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기 20분 | 02 역사 2


+ 선생님께서 블로그에 올리신 글과 녹음파일을 들으면서 필사한 것을 함께 정리하여 올린다.

+ 녹음파일은 선생님 블로그에서 링크되어 있다.


[책읽기 20분] 역사 – 3

Posted on 2016년 4월 4일


제2장 돌고래의 꼬리부터 정치의 탑까지

“진실한 이야기”인 역사를 쓰는 방법에 관한 논의, 즉 역사서술의 역사, “역사 자체를 역사화”한 논의

역사서술의 차이가 생겨나는 요인들: 역사서술의 목적, 서술의 바탕에 놓인 시간에 대한 관점, 서술 규칙, 사용한 자료(또는 도구들)


서기전 6세기 바빌로니아의 왕 나보니두스의 ‘에-밥바르 신전 수색’: “신전이 그를 왕족 전통과 연결해주고 그 연결이 권력과 권위를 함축했기 때문”

헤로도토스: “허구적 이야기와 진실한 역사적 서술을 구별하기 위해 증거를 사용”

헤로도토스의 시간관: 순환적 시간, 과거가 되풀이된다. “운명의 수레바퀴가 인과 관계를 지배한다.”

기독교의 시간관: 직선적. “세계가 창조와 종말이라는 고정된 두 지점 사이에서 가차없이 움직이고 있다”

에우세비우스, 아우구스티누스: 교회의 목적에 기여하려는 역사서술

수사학의 규칙들: 살루스티우스, 키케로. “진실을 불편부당하게 말해야 하고, 사건들을 연대기적·지리적으로 배열… 성격과 우연을 포함해 행위의 원인에 주목… 쉽고 물흐르는 듯한 문체로 차분하게 써야”

중세에 등장한 도구들: “작문과 수사학의 고전적 모형, 과거의 사건에 대한 구술자료, 연표, 연대기”

14세기: “과거로부터 철학적 교훈을 배운다는 생각”, “역사는 정치가와 통치자를 위한 선례의 창고”, “도시마다 자기네와 고대를 연결하는 고유한 서술을 원했던 까닭에 역사 저작물이 급증”

16세기: “역사는 아름답게 쓰여야 할 뿐만 아니라 그 ‘위엄’에 걸맞은 사건과 인물만을 다루어야 했다.”

이후 역사의 위기 시대를 거쳐 “역사를 옹호하려는 일련의 저작들” 등장




지난 시간에 저자가 말하는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얘기했다. 그 역사라는 것이 저자에 따르면 '진실한 이야기'이다. 오늘은 제2장 돌고래의 꼬리부터 정치의 탑까지를 하겠다. '돌고래의 꼬리부터 정치의 탑까지' 제목이 심상치 않다. '돌고래의 꼬리'는 헤로도토스 《역사》에 나오는 것이고, '정치의 탑'은 이번 챕터 마지막 부분에 나온다.


61 투키디데스는 역사가 정치와 국가 말고는 아무것도 다루지 않는다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아르날도 모밀리아노(Arnaldo Momiglian, 현대 저자)는 투키디데스가 정치사의 탑에 칩거하면서 우리까지 전부 가두려 했다고 말했다. 


헤로도토스 이전 역사서술부터 쭉 얘기하다가 마지막에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를 대비해서 역사라고 하는 것이 무엇을 쓰는 것인지 얘기하고 있다. 그래서 이 책 60페이지를 보면 사진이 하나 있다.



Two-faced herm of Herodotus and Thucydides, marble, Roman Art, The National Archaeological Museum, Naples, 1900 ca., Alinari Archives-Alinari Archive, Florence (출처: http://www.alinariarchives.it/en/search, Image ID: ACA-F-011069-0000)


60 고대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의 이중 흉상. 헤로도토스는 이야기와 민족에, 투키디데스는 정치와 국가에 관심을 두었다.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의 이중 흉상이 있고, 사진 설명이 붙어있다. 따라서 제2장의 제목이 돌고래의 꼬리부터 정치의 탑으로 되어있는 것은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를 가리킨다. 중간에 이런저런 얘기가 있는데도 결국 역사에 무엇을 담는가 하는 것은 투키디데스와 헤로도토스 안에 다 들어있다는 것을 말하는 셈이기도 하다. 제2장이 조금 난삽하게 되어있다는 느낌도 드는데 재정리해서 말해보도록 하겠다. 제1장에서 역사란 무엇인가를 말할 때 '진실한 이야기'라고 했다. 그렇다면 제2장은 진실한 이야기를 어떻게 써야 하는가, 즉 진실한 이야기를 쓰는 방법에 관한 논의들이다. 다시 말해서 헤로도토스 이후의 역사서술의 역사를 다루는 것이다. 역사 자체를 역사화하는 것을 논의한다. 역사책에 대한 역사를 다룬 것이라 생각하면 되겠다.


