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경희: 플라톤 — 서양철학의 기원과 토대
- 책 밑줄긋기/책 2012-22
- 2016. 4. 12.
플라톤 - 남경희 지음/아카넷 |
머리말
서문 : 플라톤과 서양철학의 사유범주
제1부 플라톤의 생애와 철학의 개관
제2부 윤리적 삶에서 인신과 이익
제3부 정신의 지향성
제4부 형상의 존재론
제5부 국가에서 정의와 이성
제6부 세계 구성의 원리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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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플라톤의 시대와 그의 저술
33 플라톤과 그 시대
고대 그리스는 위대한 시기였다. 이 시기는 서구 정신사에서 가장 탁월한 인물 셋을 거의 동시에 배출했다. 이들 세 사람은 우연히 동시대적 인물이 된 것이 아니라 깊은 정신적 관계 속에서 등장 했으므로 고대 그리스의 문화가 우리에게 주는 의의는 더욱 크다고 하겠다. 소크라테스(Socrates)는 플라톤(Platon)의 스승이었고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는 플라톤이 개설한 서양 최초의 대학 아카데미에서 가장 우수한 학생이었다. 이들 간의 사제 관계는 통상의 수준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었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와의 만남이 자신의 삶 중에 가장 큰 행복이었다고 고백하며, 소크라테스와의 만남을 통해 삶의 전환점을 마련 할 수 있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신적인 수용력이 가장 왕성한 18세 청년 시절에 아카데미아에 입교한 이후 20년간이나 플라톤 문하에서 수학했다. 이들 세 철학 거인의 사제관계는 깊은 전인적인 유대 속에서 맺어진 것이었다. 오랫동안의 사제 관계 속에서 제자는 스승의 광휘를 벗어나기 어렵고 그런 점에서 우리는 이들 세 철학자의 사상이 매우 유사하리라 생각하기 쉽다. 이런 예상과는 달리 이 세 철인들은 각각 고유한 철학의 경지를 넓고 깊게 형성했다. 소크라테스의 삶은 철학 그 자체였으며, 플라톤은 인간의 삶과 사회와 우주의 구석 구석을 뒤지면서 철학적 문제들을 제기하고 이의 해결을 위한 단서를 모색하고 제시했다. 형이상학과 분과과학과의 관계를 정립하여 학문의 체계화와 조직화를 위한 기초를 마련한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였다.
플라톤은 전쟁의 와중에 태어나, 그 전쟁에서 결국 패망하게 되는 도시 국가에서 성장했다. 그는 기원전 429년 에 태어났다. 그의 탄생 2년 전인 431년에 펠로폰네소스전쟁이 발발했고, 이 전쟁은 그가 25살에 이르기 까지 지속되었으나, 결국 아테네의 굴욕적인 패배로 종료되었다. 고대 그리스의 위대한 시대를 전개한 페리클레스(Perikles)는 전쟁 초기인 기원전 429년, 즉 플라톤이 태어나던 해에 전염 병으로 죽었다.
전쟁의 패배와 함께 아테네로 하여금 제국의 위세를 떨치게 했던 델로스 동맹이 해체되고, 이와 함께 아테네는 몰락의 길을 걷는다. 전쟁 초기에는 페리클레스 사후 급진적인 민주주의 세력이 권력을 잡아 아테네가 제국의 위세를 잠시 동안 유지하기도 했으나, 전쟁은 결국 수년간 교착 상태를 지속하다가 기원전 421년에 일단락된다. 이후 아테네는 팽창 정책의 일환으로 시라큐스로 대원정을 떠났으나 엄청난 실패를 겪어야 했고 군사력은 만회가 불가능할 정도로 상실되었다.
2장 동굴의 비유
80 우리는 이들 개념의 구체적 내용이나 실현된 상태의 모습이 어떨지에 관해 몽매한 상태에 있으며, 과연 정의, 자유, 행복 등의 이상이 존재할지에 대해 난관할 수 없다. 그럼에도 가치와 개념들이 아주 강한 힘으로 우리의 삶을 규제하고 인도하는 한, 우리는 그것들이 실재한다고 확신하는 것이다. 플라톤이 말한 형상계는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으나 언젠가는 실현될 수 있으리라 우리가 믿는 완전한 실현태를 의미한다. 철학이나 학문의 목표, 나아가 윤리적 실천의 목표는 이런 실재자들에로 나아가는 것이며, 실재계로 나아가지 못하는 한, 인간은 영원히 수인의 상태로 머무를 수밖에 없다. 상식적인 틀 속에서 무반성적으로 사는 삶이란 그림자의 세계에 안주하는 삶인 반면, 철학적인 삶이란 빛 속에서의 삶 또는 빛 속으로 나아가고자 노력하는 삶이다.
87 선각자의 사명
동굴의 비유가 담고 있는 마지막 함의는 철학자의 사명과 현실세계에서의 위치에 관한 것이다. 철인은 철학적 지혜를 얻어 해방을 이룬 자이다. 그는 선각자로서의 의무를 지고 있는 바, 자신이 어두움 속에서 헤매고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는 이전 동료 시민들에 대한 연민과 동정을 느끼고 이들을 동굴 밖으로 인도해야 한다는 것이 플라톤의 믿음이다. 인류에 대한 연대성을 느끼고, 박애를 베푸는 일은 선각자들에게 주어진 사명이다. 이 당위를 실천하려는 자의 모습을 그린 것이 바로 플라톤의 철인 왕(Philosopher-king)의 이념이다.
당위를 따르는 철인의 이런 실천이 항상 환영 받는 것은 아니다. 철인이 현실세계로 하강하여 무지한 대중을 깨우치려 할 때, 그들은 동굴 안의 일에 무관심하고 서투르기까지 한 철인에게 그가 동굴 밖에 나갔다 오더니 눈이 멀었다며 오히려 철인을 조롱하고 박해할 것이다. 대중의 추종이나 인기는 진리와 상관 없으며, 설혹 대중들이 철인들의 입장에 즉각 호의를 보인다면, 이는 오히려 그 입장이 진리를 담고 있지 않음을 알리는 반증일 수도 있다. 앞서 가는 자, 먼저 깨우친 자는 많은 경우 현실 사회로부터 버림받고, 박해받으며, 순교까지 당한다는 것은 역사에서 거듭 반복되어온 사실이다. 플라톤의 스승 소크라테스는 이 같은 불행한 역사의 첫 번째 희생자였다.
96 생활 주변에서 시각적으로 접할 수 있는 다양한 원형의 물체들을 보고서인가? 문제는 경험적 세계에는 어디에도 정확한 의미의 원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 '太陽', '해', 'sun'의 경우에는 그 의미의 동일성을 쉽게 설명 할 수 있다. 위의 서로 다른 표현의 사용자들은 모두 경험적으로 동일한 존재자를 염두에 두고 있으며, 그 존재자는 경험적 세계에 객관적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원의 개념을 표현하는 여러 언어권의 어휘들 '동그라미', '圓', ‘circle’, 또는 '아름다움', '美', 'beauty' 등에 대응하는 대상은, 즉 정확히 동그란 것이나 아름다움의 원형은 경험계 어디에도 없다. 그렇다면 해답은 하나, 진정한 원, 삼각형, 아름다움, 정의 등은 경험계를 넘어선 초월적 세계 어딘가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 플라톤의 추론이다.
바로 이런 논리의 귀결이 플라톤의 형상론이다. 경험의 세계를 넘어선 또 다른 세계에 영원 불변하며, 명료하고, 항상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고 있으며, 그 누구의 주관, 심지어 신의 주관에도 의존하지 않으며, 객관적으로 영속하는 존재자들이 우리가 사용하는 어휘들의 의미체이다. 우리는 사고하고 대화하면서 부분적으로 형상세계와 관여한다. 플라톤 철학의 목표는 이성적 사유를 통해 형상의 세계를 관조하는 일이다.
3장 윤리적 실천에서 인식
117 현상의 힘과 측정의 기술
이런 논의는 자연스레 인식의 역할에로 대화를 이끌어 간다. 두 행위 간의 결정에서 고려해야 할 것은 현재의 쾌락과 미래의 쾌락이다. 이를 판단하는데 에 관여하는 것이 두 대조적인 힘인 바, 현상의 힘과 측정의 기술이다. 현상적으로는 같은 크기의 사물이라도 가까이 있으면 커 보이고, 멀리 있으면 작아 보인다. 같은 논리로 현재의 쾌락이 미래의 쾌락보다 더 좋고 큰 것으로 생각될 수 있다. 이런 믿음을 산출하는 것을 현상의 힘(hē tou phainomenou dunamis, 356d)라 부를 수 있다. 이 현상의 힘에 압도될 때 우리의 삶은 혼란스러워지고, 행동이 갈피를 못잡게되, 어떤 선택에서 착오를 겪게된다. 이런 현상의 미혹적인 힘과 대조적으로 측정의 기술(hē metrētikē technē, 356d)은 현상을 무력하게 하는 한편, 우리에게 진리를 보여주며 진리와 함께 거할 수 있도록 해준다. 그래서 우리 의 삶을 구원하는(sōzein, 356e) 것은 현상의 힘이 아니라, 측정의 기술이다.
