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기 20분 | 03 옥스퍼드 중국사 2


[책읽기 20분] 옥스퍼드 중국사 - 3

Posted on 2016년 5월 23일

폴 로프(지음), <<옥스퍼드 중국사 수업>>, 유유출판사, 2016.

원제: Paul Ropp, China in World History.

2장 최초의 제국: 진나라(기원전 221–기원전 206)와 한나라(기원전 206–220)

3장 혼돈의 시대(220–589)

진(秦)나라의 중국통일 

- "부유한 경제적 자원을 동원하여 120년도 채 걸리지 않아 전국 시대의 통일과 안정이라는 위대한 과업을 이룩하는 데 성공했다."

- 중앙집권화와 규격화: "유럽이 2,000년 뒤에도 도달하지 못했을 정도로 대단한 것"

- 중앙집권적 관료제 국가: "진나라가 창조한 국가 경영 방식은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랜 시간 동안 존속했다."

한(漢)과 흉노의 관계

- 한나라 초기 조정은 흉노와 화친을 추진. 초창기 한 왕조는 흉노 제국에게 조공을 바치는 봉신이었다고 보는게 타당

- 서역이 중국 군대 관할 아래 놓이면서 중앙아시아에 무역로가 생겨남

참조: 발레리 한센, <<[실크로드 - 7개의 도시](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63831535)>>

- 한나라가 남겨준 것: "유가 사상으로 합리화한 법가적인 제도들로 제국의 원형을 만들었다."

- 로마제국과의 비교: 로마는 수많은 교역로가 교차하는 곳이었던 반면 한은 거의 전적으로 농업국가, 문화적으로 대단히 획일적인 국가

 

혼돈의 시대: 역사에서의 변화와 그것의 원인과 결과에 주목, 이 시기를 거치면서 중국은 '다른 문명'으로 전환

- 호(胡)·한(漢)의 구별이 완전히 사라졌다.

- 경제적 변화: 장강 이남으로 대규모 이주가 이루어지면서 번영하는 지역으로 변화

- 사상사적 변화: 유가 이데올로기의 쇠퇴와 도가의 발흥은 "중국에서 불교가 성장하는 데에 비옥한 토양을 제공해 주었다. 불교의 전래는 기나긴 분열의 시기 동안 있었던 모든 변화 중에서도 가장 극적인 것이었다."

- 정치적 변화: 북중국은 한족과 비한족 유목민족의 사람과 제도가 민족적·문화적으로 융합, 장강 유역을 중심으로 한족이 주도하는 완전한 형태의 정치통합체 등장

 

"이러한 변화의 모든 것은 589년의 중국이 한왕조의 그것과 다른 문명이었음을 의미한다. 당시 중국은 한나라때보다도 훨씬 더 부유하고, 도시적이었으며, 상업화된 나라였다. 한나라가 몰락한 뒤 3세기 반동안 지속된 번영과 국제교역 그리고 문화적 창조의 결과, 그 뒤를 이은 수당시대는 중국 역사를 통틀어 문화적으로 가장 힘차고 풍성한 시기가 되었다."



발레리 한센, 《실크로드 - 7개의 도시


지난 주에는 형성기를 했고, 이번 주에는 2장과 3장을 한다. 3장 혼돈의 시대가 더 중요하게 여겨지기 때문에 진나라와 한나라는 상대적으로 소홀하게 지나가겠다. 그렇다 해서 진나라를 완전히 무시하고 갈 수는 없는데 진나라의 중국통일이 있기 때문이다. 진시황이라고 불리는 진나라 왕 정과 승상인 이사에 의해서 이룩된 통일. 진시황 그러면 안 좋은 이미지가 많이 있는데 역사가 착한 사람과 악한 사람의 구별을 없애버리는 경향이 있기는 하고, 그것을 완전히 무시하자는 건 아닌데 중국의 역사를 큰 흐름에서 보자면 꼭 그렇게 나쁜 놈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겠나 하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 해서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게 되었는가. 가장 핵심적인 것은 부유한 경제적인 자원이 있었다는 것. 82페이지를 보면 "부유한 경제적 자원을 동원하여 120년도 채 걸리지 않아 전국 시대의 통일과 안정이라는 위대한 과업을 이룩하는 데 성공했다."고 되어있다.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서기전 221년에 진시황에 의한 중국 통일은 법가사상의 실천에 따른 성과라고 할 수 있다. 법가사상이 중국에서는 현실적으로 나라를 세우는데 또는 통일을 하는데 작동한 사상이 법가이다. 법가사상이 가지고 있는 위력을 무시할 수 없다. 법가가 여러 가지로 잔혹하다는 느낌을 주지만 그것은 유가에 의한 이데올로기적인 공세가 있었다는 것도 무시해서는 안 된다. 


82 결국 진나라는 부유한 경제적 자원을 동원하여 120년도 채 걸리지 않아 전국 시대의 통일과 안정이라는 위대한 과업을 이룩하는 데 성공했다. 이 기념비적인 과업을 훌륭히 성취해 낸 가장 위대한 사람은 진나라 왕 정政과 승상 이사였다.


