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기 20분 | 일본 근현대사 | 03 청일·러일전쟁 5


청일.러일전쟁 - 10점
하라다 게이이치 지음, 최석완 옮김/어문학사


Reading_20min_20140721_5

– 영일동맹을 맺으면서 일본은 러시아를 가상적국으로 설정하게 된다. “러시아와 맞서는 일본, 위에서 미는 영국, 배후에서 지켜보는 미국”

– 구미 각국은 아시아의 군사적 긴장에 의한 무역과 금융을 통해 1873년 이래의 대불황을 해소한다.

– 일본은 의화단 사건(1899-1901) 당시의 공동파병을 거쳐 구미열강(영제국, 미합중국, 러시아,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오스트리아)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제국으로 성장


– “러일전쟁은 양국에게 싸우지 않아도 좋을 전쟁이었다.”

– 러일전쟁에서 얻은 戰訓: 군비확장을 도모해도 일본의 국력은 소모전을 견디지 못하므로 정신력으로 보완해야 한다; 장비의 충실보다 병사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突貫戰法에 기댄다; 현대전의 핵심인 포병운용의 문제점이 드러났으나 러시아를 이긴 것이 실패를 지웠다 — 이로써 “皇国獨特의 軍事學”이 성립

–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것은 제1차세계대전(유럽대전)의 전법에도 영향을 끼쳐, 독일식 火力主義와 프랑스식 白兵主義가 등장


– 러일전쟁 이후 일본은 ‘戰後가 戰前이 되는 시대’로 들어서게 된다. 이것의 遠因은 조선지배의 추구이다.

– 異法域으로서의 식민지 개념




우선 지난 시간에 정리했던 것은 청일전쟁에 이어지는 성과가 무엇인지를 정리했다. 일단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를 함에 따라서 군비를 집중적으로 확장하게 된다. 그리고 중요하게 설정되는 관점이 하나 있는데 일본과 영국 사이에 동맹이 설정됨에 따라 러시아를 가상적국으로 설정하게 된다. 이것은 영일동맹에 따라서 이뤄진 것이 굉장히 크다. 당시에 세계 제국주의 열강들 사이에서 가장 중요한 세력은 영국과 러시아였다. 이 대립구도 속에서 영국 편에 일본이 섰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본이라는 나라가 하나의 독립적인 행위자로 아직 나설 수 있는 위력을 갖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위력을 갖는다는 것이 상당히 어렵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경제력에 있어서는 어떻게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정치적인 세력이나 군사적인 우위를 갖는다는 것은 어렵다. 어쨌든 일본은 청나라를 이김으로써 아시아의 맹주가 되었다고 생각했고,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당분간 영국과 긴밀한 관계를 맺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러일전쟁의 씨앗이 여기서 심어지는 셈. 그리고 일본에서 이런 전쟁을 벌이는 것을 구미 여러나라에서 그렇게 싫어하지 않았다는 것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이때부터 세계정세라고 하는 것이 아시아의 긴장상태를 구미가 즐겼다는 것. 불황을 극복할 계기를 마련하고 1873년 이래의 대불황을 해소하게 된다. 여기서 일본은 중국에서 일어난 의화단 사건 때 공동파병을 하면서 구미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영국, 미국, 러시아,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오스트리아가 구미열강인데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는 오늘날 빠진다 하더라도 나머지는 여전히 구미열강이다. 그리고 아시아에서는 어떻게 세력구도가 형성되었는가. 일본이 러시아에 직접적으로 맞서게 되고, 뒤에서는 영국이 봐주고 있다는 것. 배후에서는 또 미국이 있었다. 그래서 책에도 나와있듯이 "러시아와 맞서는 일본, 위에서 미는 영국, 배후에서 지켜보는 미국" 이렇게 4개 나라의 구도가 설정되게 된다.
258 1902년 1월 30일에 영일동맹이 조인되었다. 내용은 1) 청국 및 한국의 독립과 영토 보전, 2) 제3국이 참전한 경우에만 동맹국과 협동하여 전투할 의무를 진다는 사실상의 군사동맹이었으며, 동시에 일본이 한국에 특수 권익을 갖는다는 점을 영국에게 승인시키는 것이었다.