인간 삶의 구원이 쾌락과 고통에 관한 올바른 선택에 있다고 한다면,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측정의 기술이고, 그 기술은 일종의 지식, 즉 측정의 지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357a). 이상과 같이 측정의 역할을 감안할 때, 지식이 종종 쾌락에 의해 압도된 사태로 보이는 현상의 진상은 무지이다. 즉 쾌락에 의해 압도된 것으로 보이는 사람은 실은 무지해서, 쾌락과 고통을 잘못 계산하여 현재의 쾌락에 이끌린 것뿐이다(357d-e). 결론적으로 아크라시아라 불리는 현상의 원인은 무지이다.
127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들은 소크라테스의 사상을 담고 있거나, 그의 영향력 하에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초기 대화편들에서 대화를 주도하는 주제는 소크라테스의 전형적인 물음인 "What is x?"라는 질문이며, 이 질문의 대상은 우정, 경건, 절제, 정의와 같은 도덕적 덕목들이다. 이 물음은 흔히 정의 (definition) 물음이라고 해석되는데, 이런 해석은 시정될 필요가 있다. 소크라테스는 "What is x?" 물음을 제기함으로써 단지 언어적 차원에서 x라는 덕목에 대한 개념적 정의를 알고자 했다기보다는 존재론적 차원에서 그 덕목 자체의 본질을 알고자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그들은 의미론적인 물음이 아니라 존재론적인 물음을 던지고 있다. 나아가 그들에게 존재론은 윤리적 삶과 무관할 수 없다는 점에서 윤리적인 문제제기를 했던 것이다.
130 플라톤은 진정한 존재인 이데아만이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있고, 현상계의 대상들은 단지 믿음의 대상에 그치는 것으로 구분했다. 그렇다면 진정한 존재는 우리의 삶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진정한 실재는 우리 삶의 기반이고 지침이다. 우리가 인식하고자 하는 이유는 실재의 모습을 확인하고 이에 따라 살고자 하기 때문이다. 광화문에서 강남으로 최단시간 내에 가려는 자는 지름길을 찾을 것이며, 그에 대한 인식을 지침으로 하여 길을 찾아 갈 것이다. 존재는 우리 삶과 무관한 인식의 대상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과 행동을 위한 기반이 되며 힘을 발휘한다.
플라톤은 존재나 이에 대한 인식은 우리를 움직일 수 있는 힘을 발휘한다고 보았다. 힘이 없는 실재는 공허한 허상이며, 우리의 실천이나 삶과 무관한 인식이란 실은 실재로부터 벗어나 있는 믿음에 불과한 것이다. 무엇이 진정으로 앎인지 믿음에 불과한지를 나눌 수 있는 기준은 그것이 우리의 삶을 올바로 인도 할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는가의 여부에 있다. 인식이란 확실성의 상태이고 믿음이란 아직은 불확실성에 머물러 있다. 진정한 인식은 우리의 행위를 규제 인도한다.
소크라테스의 지행합일론은 앎에 대한 통상의 견해를 수정하라고 요구한다. 인식이란 무엇인가? 통상적으로 전형적인 인식은 명제적 인식인데, 이러한 인식은 진리, 믿음, 정당화 등 세 요소를 갖추어야 하는 것으로 정의 된다. 플라톤에 따르면, 인식이란 우리 영혼이 단지 정당화된 옳은 명제를 소유하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인식은 우리 영혼에 변화를 가져와야 한다. 우리의 정신은 자신 안에 새로운 무엇이 들어오면 그것을 단지 저장할 뿐 여하한 변화도 겪지 않는 설합 같은 것들과는 달리, 자신에게 유입된 것에 의해 자신을 구성하고 스스로 변모하는 존재이다. 무엇에 대한 인식을 소유하고 있다면 우리의 영혼은 이미 그 무엇에 의해 변화되어 어떤 새로운 상태에 들어섰음을 의미한다. 우리의 정신은 총체적·통합적인 것이어서, 새로 운 요소가 유입되면 전체적으로 변화하게 된다. 정신이 윤리적 지식을 취득하게 될 때, 우리가 소유하게 된 윤리적 규범들이나 가치는 우리의 행위방식과 삶의 방식을 전면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그렇지 않은 것은 진정한 의미의 윤리적 인식이라고 할 수 없다.
136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이 인간 삶의 궁극 목적으로 규정하는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는 그런 자체 목적성을 지닌 활동이다. 그리스어의 이 명사는 고대 그리스 윤리사상의 중심을 차지하는 개념이다. 이들은 통상 'happiness'나 '행복'으로 번역되는데, 이런 번역은 이 개념의 의미와 그리스 윤리사상의 핵심을 오해하게 만든다. 이 어휘는 그리스어 동사 'eu prattein'의 명사형인데, 이 동사는 '잘 지낸다'는 다소 수동적인 의미를 지니기도 하나 플라톤은 여러 곳에서 '바르게 행동한다'는 능동적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에우다이모니아는 수동적인 의미이건 능동적인 의미이건 간에 만족이나 충족, 쾌적함 등의 정서를 느끼는 상태가 아니라 역동적이고 진행적인 활동성을 나타낸다.
4장 정의의 이익
156 정의와 평형성은 어디에서 오는가? 이는 일종의 평등에서 온다. 그런데 적절한 평등이란 무조건적인 산술적 평등이 아니라 관여요소를 감안한 기하학적 평등이다. 기하학적 평등은 비례적 평등을 의미하는 것으로, 산술적 평등과 대비된다. 산술적 평등이 모두에게 동일한 몫을 배분하는 것인 반면, 기하학적 평등은 각자에게 적합한 것을(to prosekon hekastois, Laws 757b-c) 배분함을 의미한다. 기원전 4세기에 이르러 기하학적 평등의 개념이 중요해지면서, 그리스 사회에서는 이것이 분배적 정의의 원리로 간주된다. 이런 평등성의 개념은 피타고라스 학파에 의해 처음 형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고, 플라톤 이전에 이소크라테스(Isocrates)에 의해 언급된 바 있다.
플라톤은 산술적 평등 원리를 채택하는 민주주의를 같은 자나 다른 자에게 모두 동일하게 배분하는 무정부적 뒤범벅이라고 혹평한다(Rep. 558c), 기하학적 평등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각자에게 적절한 몫이 무엇인지, 그 합리적인 몫을 산출하기 위해 관여되고 고려해야 할 요인들이 무엇인지를 가려내야 한다. 이런 계산과 판단을 위해서는 지식이, 자세히 말하면 관여요인들을 반영하여 각자의 몫을 계산할 수 있는 측정술이 필요하다. 이 같은 『고르기아스』의 결론은 『프로타고라스』의 결론, 즉 쾌락에서 측정술이 중요하다는 결론을 재확인해 주고 있다.
158 윤리학이나 정치술 역시 일종의 지식이고 기술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그것은 다른 기술과 달리 특별한 평가를 받는데, 이들이 이런 특별한 평가를 받는 이유는 무엇인가? 윤리학이나 정치학은 우리의 삶을 보다 아름답고 훌륭하게, 그리고 좀더 인간답게 만들 수 있어야 한다. 고귀하고 훌륭한 것(to gennaion kai to agathon)은 목숨을 구하고 구해지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것이다(512d), 진정 사람다운 사람(ton hos alethos andra)은 오래 사는 데에 관심을 두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최대한 훌륭하게 사는 방법을 숙고하며, 그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특별한 노력을 기울인다. 윤리학과 정치학은 바로 이 인간 고유의 가치를 실현하려 노력한다는 점에서 다른 종류의 기술들과 다르다.
이들 지식이나 기술의 역할을 고려할 때, 진정 훌륭한 정치가로 평가받고자 한다면, 우리 삶을 물질적으로 풍요하게 만드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발전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세인들에 의해 탁월한 정치가라고 평가 받는 이들은 단지 시민들에게 부와 권력만을 증대시켜 주었을 뿐, 그들 삶의 질을 개선하지 않았다. 단지 오래 살거나 타인들의 호감을 얻기 위해 동료 시민들의 정신상태에 자신을 동화시키고 여론이나 권력자에 아부하는 것은 너무 비싼 대가를 치르는 것이다.