부유한 경제적 자원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배경은 법가사상이 제공했다. 무엇보다도 중국에서 한번 만들어지고 그 뒤로도 계속해서 진나라의 업적으로 남은 게 중앙집권적 관료제 국가. 규격화라는 이름으로 불리는데 저자는 중앙집권화와 규격화가 "유럽이 2,000년 뒤에도 도달하지 못했을 정도로 대단한 것" 이라고 말한다.


86 진나라가 이룩한 중앙집권화와 규격화의 수준은 유럽이 2,000년 뒤에도 도달하지 못했을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다. 


예를 들어서 1789년 프랑스혁명 이후에 프랑스에 나온 업적 중 하나가 미터법. 그런데 서기 전 221년에 진나라의 중국 통일 이후 진행된 여러가지 통일, 즉 규격화가 있었다. 진나라가 창조한 국가 경영 방식은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랜 시간 동안 존속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중앙집권적 관료제 국가. 중국 문명이 내놓은 여러가지 업적들이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아닌가 한다. 


진시황의 널리 알려진 있는 것 중 하나가 역사적 사실인지 허구인지 알 수 없지만 분서갱유가 있다. 책을 불태우고 유가 사상가들을 땅에 묻었다.


89 진나라가 주대의 경향과 전통 가운데 다수를 파괴했다기보다는 종합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저자는 분서갱유가 유가사상가들의 왜곡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한다. 하지만 한번 외워버리면 그 다음에는 없어지지 않는다. 그것 때문에 진시황이 나쁜놈이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이 아닌가 한다. 진나라의 법가사상이 가혹하다고 하기도 하지만 비교적 공평하면서도 유연하게 집행되었고 각 항목마다 세심하게 집행되었다는 평가가 있다.


90 진대의 무덤을 추가로 발굴하여 조사한 바에 따르면, 진나라 법은 비교적 공평하면서도 유연하게 그리고 각 항목마다 세심하게 집행되었다.


90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그 뒤를 이은 모든 왕조가 제도적 전범으로 삼은 중앙 집권적 관료제 국가를 창조한 것은 진 왕조의 기념비적인 업적이다 


90 진나라가 창조한 국가 경영 방식은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랜 시간 동안 존속했다.


그 다음에 한나라. 한나라에 대해서는 사마천의 사기.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한나라와 흉노의 교류라고 보겠다. 한나라 중심으로 역사를 이해하게 되면 흉노, 이름부터 흉한데 팩트만 놓고보면 한나라 초기의 조정은 흉노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서 화친을 추진했고 선물을 많이 보냈고 심지어는 공주를 묵돌 선우에게 시집을 보냈다.


93 건국 초기 한 왕조에 닥쳤던 가장 심각한 위협은 중앙아시아 흉노의 침입이었다.


94 결국 한나라 조정은 흉노와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 화친을 추진했으며, 비단, 금, 곡물 등을 아낌없이 선물로 보내고 한나라 공주를 묵돌 선우에게 시집 보내야 했다. 한나라는 화친을 맺는 과정에서 (비록 한나라 조정 내부에서는 자기네 나라가 천하의 중심이라는 중화사상을 견지하고 있었지만) 흉노를 한나라와 동등한 존재로 인식했다. 초창기 한 왕조는 흉노 제국에게 조공을 바치는 봉신으로 존재했다고 보는 편이 그와 반대였다고 보는 것보다 타당하다.


그러면 한나라가 흉노를 아래 두었다고 보기 어렵다. 오히려 초기에 한나라 왕조는 흉노제국에게 조공을 바치는 봉신이었다고 보는게 그렇지 않다고 보는 것보다 타당하고 저자는 보고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지만 한번 생각을 바꾸어둘 필요가 있다. 그렇게 되면 중국과 북방 유목민족은 중대한 변화가 일어난 것. 반드시 한나라와 흉노의 관계가 적대적인 것만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공주를 시집 보낼 정도이니 많은 유목민족의 문화들이 들어왔고 특히 한나라 상류층에서 복식, 음식 문화를 좋아했고 아주 중요한 교류 요소 중에 하나가 기마전술이 들어왔다.


95 한나라와 흉노의 관계는 한나라와 외부 세계의 관계, 더 나아가 그 뒤에 있을 중국과 유목민족의 관계에 엄청난 변호를 가져왔다.


95 중국의 전술은 유목 민족의 기마 전술과 궁술에 의해 더욱 세련되게 다듬어졌다. 한나라 황제들은 유목 민족의 복식, 음식, 음악, 무용을 무척 좋아했고, 그로 인해 유목 민족의 문화가 한나라 엘리트층에도 널리 퍼졌다.


그러다가 중국에서 서역을 중국 군대 관할 아래 두면서 중앙아시아를 관통하는 도로망이 생겨나고 교역이 생겨났다. 이게 이른바 19세기에는 실크로드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그런데 최근에 읽은 책 중에 발레리 한센의 《실크로드 - 7개의 도시》가 있는데 여기에 보면 '실크로드'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되었다는 것. '로드', 즉 길이 아니라 '도시'가 중심이다라는 것이다. 오아시스 중심의 도시들을 중심으로 봐야한다는 주장을 담고있는 책. 가장 최근에 읽는 것이 이 책인데 일독을 권한다. 