역사라고 하면 언제 어디서나 똑같은 방식으로 쓰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 역사서술은 언제나 똑같지 않고 차이가 있다. 최근에 한국사를 둘러싸고 어떻게 써야할 것인가, 국정화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그것도 역사를 어떤 식으로 써야할 것인가의 문제이겠다. 즉 역사서술의 목적 그 다음에 서술의 바탕에 놓인 시간에 대한 관점, 서술 규칙, 어떤 자료들이나 도구들를 사용할 것인가, 이런 것들에 따라서 차이가 생겨난다. 되풀이해서 말해보자면, 역사서술은 '진실한 이야기'를 목표로 하는데 '진실한 이야기'를 한다해도 쓰는 방법에 따라서 역사가 서로 달라진다. 그럼 그 차이는 어디에서 생겨나는가. 이러한 요인들을 살펴보면 역사서술의 목적, 서술의 바탕에 놓인 시간에 대한 관점, 서술 규칙, 마지막으로 사용한 자료에 따라서 서술의 차이가 생겨난다.


가장 오래된 얘기로 서기전 6세기 바빌로니아의 왕 나보니두스의 '에-밥바르 신전 수색'부터 시작한다. 그 수색의 이유가 "신전이 그를 왕족 전통과 연결해주고 그 연결이 권력과 권위를 함축했기 때문이다" 라고 되어있다. 


35 나보니두스가 에-밥바르를 찾는 일에 관심을 기울인 이유는 신전이 그를 왕족 전통과 연결해주고 그 연결이 권력과 권위를 함축했기 때문이다.


다시말해서 자신의 권력과 권위를 아주 오랜 이전의 전통과 연결시키고 싶어서였다. 사실 이게 많은 경우에 역사가 사용되는 방식이다. 역사를 서술하는 목적이 현재 자신의 정치권력을 정당화하는데 있다. 이게 역사를 사용하는 가장 오래된 방식. 그러니까 흔히 돌아다니는 얘기로 '역사는 승리자의 기록'이라는 말이 있다. 그 말은 승리자가 자신의 권력을 정당화하고 찬양하기 위해서 역사를 서술한다는 말이 되겠다. 그에 비하면 헤로도토스는 "허구적 이야기와 진실한 역사적 서술을 구별하기 위해 증거를 사용"하고자 했다. 증거라는 것이 오늘날 통용되는 의미에서 살펴보면 엄밀한 역사적 사실을 가지고 작업한 건 아니다. 그래서 돌고래의 꼬리 얘기도 나온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헤로도토스를 '역사의 아버지'라고 하지만 동시에 '거짓말의 아버지'라 말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헤로도토스는 과거가 되풀이 된다고 생각했다. 다시말해 "운명의 수레바퀴가 인과 관계를 지배한다"고 보아서 순환적 시간관을 가지고 있었다. 황금시대가 있었고, 은, 동, 철의 시대가 그러다가 다시 또 쇠퇴한 것에서 황금시대로 가는 그런 것 말이다. 역사는 어쩐지 몰라도 인간 개인은 운명의 수레바퀴가 인과 관계를 지배하지 않나 라는 생각도 해본다. 직선적으로 계속 발전해나가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


38 헬레네의 역사에 관한 헤로도토스의 새로운 서술을 우리가 믿든 안 믿든, 허구적 이야기와 진실한 역사적 서술을 구별하기 위해 증거를 사용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헤로도토스는 20세기 역사가와 흡사해 보인다.


40 헤로도토스는 당대에 상황과 성격을 예시하기 위해 과거를 이용했다. 시간이 순환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에게 역사란 동일한 주제들과 문제들을 거듭거듭 낳으면서 거듭거듭 순환하는 것이었다.


이에 반해 역사의 의미와 접근하는 방법에 대해서 상당히 다른 견해라고 할 수 있는게 직선적 시간관인데 바로 기독교의 시간관이다. 세계가 시작과 끝이 있는 것. 순환적 시간관은 시작과 끝이 없는데 기독교는 창조와 종말이라는 고정된 두 지점 사이에서 몇개의 시대가 순차적으로 놓여있다. 그러다가 끝. 좋게 말하면 진보사관이고 가치평가를 집어넣지 않으면 직선적 시간관이다.


40 기독교 신앙은 운명의 수레바퀴에 의존하지 않았다. 오히려 세계가 창조와 종말이라는 고정된 두 지점 사이에서 가차없이 움직이고 있다고 보았다.


43 앞에 놓인 것은 세계가 종말을 고하고 역사가 끝나는 일곱 번째 시대뿐이다. 이런 틀은 역사의 의미와 역사에 접근하는 방법에 관한 상당히 다른 견해를 시사했다.


