이러한 상호이해의 기반을 기대한다는 것은 부질없는 것이다.
313 예술을 창조하는 사람들과 예술에 대한 진정한 관심이 없는 사람들 사이의 중재자로서 예술전통의 보존에 줄곧 기여해온 동질적이고 고정적인 관중은 우리가 잘 알다시피 예술감상의 민주화가 진전되면서 사라졌다.
314 영화는 유럽의 근대문명이 그 개인주의적 도정에 오른 이래 불특정의 집단적 군중으로서의 관중을 위해 예술을 생산하려 한 최초의 기도이다.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19세기 초엽에 노변극장 및 연재소설의 탄생과 관련하여 연극청중과 독서대중의 구조에 변화가 일어난 것이 예술의 민주화의 참된 시초가 되었다. 그것이 영화의 대량관람에 이르러 절정에 달한 것이다.
324 예술사상 가장 위대한 작품들 가운데 강제와 독재 아래 창조된 것들이 허다한 것은 사실이다. 고대 동방에서는 예술이 무자비한 폭군정치의 비위를 맞춰야 했고, 중세에서는 엄격한 권위주의적 문화의 요구에 응해야만 했다. 그러나 같은 강제와 검열행위라 해도 역사의 시대가 달라지면 그 의미와 효과도 달라지게 마련이다. 오늘의 상황과 과거의 상황 간의 가장 중요한 차이는, 우리는 시간적으로 프랑스 대혁명과 19세기 자유주의 이후에 살고 있으며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사상과 우리가 느끼는 모든 충동이 이 자유주의에 젖어 있다는 점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기독교 문명 역시 고도로 발달되고 비교적 자유스러운 문명을 파괴하지 않을 수 없었고, 중세예술은 매우 미천한 근원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을 내세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초기 기독교 예술이 실제로 '원점에서부터 출발'한 것에 비해 소련의 예술은 오늘날 비록 시대에 뒤떨어지기는 했으나 역사적으로 이미 상당히 발달된 스타일에서 출발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설사 소련 예술에서 요구되는 희생을 새로운 '고딕'을 위한 대가라 인정한다 하더라도, 이러한 '고딕'이 중세의 경우처럼 다시 비교적 좁은 엘리뜨층의 독점물이 되리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는 것이다.
324 우리의 과제는 다수 대중의 현재 시야에 맞게 예술을 제약한 것이 아니라 대중의 시야를 될 수 있는 한 넓히는 일이다. 참된 예술이해의 길은 교육을 통한 길이다. 소수에 의한 항구적 예술독점을 방지하는 방법은 예술의 폭력적인 단순화가 아니라 예술적 판단능력을 기르고 훈련하는 데 있다. 문화정책의 모든 영역에서 그렇듯이 예술의 세계에서도 발전을 자의적으로 중단하는 것은 항상 해결해야 할 문제의 회피가 되고 만다는 데에 가장 큰 난점이 있다. 즉 문제가 생기지 않는 상태를 조성함으로써 결과적으로 해결책을 발견하는 일을 연기하는 것밖에 안된다는 것이다. 오늘날 참되고 진취적이고 창조적인 예술은 복잡한 예술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예술을 누구나 똑같은 정도로 즐기고 이해할 도리는 없지만 좀더 폭넓은 대중의 참여가 확대되고 심화될 수는 있다. 문화적 독점을 해소하는 전제조건은 무엇보다도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전제조건을 만들어내기 위해 싸우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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