258 그림 7-4 러시아에 맞서는 일본(비고가 그린 그림엽서), 뒤에서 미는 것은 영국, 배후에서 지켜보는 것은 미국. 전쟁과 강화의 관계를 완벽하게 표현

그렇게 해서 러일전쟁이 일어났다. 확실하게 일본에게도 여러가지 시사점을 던져주었고, 동아시아 정세가 러일전쟁을 계기로 해서 변화가 된다. 이 책의 저자는 "러일전쟁은 양국에게는 싸우지 않아도 좋을 전쟁이었다." 이런 얘기를 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첫째는 일본은 사실상 국력이 상당히 빈약한 상태에서 전쟁에 임하게 된다. 그러다가 1905년 동해 해전에서 이기게 된다. 일본이 이길만한 군비나 전략적인 우위가 있었던 것은 아닌데 승리를 하게 된다. 이게 미묘한 것. 그리고 러시아도 여기서 패배한 것이 예상외의 사건이 된다. 그래서 전쟁을 계속하겠다는 의욕을 잃어버린다. 그런데 일본은 전쟁을 끝까지 수행할만한 능력이 결여된 상태였다. 마침 그때 일본이 자기 스스로 알고 있었던 육상전투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둘 사이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서 강화를 맺게 된다.
265 러일전쟁은 양국에게는 싸우지 않아도 좋을 전쟁이었다.

277 전쟁과 강화를 동시에 관찰하고 경계하면서 지구전을 수행하되, 상화에 따라 어느 한 쪽으로 흔들이를 밀어붙인다는 위험한 각의 결정이었다. 전쟁 전의 단기적 전략 구상은 일찍이 없었던 전쟁 전개에 따라 산산이 부서지고, 강화로도 넘어갈 수 없는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었던 것이, 1905년 4월의 일본 정부의 정확한 위치였다. 사태를 움직인 것은 5월의 동해 해전(일본해 해전)이었다. 일본 해군이 일방적으로 승리한다는 세 가지가 동시에 맞아떨어져야만 가능한 예상외의 사건이 현실이 됨으로써, 우려되던 전쟁의 지구화는 거의 사라졌다. 강화가 서둘러진다.

러일전쟁을 끝내면서 몇 가지 전쟁에서 교훈을 얻게 되는데 이 교훈이 굉장히 변질된다. 굉장히 과학적이고도 합리적인 인식을 하게 되는데 이것이 어떻게 해서 아시아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의 전형적인 특징으로 알려진 옥쇄주의라든가 정신주의도 변질되는가, 과연 일본군에게는 어떤 합리적이고도 과학적인 의사결정 구조가 있었는가에 대한 의구심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강력한 정신주의가 일본에서 나타나는데 그 정신주의의 등장은 나중에 살펴보기로 하고 그 이전에는 일본이 러일전쟁 이후에 확실하게 전쟁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인식이 있었다는 점을 꼭 유념해둘 필요가 있다.

일단 해군에서는 동해 해전에서는 이겼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없었을지는 몰라도 그렇게 어리숙한 놈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첫째가 군비확장을 한다 해도 일본의 국력은 소모전을 견디지 못하므로 이것은 심각한 문제가 된다. 1차세계대전이 아직 시작되지는 않았지만 벌써 이때부터 현대전이라고 하는 것은 소모전이고 이것을 견딜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과학적 인식으로 등장했으나 그런 국력을 키운다는 것이 굉장히 어렵기 때문에 의외로 그것이 결핍된 상태에서 하나의 역설적인 대책이 나오는데 그것이 바로 정신력으로 보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본 육군에서도 한편으로는 굉장히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전략 전술이 있는 반면에 그것의 결핍을 뚜렷하게 인식한 상태에서 정신력주의, 즉 장비를 충실하게 하기보다는 병사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않는 돌반전법, 그리고 전선에서 총을 들고 있는 사람들의 총후라는 개념이 형성된다. 그리고 현대전에서 일본과 러시아가 싸우면서 문제점이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러시아를 이겼다고 하는 결과가 이 모든 문제점을 지우게 된다. 일본이 이제 러시아를 이겼다고 하는 것이 중요한 요소가 되는데 이 결과가 그 과정에서의 결합을 모두 다 뒤엎어 버리는 결정적인 요인이 된다. 차라리 졌더라면 앞으로 더 날뛸 수 있는 것이 무너졌을 것. 그런데 일본이 이겨버렸다. 이 승리라고 하는 벅찬 결과가 승리가 아주 우연적인 사태에 의해서 자기들에게 주어졌다고 하는 아주 냉정한 사실을 지워버리게 된 것. 그리고 서양사람들도 일본이 러일전쟁에 이겼다는 것을 굉장히 충격으로 받아들이고 일본의 그 정신력 주의를 일정부분 받아들이게 된다. 그래서 이게 1차세계대전에서 그것이 등장하게 된다. 즉 독일의 화력주의에 대비하여 프랑스에서는 백병주의가 생겨나게 된다. 그게 바로 1차세계대전에서 프랑스에서 참호전을 치르게 된 백병전 전략이 등장하게 된다. 대량살상의 원인이 된 것. 러일전쟁이 끼친 영향이 그렇게 크다.