시민들의 교육과 영혼의 개선, 또한 영혼에 질서를 부여하여 폴리스 내의 조화 및 우주와의 조화를 이루게 하는 것, 그것이 진정 훌륭한 정치가의 역할이다. 몸에 탈이 났을 때 조리사보다 의사가 중요 하듯이, 정치가는 정신의 삶에서 의사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진정한 정치가 역할은 시민들을 즐겁게 해주며 아부하기(kolakeia)보다는 그들이 훌륭하게 되도록(hopos hos beltiston estai, 513e) 배려 하는 것이다. 이런 훌륭함이 없이는 정치가가 시민들에게 부와 권력을 안겨주더라도 그들의 삶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513e)
5장 에로스와 아름다움의 이데아
168 우리는 두 대화록을 다음과 같이 대조할 수 있다; 『향연』이 삶, 삶과 정신의 원리, 젊음, 역동성, 불완전성, 감성과 아름다움, 생동적인 에로스와 밝은 낮의 윤리학이라면, 『파이돈』은 죽음, 죽음과 이성의 의미, 정태성, 완전성, 논리성과 이성, 정관적인 프로네시스(phronesis)와 차분한 밤의 윤리학이다. 전자는 신체와 정신의 조화, 후자는 신체로부터의 정신의 해방을 역설하고 있다.
170 고대 그리스인들은 우주 자연이 역동적이고 활성적인 생기로 가득한 살아있는 존재라고 믿었다. 그리스어에서 자연을 의미하는 퓌시스라는 개념은 자라나는 것, 살아 있는 것이라는 의미가 함의되어 있다. 이는 만유를 움직여가는 힘 또는 이런 힘에 의해 움직여지는 자연 전체를 칭했다. 이 퓌시스의 작동에 의해 만물들이 생성하고 계절의 변화에 따라 꽃이 피며, 신록이 눈부시게 우거지고, 나무는 열매를 맺으며, 동물들은 짝짓기를 통해 번식한다. 고대에는 생물과 무생물의 구분이 없었고, 모두 이 퓌시스의 힘에 의해 움직인다고 생각했다.
고대인들에게 가장 기초적인 구분은 토테미즘적인 것으로서 어느 토템을 모시는가에 따라 세계가 구분, 분류되는데, 동일한 토템 공간에서는 인간과 동물들, 나아가 우주나 자연의 부분들까지도 연속되어 있었다. 그러다 기계적인 운동과 생물적인 운동이 구분되는데, 원소의 개념이 등장하는 것은 그때이다. 아마도 자연철학자들의 기여는 바로 이런 기계적 운동의 개념을 형성하고, 이를 생명적인 힘으로부터 구분한 일일 것이다. 플라톤은 생명의 세계를 움직이는 힘을 푸쉬케(psuche) 또는 에로스라 불렀다.
퓌시스는 푸쉬케와 연관되어 있는 개념이다. 통상 영혼을 의미하는 푸쉬케 역시 정신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를 움직이는 생기의 원리로서 일종의 미세한 물질과 같은 것이라 믿어졌다. 호메로스 시대 그리스인들의 믿음에 따르면, 사람들을 포함한 생명체들이 탄생 할 때에 자연 속에 있는 생기가 신체 속에 들어오며 죽음이란 그 생기적 푸쉬케가 신체에서 빠져나와 자연으로 되돌아가는 현상이었다. 그런 점에서 고대 그리스에서 퓌시스와 푸쉬케는 동일한 종류의 것이었다. 호메로스 시대에는 아예 영혼이라는 개념이 없었으며, 자연철학자들의 시대에도 이 개념은 형성과정에 머물러 있었다. 사유와 행동의 주체로서의 영혼 개념이 확립된 것은 소크라테스 시대에 이르러서이다.
178 사랑하고 욕망하는 자는 무엇을 결여하고 있기에 그런 것이다. 에로스가 미와 덕을 욕망한다면, 이는 그가 이것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 이다. 미와 덕을 결여하기에, 아름답거나 유덕한 존재라고 할 수는 없으나, 그렇다고 해서 에로스가 추하거나 부덕한 것은 아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에로스가 미와 덕을 결여한 자신의 상태를 불완전한 것으로 평가하고 이를 메우고자 욕구한다는 것이다. 에로스의 진정한 중간자적 성격이나 중요성은 바로 이런 자기의식, 자신에 대한 반성의 의식과 이런 의식을 동기로 하는 상향에의 의지에 있다. 어떤 존재가 무엇을 결여하여 불완전한 상태에 있으되 이에 대한 의식조차 없다면, 우리는 그를 진정한 의미에서 결여적이고 불완전한 존재라 할 수 없다. 즉 스스로를 결여적이라고 의식하는 존재만이 실질적 의미에서 결여적 존재이다.
결여태를 벗어나 완전성에 이르고자 하는 의지나 가능성이 없는 존재는 완전하지도 않지만, 불완전하지도 않다. 나무와 돌, 바람과 비는 결여하고 있는 것들이 많으나 우리는 이들을 불완전하다고 평가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그런 결여태는 그것의 본질이고 실재이니 그 상태가 바로 충만이고 완전성이다. 오직 스스로가 불완전하다는 반성적인 의식을 지닌 존재만이 완전에의 의지와 가능성을 지니고 있으며, 완전에의 의식이 있는 존재만이 불완전하다 규정될 수 있는 것이다.
184 신은 지혜를 구애하지 않는다. 이미 지혜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전적으로 무지한 자, 이해를 지니고 있지 않은 자 역시 지혜를 구하지 않는다. 자신이 무지하며 추하다는 사실조차 자각하지 못하는 그 상태가 만족스러운 상태라 믿으며, 지혜나 미를 추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204a). 이것이 완전한 무지의 문제, 또는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바 무지(無知)의 무지(無知)의 결정적 문제점이다. 이들 무지의 무지자와는 달리 에로스를 지닌 철학자는 최소한 자신의 무지를 자각하고 지혜를 구하려 한다. 철학자는 다이몬적인 존재, 지자와 무지자의 중간적인 존재로서 이런 중간적 성격은 철학자의 정신에 깃든 에로스의 출생 신분에서 연유한다(204b).
이 같은 사랑론을 배경으로 소크라테스는 아가톤의 사랑론이 안고 있는 논리적 약점을 지적한다(204c). 아가톤이 찬미한 것은 사랑의 신이 아니라 사랑의 신이 사랑하는 바의 것이다. 사랑의 본질은 사랑받는 수동적 상태가 아니라 사랑하는 능동적 활동이다. 사랑받는 것으로서의 사랑은 아가톤의 모든 찬사를 받을 수 있는 존재일 것이나, 사랑하는 존재로서의 사랑은 그와 정반대로 결여적 존재, 나아가 그런 결여 때문에 욕구하고 갈구하고 고뇌하는 존재이다.
186 사랑은 대체 우리에게 무엇을 주는가? 우선 확인할 것은, 방금 지적한 바와 같이, 사랑이란 단지 좋은 것을 사랑함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영원히 자신의 것으로 하고자 하는 욕망이라는 점이다. 사랑은 우리에게 불사에의 욕망을 품게 하는데, 이 욕망은 아름다운 것이나 좋은 것을 출산함으로써 충족 된다. 출산의 욕구는 불사성에 대한 열망이기에 너무도 격렬하여, 역설적이지만 생명체들은 죽음을 대가로 치르고서라도 출산하고자 한다(207b). 불완전하고 가사적인 존재가 이를 수 있는 방법은 사랑을 통해서이다. 사랑의 이런 측면을 반영하여 우리는 사랑을 추가적으로 규정 할 수 있다. 사랑은 좋은 것에 더하여 불사적인 것에 대한 사랑이다(207b).
좋은 것이나 불사적인 것을 단지 원한다고 해서 가사적인 존재가 항상 그런 것을 출산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좋고 불사적인 것을 낳을 수 있기 위해서는, 가사적이고 불완전한 인간의 내부에 불사적이고 완전한 것에의 가능성이 내재해 있어야 하는데, 과연 인간은 그런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가? 모든 생명체는 공통적으로 출산의 욕구를 갖고 있다. 인간 역시 생명체로서 생식활동을 하며 항상 무엇인가를 임신하고 있어, 그를 출산하려 한다는 것이 플라톤의 통찰이다(206c). 그러나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생명체로서만이 아니라 더 중요하게는 정신적 존재로서 출산의 욕구를 지니고 있다. 정신의 출산 욕구는 존재론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서, 인간은 이를 통해 자신의 가사성을 극복하고 완전성과 영원성을 성취하려 한다. 산파술에 대한 철학적이고 인간 존재론적인 근거는 바로 인간 정신에 내재되어 있는 출산 욕구 이다.
6장 상기와 앎-우리는 어떻게 아는가?