다시 역사서술의 목적에 주목을 하게 되면 초창기 교회사 저자 중에 한 사람인 에우세비우스 같은 경우는 기독교의 합리성과 도덕성, 그리고 쓸모있음을 주장하기 위해 교회 역사를 썼고, 대표적인  예로는 아우구스티누스 《신곡》. 교회의 역사적인 고투라고 하는 역사와 선과 악의 영원한 투쟁이라고 하는 신학을 결합시키기 위해 쓴 게 《신곡》. 


43 에우세비우스(Eusebius)가 『교회사 Ecclesiastical History』(서기 325년경)를 쓴 목적은 기독교와 이교들에게 기독교가 이교보다 더 오래되었고 더 합리적이고 더 도덕적이고 더 유효하다는 점을 납득시키는 것이었다.


43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는 『신국 City of God』(426년경)에서 교회의 역사적 고투를 선과 악의 영원한 투쟁과 결합했다.


그 다음 역사서술의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이 서술 규칙. 대표적인 예로 수사학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정리된 수사학이 로마시대에 와서 널리 융성하게 되었는데 살루스티우스, 키케로같은 사람들은 역사서술에 있어서 수사학의 규칙을 도입했다. 도입했다기보다는 세워놓은 규칙을 역사가들이 가져다 쓴 셈. 이들은 어떤 규칙을 세웠는가. "진실을 불편부당하게 말해야 하고, 사건들을 연대기적·지리적으로 배열하고, 성격과 우연을 포함해 행위의 원인에 주목해야 하고, 쉽고 물흐르는 듯한 문체로 차분하게 써야한다." 이러면 기본적인 것은 다 나온셈.


44 로마시대 저술가 살루스티우스(Sallustius)와 키케로(Cicero)는 어떤 종류의 글을 쓰든 지켜야할 규칙과 규약이 있으며 역사를 쓸 때는 특정한 규칙과 규약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역사의 '수사학자'(또는 서술자)는 설령 다른 이들이 불쾌해할지라도 진실을 불편부당하게 말해야 하고, 사건들을 연대기적·지리적으로 배열해야 하며, 성격과 우연을 포함해 행위의 원인에 주목하면서 어떤 '위대한 행위'가 행해졌는지 말해야 하고, "쉽고 물 흐르는 듯한 문체로 차분하게 써야" 했다.


이렇게 해서 중세에는 작문과 수사학의 고전적 모형, 과거의 사건에 대한 구술자료, 연표, 연대기와 같은 도구들까지 이용해서 중세의 서술들이 이루어졌다. 


48 중세에 수사학은 줄곧 역사서술의 한 요소였지만 다른 요소들도 등장하기 시작했다. 중세에 역사가들이 받아들인 도구로는 작문과 수사학의 고전적 모형, 과거의 사건에 대한 구술자료, 연표, 연대기 등이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엄밀하게 정확한 서술이 이루어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래도 중세 연대기 작가들을 보면 규칙을 지켜서 역사를 쓰려는 시도들이 돋보이기도 한다. 그러다가 12,13세기 들어서서 역사서술의 고전적 모형이라는 것에서 탈피하려는 움직임이 보이고, 특히 14세기는 다시금 역사에서 목적이 중요하다는 것이 전면적으로 등장하게 된다. 그래서 고대 지혜와 영광을 드높이고, 과거로부터 철학적 교훈을 배운다는 생각에 역사가 서술되기 시작했고 그러다보니 "역사는 정치가와 통치자를 위한 선례의 창고”라고 보게되었다. 그래서 대표적인 사례라고 보기는 어려운데 그때 나온 고전 중에 마키아벨리의 《로마사 논고》가 있다. 로마사에 대해 마키아벨리의 생각을 적은 것. 《군주론》과 《로마사 논고》 이 두 가지가 쌍벽을 이루는 저작이데 정치가와 통치자를 위해서 역사를 리비우스의 로마사를 가져다가 필요한 만큼 떼내서 앞뒤 없이 사례를 쓴 것. 이게 바로 "정치가와 통치자를 위한 선례의 창고"로서 역사를 이용한 예라고 할 수 있다. 

50 12세기와 13세기는 역사서술의 고전적 모형이라는 틀에서 탈피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급성장하는 일군의 세속적·종교적 문인들이 역사를 쓰기 시작했다.


51 이탈리아, 특히 피렌체는 다시 한번 고대 그리스, 로마와 사랑에 빠지기 시작했다. 고전 전통은 사라진 적이 결코 없었으며, 오히려 14세기 후반부터 이탈리아인들은 자기네가 이전 세기들은 결코 해내지 못했던 방식으로 고대 지혜의 영광을 재발견하고 갱신했다고 굳게 믿었다.


51 역사는 정치가와 통치자를 위한 선례의 창고다, 키케로식 수사학은 역사가의 문체에 필수적이다 등등이 그런 요소였다.


