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기 20분 | 일본 근현대사 | 03 청일·러일전쟁 7


1894년, 경복궁을 점령하라! - 10점
나카츠카 아키라 지음, 박맹수 옮김/푸른역사


Reading_20min_20140804_7

– 청일전쟁을 설명하는 방식들

1) “1890년 공황 그리고 (일본)정부와 의회의 대립으로 인한 정치불안 등으로 설명하려는 관점”. 이는 메이지 이래 계속된 “일본의 조선침략정책과 분리”해서 논하려는 시각. 경복궁 범궐사건에 대한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견해는 이러한 관점에 연결되어 있다.

“조선왕궁점령은 먼저 발포한 조선 병사와의 우발적인 충돌에서 시작되었고 일본군은 어쩔 수 없이 왕궁으로 들어가 국왕을 보호했으며… 소규모 충돌사건”

2) “7월 23일 왕궁점령사건은 결코 ‘한일 양국 병사의 우연한 충돌’이 아니며 일본 공사관과 일본 육군의 혼성여단이 하나가 되어 사전 주도면밀하게 준비한 작전계획에 근거하였다는 사실, 그리고 그 작전은 왕궁과 그 주변 서울의 중추 지역에 대한 전면적인 점령이었다는 사실이 기록에 의해 명백히 밝혀졌다.”


– 위조된 戰史가 통용되는 과정: “청일전쟁을 비롯한 전쟁을 정당화하는 목소리가 천황의 위광(威光)과 결부되어 한층 높아져 교육의 장에서 강요되었다. 학교교육을 비롯한 모든 장소에서 허구를 바탕으로 ‘조작된 이야기’만이 ‘국민적 상식’으로 통용되었다. 이리하여 일본국민은 역사적 사실로부터 멀어지게 되었을 뿐 아니라, 정치·군사 지도자들 자신도 객관적인 사실과 그 추이를 통해 정책을 결정하는 근거를 잃어갔던 것이다.”


– 청일전쟁 이후부터의 전쟁구상: “원래 당국이 이와 같이 남방에 뜻을 둔 것은 단지 이번 전쟁에서의 작전상 문제 때문이 아니라 크게 보아 영원한 국시(国是)로 고려해야 할 바였기 때문이다.”(일청전사 초안, 제16편 제72장 제2초안)





지난 주에 이어서 나카츠카 아키라 교수가 쓴 《1894년, 경복궁을 점령하라》을 계속 읽겠다. 지난 주에는 역사가의 책무에 관해 이야기했다. 오늘은 본론에 들어가겠다. 먼저 청일전쟁을 설명하는 방식이 두 가지 있는데 하나가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견해에 바탕을 둔 바탕이고, 다른 하나는 사료를 검토한 다음에 찾아낸 방법이 있다. 청일전쟁의 시작 또는 시작을 설명하는 방식 또는 청일전쟁 전체를 어떻게 볼 것인가를 먼저 이야기하고 그 다음에 조선왕궁을 점령하는 계획이 어떻게 이루어졌고 어떻게 실행되었는가 하는 얘기, 그 뒤에 이어지는 전사를 위조한 얘기 그리고 그것이 조작이 통용되는 과정을 얘기하겠다.


청일전쟁을 설명하는 방식. 일본정부의 공식적인 견해에 따르면 경복궁 범궐사건은 "조선왕궁점령은 먼저 발포한 조선 병사와의 우발적인 충돌에서 시작되었고" 조선병사가 먼저 발포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다 보니 우발적인 충돌이 시작되어 사건이 발달하여 "일본군은 어쩔 수 없이 왕궁으로 들어가 국왕을 보호했으며" 그에 따라 소규모 충돌사건이다 라는 것이 공식적인 견해이다. 사건의 시작은 조선 병사의 발포, 우발적인 충돌, 일본군은 어쩔 수 없었다. 이렇게 얘기를 한다. 이것이 일본정부가 내놓은 공식적인 견해이고 지금까지도 공식적인 견해이다. 그리고 이것과 관계가 있으면서도 좀 넓은 범위에서 청일전쟁의 시작을 설명하려는 관점이 이른바 일본정부 또는 일본국내정치상황에 바탕을 두고 내놓은 시각이 있다. "1890년 공황 그리고 (일본)정부와 의회의 대립으로 인한 정치불안 등으로 설명하려는 관점"이 있다. 일본정부의 공식견해와 딱 맞아 떨어지는 것은 아닌데 청일전쟁이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일본이 일관성 있는 조선침략정책을 갖고 있었다는 것과 청일전쟁을 분리해서 논의하려는 시각이다. 이것이 사실은 메이지 이래로 계속된 시각이다. 일본의 조선침략정책과 분리해서 설명한다. 일본은 침략이라든가 전쟁이라든가 이런 것들을 공식화하지 않는다. 가토 요코가 일본 근현대사시리즈의 제5권인 《만주사변에서 중일전쟁으로》을 썼는데 여기서 굉장히 면밀히 검토하는 것이 있다. 일본이라는 국가가 대외침략을 벌이면서 어떤 방식으로 그것을 비공식화하는가. 선전포고 하지 않고 중일전쟁을 벌였는가. 거기서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었는가 이런 것들을 분석하고 있다. 나중에 5권을 할 때 다시 얘기하겠다.