한나라 역사에 중요한 이야기들이 많은데 여기서는 생략하고 교류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겠다. 한나라가 남겨둔 것은 무엇인가. 115페이지에서 저자는 중국문명에서 계속된 것들인 "유가 사상으로 합리화한 법가적인 제도들로 제국의 원형을 만들었다."고 말한다. 이게 중요하다. 사상사를 공부하는 사람이기도 하니까 법가적인 제도들이 진나라 통일에 있어서 실효성을 발휘했기 때문에 버릴 수가 없다. 그런데 그것만 가지고는 안되니까 나중에는 유가사상으로 합리화했다. 그것이 바로 한나라가 중국 문명에 남겨준 성취이다. 중국은 유가의 나라다 이렇게 말하면 안되고 대체로 중국역사에서 가장 많이 관철된 것은 유가사상으로 합리화한 법가적인 제도라고 보면 되겠다.


115 한 왕조는 4세기 넘게 지속하면서 유가 사상으로 합리화한 법가적인 제도들로 제국의 원형을 만들었다.


115 지중해에 수많은 교역로를 지닌 (중국인에게는 대진으로 알려졌던) 로마 제국과는 대조적으로, 한나라는 비교적 육지로 둘러싸여 있었고 거의 전적으로 농업국가였다. 그리고 한나라는 하나의 문자, 유가 사상 그리고 이것들을 공유하는 엘리트층 문화를 지닌, 문화적으로 대단히 획일적인 국가였다. 


두 번째 장 마지막에서 저자는 로마제국와 비교하다. 수많은 교역로가 있었던 로마제국과는 달리 중국에서는 물론 실크로드가 있었지만 거의 전적으로 농업국가였고 밀도 있는 통제가 이루어진 문화적은 대단히 획일적인 국가이다. 반면 로마는 멸망 후에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파괴되었다. 나중에 중세 교황들이 다시 재건해서 오늘날의 로마시를 만들었다. 또 신성로마제국 이름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들이 로마제국의 전통들을 직접적으로 이어받은 것은 아니다. 반면에 한나라는 끊임없이 중국의 역사 속에서 하나의 파라다이그마로서 재생되었다는 것. 그게 한나라가 중국문명에 남긴 지속적인 것이라고 하겠다.


115 한나라의 수도 뤄양은 비록 로마보다 거의 2세기 먼저 몰락했지만, 로마 제국이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완전히 붕괴된 것과 대조적으로, 광대하면서도 하나로 통합된 영토를 기반으로 제국을 형성했던 한나라의 원형은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중국에서 끊임없이 재생되었다.



이제 3장인 혼돈의 시대를 보자

역사에서의 변화와 그것의 원인과 결과는 무엇이고, 그 시기를 거치면서 중국은 '다른 문명'으로 전환된다고 하는데 어떤 문명들이 들어와서 어떻게 혼란하였고, 어떻게 변화해서 다른 문명으로 전환했는지를 생각해본다면 3장이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한나라가 멸망하면서 위촉오 삼국시대를 거친다. 그리고 북중국에서는 비한족계 유목민족이 날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호(胡)와 한(漢)의 구별이 완전히 사라졌다. 호라는 말이 처음에는 한족의 문화를 구별하는 말로 나중에는 서로 다른 세력들이 상대를 낮추어 부르는 경쟁상대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 것. 


121 예전부터 있었던 한족과 비한족을 가리키는 '호족(胡族)' 사이의 구별은 급속한 변화의 시기를 거치는 동안 완전히 사라졌다.


122 '호족'이라는 말은 처음에는 비한족의 문화에서 한족적인 문화를 구별할 때 사용하는 용어였지만,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서로 다른 세력들이 각기 자산의 경쟁 상대를 부를 때 사용하는 말로 바뀌었다. 남중국과 북중국은 독자적으로 진화했지만, 양측 모두 스스로를 '문명화된 중국인'으로 주장했으며, 모든 영토를 아우르는 하나의 중앙집권적 제국이라는 옛 한나라의 이상을 회복하기를 갈망했다.


그렇지만 이때 중국은 북중국과 남중국이 독자적으로 발전하고 그렇게 되면서 중앙집권적 제국에 대한 이상이 있었다. 또한 오늘날 양자강이라고 불리는 장강 이남으로 대규모 이주가 일어나면서 번영하는 지역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굉장히 중요한 요소이다. 교역이 발달하고 6세기 초에 양나라 수도 건강은 인구 100만의 도시가 되었다. 신라의 삼국통일이 676년이니 비교를 해보면 100만의 도시라하면 어마어마한 것. 그러다가 589년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는 큰 번영을 누리게 된다.


123 한 왕조 이후 남중국으로 대규모 이주가 이루어지면서 창장 강 유역은 중국에서 가장 번영하는 지역으로 탈바꿈했다.