적어도 일본에서는 일본 특유의 군사전략이 생겨나게 되는데 일본사람들은 황국독특의 군사학이다 라고 말한다. 러일전쟁에 관한 것은 가토 요코의 《근대 일본의 전쟁논리》에서도 상세하게 나와있다.

러일전쟁 이후에 러시아는 확고하게 동아시아 패권을 잡았고 식민지를 본격적으로 확보하게 된다. 중요한 계기가 몇 가지 있는데 우선 전후인데 이것이 또 다른 전쟁으로 나아가는 전단계가 된다. 전후가 곧 전전이 되는 시대가 이때부터 이어지게 된다. 청일전쟁 이후로 50년동안 일본은 계속되는 전쟁 속에 살아간다. 일본은 러일전쟁 이후에 만주에 영향력을 확대해서 조선지배를 안정화시키는 일을 추구하게 되고 군사적 해결도 선택방안의 하나로 등장하게 되는데 이게 바로 1920-30년대 일본의 모습이 된다. 즉 조선 지배에 대한 추구가 일본에서 청일전쟁 이후에 일관성 있게 유지했던 정책 중에 하나인데 이익선과 주권선과 관련이 된다. 조선지배에 대한 추구가 일본을 지속적인 전쟁으로 몰고 간 먼 원인이 된다. 이에 따라 식민지배를 강화하게 된다. 결국 식민지배라는 것은 자국민의 희생도 일삼는 내외적으로 비인간적인 정책이 되는 것.
299 1945년까지의 일본 사회는 전쟁의 연속인 시대였다고 회고되는 경우가 많다. 이를 다른 말로 바꾸면 하나의 전쟁이 끝나면 전후가 오지만, 실은 그 전후가 머지않아 전쟁을 맞이하는 전전이었다는 말이 된다. 다음 전쟁이 돌연 찾아오는 것이라면 중간 시기는 전후라고 할 수 있겠지만, 다음 전쟁을 위한 준비가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라는 점에서 전전이라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떤 이유에서 그와 같은 긴장의 연속을 사람들은 계속하고 있었던 것일까?

299 청일 전쟁을 통해 대만을 청으로부터 빼앗아 식민지로 만든 것은 이 전쟁의 본래 목적이 아니었다. 일본 단독이냐 또는 구미 열강과의 공동관리냐 하는 문제는 차지하고라도 조선을 지배하에 두는 것이 전쟁의 목적이었다.

300 일본의 조선 지배는 가혹하여 조선 민중은 압록강을 넘어서 중국 동북부(이른바 '만주지역')로 도망쳐 들어간다. 자립한 조선 민중이 '만주'에서 조선으로 영향을 미치지 못하도록 저지하는 일이 일본의 과제가 되었다. 만주에 영향을 확대하여 조선 지배를 안정화시키는 일을 추구하게 되면서 군사적 해결도 선택 방안의 하나로 등장하는데, 그것이 1920~30년대의 일본의 모습이 되는 것이다.