30 일본 정부의 공식 견해는 오토리 공사가 보낸 공식전문 내용대로 관철되었다. 곧 조선왕궁점령은 먼저 발포한 조선 병사와의 우발적인 충돌에서 시작되었고 일본군은 어쩔 수 없이 왕궁으로 들어가 국왕을 보호했으며 소규모 충돌사건에 지나지 않았다라는 식으로 시종일관했던 것이다.


메이지 이래 계속된 일본의 조선침략정책과 분리해서 논하려는 시각에 대해서 저자는 반박하는 사료를 내놓는다. 해석이 아니라 사료다. 《일청전사》 공식간행물인데 그것을 쓰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초안 제11장이 있다. 성환회전 이전에 일본군 혼성여단이 어떤 상황에 있었는가에 덧붙이는 '조선왕궁에 대한 위협적 운동'이라는 것이 있다. 초안 11장의 제목이 <성황회전 전 일본군 혼성여단의 정황 부(附) 그 조선왕궁에 대한 위협적 운동>이다. 이 사료를 검토한 저자는 이것이 일본군의 조선왕궁 점령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다. 일단 계획서가 아닌 상세한 기록이다라는 것. 그리고 이것이 참모본부가 쓴 초안이라는 것을 확증한다. 초안 기술의 일부가 <공간전사>에 그대로 실려 있는 부분이 있기도 하지만, 일본 정부와 일본군의 공식 입장을 불리하게 만드는 내용을 '위서'로 만들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저자는 사료를 비판한 다음에 이렇게 정리를 한다. "7월 23일 왕궁점령사건은 결코 '한일 양국 병사의 우연한 충돌'이 아니며 일본 공사관과 일본 육군의 혼성여단이 하나가 되어 사전 주도면밀하게 준비한 작전계획에 근거하였다는 사실, 그리고 그 작전은 왕궁과 그 주변 서울의 중추 지역에 대한 전면적인 점령이었다는 사실이 기록에 의해 명백히 밝혀졌다."

70 7월 23일 왕궁점령사건은 결코 '한일 양국 병사의 우연한 충돌'이 아니며 일본 공사관과 일본 육군의 혼성여단이 하나가 되어 사전 주도면밀하게 준비한 작전계획에 근거하였다는 사실, 그리고 그 작전은 왕궁과 그 주변 서울의 중추 지역에 대한 전면적인 점령이었다는 사실이 기록에 의해 명백히 밝혀졌다.


그렇다면 일본정부의 공식견해는 사료에 의해서 논박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계획을 가지고 그것이 구체적으로 실행된 경과를 저자는 밝혀낸다.


첫째 왕궁점령을 계획한 이유는 무엇인가. 성환에서 전투를 하기 위해서 여단이 남하를 하게 되는데 경성이 안전하지 않으면 군수품을 운반하고 전투를 치르는데 어려움이 있다는 것이다. 그 다음에 <초안>을 보면 "그들이 말을 듣지 않자 대대장이 즉각 칼을 빼들고 군대를 지휘하여 질타하면서 문안으로 돌입하려고 하였다. 그들은 크게 놀라 대대장의 요구를 받아들여 국왕의 재결을 얻을 때까지 미루기를 청하였고, 잠시 후 문을 나와 조선 병사의 무기를 내주었다." 그들은 조선군대를 말한다. 이 부분은 해석을 하자면 일본군이 총검을 들고 국왕을 보호하고 있던 경복군 병사들의 무장을 해제시킴으로써 무방비된 상태가 된 국왕을 포로로 삼았다고 하는 것이다. 이게 핵심이다. 일본의 공식견해를 반박할 수 있는 사료가 첫째 '조선왕궁에 대한 위협적 운동' 계획이 작성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치밀한 계획 아래 이루어졌고, 그것에 따라서 우발적인 충돌로 위장된 부분이 있었다.