124 정치적으로 분열되었고 국력도 약한 시대였지만 장거리 교역은 전례 없이 활발해졌다.


125 6세기 초 창장 강 유역에 자리한 양梁 나라의 수도 건강은 인구 100만의 세계에서 가장 크고 호화로운 도시였다.


수나라가 큰 번영을 누리게 된 핵심적인 이유는 장강 이남의 교역으로 인한 경제의 발전이다. 바로 이것이 수나라와 당나라가 세계 제국으로 나아가는 기초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일단 혼돈의 시대이지만 동시에 장강 이남에서는 물산이 발전하고 인구가 늘어났다는 것, 경제적인 변화가 있었다는 것이 하나이고, 둘째로 사상적으로 중대한 의의가 있는 사건들이 이때 일어나는데 한나라가 몰락하면서 유가 이데올로기가 쇠퇴하고 사회가 혼란스러우니까 은둔의 사상인 도가가 발흥했다. 저자는 129페이지에서 도가가 발전한 것은 "중국에서 불교가 성장하는 데에 비옥한 토양을 제공해 주었다. 불교의 전래는 기나긴 분열의 시기 동안 있었던 모든 변화 중에서도 가장 극적인 것이었다"고 말한다.


125 한 왕조가 몰락하자, 한나라의 통치 체제를 정당화하고 합리화했던 유가 이데올로기에 대해 수많은 학자와 관료가 가졌던 신념 역시 함께 무너졌다. 유가 사상이 더는 질서를 유지할 수 없게 되자, 사람들은 자연히 다른 철학과 종교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한나라가 멸망할 무렵 도가 사상은 일부 지역에서 대중 종교로 탈바꿈했다.


129 불교의 전래는 기나긴 분열의 시기 동안 있었던 모든 변화 중에서도 가장 극적인 것이었다.


135 한나라가 멸망한 뒤 수많은 중국인이 유가 사상에 대한 개혁을 모색한 반면, 불교는 당시의 충격에 빠진 사회 분위기에서 새롭게 분출하고 있던 다양한 욕구와 잘 맞아떨어졌다.


중국에 불교가 전래되었다는 것이 중국 사상사에서도 중요한 시기. 대개 철학과에서 중국 철학을 배울 때 이 시기를 잘 안 배우는데 선진 유가, 공자, 맹자를 배우고 바로 성리학으로 들어간다. 수당시대의 불교를 배우지 않으니 그러니까 중국이 이때 굉장히 침체된 시기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사상사적으로는 굉장히 중요한 시기. 물론 불교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었다고 하지만 유교 사상의 힘은 여전했고 제국에 대한 생각을 가진 이는 여전히 유교를 고수했다. 또한 불교가 중국에 들어와서 원래 인도에서처럼 그런 모습을 띠고 있었던 것도 아니고 점차 중국화되었다. 어떤 학자들은 불교가 중국을 정복했다고 하지만 그렇게 보기는 어렵고 중국화되었다고 보는 게 타당할 것 같고 중국 특유의 불교가 완성된 것이라 말할 수 있겠다.


141 불교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유가 사상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북중국과 남중국을 하나의 거대한 제국으로 통합하기를 꿈꾸는 사람들 사이에서 유가 사상은 여전히 매력적이었다.


불교가 들어옴으로 해서 유가가 새로운 도전을 맞이하게 되었고 그러면서 유교도 변화를 일으키게 된다. 수나라와 당나라를 거치면서 송나라에 들어서면서 성리학이라 부르는 이학이 등장하게 되는데 불교의 영향이 크다. 불교에서 흡수한 것도 있고 철저한 배척의 시도로서 성리학 이학이 등장한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경제적 변화와 사상사적 변화, 그리고 세 번째로는 정치적 변화를 들 수 있다. 혼돈의 시대인 220~589년, 그리고 589년이 수나라에 의한 중국의 통일이다. 앞서 변화를 셋으로 나누었다. 혼란의 시기지만 정치적 변화시기에 북중국은 한족과 비한족, 유목민족의 법과 제도가 민족적·문화적으로 융합되었고, 남중국은 장강 유역을 중심으로 한족이 주도하는 완전한 형태의 정치통합체가 등장하게 된다. 그러고 나서 589년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게 된다. 저자가 쓴 내용을 보자 "이러한 변화의 모든 것은 589년의 중국이 한 왕조의 그것과 다른 문명이었음을 의미한다. 당시 중국은 한나라 때보다도 훨씬 더 부유하고, 도시적이었으며, 상업화된 나라였다. 한나라가 몰락한 뒤 3세기 반동안 지속된 번영과 국제교역 그리고 문화적 창조의 결과, 그 뒤를 이은 수당시대는 중국 역사를 통틀어 문화적으로 가장 힘차고 풍성한 시기가 되었다." 