213 상기설 논증을 위한 조건들
상기설의 논제를 더 자세히 분석하여 보면 이는 다음의 여러 주장들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상기설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이 모두를 논증해야 한다.
(ㄱ) 현상계의 동일한 두 사물을 보고 동일함에 대한 생각을 하고, 이에 대한 인식을 갖는다.
(ㄴ) 동일함의 규정성이나 속성에 대한 인식이 가능한 것은, 현상계의 두 사물 사이에 동일함이 현재하고 있기 때문도. 그 두 사물이 진정으로 동일하기 때문도 아니며,
(ㄷ) 또는 동일함이 우리의 인식 능력이 구성한 허구로서 존재하기 때문도 아니다.
(ㄹ) 동일함은 그 자체 독립된 존재로서 우리 인식 능력의 밖 어디엔가 존재하나,
(ㅁ) 우리가 현상계의 '동일한' 두 사물을 지각함과 동시에 이 동일함 자체를 직각적(直覺的)으로 통찰하는 것은 아니다.
(ㅂ) 우리가 그 동일함 자체를 인식하는 것은 현상계의 그 두 사물을 감각하기 이전부터 그에 대한 인식을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ㅅ) 동일함을 인식했던 때는 그 두 동일한 현상적 사물을 감각하기 이전, 나아가 우리의 모든 감각적 경험 이전이다.
(ㅇ) 그렇다고 해서 동일함의 인식 시점이 생시(生時)인 것은 아니다.
(ㅈ) 그 인식의 시점은 우리의 생전, 즉 우리의 영혼이 수육(受肉)하기 이전이다.
(ㅊ) 그런데 우리의 영혼은 생전에 인식한 바 있는 동일함 자체를 여하한 이유에선가 망각했다.
218 동일함 자체는 기준이고, 동일한 것들은 그 기준을 통해서 재어지고 평가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동일함 자체가 항상 동일한 것이라는 주장, 즉 '동일함은 항상 동일하다'는 문장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런 식의 문장은 과연 의미있는 정상적인 문장인가? 동일함은 관계 개념이다. 따라서 두 개 이상의 사물이 주어질 때만 이 개념을 술어로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기준이나 준거로서의 동일함 자체는 마치 미터 원기와 같이 분명 하나의 단일한 사물일 것으로 여겨지는데, 어떻게 동일하다는 개념을 술어로 가질 수 있는가?
동일함은 관계 개념이므로 이 물음에 대한 긍정적 답은 일단 유보하더라도, 플라톤은 가령 정의 자체는 정의롭다, 아름다움은 진정으로 아름답다는 식의 주장을 한다. 과연 이런 문장이 의미가 있는 것인지, 있다면 이런 자기 서술적인(self-predictive) 문장의 의미가 무엇인지 궁금한 노릇이다. 조금 전에 시사 한 바와 같이, 형상을 미터 원기와 같은 것으로 해석 할 수도 있을 터인데, 그런 경우 "1미터 원기는 1미터이다" 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미터 원기는 모든 1미터인 것들의 기준이라는 점에서 완전한 1미터이어야 할 것으로 보이나, 다른 한편으로 "1미터 원기는 1미터이다"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기준이 있어야 하는데, 과연 미터 원기를 '1 미터'라고 기술 할 수 있기 위한 기준은 무엇인가? 무엇을 "1미터이다" 또는 "1미터가 아니다"라고 할 수 있으려면 그것을 재어야 할 터인데, 미터 원기를 잴 수 있는 자는 무엇일까? 미터 원기는 재어 보니 1미터인 것이 아니라, 단지 우리가 합의에 의해 1미터라고 한 것이 아닐까? 즉 미터 원기는 측정의 대상이 아니라 측정을 위한 준비이거나 합의의 결과가 아닐까?
(5) 따라서 동일함에 대한 지식은 동일함과는 다른 것, 즉 동일한 것들로부터 획득된다(74c6-c10).
이 명제는 (3)과 (4)로부터 추론된 것이다. 이 추론은 상기설을 입론함에서 매우 중요한 단계이다. 동일함에 대한 지식이나 개념의 획득은 그것 자체를 직접적으로 지각하거나 인식해서가 아니라, 그것과는 다른 것들을 접촉하고 감각하여 인식함으로써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런 매개적인 인식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한 대상 x와 x의 인식 계기를 제공하는, 또는 그것의 인식에서 매개체가 되는 것(y)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후자는 전자의 모사물이거나 불완전 모방체임으로, 전자를 인식하기 위한 매개체 역 할을 할 수 있는 것으로 우리는 전자의 불완전한 모사물을 생각해 수 있다.
237 플라톤 철학의 모든 체계 안에서 상기설과 이데아론은 분명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으나, 그 관계란 이데아론이 상기설을 논리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그 반대의 것이라 하겠다. 다시 말하면 플라톤은 이데아론을 가정할 때 생기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상기설 을 도입한 것이 아니고 『메논』 등에서 확인하고 있는 바, 상기로 여겨지는 인간 인식의 현상에 관한 인식론적인 난문(難問, aporia)을 해결하기 위해서 이데아의 존재를 논리적으로 요청한 것이다.
238 이런 일상의 사실들은 중요한 철학적 문제를 제기한다. 언어적 기술과 대화의 활동이란 우리의 발언들을 구성하는 어휘들이 판명하고 일정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발언자나 청취자는 그 의미를 명확하게 파악하고 있음을 전제한다. 플라톤이 '동일함 자체'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염두에 두었던 것은 바로 우리의 일상적 언어 생활을 가능하게 하는 발언과 대화의 기본 어휘들, 가령 '동일하다'라는 어휘의 의미를 지시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그가 '자체적인 거'이라 한 것들은, 우리가 대상을 서술하고 규정하기 위해 동원하는 기술적 형용사나 동사 들, 나아가 우리의 행위에 모습과 방향을 부여하기 위해 사용하는 여러 윤리적 술어들의 의미근거로 볼 수 있다.
243 플라톤에 따르면, 우리의 인식 주관은 순전히 수동적이다. 가장 완전한 상태의 우리 인식 능력이란 정밀도 100%의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한 거울과 같다. 이런 수용력의 완벽한 발휘는 진상(眞相)을 100% 정확하게 반영하는 데에 있다. 우리 인식 능력이나 인식 행위를 반영적인 것이라 할 때, 플라톤은 중요한 난문에 봉착한다. 그것은 객관적인 대응체가 없는데, 어찌해서 동일함의 개념이 윤곽이 분명한 영상과 같이 우리 인식의 거울에 비추어져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물론 이 동일함의 개념이나 의미라는 우리 인식에 비친 표상 또 는 재현상(再現象, representation)을 단지 허상이나 환상에 불과하다고 치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플라톤이 그 길을 택하지 않은 이유는 그런 허상론을 취한다면 분명히 존재하는 언어 현상이나 대화의 가능성은 설명 할 길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플라톤이 처한 난문을 해소하기 위해 또 하나 제안될 수 있는 방법은 칸트의 인식론을 취하는 것이다. 칸트에 따르면, 개념이니 의미니 하는 것들은 대응하는 실재가 없는 일종의 허상이되 인간 모두가 소유하는 허상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개념이나 의미들은 인간 의식의 선험적 형식으로서 주어지거나 이를 기초로 형성된 간주관적인 존재자들이다. 이런 방식 역시 우리 언어 현상이나 대화의 가능성을 잘 정초해 줄 수 있을 것이다. 개념이니 의미니 하는 것들이 인간 인식 능력의 구조 자체에 기초한다면, 모든 인간이 동일한 인식 구조 내지는 형식을 지닐 것이므로, 개념이나 의미에 대응하는 객관적 존재를 상정함이 없이도 언어나 대화의 가능성을 설명 할 수 있다.
칸트는 인식 주관을 수동적인 거울이 아니라 인식 내용을 구성해내는 능동적인 능력으로 본다. 인식 주관은 외부의 감각 소여(所與)들을 받아들이기는 하되, 이 자료들에 형식과 질서를 부여하여 법칙성과 논리성 등을 지니는 인식 체계를 산출해 낸다. 우리 개체들 상호간에 뚜렷한 한계를 가지고 있으며 정합성을 지닌 하나의 세계를 구성하고, 개념적 인식을 소유할 수 있음은, 인식 주관이 자신의 형식을 가지고 능동적으로 그 주어진 감각 소여들을 정리했기 때문이며, 동일함의 개념이나 의미란 바로 이런 인식 주관의 한 형식이다.