75 그들이 말을 듣지 않자 대대장이 즉각 칼을 빼들고 군대를 지휘하여 질타하면서 문안으로 돌입하려고 하였다. 그들은 크게 놀라 대대장의 요구를 받아들여 국왕의 재결을 얻을 때까지 미루기를 청하였고, 잠시 후 문을 나와 조선 병사의 무기를 내주었다.


이렇게 전사를 위조했다. 전사가 위조되면 잘못된 사실을 배우게 된다. 청일전쟁만이 아니라 러일전쟁까지도 자기네들이 실패했던 부분을 기록하지 않는다. 나중에 배우는 사람들은 실패한 부분을 모르니까 그 부분에 대비를 할 수 없다. 과거의 잘못이 은폐된 채 교과서가 쓰여지니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하는 것을 모르게 된다. 이렇게 해서 사실은 청일전쟁, 러일전쟁 과정 차제가 한반도와 일본 사이에 관계에서도 문제가 되지만 사실은 일본을 멸망으로 몰아넣게 되는 것이다.

111 노무라는 "태평양전쟁 전 일본 육해군의 수뇌부에게 강한 인상을 남긴 전쟁은, 1차세계대전보다도 러일전쟁이었다"라며, 그러나 "태평양전쟁에 이르는 일본의 정책 결정과 그 전쟁에 관여했던 일본육·해군인 중 그 최고 수뇌급만이 러일전쟁에서 초급사관으로서 약간의 실전 경험을 가졌을 뿐, 대부분은 러일전쟁의 실태를 참모본부와 해군본부가 편찬한 《공간전사》를 통해 배웠을 따름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청일전쟁을 비롯한 전쟁을 정당화하는 목소리가 천황의 위광(威光)과 결부되어 한층 높아져 교육의 장에서 강요되었다. 학교교육을 비롯한 모든 장소에서 허구를 바탕으로 '조작된 이야기'만이 '국민적 상식'으로 통용되었다. 이리하여 일본국민은 역사적 사실로부터 멀어지게 되었을 뿐 아니라, 정치·군사 지도자들 자신도 객관적인 사실과 그 추이를 통해 정책을 결정하는 근거를 잃어갔던 것이다." 조작이 통용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결과는 참으로 무시무시한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역사가의 책무는 여기까지 뻗어있다는 것을 저자는 암시하고 있다.

157 청일전쟁을 비롯한 전쟁을 정당화하는 목소리가 천황의 위광(威光)과 결부되어 한층 높아져 교육의 장에서 강요되었다. 학교교육을 비롯한 모든 장소에서 허구를 바탕으로 '조작된 이야기'만이 '국민적 상식'으로 통용되었다. 이리하여 일본국민은 역사적 사실로부터 멀어지게 되었을 뿐 아니라, 정치·군사 지도자들 자신도 객관적인 사실과 그 추이를 통해 정책을 결정하는 근거를 잃어갔던 것이다.


그리고 청일전쟁 이후에 일청전사<초안>에 따르면 제목이 "남방작전에 관한 대본영의 결심 및 그 병력"인데 "원래 당국이 이와 같이 남방에 뜻을 둔 것은 단지 이번 전쟁에서의 작전상 문제 때문이 아니라 크게 보아 영원한 국시(国是)로 고려해야 할 바였기 때문이다." 영원한 국시라고 하는 것이 대일본제국의 영광이다. 이것을 군사적인 침략과 그에 따른 식민지 지배로 이룩하고자 하는 것이다.

170 원래 당국이 이와 같이 남방에 뜻을 둔 것은 단지 이번 전쟁에서의 작전상 문제 때문이 아니라 크게 보아 영원한 국시(国是)로 고려해야 할 바였기 때문이다.


경복궁 범궐사건으로 우리가 뚜렷하게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첫째는 역사가의 책무는 무엇인가. 둘째는 일본이 어떻게 해서 사건을 조작하고 조작된 이야기를 국민적 상식으로 통용시켰는가. 셋째로 조작된 역사에 맛을 들일 때 나라와 국민은 어떻게 대가를 치르는가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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