게다가 이 때는르네상스 도시국가시대니까 도시마다 자기네와 고대를 연결하려는 그런 시도가 있었고, 그것이 연결된 고유한 서술을 원했던 까닭에 역사 저작물이 급증했다. 그런데 목적 자체가 곧 자기 도시의 영광을 드려내는 것에 있었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의 역사책라고 보기는 어렵다. 목적이 앞서면 역사서술이 왜곡되기 싶다. 


51 도시마다 자기네와 고대를 연결하는 고유한 서술을 원했던 까닭에 역사 작품이 급증했다.


그러다가 이제 16세기 들어서면 "역사는 아름답게 쓰여야 할 뿐만 아니라 그 ‘위엄’에 걸맞은 사건과 인물만을 다루어야 했다"라고 하는 그런 목적이 등장하게 되서 개신교와 가톨릭 역사가들이 자신들에게 유리한대로 역사를 쓰게 된다. 그러다보니 역사가 엉망이 되었다. 역사라기보다는 역사를 빙자한 여러가지 이런 저것들이 나오게 되면 16세기 말쯤되면 다시 과거에 대한 '진실한 이야기'가 되려는 목표롤 되찾게 된다. 다시 핵심은 '진실한 이야기'로 되돌아 왔다. 그럼 다시 묻게 된다. 처음에 제기했던 질문이 '역사는 진실한 이야기'이다. 그러면 무엇을 진실이라고 할 것인가. 먼저 과거 사람들은 진실에 관해서 지금의 우리와는 다르게 생각하였고, 또 어떤 목적으로 역사를 쓰는가의 문제도 사실 우리와는 많이 달랐고, 그 당대의 특수한 환경과 필요, 즉 왕의 영광을 찬양한다든가, 도시의 위엄을 찬양한다든가의 목적이 있었다. 그리고 또 여기서 제기되는 또 하나의 문제가 무엇을 기억할 것인가, 누가 한말을 기억할 것인가이다. 처음에 얘기한 것처럼 투키디데스는 정치와 국가만을 다룬다. 그래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읽어보면 정치적인 것들, 연설, 이런 것들을 다루고 있다. 그러면 다시 중요한 사건이라고 하는 것을 무엇이라고 할 것인가하는 이런 문제들이 계속 제기된다.


52 16세기를 지나면서 수사학이 지배적인 뮤즈의 위치에 올랐다. 문체가 다시 한번 내용을 정복했다. 역사는 아름답게 쓰여야 할 뿐만 아니라 그 ‘위엄’에 걸맞은 사건과 인물만을 다루어야 했다.


58 16세기 말에 이르러 역사는 과거에 관한 '진실한 이야기'가 되는 것을 다시 한번 목표로 삼게 되었다.


59 이 시기에 역사는 사람들에게 정체성을 제공한다는 목적에 이바지 했다. 이런 의미에서 역사는 기억과 비슷하다. 그러나 누구의 기억인가? 그리고 무엇을 기억할 것인가?


다시 정리를 해보면 가장 큰 전제로 역사는 진실한 이야기를 다룬다. 

그러면 무엇을 진실이라고 할 것인가. 진실한 것인 무엇인가에 대해 취사선택을 해야한다. 

그러면 방금 전에 얘기한 것처럼 과거의 사람들이 진실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지금의 우리와는 다르고, 그 당시에 정말 이걸 남겨야겠다, 왕의 업적이 진실이다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그것 만을 다루었겠다. 

누구의 기억이고, 무엇을 기억할 것인가를 생각해봐야 하는데 그럴 때 역사서술의 역사를 살펴보면 서술이 언제나 똑같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 차이는 역사서술의 목적, 서술의 바탕에 놓인 시간에 대한 관점, 서술 규칙, 사용한 자료에 따라 달라졌다는 것이다. 


우선 목적만을 염두에 두어보면 바빌로니아의 왕 나보니두스처럼 자신의 권력과 권위를 드러내 보이고, 널리 알리려는 목적에서 역사를 서술한 경우도 있고,

에우세비우스나 아우구스티누스처럼 기독교의 합리성과 유효성을 주장하거나 또는 역사와 신학을 결합해서 선과 악의 영원한 투쟁이라는 신학적인 관점에서 교회가 얼마나 선을 위해서 고생스러운 투쟁을 해왔는가를 논의하려는 목적도 있고,

14세기 르네상스 시대처럼 역사는 정치가와 통치자를 위한 선례의 창고이고, 도시국가가 고대와 연결되어 있으니 이만큼 우리는 찬란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 보여주려는 목적도 있을 것이고, 그런 목적들이 역사를 서술하는 것에 개입된다는 것.


그 다음에 서술의 바탕에 놓인 시간적 관점을 보면 헤로도토스처럼 순환적 시간관, 즉 운명의 수레퀴가 인과관계를 지배한다고하는 순환적 시간관이 있는가하면 기독교적인 시간관이 있어서 창조와 종말이라는 고정된 두 지점 사이에서 가차없이 움직이고 있다고 하는 관점도 있다.