칸트식의 해결을 플라톤 자신이 고려해 보았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으나, 플라톤의 관점에서 칸트 식의 해법에 문제를 제기할 수는 있을 것이다. 즉 우리는 우리 인식 주관의 선험적 일부로 존재하는 형식과 개념들의 연원을 물을 수 있다. 칸트는 우리 인식 주관을 넘어서는 '예지계(noumena)'의 세계에 관해서는 불가지론의 입장을 취했다. 칸트가 『순수 이성 비판」에서 인식의 가능성을 탐구하면서 한 일은 우리의 개념적 사고를 가능하게 하는 인식 주관의 형식과 개념들을 밝히는 일에 그친다. 그는 이를 넘어서 이 형식과 개념들이 어떻게 가능한지, 어디에서 주어졌는지는 묻지 않았다. 물음을 제기한다고 해도, 그 답은 우리 인식의 한계 저편에 있서 인식될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플라톤은 칸트식의 해결이 자신이 처한 난문을 종결시킨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문제의 대상을 단지 뒤로 후퇴시켰을 뿐이라고 비판할 수 있다.
246 플라톤의 상기설 논증의 과정에서 운위한 '자체(自體)'라는 어휘에 대한 이상의 논의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플라톤은 '동일하다'라는 우리가 늘 사용하는 어휘가 명석 판명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이 의미가 대화 쌍방에 의해서 공유되므로 우리의 대화가 가능하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더 나아가 플라톤은 인식 능력의 본질은 외부의 진상을 그대로 반영하는 거울과 같은 것이므로, 의미란 인식 주관이 구성한 것이 아니라 어떤 대상에 대한 직관적 인식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의미들은 우리가 경험적 사물들을 지각해서는 얻어질 수 없는 것이므로, 이들의 존재는 철학적 문제 상황이라 간주했다. 플라톤은 일상의 사실들, 우리가 통상적으로 당연하다고 여기는 일상의 사실이 실제로는 그리 당연하지 않은 것이라고 판단했다. 여기에서 그의 철학적 물음과 철학적 사유가 시작되는 것이다. 형상론은 이런 철학적 물음에 대한 플라톤의 답변이다.
7장 최상위 존재로서 좋은(善)의 이데아
255 좋음과 아이티아(aitia)
좋음의 이데아와 관련된 플라톤의 일견 당혹스러운 주장들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이 이념은 다양한 논란의 대상이 되어 그에 관해 일치된, 그리고 확정적인 해석에 도달하기가 힘들며, 플라톤 자신도 이에 대하여 확실하게 알지 못한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우리는 태양의 비유를 이의 이해를 위한 단서로 삼아 추정적인 해석을 시도할 수 있다. 플라톤은 좋음의 이데아가 이데아 세계에서, 따라서 인간의 정신세계나 사유세계에서 태양의 위치를 점유한다고 비유한 바 있다. 우선 우리는 좋음의 이데아에 관한 플라톤의 언명을 다음 세 가지 명제로 좁히기로 한다. 다른 언명들은 이와 관련하여 비교적 쉽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좋음의 이데아는 인간 욕구와 행동의 지향 목표이다. ─ (행위 목표)
둘째, 좋음의 이데아가 사물들의 인식 근거가 된다. 이는 사물들이 인식될 수 있게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사물들을 인식할 수 있도록 해준다. ─ (인식 근거)
셋째, 좋음의 이데아는 모든 것의 존재 근거이다. 그것은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한다. ─ (존재 이유)
256 플라톤이 이성적 인식(nous)과 좋음, 나아가 존재와 좋음을 연관시키고 있는 곳은 『파이돈」이다. 그는 이곳에서 물상의 진정한 원인(aitia)과 보조 원인(sunaitia)를 구분하면서, 아낙사고라스의 지성(nous) 개념에서 진정한 원인에 대한 설명을 기대했으나 실망했다고 고백한다. 통상적으로 우리는 물상의 원인으로, 가령 소크라테스가 감옥에 앉아 있음의 원인으로, 그의 골격이나 근육 등의 구조와 같은 신체적 조건을 제시하는데, 이들은 진정한 원인이 될 수 없다고 그는 비판한다. 이들은 단지 그런 사태를 위한 보조 원인이나 필수조건에 불과하다. 진정한 원인은 사태를 지성이나 이성의 관점에서 파악하여야 발견할 수 있는데,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의 감옥에 앉아 있음의 진정한 또는 지성적인 원인은 그의 이성이 좋음을 지향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최후 모습은 최선의 사태이다. 같은 논리가 다른 곳에서도 주장되고 있다: 우리 인간의 시각을 가능하게 하는 진정한 원인 역시 눈의 구조 등이라기보다는 신(神)의 선의지이다.
265 자체적인 것
플라톤이 서양철학사에 남긴 철학적 유산 중 가장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는 자체적 존재(auto kath' auto)의 개념이다. 이 개념은 서양철학사에서 존재론적·인식론적 사유의 주축을 이루어 온 여러 다양한 개념들, 즉 의미, 보편자. 추상체, 성질 자체, 실재, 실체, 물 자체 (物 自體), 자체적 선, 선험적 존재, 초월자, 논리적 원자 등의 선구를 이룬다. 플라톤은 경험계의 사물들이 지닌 성질이나 속성의 모델이나 원형에 해당하면서도, 이들과는 분리되어 독립해 있는 것들이 존재한다고 보았다. 이 것이 바로 형상인데, 형상은 그리스어로 '에이도스(eidos)', '이데아(idea)'로서, 이들은 '모습' 또는 형상(形相)'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런 원의(原義)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이들은 인식적인 관점에서 상정된 존재이다. 하지만 이는 진정한 실재이자 인식의 대상임을 넘어서서 경험계 사물들의 원형이며, 나아가 우리 행위의 준거 역할을 한다. 더 포괄적으로 언어의 근거로서 우리의 언어 활동과 사유 활동의 근거가 된다. 형상들은 실천의 영역에서도 실질적인 힘을 발휘한다. 이들은 우리 행위가 지향하는 하나의 이념으로서 인과력을 발휘하며, 우리의 삶은 이들 이념의 세계를 지향한다. 자체적으로 존재하며 존재의 완전성을 지니고 있는 것, 나아가 우리에게 실천을 위한 지향 이념으로서 힘을 발휘하는 것, 그것이 이데아이다. 그 중 최고위를 차지하는 것이 선의 이데아였다.
8장 무엇이 존재하는가?-형상론 I
292 형상은 우리가 늘 사용하는 수많은 어휘들의 의미 근거이며, 인식의 대상으로서 한문적 인식을 근거지우기도 하고, 경험적 사물들이 소유하는 성질들의 존재론적 원인 역할을 행하기도 한다. 나아가 윤리적으로 절대 객관적 가치의 규범을 제시해주며, 존재론적으는 현상세계 사물들이 지닌 규정성의 근거라 할 수 있다. 게다가 인식론적으로는 앎의 대상으로서 객관적·보편적인 인식의 기초를 제공한다. 이처럼 형상들은 다양한 역할을 통해 헤라클레이토스적인 만상 유전의 세계관이나 일자만이 존재하는 파르메니데스의 지극히 금욕적인 세계관을, 다른 한편으로는 소피스트들에 의해 주장된 윤리적 상대주의나 인식적 회의주의 및 주관주의를 극복할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이들보다 더 중요하며 기본적인 형상들의 기능이 있다. 그 것은 형상들의 존재가 언어와 정신의 가능성을 확고하게 설명해 준다는 점이다. 언어의 가능 근거를 마련함이 다른 기능보다 더 중요하고 기본적인 이유는, 언어란 사고 내용을 표현한 것이라 할 때, 언어와 사고의 가능성은 존재론적·윤리학적·인식론적 작업의 선결 요건이기 때문이다. 언어 없이는 현상적 사물들의 모델이나 윤리의 보편적 기준 또는 인식의 객관적 대상 등에 대한 논의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294 플라톤이 판단하기에는 가치세계와 경험세계의 구제 이전에 의미세계의 구제가 선결되어야 할 과제였다. 이런 이유 때문에 로고스에 대한 논의는 후기 대화편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로 부각된다. 초·중기 저작들에서 플라톤은 대화가 가능하다는 사실에서 존재론, 인식론, 윤리학의 제 문제들에 대한 해답의 단초를 마련 했으나, 후기에 가서는 대화의 가능성 자체가 플라톤 철학의 핵심 과제가 된다.
295 우리가 질문과 대답을 주고 받으며 대화할 수 있다는 것은 지극히 일상적인 범사요, 인간의 삶에서 가장 편재적이고 기초적인 사실이다. 플라톤은 이런 일상의 사실이 매우 중요한 철학적 의미가 있다고 보았다. 대화의 사실은 우리에게 주어진 소여(所與, data)들 중에서 가장 확실하여 부정할 수 없는 것이며, 따라서 모든 것의 근거를 추구하는 철학의 출발점은 바로 이곳이어야 한다고 그는 생각했다.