300 그와 같은 전환점이 청일전쟁이었다. 군사력이 국가와 사회에서 커다란 의미를 갖게 되는 것도, 따라서 작은 나라 일본이라는 사회가 극적으로 변화하는 것도 이 시기였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러일전쟁 이후 식민지지배에 대해서 옹호하는 세력들이 식민지였던 곳에 있다.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론이라는 형태를 띠고 계속해서 등장한다. 책에서는 세가지 정도를 들고 있는데 일본의 식민지배는 서구 여러나라의 극악한 식민지배와 다르다는 변명이 있다. 저자는 이에 대해서 딱 한마디로 말한다. "일소에 부쳐질 낮은 수준의 이야기"라고 말한다. 식민지 지배는 다 극악한 것이다. 근대사회가 들어선 이후에 한반도에서 벌어지는 어쩌면 처음이라 할 수 있는 집단학살이 청일전쟁 때 일어났다. 그런 것들이 극악한 것.
303 식민지 대만과 조선에 대한 일본의 정책은 '발달한 일본'의 기술과 자본을 '뒤처진 지역'에 옮겨 놓는 것이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구미와 같은 '극악한 식민지 지배'와는 다르다는 변명이, 20시가 말 이래 일본에서 확산되고 있다. 지금까지의 상세한 연구에 따르면 그러한 '변명'은 일소에 부쳐질 낮은 수준의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경제사의 연구에서 보면 대만은 제당과 남진의 거점으로 개발되어, 일본 내지의 생활을 충실히 하고 국토를 팽창시키는 데 도움이 되는 역할을 담당했다. 단순한 개발책의 실시가 아니었다.

두 번째로는 한국병합은 부패한 조선 왕조에 그 책임이 있다면서, 일본이 적극적으로 식민지화를 목표로 움직인 사실을 은폐하고 있다. 부패한 조선 왕조도 물론 책임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야 한다는 논리를 정당화 시켜주는 필연적 근거가 될 수 없다. 이미 근대 주권체제기 때문에 정당화 시킬 수 없다. 그리고 1910년 이후에 일본은 대규모 식민지를 보유한 이른바 대일본제국이 된다. 이 부분에 대해서 저자는 식민지라고 하는 데가 법이 적용되는 영역이 다르다는 것이다. 이념적으로는 대일본제국헌법이 시행되는 곳이지만 구체적으로 시행되지 않는다. 이법역으로 성립이 되는데 헌법의 영역에서 배제된다. 일본이 정말로 식민지 근대화를 했다, 한반도를 잘살게 해주려고 했다면 착취의 대상이 아니라 정치의 주체로까지 식민지의 국민들의 지위를 올려야 한다. 이법역이 성립되지 않아야 한다. 물론 법적으로 권리가 있다 해서 그것이 온전한 의미에서의 주권자로 대접을 받느냐는 다른 문제지만 법은 최소한의 요건이다. 그것까지도 하지 않았던 것.
303 또 '발단한' '뒤처진'이라는 표현의 근저에는 차별 의식이 드러난다. 한국병합은 부패한 조선 왕조에 그 책임이 있다면서, 일본이 적극적으로 식민지화를 목표로 움직인 사실을 은폐하고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는 의견도 보인다.

304 1910년 이후의 일본은 대규모 식민지를 보유한 '대일본제국'이었다. 그곳에는 대일본제국헌법에 의해 수호된 '국민'과 그 보호 아래에 들어갈 수조차 없는 '국민'이 존재하였다.

예를 들어서 프랑스 공화국은 1962년이 되도록 알제리가 여전히 식민지였다. 프랑스에서는 굉장히 심각한 갈등요소였다. 그래서 1962년 3월에 알제리 독립을 인정하면서 식민지라고 하는 시스템을 스스로 청산하는 계기를 삼는다. 그런데 일본은 일본제국이라고 하는 역사가 내놓았던 식민지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 스스로 해결을 하지 못했다. 중대한 사상사적 과제로 삼고 일본에서 돌파하지 않은 채 그냥 1945년 패망이라고 하는 외부의 힘에 의해서 대만이나 조선을 손에 놓았다. 그래서 이 문제는 일본에서 안일하게 해결한 것. 스스로 반성을 못하니 여전히 식민지 근대화론이 여전히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305 근대 일본은 제국이라는 역사가 초래한 결과로서의 식민지를 왜 방기해야 하는지 라는 중대한 사상적 과제를 돌파하지 않은 채, 1945년의 패망이라는 이른바 '외압'에 의해 대만이나 조선을 손에서 놓게 됨으로써 안이하게 '식민지 문제'를 '해결'하였다. 그렇게 된 역사적 경위를 곱씹어 숙고해 보아야만 한다. 그 출발점은 '청일전쟁에서 러일전쟁으로' 향하던 시기였다. 역사를 확실하게 찾아가는 일은 생각할 재료를 발굴하고, 사고를 넓혀 비약시키는 모험 여행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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