셋째로는 서술의 규칙에 따라 역사서술의 차이가 있어서 살루스티우스, 키케로가 세워놓은 수사학의 규칙을 따라가는 경우도 있겠다.


그리고 사용하는 도구들, 사료들이 어떤 것들이 있는가에 따라서도 역사서술의 차이가 있겠다. 


이것을 다 묶어서 저자는 투키디데스와 헤로도토스 두 사람을 대표자로 두고 있다. 그러면 제2장은 역사서술의 역사를 다루고 있고, 제3장은 2장 마지막에 나온 것처럼 정치와 국가만을 다룬다고 하는 정치사라고 하는 것이 역사서술의 모형처럼 여겨져왔는데 이런 정치사에서 벗어나게 해서 다양한 부분의 역사를 형성하게된 과정이 어떤 것인가에 대한 얘기가 제3장이다. 

"그것은 실제로 어떠했는가”―진실, 문서고, 옛것에 대한 애정. 이 부분은 다음주에 계속하겠다.




[책읽기 20분] 역사 – 4

Posted on 2016년 4월 11일


제3장 “그것은 실제로 어떠했는가”―진실, 문서고, 옛것에 대한 애정


‘진실한 이야기’에 진실을 담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레오폴트 폰 랑케(Leopold von Ranke), “그것은 실제로 어떠했는가”(wie es eigentlich gewesen, how things actually were)

중거에 호소하고, 문서고를 부지런히 참조하면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역사를 산출할 수 있다고 주장

역사적 진실을 찾으려는 시도들

– 골동품 연구자들이 수행한 문헌분석. 골동품 연구자들은 역사가들과는 다르지만 “잔존하는 문헌과 자료를 매개로 과거를 다루는 도구를 개발”하였다.

– 로렌초 발라는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장’이 위조문서임을 입증.

– 문헌학은 문서 자체의 특징에 근거하여 문서를 비판하며 역사적 기록의 진실을 판별할 수 있는 기준을 제시한다. 또한 언어(문화)가 역사적 시대에 따라 변화함을 보임으로써 언어와 문화에 대한 연구를 역사에 도입하였다.


계몽주의 시대의 역사는 철학과 연결

– 철학으로 기울어진 역사가들은 축적된 사실과 정치적 사건만 다루는 것으로는 불충분하다고 생각하였다.

– 신이 배제된 대신 ‘신의 섭리’와 유사한 초역사적 이성이 도입되었다.

– 데이비드 흄(David Hume)은 역사 연구를 통해 ‘인간 본성’을 구성하는 본질적 요사들을 밝혀낼 수 있다는 믿음까지 가지고 있었다.


계몽주의 시대 이후의 역사가들은 문서고를 상세하게 연구하였으며, 지리적 위치, 사회체제, 경제적 세력, 문화적 관념, 기술발전, 개인의 의지 등을 연구한다.

랑케는 이러한 상황에서 계몽주의 역사연구에 반발하면서 등장하였다.




지금 우리가 역사라고 하는 것을 계속해서 거론하면서 '역사는 진실한 이야기다'라는 규정을 가지고 얘기를 하고 있다. '진실한 이야기'의 핵심은 진실이다. 이야기를 아무리 그럴듯하게 잘 꾸민다 해도 그것이 진실에 바탕을 두고 있지 않으면 그것은 역사라고 말할 수 없고, 역사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3장을 보면 랑케가 나오는데 어떻게 해서 자신의 역사서술을 하게 되었는가를 이야기하면서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 하고 있다. 랑케는 역사소설을 즐기면서 그것이 역사로 나아가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그 낭만적인 소설을 읽으면 재미있기는 한데 "소설에서 완전히 등을 돌렸고, 나의 저작에서 날조와 상상을 일체 배제하고 사실을 엄격히 고수하기로 결심했다"고 말한다. 


65 나는 대조를 통해 사료들 자체가 낭만적인 소설보다 더 아름답고 어쨌든 더 흥미롭다는 확실에 이르렀다. 나는 소설에서 완전히 등을 돌렸고, 나의 저작에서 날조와 상상을 일체 배제하고 사실을 엄격히 고수하기로 결심했다.