309 형상들은 일차적으로 명제를 구성하는 어휘들의 의미체들이다. 그래서 명제들이 기술하는 바는 형상들이 결합한 사태이다. 모든 명제는 두 개 이상의 형상들이 결합함을 전제로 한다.
310 따라서 형상들이 상호 결합할 수 없을 때, 명제를 만들어내거나 대 화를 엮어갈 가능성이 없다. 플라톤의 어려움은 바로 여기에 있다. 형상들의 존재는 명제를 구성하는 의미들의 존재론적인 근거를 제공해 주나, 이 근거가 되는 형상들이 상호 관계할 수 없으므로 그 원자적 의미들은 서로 결합하여 한 명제를 구성할 수 없다. 예컨대 수와 수학적 기호를 위한 '5', '7', '+', '=', '12' 등의 표현을 각각 형상의 이름이라고 해보자. 이 표현들이 지시하는 형상들이 상호 의미있게 결합하여 하나의 사실을 구성할 수 없다면, '5 + 7 = 12'라는 문장은 단순한 표현들의 집적에 불과할 것이다. 이들은 '7 5 + = 12'라는 표현들의 연쇄와 같이 무의미하다. 전자의 명제가 의미 있기 위해서는, 우선 존재론적으로 그 명제를 구성하는 표현들이 지시하는 형상이 결합하여 하나의 사실을 구성할 수 있어야 한다.
9장 의미의 원자론과 언어의 가능성-형상론 II
331 뒤나미스론
명제의 가능 근거에 대한 논의, 그리고 이와 관련된 위의 난문들에 대한 해결책의 모색은 『소피스트』에서 이루어진다. 플라톤은 여기에서 각각의 형상들은 고유하며 단순한 본질(phusis)에 더하여 타자와 결합할 존재론적 기반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재규정하고 있다. 그는 이 기반을 뒤나미스(dunamis, 가능성)라고 불렀다. 형상들은 퓌시스(phusis) 에 더하여 뒤나미스를 지니고 있다. 형상들은 이제 자신의 고유한 본질만을 지키며 고고히 독존하는 존재가 아니라, 타자와 결합할 가능성을 내부에 지닌 관계적 존재자들이다. 이 같은 추가적 규정에 따라 형상들은 명제들을 구성하는 어휘들이 지닌 원자적 의미들의 존재론적 기반이기도 하지만 이 의미들이 상호간에 결합하여 문장을 산출할 가능성, 즉 구문의 존재론적 근거까지도 제공 할 수 있다.
334 존재자는 더 이상 혼자서 자체적으로 홀로 존재하는 것이라기보다는 타자와 어떤 관계나 영향력을 주고 받는 가능성이나 능력을 지닌 존재이다. 그것은 다른 것에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능동적인 존재일뿐 아니라 다른 것들의 영향력이나 변화를 수용할 수 있는 수동적인 존재라는 것이 존재에 대한 플라톤의 새로운 규정이다. 이는 중기의 존재관과 비교할 때 가히 혁신적이라 할 수 있는 변모이다. 중기의 형상들은 그 자체로서 타자와 무관하게 존재하는, 그럼으로써 자기동일성을 확보하는 그런 고고한 존재였다. 경험계의 물상들 이 타자와 관계하면서 영향력을 주고받는 존재인 반면, 형상들은 자체적·자족적으로 존재하는 단순체였다. 이들에 대해서는 그러므로 명명만 가능하고 문장은 언명될 수 없다. 이들에 관해 합법적인 유일한 문장은 "삼각형의 형상은 완전한 삼각형이다", "아름다움 자체는 아름답다"는 등의 자기 서술적인 문장뿐이었다. 이들은 그러나 동어 반복적이므로 존재에 관해 제공하는 내용이 없다.
존재에 대한 새로운 규정을 기초로 형상들간 관계 가능성의 근거를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관계는 형상들이 자신의 본성에 더하여 타자와 관계할 수 있는, 즉 영향을 주고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존재자들이 이렇게 관계하고 있으므로 이를 기술하는 문장들, 예컨대 "삼각형은 도형이다"나 "정의는 영혼의 덕목 중 하나이다" 또는 "소수는 홀수이다" 등과 같이 존재에 관해 정보를 제공하는 문장들이 있을 수 있다. 이들이 정당한 문장이라는 사실은 학문의 가능성을 정초한다. 학문이나 변증법은 존재자들의 본성과 이들 간의 관계 가능성, 또는 관계능력을 탐구하는 활동이다.
338 플라톤은 이와 같은 극단적 논리주의를 적어도 그대로는 수용할 수 없었다. 그런 점에서 플라톤은 권위주의적인 철학적 대부 파르메니데스보다 인간적이었으며, 인간의 대지에 발을 붙이고서 있있다. 그는 과감히 부친살해를 감행하여 파르메니데스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한 무(無)를 일종의 존재로 실재계에 수용함으로써 철학적 금기 제1호를 깨는 과감함을 보였다. 나아가 그는 일자만이 유아독존적으로 거하고 있는 신성한 실재계의 인구 수를 대폭 증가시켰으며, 심지어 하찮은 것들에도 이 실재계 시민의 자격을 부여했다. 실재계에 다수의 원자적 형상들이 존재한다고 본 플라톤의 첫번 째 이유는, 경험계와 의미세계의 다양성과 복잡성을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원자적 형상들이 상호 결합하여 명제를 근거 지울 수 없다면, 그 존재 의의를 상실하게 된다. 플라톤은 이 같은 난경에 봉착하여 자신의 주요 입장을 수정하게 된 것이다.
10장 보편자 문제
344 보편자가 경험계 내의 특수자 속에 존재한다고 할 때, 이 같은 어려운 문제들이 발생한다. 이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 또는 해소할 것인가? 한 방안은, 상식의 존재론을 부분적으로 부인하고 보편자의 주거지를 경험계 저편의 초월적 세계에 위치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플라톤이 취한 선택이다. 보편자들의 거처를 특수자들의 다수의 다수성(多數性)과 생성소멸에 영향받지 않는 난공불락의 안전한 세계에 마련함으로써, 플라톤은 대화와 학문적 인식의 가능 근거, 의로움과 아름다움의 영원한 원천을 확보했다. 그러나 경험 가능한 세계의 저편. 우주의 저편에 사람 자체, 정의 자체, 삼각형 자체 등 보편자들의 거주지가 존재한다는 주장을 받아들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광속의 로켓을 타고 무한히 달려도 다다를 수 없는 세계이다.
형이상학적 부담 때문에 초월적 세계의 존재를 수락하지 않을 때, 취할 수 있는 또 다른 방도는 무엇일까? 그것은 보편자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다. 특수자들 간에는 그들이 동일한 명사나 형용사에 의해 기술된다는 사실 외에는 공통적인 것이 없다. 이순신, 안중근, 링컨이 사람이요 의로운 자라 불리는 것은 확실하나, 그 이유는 그들이 어떤 공통의 보편적인 속성을 지녀서가 아니라, 우연히 그렇게 불리게 되었을 뿐이라고 간주하는 것이다. 이런 입장을 명목론(名目論) 또는 유명론(唯名論, Nominalism)이라 하는데, 이런 입장을 취할 때, 특수자 들에 대한 언어적 기술의 존재론적 근거나 의미론적 근거를 마련하기가 쉽지 않다. 이 방안은 우리의 형이상학적 부담을 덜어주기는 하나, 특수자들에 관해 의미있는 기술과 논의를 할 수 있다는 상식을 부인해야 하는 어려움에 봉착하게 한다.
보편자의 존재를 인정하게 되면, 초월적 세계를 진정한 실재계(實在界)의 하나로, 아니 경험세계보다 더 실재적인 존재로 수락해야 하는 형이상학적 부담을 안게 된다. 이런 부담을 피하기 위해 보편자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면, 역시 대화와 학문 탐구와 정의와 아름다움과 자유와 평등과 무한적 진리 등, 우리가 귀하게 여기는 이념과 가치들이 우리 삶의 세계에서 자리잡지 못하는 비관적 상황을 감수해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 삶의 세계는 말하자면, 특수자들의 수렁과 같을 것이다.
350 우리가 이들 경험계의 존재자들을 손가락으로 지시하고, 가리킬 수 있는 이유는, 바로 그들이 특정의 시공간을 점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을 특수자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들은 특정의 공 간을 영원히 점유하고 있는가? 영원은 아니더라도 무한 시간 동안 존속하는가? 모두가 영원하거나 무한 시간 동안 존속한다면, 경험세계에는 운동, 변화, 생성, 소멸의 과정이란 없을 것이다. 이 세계는 신의 영원한 정물화가 아니라 운동, 생성, 소멸 과정이 진행되는 유동성의 장소이다. 경험계의 존재자들 대부분은, 우리가 아는 한, 특정의 제한적 공간뿐 아니라 특정의 유한 시간을 점유하고 있으며, 길고 긴 시간축의 어느 시점에 위치해 있다.