그 이전 진한시대와 수당시대를 비교해보면 중간에 350년이라는 혼란의 시대가 있었다. 한나라는 한족 중심의 획일적인 국가. 그러나 분열의 시기에 다양한 문화가 유입되고 다원화된 국가로 변모하였다. 이때부터 중국이라는 나라는 더 이상 한족의 나라가 아니다라는 것에 주의해야 한다. 수와 당은 비한족 국가이고 오랑캐 호 胡라고 하는게 더 이상 중국 아닌 것들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게 되었다. 이렇게 이해를 해야 되겠다. 현재 중국이라는 나라도 그렇다. 한족의 나라다 라고 하면 중국 정치체제의 오해에서 기인한다 


144 581년 중국식으로 양견楊堅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 선비족 장국이 북주로부터 권력을 찬탈하고 수 왕조를 창업했다. 문제文帝(문화적 황제라는 의미)라는 중국식 칭호를 선택한 양견은 몇 년 뒤 남중국으로 군대를 파견했고 589년 북중국과 남중국을 다시 통일했다. 이는 한 왕조가 멸망하고 3세기 반이라는 시간이 지난 뒤의 일이었다.


144 200-589년의 오랜 분멸의 시기는 엄청난 정치적 변화의 시대였다.


145 이러한 변화의 모든 것은 589년의 중국이 한 왕조의 그것과 다른 문명이었음을 의미한다. 당시 중국은 한나라 때보다도 훨씬 더 부유하고, 도시적이었으며, 상업화된 나라였다. 한나라가 몰락한 뒤 3세기 반동안 지속된 번영과 국제교역 그리고 문화적 창조의 결과, 그 뒤를 이은 수당시대는 중국 역사를 통틀어 문화적으로 가장 힘차고 풍성한 시기가 되었다.


현재 한국도 분열과 혼란의 시기이다. 이 시기에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일단 다양한 문화가 유입되어 들어오고 다원한 국가로 변모하고 그렇게 해서 하나의 나라로 다시 융합되어 들어갈 때는 좀더 풍성한 문화적인 자원들을 가진 나라로 가면 되지 않겠나 생각해본다. 그렇게 본다면 다원성에 대해 민감하고 편견이 없고 관용적인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 앞으로 살아갈 시대에 좀더 유연하게 잘 적응해 나갈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옛날 것을 수구적으로 고수하는 태도보다는 3장을 읽으면서 그런 점들에 유념해야 한다고 봤다. 다음주에는 4,5장을 하겠다.




[책읽기 20분] 옥스퍼드 중국사 - 4

Posted on 2016년 5월 30일

폴 로프(지음), <<옥스퍼드 중국사 수업>>, 유유출판사, 2016.

원제: Paul Ropp, China in World History.

4장 다시 통일된 제국: 수 왕조(581-618)와 당 왕조(618-907)

수가 성취한 것: 남중국과 북중국의 정치적·문화적 통일

당이 성취한 것: "가장 국제적인 나라", 수도의 건설, 유가의 정치철학, 불교의 종파, 불교예술과 건축, 한자의 전파

수나라 문제(양견)

- "고도의 군사적 통일과 정치적 통합을 이룩했다."

- 대운하 건설 시작

- 전한(前漢)의 수도였던 장안(長安)의 옛터에 대규모 수도를 건설. 이후 장안은 한 세기만에 세계에서 가장 크고 위대한 도시가 되었다.

참조: 세오 다쓰히코, <<[장안은 어떻게 세계의 수도가 되었나](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866215)>>

이시다 미키노스케, <<[장안의 봄](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499737)>>

당의 발전 조건: 조세 기반을 바탕으로 국고를 튼튼히 했고, 장강 유역이 대운하를 통해 북쪽의 수도와 연결되었다.

당의 국제성의 조건: "당나라의 평화와 번영", "당나라 조정의 이국적 뿌리", "당나라 군대가 중앙아시아에서 이룩한 안정"



이시다 미키노스케, 《장안의 봄

세오 다쓰히코, 《장안은 어떻게 세계의 수도가 되었나

미야자키 이치사다, 《수양제


혼돈의 시대를 지나서 다시 중국은 통일된 제국의 시대로 들어가게 된다. 수나라와 당나라. 수나라는 남중국과 북중국의 정치적 문화적 통일을 성취한 업적이 있고, 당나라는 말그대로 국제적 교류의 측면에서 볼만한 것들이 많이 있다. 그리고 문화적으로 굉장히 번성했던 나라. 군대에서 흔히 '당나라 군대같다' 라고 말을 한다. 군기가 빠진 군대를 말할 때 쓰는 용어인데 사실 당나라 군대만큼 중국 역사에서 강한 군대도 별로 없었는데 왜 오합지졸을 가리키는 말로 쓰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당이라고 하는 나라는 오늘날 중국사람들이 사용하는 당나라 사람들의 거리라는 뜻의 당인가 唐人街이라고 한다. 당나라야말로 중국의 역사에서 세계적인 명성을 끼친 나라이고, 무엇보다도 당나라의 시인들인 이백과 두보가 있다.