65 랑케는 근대 역사서술의 아버지로 일컬어지곤 한다. 이처럼 랑케가 아버지로서 유산을 물려주었다고 생각하는 주된 이유는 그가 '증거'에 호소했거니와, 역사가가 문서고에 부지런히 되돌아간다면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역사를 산출할 수 있고 또 산출해야 한다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역사소설을 읽고 역사에 흥미를 갖기는 했는데 이제 날조와 상상을 배제해야겠다고까지 갔다. 랑케라고 하는 사람은 근대 실증사학의 아버지라고 말한다. 우리가 계속해서 역사라고 하는 것을 말할 때 그 진실을 찾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주 간단한 대답으로는 진실만을 쓰고자 한다면 정확한 사료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 나올 수 있겠다. 그래서 3장의 제목이 "그것은 실제로 어떠했는가"― 진실, 문서고, 옛 것에 대한 애정이다. 랑케의 말인 "그것은 실제로 어떠했는가"(wie es eigentlich gewesen, how things actually were), 이것이 역사가가 진실을 찾기 위해서 물어야할 첫째 질문이라고 하겠다. 그러려면 당연히 증거에 호소해야 하고, 랑케의 생각대로 문서고를 부지런히 참조하고, 그러면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역사를 산출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여기서 도출되는 하위 문제는 바로 진실 문제. 역사적 문헌을 이용하는 방법 그리고 과거와 현재를 어떻게 다루는가. 지금 쓰는 방식대로 쓰진 않았을테니 그때는 어떤 식으로 이것이 쓰여졌는지, 특히 중요한 것은 역사적 문헌을 이용하는 방법이라 하겠다. 


그러면 랑케와 같은 방법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우선 이전 역사책들은 이야기에 중점을 두었는데 이것을 수사학적 역사라 한다면 섬세하게 다듬은 서사를 제공하는 동시에 과거에 정치적 사건에서 본받을 만한 교훈을 이끌어내려는 역사가 바로 수사학적 역사인데 이것을 비판하면서 이른바 근대적인 역사학이 시작되었다고 하겠다. 랑케는 역사소설을 읽고 엄밀한 사료에 근거해서 역사를 쓰겠다고 생각했는데 역사학의·역사서술의 역사를 보면 수사학의 역사를 비판해서 시작했다.


67 그들이 매도한 '역사'는 대부분 수사학적 역사였다. 다시 말해 고전적인 작문 원칙을 준수하고, 섬세하게 다듬은 서사를 제공하는 동시에 과거의 정치적 사건에서 본받을 만한 '교훈'을 이끌어내려는 역사였다.


우리가 역사라고 하면 교훈을 이끌어내야 한다는 것에 굉장히 집착을 한다. 지금 현대 한국에서도 역사 그러면 많은 사람들이 과거의 사실로부터 오늘의 교훈을 이끌고 미래에 어떻게 나아갈지를 얻어야 하는게 아닌가라는 생각을 많이 한다. 사실 교훈을 이끌어내서도 본받지도 않을 거면서 그런다.


수사학적 역사의 비판에서 시작되었는데 그렇다면 진실을 찾으려는 시도들이 있었다. 첫 번째 시도는 종교적 분쟁에서 시작한다. 개신교와 가톨릭 교도가 모두 17세기 들어서면서 서로가 서로를 험담하고 비방하고 싸우기 바빴으니 가장 좋은게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역사를 쓰는 것이었다. 그래서 자기네 권위를 뒷받침하기 위해 팩트에 의존하는 역사를 써보려고 했다. 종교의 초월적 진리는 역사를 넘어서는 것이고 역사와 무관한 것일 수 있는데 그것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역사를 이용했다는 것이 참 그렇다. 과학적인 것, 이른바 합리적인 것을 가지고 종교를 설명하려는 시도가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만 그리 훌륭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68 역사의 '진실'을 옹호하도록 처음 추동한 것은 (초기 기독교 시대와 마찬가지로) 종교적 분쟁이었다.


68 개신교도와 가톨릭교도 모두 상대편에 맞서 자기네 권위를 뒷받침하기 위해 역사에 의존했다.

 

두 번째로 골동품 연구자들이 수행한 여러가지 역할들이 있다. 이게 중요하다. 골동품 연구자들 중에는 문헌수집을 하는 사람이 있고, 또 화폐연구자도, 지역지리학자도 있었을테고, 말 그대로 온갖 잡다한 골동품을 모으는 사람들인데 이 사람들은 이야기들을 만들기보다는 모은 것들을 조합해서 하나의 상으로 종합하려는게 목적이었다. 그것을 역사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겠다. 문헌분석으로 골동품 연구자들 중에 널리 알려진 사람으로는 로렌초 발라가 있다. 역사가는 아니지만 잔존하는 문헌과 자료들을 매개로 과거를 다루는 도구를 개발한 사람. 


71 로렌초 발라(Lorenzo Valla, 1406~1457)은 그리스도 이후, 1,400년 동안 가장 유명해쓸 문서에 대해 역사상 가장 유명할 문서 분석을 내놓았다. 그 문서는 4세기에 로마 황제가 기독교 교회에 선물과 교리를 증여했음을 기록하고 있다는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장’이었다. 이 '기증장'은 중세 내내 교회의 무기고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였다. 발라는 이것이 위조문서임을 입증했다.