경험적 존재자 중 단 하나라도 무한 시간 동안 존속하는 것이 있는가? 경험적 존재자들이 존재하는 시각은 모두 각각이며, 존속하는 시간의 길이 역시 저마다 다르다. 그들이 모두 동시에 생성 했다가 동시에 사라진다고 하면, 우리에게 시간의 길이를 측정 할 방도가 없다.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허무의 시간, 그리고 모든 것이 일시에 존재했다 사라지는 그런 시간이란 없다. 시간은 그 자체로서보다는 그 속에 자리잡은 경험적 존재자들이 변화하기에 그 흐름이 알려지는 것이다.
11장 정의의 내면성과 사회성-정의론 I
382 개인 정의에 관한 플라톤의 상기 언명들을 요약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개인 정의는 국가 정의와 같은 방식으로 규정된다.
(2) 개인 영혼은 국가의 세 계층과 유사한 기능을 하는 세 구성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3) 개인 정의는 개인 영혼의 세 부분, 즉 이성(logistikon), 기개(thumos), 욕구(epithumetikon)의 세 부분이 각자의 고유 기능을 수행하는 상태이며, 이런 상태에 이르게 하는 힘이요 원리이기도 하다.
(4) 이런 고유 기능의 수행은 각자 영혼의 본성을 고려하여, 세 부분 간의 지배와 피지배의 위계 질서적인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
(5) 개인 정의 규정에서 진정한 준거가 되어야 할 것은 외적 행위가 아니라, 영혼의 내적 상태이다.
(6) 악행의 수행 여부에 의해 외적으로 개인의 정의로움을 판단함은 통속적이요 피상적인 테스트이다.
(7) 영혼이 내적으로 조화롭고 질서 있는 자는 정의로운 자이며 그는 사회적으로 자신에 적합한 직분을 수행한다.
(8) 개인 정의란 영혼의 자기 통제, 내면의 위계적 질서와 조화, 자신의 고유한 본성에 따름, 내적인 아름다움, 다(多)로부터 일자(一者)에로의 통합성이다.
385 정의를 타인과의 사회적 관계에서 규정할 때, 그것은 필수적으로 그것의 소유 여부가 타인에 의해 경험적으로 확인될 수 있는 방식으로 규정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한 사람이 정의로운지의 여부는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정의로운 자의 내면적 정신 상태나 영혼의 상태 또는 행위의 동기가 아니라, 이들 내면적인 것이 원인이 되어 밖으로 나타난 결과로서의 행위나 상태에 주목하여 정의가 규정되어야 객관적으로 검증 될 수 있다. 비단 정의와 같은 대사회적 정의가 아니더라도 도덕적 덕목 일반은 행위나 활동으로 표출되게 마련이다. 그것들은 어떤 특정의, 구체적이고 경험적으로 확인할 수 있은 방식의 행위를 수행하는 경향성이라 말할 수 있고, 한 개인의 유덕함 여부는 그의 행위나 활동에 의해 평가 판단될 수 있어야 하며, 실제로 그럴 수 있다는 것이 상식이다. 이런 상식은 정의란 당연히 외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어떤 행위의 방식으로 규정되어야 하리라 기대하게 한다. 이런 기대에 부합되게, 당시 그리스의 규정이나 현대의 정의 규정은 모두 중요한 특색을 공유한다. 이들의 정의 규정은 대타적이며, 대사회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플라톤은 우리의 기대를 좌절시킨다. 그러나 바로 그런 점에서 그의 정의관은 혁신적이다. 그의 정의관의 혁신성, 즉 내면주의는 그의 국가론에서 약연하게 나타난다. 그의 국가론에는 법과 제도에 관한 논의가 거의 없다. 좋은 국가의 실현에서 중요한 것은 주도면밀하고 오랜 기간에 걸친 교육과정과 철인왕의 이념이었다. 그의 정의 규정에 따르면, 개인의 정의란 영혼의 각 부분들이 자신의 역할을 행함으로써 내적 조화를 이룸이며, 국가의 정의란, 국가의 세 계층이 각자의 적임(適任)을 수행함으로써 내적인 질서와 조화를 이루어 다적(多的)인 혼란에서 일자적(一者的) 통합성에로 나아감이다. 그의 정의 규정은 개인이나 국가의 경우, 모두 대자적(對者的)이고 내면적이라 평가할 수 있다.
12장 정의와 인간존재론-정의론 II
416 개인 정의가 국가 정의로부터 유추될 수 있음은 단지 방법론적인 의의만을 지니는가? 유추 가능성의 사실은 인식의 순서만 알릴뿐 존재의 순서는 함의하지 않는. 국가 정의는 개인 정의보다 먼저 인식되나, 존재론적으로는 그 반대인 것으로 보인다. 국가와 사회가 개인 삶의 투영이요 확대라면, 국가 정의가 개인 정의의 기초가 되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개인 정의가 국가 정의의 기초가 되어야 할 것이다. 개인 영혼은 내적으로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개인 영혼의 정의는 이들 세 부분이 각자의 것을 행하여 영혼이 내적으로 전체적 질서와 조화를 이룸이다. 개인의 삶은 그 개인의 내적인 삶의, 즉 영혼 상태의 반영이며 사회의 삶은 개인의 삶과 행위의 투영이다. 따라서 국가의 정의는 개인 정의와 같이, 국가를 구성하는 세 집단 각자가 고유의 직분을 수행함이라는 것이 진정한 논리 전개의 순서라고 여겨진다. 이 해석이 옳다면, 플라톤의 정의로운 국가에서는 개인이 자신의 본성을 고려하여 선택한 자신의 일과 사회적으로 위임될 사회적 적임 사이에는 적어도 괴리와 갈등이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 양자는 더 이상 우연적이거나 적대적인 관계가 아니다.
427 플라톤에 대해 또 다른 비판이 있을 수 있겠다. 모든 사회 구성원은 자신들의 적성이나 능력과 상관없이 지도자나 무사가 되길 원할 수 있으며, 그럴 수 있는 권리와 기회가 보장되어야 할 것인데, 플라톤은 이런 기본적인 자유와 권리를 제한한다. 이는 모든 이에게 기회 균등을 보장해야 한다는 현대 자유주의적 입장에서 가할 수 있는 비판이다. 현대사회에서 지도자가 될지의 여부는 후보자들의 적성과 능력보다는 그들의 의도와 노력, 선거 결과 투표자들의 판단에 따라 결정되므로, 그런 '불합리한' 욕구가 성취되는 경우가 많다.
플라톤은 어떤 응수를 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이에 대해 그를 대신하여 대답해 볼 수 있다. 한 사회적 직책, 그것도 그의 수행이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영향을 주는 공직을 적절히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능력, 의도, 그리고 의무의식이다. 특히 지도자와 무사의 직책은 사회봉사적 성격이 강하므로 철저한 의무의식이 요청된다.
이런 점과 관련하여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있다. 플라톤은 이성과 진리의 삶이 지도자뿐 아니라, 무사, 생산자 모두에게도 궁극적으로는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삶의 양식이라고 본다는 점이다.
432 플라톤 철학의 한 중요한 목표는 인간의 구제인데, 이 구제 작업의 최종 목표는 다(多)의 일자화(一者化)라는 개념으로 집약된다. 생성적 현상계에는 무수히 많은 불완전한 삼각형들, 아름다움들, 정의들이 존재하는데, 이들에 한계성(peras)을 부여하여 무규정성과 허무에 빠지지 않게 하는 것들이 삼각형 자체, 아름다움 자체, 정의 자체 등의 이데아들이다. 생성계에는 다(多)들이 존재하며, 이 각각의 개별자들은 자기동일성을 상실하여 지속적으로 타자화하는 경향이 있다. 이들과 달리 이데아들은 영원에서 영원으로 자기동일성과 일자성을 유지하고 있다. 일자(一者)에 의한 다(多)의 지배와 통제(one over many), 일자와 다적인 것들 간의 올바른 관계의 정립, 이것이 플라톤의 존재론, 윤리학, 그리고 정치철학의 목표였다. 나아가 그리스 철학자들 일반의 과제이기도 했다. 이런 목표의 실현을 가능케 하는 것, 그리고 그 목표의 실현상태가 바로 이데아계이다.