수 나라에 대해서 한국사만 배운 사람은 편견이 있을 것이다. 특히 수 양제는 고구려 을지문덕 장군의 살수대첩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그런데 중국사의 맥락에서 보면 수나라는 성취한게 많은 나라이고, 그러한 성취가 당나라로 이어졌음을 고려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당나라의 업적은 수나라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처음에 말했던 것처럼 남중국와 북죽국의 통일을 이룩했던 것은 수나라 문제인 양견의 공이 컸다. 남중국과 북중국 통일 이전에는 남중국 사람들은 북중국 사람들은 절반은 문명인이지만 야만인이나 다름없다 생각했고, 북중국 사람들은 남중국 사람들이 “퇴폐적이고 속물적이고 허위로 가득찬" 사람들이다 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이러한 차이와 선입견 때문에 중국을 하나의 통일제국으로 통합하려면 군사적인 도전 못지 않게 문화적인 도전도 필요했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게 바로 수나라 문제가 이룩한 업적 중에 하나가 되겠다. 


149 그들은 자신들보다 더 강력한 북중국의 북위 조정과 그 계승자들을 유가 사상에 무지하고 예의범절과 사회적 위계질서도 모르는 반半 야만인이라면 경멸했다.


149 그에 반해 북중국 통치자들은 남중국의 정치제도가 퇴폐적이고 속물적이며 허위로 가득 차 있다고 경멸했다.


149 이러한 차이와 선입견 때문에 중국을 하나의 통일 제국으로 통합하기 위해서는 군사적 도전 못지않게 문화적 도전에 맞서기 위한 각고의 노력이 필요했다. 남중국과 북중국을 통합하는 데 성공한 사람은 양견이다.


150 전국시대를 통일한 진나라 때만큼이나 극적이었던 30년 동안 수나라 군대와 정부는 일찍이 전례 없는 고도의 군사적 통일과 정치적 통합을 이룩했다. 양견은 '문화적 황제'라는 뜻의 문제 文帝 라는 칭호를 사용했는데, 남과 북을 통합하는 데에는 문화적 요소가 군사적 요소만큼이나 중요하다는 점을 그가 잘 이해하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남중국과 북중국을 어떻게 나누는가 하면 민산(岷山) 산맥 동쪽에 진령(秦嶺) 고개가 있는데 그것과 황하와 장강 사이에 회하/회수라고 불리는 강이 있다. 이렇게 진령과 회화의 선을 이으면 그 기준으로 남과 북을 나눈다. 연간 강수량이 1000미리되는 선과 대체로 일치하는데 식생기준으로 본다. 위도로 보면 한국의 제주도와 비슷한 위치. 제주도에서 감귤 농업을 하는데 중국에서도 회수 이남에서는 귤이 되는데 건너가면 귤이 자라지 않는다. 귤이 회수를 건너가면 탱자가 된다는 말. 그때 사용하는 말이 회수이고 그 선이 바로 진령회화선이다. 북쪽은 밭농사가 남쪽은 쌀농사가, 북쪽 사람들은 만두를 주식으로 하고, 남쪽은 밥을 주식으로 한다. 교통수단도 남쪽은 배가 풍부하고, 북쪽은 말을 타고 다닌다. 남선북마(南船北馬)라는 말도 있다.

이게 진령 회화 선이라고 하는데 남 북 중국을 가르는 중요한 선. 지리적인 조건들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수나라 양견 문제는 "고도의 군사적 통일과 정치적 통합을 이룩했다"고 하는데 그러면서 동시에 대운하 건설을 시작했다. 또한 전한(前漢)의 수도였던 장안(長安)의 옛터에 대규모 수도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당나라 수도 장안이 한 세기만에 세계에서 가장 크고 위대한 도시가 되었다는 것은 바로 수나라가 양견의 수도 건설에서 비롯되었다고 하겠다. 양견의 아들 수양제. 미야자키 이치사다의 《수양제》라는 책도 있다. 고구려 원정에 실패하고 이후 내전이 일어나서 수나라는 망하고 당나라가 건국된다. 태종 이세민은 수의 업적을 이어받아 왕조의 기틀을 세우고, 영토를 확장해서 그 당시 기준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큰 제국을 창조해냈다. 당나라 이렇게 할 수 있었던 밑바탕은 조세인데 조세를 기반으로 국고를 튼튼히 했다. 그 다음에 장강 유역에 대운하를 통해서 수도와 연결되었다는 점을 중요하게 봐야한다. 대운하라고 하는 것. 산업기반 시설로서의 교통로가 만들어진 것과 경제적인 기반이 있기 때문에 당연히 세계적인 제국이 될 수 있었던 것. 


151 제국의 미래를 위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대운하 건설이었다.


152 수 문제는 또한 전한의 수도였던 장안의 옛터에 대규모의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라고 명령했다.


152 장안은 수문제가 살아 있을 때까지만 해도 비교적 빈 공간이 많은 도시였지만, 이후 한 세기 만에 세계에서 가장 크고 위대한 도시가 되었다.


153 수 양제는 612년 육상과 해상에서 동시에 고구려에 대한 대대적인 군사 원정을 단행했지만 실패로 끝났다.


154 626년 이연의 야심에 찬 아들 이세민이 아버지를 투옥시키고 황태자를 포함한 두 명의 형제를 죽인 뒤 스스로 황위에 올랐는데, 그가 바로 당 태종이다.