4세기 로마 황제가 기독교 교회의 선물와 권위를 기록했다는 ‘콘스탄티누스황제의 기증장'이 있다. 이게 교황의 권위를 뒷밤침하고 정치적인 세속적 권력을 정당화하는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해온 문서인데 로렌초 발라는 교황직을 도전하기 위해서 또 비난하기 위해서 이게 위조문서임을 입증했다. 이게 바로 '콘스탄티누스황제의 기증장'을 둘러싼 아주 오랫동안 논란이 되었던 것. 어떻게 했느냐. 바로 언어를 연구해서 확증을 해냈다. 즉 이 기증장이 쓰여진게 라틴어인데 4세기경 로마황제가 증여했다고 하는 그 시기의 고전적 라틴어와는 다르다는 것을 입증했다. 문헌학이라고 하는 것이 사실은 언어에 대한 연구가 중요하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 


그래서 문헌학을 이용해서 어떤 성과가 있는가. 첫째로 문헌학은 문서 자체의 특징에 근거하여 문서를 비판하며 역사적 기록의 진실을 판별할 수 있는 기준을 제시된다. 방금 전에 말한 것처럼 문헌을 식별하고 연구한다는 것 자체가 언어, 그리고 그 언어에 의해서 표현되는 문화에 대한 연구가 되는데 또한 언어와 문화는 역사적 시대에 따라 변화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언어와 문화에 대한 연구를 역사에 도입하였다고 말할 수 있겠다


72 문헌학을 역사적 연구에 적용한 결과, 과거를 다루는 방법에 두 가지 새로운 생각이 추가되었다. 첫째 생각은 문서 자체의 특징에 근거해 문서를 비판할 수 있고, 따라서 무엇이 역사적 기록의 '진실'을 구성하느냐는 문제에 대한 기준을 몇 가지 세울 수 있다는 것이었다. 둘째 생각은 언어가(따라서 문화가) 역사적 시대에 따라 바뀌었다는 것, 시간이 흐르는 가운데 통치 엘리트층의 운명만이 아니라 사람들이 말하고 생활하는 방식 또한 변했다는 것이었다.


로벤초 발라의 기증장 입증은 역사학에서 중요한 계기라고 할 수 있다. 문헌을 이용해야 한다. 그 문헌에 따라서 역사적 기록의 진실을 판별해낼 수 있다. 문헌연구는 언어를 연구한다는 것이고, 그 언어에 의해서 드러나는 문화에 대한 연구를 한다는 것이다. 


그 이후에 1590년부터 1650년 중반까지 살았던 프랑수아 보두앵은 역사가는 그런 문서를 놓고 서로 충돌하는게 있으면 균형을 잡고 사건들의 연쇄를 확증하려 노력해야하고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의심하는 태도를 가지고 문헌을 대해야 한다고 말했다. 


77 프랑수아 보두앵(1590~1650)은 과거부터 당대까지 로마법이(따라서 통치체제가) 어떻게 변했는지 이해하려던 학자였다.


78 역사가는 법률가처럼 상충하는 서술들 사이에서 균형을 잡고, 사건들의 정확한 연쇄를 확증하려 노력하고,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의심하는 태도로 '증인'(문헌)을 대해야 한다고 보두앵은 말했다.


이렇게 되면 역사는 뭔가를 서술하려는 것이 아니라 진실한 이야기를 쓰는, 아무리 잘 꾸며진 것이라 해도 진실한 것이 아니면 소용이 없으니 정확한 것을 탐구하는 학문이 된다. 가끔 역사책을 읽다보면 역사가 과연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인문학의 영역에 속하는 것 일까 의심해보고는 한다. 인문학이라고 하는게 문사철이라하는데 문학과 철학은 거짓말을 가지고 하는데, 역사는 사실에 근거해서 하니까 그것은 오히려 사회과학에 더 가까울 수도 있다. 그래서 역사를 꼭 인문대학에 넣어놔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의구심이 있다. 반대로 어떤 사람들은 역사야말로 인문학의 정점이다라고 하기도 한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역사가 무슨 고귀한 인간 정신의 무엇인가로 간주되어 왔는가를 곰곰이 생각해보면 계몽주의 시대의 역사에서 그런 것이 남지 않았나 생각된다. 바로 철학과 연결되었던 것. 계몽주의 그러면 과학적 이성을 가지고 뭔가를 하는 시대. 그런데 이상하게도 계몽주의 시대의 역사는 판타스틱한 데가 있다. 볼테르를 보면 역사철학의 창시자라고도 한다. 역사와 철학이 연결되면서 뭔가 왜곡이 일어나기도 하고, 철학으로 기울어져 버리기도 하는데 이들이 역사가 행세를 했다. 축적된 사실과 정치적 사건만 다루면 충분하지 않고, 역사라는게 철학으로 기울어져버린 나머지

그래서 반종교주의자들이 신을 배제한 이성의 초역사적인 섭리 이런 것들을 도입하게 된다. 