13장 이성과 유토피아
461 철인왕은 보편적 인간이다. 국가의 통치는 보편적이고 가치 지향적 원리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 일반적인 통치 원리는 항상 구체적 상황의 구체적·특수적 개인들에 적용되어야 하며, 구체적인 적용을 위해서는 해석되어야 한다. 그런데 보편 원리의 해석을 위한 또 다른 지침적 규칙을 설정할 때, 우리는 무한 후퇴에 빠질 수밖에 없다. 무한 후퇴를 막기 위해서는 어느 단계에선가 신뢰할 만한 사람의 주관적 해석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해석의 위임은 법치를 이념으로 하는 현대 국가에서도 불가피하다. 해석의 자의성을 피하기 위해서 다심(多審)제도를 채택하기는 하나, 이도 3심에서 그치고 대법원의 대법관에게 최종적 해석을 할 수 있는 권위를 부여 하는 것이다. 해석의 구체성과 특수성 때문에 최상급심에서도 주관적 해석은 불가피하기에, 법치국가에서도 판례가 최종의 법 적용에서 핵심적 중요성을 지니게 된다.
통치자의 선발 과정에서 자유주의 국가의 투표 제도는 그 과정의 민주성과 객관성에 1차적인 중요성을 부여한다. 플라톤은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통치자의 자격이라고 보았다. 아무리 지도자가 객관적이고 민주적인 절차에 의해 선택되더라도, 그가 우둔하고 포악하다면 그런 기준은 무의미할 것이다. 통치자의 선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의 자격이라 판단했기에 플라톤은 『국가』에서 통치자를 훈련, 양성하고 선발하는 과정에 대한 논의에 최대의 지면을 할애한 것이다. 논리적으로 자격을 가진 자가 통치하는 것이 당연한 노릇이며, 이런 자격론의 원칙적 타당성을 인정한다면, 통치자는 통치에 대해 우연적인 요인을 기준으로 선정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런 기준은 비이성적이다.
14장 우주론과 원인론
505 플라톤은 이성과 감성, 인식과 믿음 간의 차이는 그 인식 내용이나 방법이라기보다는 인식 대상에 있다고 보았다. 감성은 한 대상에 대한 감각기관을 통한 인식인 반면, 이성은 동일 대상을 이성적 사유에 의해 인식한다는 식의 현대적 구분은 표면적이다. 다시 말하면, 감성적 인식과 이성적 인식이란, 각각 한 동일 사태에 대한 감성적 방식의, 그리고 이성적 방식의 인식이 아니다. 현대적 관점에서 인식과 믿음의 차이는 증거나 논거에 의해 정당화 될 수 있느냐의 여부에 있다. 이런 입장에 따르면, 인식과 믿음의 대상은 동일하다. 대상만이 아니라 내용도 역시 동일 할 수 있으나(옳은 믿음의 경우), 믿음은 인식과 달리 인식 내용인 진리에로 오르는 정당화의 사다리를 결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플라톤은 이와 다른 입장을 취했는데, 인식과 믿음은 대상 자체를 전혀 달리한다는 것이다. 이들 간의 인식적 차이는 정당화의 여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들이 서로 다른 것을 인식하기 때문에 생긴다고 보았다.
510 인간의 지성이란 보편적 세계 지성의 불완전한 모사물에 불과하다. 인간 지성의 불완전성은, 단지 세계 지성에 비해, 인식할 수 있는 대상들이 제한되어 있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세계 지성은 세계 질서의 근원으로 질서를 세계에 부여한다. 그런 점에서 세계 지성은 능동적이고 창조적이라 할 수 있는 측면이 있다. 이와 달리 인간 지성은 세계에 부여된 질서를 파악하거나 지향하며, 그 질서를 자신의 거울에 반영함을 목표로 하는 데 머문다. 세계 질서를 자신 속에 반영상으로 보유함으로써 인간의 지성은 세계 지성에 다가 갈 수 있다. 그리고 인간의 삶도 그런 질서에 따라 살 수 있게 된다.
인간은 학적 탐구를 통해 자연세계의 질서를 이성적으로 인식하려 한다. 이성적 인식이란 세계 지성이 부여한 질서를 인간 영혼에 재현 또는 반영함으로써 인간 자신의 존재론적 위치를 상승시키려는 작업이다. 인간의 이성적 인식이란 윤리적이고 존재론적인 의의를 지니는 작업, 한마디로 초월의 행위이다. 플라톤은 이성을 인간의 다른 동물 종들과의 종차(種差), 인간 고유의 삶을 영위하게 하는 인간 특유의 능력 이상으로 보았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이성적 특성은 더욱 근원적이며 포괄적인 질서와 연관되어 있다. 자연과 인간의 이성을 세계 지성과 결부시킴으로써 그는 자연세계 속에서 신적인 질서를 찾아내고, 인간의 학적 탐구의 인식론적 의의뿐 아니라 존재론적이고 윤리적인 의미를 부여했다.
514 윤리적 실천이란 이성의 도움을 받아 초월적 존재로 비상하는 일이다. 윤리는 당연히 초월적이며, 현존 탈출적이다. 우리를 이 지상의 조건에 얽매는 쾌락이나 행복, 또는 우리의 현존 조건 그 자체라 할 수 있는 쾌락이나 행복의 향유 기제는 현실 구속적이므로 반윤리적이다. 플라톤은 그의 윤리적 논의에서 'eudaimonia'를 삶의 중요한 가치로 많이 언급하는데, 많은 학자들은 이를 'happiness'나 '행복'으로 번역한다. 그러나 이런 번역은 그의 윤리 사상의 핵심을 오해하게 만든다. 그 표현은 'eu prattein', 즉 '잘 살아감'을 의미하는 것으로, 한국어의 행복이나 영어의 'happiness'가 만족 또는 충족되어 있는 정태적 상태를 의미함과 달리, 후자의 'eu-prattein'은 이성의 주도에 의해 활동이 이루어지는 동태적 과정을 함의한다. 잘 삶의 내용은 삶의 주체인 영혼의 본성, 즉 이성적 질서에로의 귀향을 완결 짓는 일이다. 이렇게 볼 때, 플라톤에게 '좋음(善, agathos; kalos)'이란 표현은 존재론적 완전성, 보편성, 전체성, 동일성, 명징성 등의 속성 전체를 지시하는 약어로 볼 수 있으며, 그 뜻을 가장 잘 전하는 우리말 표현은 '좋다', '훌륭하다'로 여겨진다.
15장 지성과 우연적 필연
524 왜 플라톤은 자연계의 물상이 인과적으로 결정된다고 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그것이 바로 법칙적으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는가? 그는 어떤 이유에서 인과 결정성과 법칙성을 구분했는가? 법칙들이란 일반적이며 보편적인 규칙으로서, 이들은 보편자와 보편자 사이의 관계로 표현된다. 다시 말하면, 자연 운행에 관한 운동 규칙의 법칙성은 그 규칙이 보편자들 사이의 관계를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갖는 특성이다. "인력의 크기는 질량의 크기에 비례한다"는 법칙은 특정의 사물들이 소유하는 특정량의 질량이 아니라 질량 일반과 인력 일반, 즉 보편자로서의 질량과 보편자로서의 인력 사이의 관계를 기술한다. 따라서 자연 세계의 운행이 법칙적으로 결정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갖기 위해선, 먼저 자연세계에 보편자가 존재하거나 관여함을 입증해야 한다.
그런데 플라톤에 따르면, 자연세계란 그 자체로선, 즉 지성의 개입이 있기 전에는 철저히 특수자들의 흐름이다. 엄밀한 의미의 특수자란 시공적인 단독성을 지닌다. 자신과 모든 면에서 동일한 다른 개체를 동시에 다른 공간에서 발견할 수 없으며, 다른 시간에서도 발견 할 수 없는 그러한 존재자만이 진정한 특수자라고 말할 수 있다. 플라톤의 자연세계는 이러한 특수자들의 연속적인 집합이다. 동시에 특수자들은 서로 다른 공간에 반복적으로 존재할 수 없으며, 시간적으로도 자기동일성을 유지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특수자들의 운동 방식을 법칙화 하기란 불가능하다. 이 특수 자들은 한 순간에만 그리고 한 장소에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526 생성계의 특수자들과 달리 형상들은 생성에서나 존재에서나 독립적이다. 그것은 영원에서 영원으로 존재하는 비생성적인 실재자이니 생성 원인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존재 근거로 타자를 필요로 하지도 않는 자체적인 존재자들이다. 이렇게 볼 때, 플라톤의 생성적 자연세계는 그 자체로서는 성질들과 힘들이 연속적으로 유동하며 변화하는 흐름(flux)이다. 이 속에서 특수자들의 운동은 여하한 규칙성도 지니지 않으므로 자연세계는 완벽한 혼돈(chaos)의 세계이다. 이 세계는 본질적으로 특수자적이고, 국지적이며, 가변적이고, 무규정적이며 무질서하고 맹목적으로 움직인다. 반면 이에 대조되는 지성의 세계는 보편적이고 전체적이며, 자기동일성을 유지하고 규정성을 지니면서, 질서있고 합목적적으로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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