154 당 태종의 치세는 626-649년이었다. 그는 한나라보다 더 넓은 영토를 차지하고 새로운 왕조를 반석 위에 올려놓음으로써 수 양제가 실패한 과업을 이룩하는데 성공했다.


156 당나라 지배층은 그 당시를 기준으로 세계에서 가장 큰 제국을 창조해냈다. 이는 당나라 초기 강력한 중앙 정부가 확고한 조세기반을 바탕으로 국고를 튼튼히 했고, 계속 번영을 누리던 창장 강 유역이 대운하를 통해 북쪽의 수도와 긴밀히 연결되었기에 가능했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국력은 제국의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에까지 미쳤다는 것이 최근의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서도 증명되고 있다. 그리고 당나라는 율령을 반포했고 후속 왕조들의 모범이 되었다. 그래서 앞서 국제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고 문화적 교류가 활발했다고 말했는데 중국의 왕조 가운데서도 가장 국제적인 나라다. 이게 가능하려면 다시 말해서 유라시아 대륙에서 당나라가 하나의 선두국가가 되는 것이 가능했던 것은 우선 당나라의 평화와 번영이 있었고 무엇보다도 당나라 조정이 이국적 뿌리를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당나라 군대가 중앙아시아에서 이룩한 안정이 있었다는 것, 이 세가지 요소 때문에 가능했다.


157 당률은 당대부터 20세기에 이르기까지 모든 후속 왕조에 법 제정의 모델이 되었다. 


157 20세기 초에 매우 극적인 고고학 발굴이 한 차례 이루어졌는데, 이를 통해 학자들은 당나라의 세력 범위가 제국의 중심에서 매우 멀리 떨어진 변방에까지 미쳤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158 당나라는 중국의 왕조 가운데 가장 국제적인 나라였다.


158 당나라의 평화와 번영, 당나라 조정의 이국적 뿌리 그리고 당나라 군대가 중앙아시아에서 이룩한 안정 덕분에 당나라는 전례 없는 국제 교역의 시대를 열 수 있었다.


그 당시 당나라가 얼마나 융성했는지는 《옥스퍼스 중국사》에서도 잘 나와있지만, 그것에 대해 다른 책 《장안의 봄》이 있다. 정말 좋은 책이다. 《장안은 어떻게 세계의 수도가 되었나》라는 책도 있는데 이 책은 현재 절판되어서 구할 수 없다. 콘스탄티노플, 바그다드, 장안 이 세도시가 어떠한지를 비교 연구한 책이기도 하고 장안의 수도 연구, 도시 계획도 나와있는 좋은 책이다. 


장안이 얼마나 외국의 영향을 받았는지는 당나라가 외국과 얼마나 깊게 넓게 교류했는지를 알려주는 지표로는 불교의 영향력이 컸다는 것이 거론 될 수 있고, 둘째로는 여성의 지위가 굉장히 높았다는 것에 있다.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한족 중국의 윤리에 따르면 여성의 지위가 높지 않았는데 장안은 여성의 지위가 높았다. 


158 당나라 수도 장안은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전 지구적인 교차로였다. 인도, 일본, 한국, 티베트의 불교도들, 페르시아의 성직자, 네스토리우스 기독교도, 조로아스터교도 등 수많은 종교인은 물론이고, 유대인, 아라비아인, 인도인 뿐만 아니라 돌궐인, 위구르인, 소그드인까지 세계 각지에서 온 상인들도 장안을 근거지로 삼아 활동했다.


165 당대 외국의 영향이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 주는 하나의 중요한 지표가 불교의 유행이라면, 또 하나의 지표는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비교적 향상되었다는 점이다.


165 당나라 그림에 보면, 강건하고 심지어는 오동통하며 뺨이 불그스레하고 풍채가 당당한 여성들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중국 여성이 정장 차림을 한 점을 제외하면 유럽의 르네상스 당시 여성의 아름다움을 묘사한 그림을 떠올리게 한다.


166 당나라 중기에서 말기까지의 궁중 회화는 여성을 풍만하고 활동적으로 묘사한다. 이 점은 송나라 이후에 여성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마르고 연약하고 다소곳한 모델을 그린 것과 대조적이다.


"당나라 중기에서 말기까지의 궁중 회화는 여성을 풍만하고 활동적으로 묘사한다. 이 점은 송나라 이후에 여성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마르고 연약하고 다소곳한 모델을 그린 것과 대조적이다" 즉, 아름답다고 하는 기준이 다르다는 것이다. 단순히 그 정도가 아니라 회화를 보면 여성이 말을 타고 다닌 것도 제법 많다. 시대가 그러했다는 것. 당나라는 양귀비가 널리 알려졌지만 당 현종의 치세를 기억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 현종의 치세는 712-756년으로 꽤나 긴 시기에 당 현종의 시대가 있었다. 당나라의 국력과 문화가 최고 정점에 이르렀고 동시에 기나긴 고통의 내리막길이 극적으로 시작된 시기이기도 하다. 이때가 지나면서 안록사의 난을 거치면서 혼란과 쇠망으로 접어든다. 다스려지는 때가 있으면 혼란한 때가 있기 마련이니까 크게 아파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그게 세상사의 이치가 아니겠는가. 이 시대에는 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와의 국제교역과 해상교역이 성장했고 인도와의 교역도 활발했다. 그래서 광저우가 발전했고 당시 당나라 전체 인구가 6천만명인데 절반이 남중국에 거주했다. 문화는 8세기 초 세계최고의 제국이라고 말하는 것이 전혀 모자람이 없을 정도로 활발했다. 