82 철학으로 기울어진 역사가들은 축적된 사실과 정치적 사건만 다루는 것으로는 불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세계 ─ 현재 세계와 과거 세계 둘 다 ─는 무엇보다 복잡한 곳이었다. 계몽주의 역사가들은 통치 엘리트층의 결정만이 아니라 지리와 기후, 경제, 사회의 구성, 사람들의 특징에서 관심을 기울였다 과학자들이 자연세계에서 현상들 간의 믿기 어려운 연관성을 지적할 수 있다면, 역사가들도 그들과 유사하게 복잡한 방식으로 과거를 이해하려 노력해야 했다.


83 이제 역사에서 신의 역할은 재규정되어야 했다. 일부 저술가들은 신을 그냥 배제해버렸다. 다른 저술가들은 '신의 섭리(Divine Providence)', 즉 인류 역사의 행로를 미묘하게 조종하고 그 역사의 목적인(目的因)으로 작용하는, 형언할 수 없는 완벽한 계획이 신의 역할이라 상상했다. 


따지고 보면 그게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의 섭리를 도입해서 인류의 역사 행로를 미세하게 조종하고 역사의 목적으로 작용하는 형언할 수 없는 완벽한 계획이 신의 역할이라 생각하거나 섭리를 포기한다 해도 이성이라 하는 초역사적이고 추상적인 형상이 발휘하는 압도적인 믿음이 있었다. 심지어 데이비드 흄(David Hume) 같이 인식론에 있어서는 회의주의에 귀결된 사람이 역사 연구에 있어서는 역사를 통해 ‘인간 본성’을 구성하는 본질적 요소들을 밝혀낼 수 있다는 믿음까지 가지고 있었다. 어떤 때 보면 이 믿음이 흄의 믿음인가 의심이 들 정도로 역사에 대해 가진 신뢰가 대단했다.


87 이 시기에 역사는 자연과학의 논리, 즉 세계는 본질적으로 정적이고 법칙의 지배를 받으며 신중한 탐구를 통해 이해할 수 있다고 믿는 논리의 영향을 받았다. 흄은 자연과학 연구와 유사하게 역사 연구를 통해 '인간본성''을 구성하는 본질적 요소들을 밝혀낼 수 있다고 믿었다.


로벤초 발라에 의해서 문헌학 연구가 있다가도 18세기 계몽주의를 거치면서 19세기 낭만주의에 오면서 역사가 하나의 종교를 대신하는 그 무엇으로 자리로 올라서게 된다. 그런 와중에 등장한 사람이 랑케다. 랑케가 중요하게 여긴 것이 그것 자체로 중요하기도 하지만 어떠한 맥락에서 사실을 중요하게 여겼나. 계몽주의 철학자들이 이른바 자칭 철학자들이 역사를 종교적인 것에 올려놓은 것에 반발해서 랑케가 등장하게 된 것. 이야기도 아니고 진실도 아닌 초월적인 형이상학적인 위력으로서 역사를 말했기 때문에 거기서 등장한 것이다. 그래서 문서고를 상세하게 연구하였으며, 지리적 위치, 사회체제, 경제적 세력, 문화적 관념, 기술발전, 개인의 의지 등을 연구하는 것이 역사라고 한 것이다. 


89 역사가들, 특히 독일 계몽주의 시대 후기의 역사가들은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서로 연관된 두 가지 일을 해야 한다고 갈수록 확신하게 되었다. 첫째, 문서고의 사료를 대단히 상세하게 연구해야 했다. 둘째, 지리적 위치, 사회체제, 경제적 세력, 문화적 관념, 기술발전, 개인의 의지 같은 요인들 간의 복잡한 관계를 포함하는 인과관계에 대한 이론을 발전시켜야 했다.


91 랑케는 무언가 다른 것을 말하고 있었다. 랑케는 발견을 '왜곡'하는 상상적 영감을 배제한 채 정밀한 조사와 입증 같은 '과학적' 개념을 고수하며 문헌을 신중하게 분석함으로써 "그것이 실제 어떠했는지만 말"할 수 있기를 바랐다.


역사는 중요한 학문의 기초이다 라고 말할 때 의미하는 바로 지리적 위치, 사회체제, 경제적 세력, 문화적 관념, 기술발전, 개인의 의지 등을 연구하는 의미에서 그렇다.


랑케는 어쨌든 계몽주의 역사연구에 반발하면서 등장했는데 그러면서도 재미있게도 저자의 말처럼 그는 투키디데스에 충성을 바쳤다. 그래서 역사를 다시 한번 정치 돌려보냈다.


93 랑케는 사실 먼 옛날의 역사가 투키디데스를 인용하고 있었다. 랑케가 충성을 바친 대상은 투키디데스였다. 랑케가 역사에 다른 무엇을 주었든 간에, 그는 역사를 다시 한번 정치적 사건의 탑으로 돌려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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