170 714년에서 756년에 이르는 현종의 긴 치세는 당나라의 국력과 문화가 최고 정점을 찍었을 뿐 아니라 기나긴 고통의 내리막길이 극적으로 시작된 시기였다.


175 특히 남아시아, 동남아시아와의 국제 교역과 해상 교역의 성장세가 두드러졌다.


175 중국과 인도 간 교역은 중국 동남 해안에서 동남아시아 여러 섬을 돌아 버마를 거쳐 인도로 가는 해상 교역이 발전함에 따라 계속해서 번영을 누렸다. 


176 인도, 동남아시아와 해상 교역이 번성하자 8세기와 9세기에 중국 중부와 남부가 점차 번영을 누렸다. 742년 정부의 인구 통계에 따르면, 당시 전체 인구(6,000만 명 정도로 추정)의 절반이 남중국에 거주했다. 대운하는 중국 대륙의 상업 경제를 통합하는 데 기여했다.


6세기 유스니티니아누스 황제와 800년대 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 대제는 로마제국의 영토과 경계회복에 굉장히 노력했지만 실패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8세기 초 당나라 왕조는 세계 최고의 제국을 구가 했다. 그리고 당이라고 하는 시대가 하나의 동아시아 세계의 모형이 된다. 사대 번속 국가를 거느리는 작봉체제를 만들었다. 한국과 일본, 베트남에도 영향을 주어서 수도를 건설하고 유가 정치철학이 전파되고, 불교의 종파들이 널리 알려지고, 예술, 건축, 한자 이런 것들이 주변에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당시 이백과 두보, 시가 있었고 외국에 대해서도 굉장히 개방성을 보여주었다.


178 700년대 장안은 인구가 200만 가까이 되는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도시였다. 


178 8세기 초의 당 왕조는 세계 최고의 제국이었다. 6세기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와 800년대의 샤를마뉴 대제가 로마제국의 영토와 경계를 회복하려 했으나 실패한 유럽과 대조적으로, 당나라는 영토, 중앙의 통제력, 번영, 문화적 화려함 등의 측면에서 대제국 한나라를 가볍게 뛰어넘었다. 한국, 일본, 베트남은 나라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수도의 건설, 유가의 정치 철학, 불교의 종파, 불교 예술과 건축, 의학적 전통, 한자 등 여러 방면에서 당 제국으로부터 직접적인 자극을 받았다.


179 중국 역대 시인들 가운데 비평가 대다수가 가장 위대한 시인으로 인정하는 두 사람은 이백李白과 두보 杜甫다. 두 사람은 중국 시의 음과 양 또는 중국적 정신세계의 도가적 측면과 유가적 측면을 대표한다.


184 여러 이유 때문에, 당 왕조는 중국 역사에서 가장 전무후무할 정도로 외국에 대한 개방성이 두드러졌다. 당나라 황실은 장시간에 걸쳐 서북쪽 유목 민족과 피를 섞었으며 국제결혼을 해왔다.


그랬으니까 907냔 당 왕조 멸망 후에 새로운 왕조가 통일하는 데에는 50년 밖에 걸리지 않았던 것 송나라가 세워진 해가 960년인데 50년이 되지 않아서 다시 중국이 통일되었다. 그만큼 당나라가 만들어놓은 결집의 힘이 강했다는 것. 통합체를 만든다고 하는게 차별과 배제를 통해서 구성원들을 결속하는 데에서 이루어지기 보다는 오히려 개방하고 열어서 많은 이질적인 것들을 하나로 모아내는 힘 그게 바로 통일의 힘이 아닌가 생각을 하게 된다. 


186 당 왕조는 중국인에게 엄청난 문화적 자부심의 원천이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국인의 거리'를 뜻하는 광둥어는 '당인가 唐人街'이다. 


186 아마도 당 왕조가 제국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거둔 성공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케 하는 가장 분명한 지표는, 907년 당나라가 멸망한 뒤 새로운 왕조가 중국을 하나로 통합체로 다시 통일하는 데 약 반세기의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는 한나라가 멸망한 뒤와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강조하고 싶은 것은 첫재 수나라가 이룩한 업적을 간과해서는 안된다는 것. 둘째 당나라가 가지고 있었던 여러가지 측면이 있지만 이 책의 본래의 취지에서 본다면 당나라가 얼마나 국제적이고 개방적이었는지 유념해두고 읽었으면 한다.



댓글(0)

Designed by JB FAC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